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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요 3:14~1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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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의 계시(3:1416)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무조건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가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믿는 것은 좋다"라고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믿음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기에 하나의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신념이나 의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믿음을 가진 자 중에서도 나의 욕망이나 소원만을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기복 적인 신앙을 가진 자가 많습니다. 그런 믿음은 성서적인 믿음이 아니며, 수준 낮은 믿음입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이 신앙을 가리켜서 "싸구려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내 소원만 이루어질 줄 아는 것은 정말 유치한 믿음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참인 줄로 알고 그대로 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약속이 없 이는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여기 볼펜이 하나 있습니다. 이 볼펜은 비싼 것은 아니지만 놀랍게도 필자가 16년 동안 사용한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파는 값비싼 어떤 볼펜보다도 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와 동거동락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런데, 이 볼펜을 누군가가 갖기를 원해서 "목사님, 그 볼펜 저에게 줄 줄로 믿습니다"라고 일방적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기를 "이 볼펜은 16년간 쓴 것이지만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믿고 ", 저에게 주십시오"라고 누군가가 원했다면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전에 약속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줄 것을 믿습니다"라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약속이 먼저요, 허락이 먼저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구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허락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믿음이란 내 뜻이나 소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약속이 먼저요,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이고 우리는 그 약속과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서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다음,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말한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 즉 목숨처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또는 "예수 말씀하시기를" 하고 기록된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외에는 모두가 두 번째, 세 번째란 말입니다. 어떤 영어성경책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빨간 글씨로 기록된 것이 있는데, 참 좋은 편집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믿되, 십자가 중심으로, 즉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믿어야 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왕으로 믿고, 선생으로 믿고, 이적을 행하는 자로 믿는 등 여러 가지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믿어야만 참으로 믿는 것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는다고 믿으며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는 모두가 없어졌습니다. 필자의 생각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땐,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재판을 받으실 때, 적어도 따라다니던 한두 사람 정도는 나서서 무슨 말로든지 참견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특별히, 죽었다가 나흘만에 살아난 나사로는 가만히 보고 있을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가령, "이 분은 훌륭한 분이십니다. 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신 데 십자가라니, 무슨 소립니까?"라고 한마디라고 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런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로부터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믿음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큰 의미를 깨닫는 것만이 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계시입니다. 사랑을 알린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말로써 설득시킬 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내 마음과 내 뜻을 전달하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내 생각의 17%밖에 전달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언젠가 필자가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웃는 이야기를 해도 웃지를 않고, 우는 이야기를 해도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뒤에 젊은이들에게 나의 말을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는가를 물었더니,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시 낭비하며 이 자리에 왔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저에게 재미있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미국교회에 가면 다 알아들을 수 있지만 가슴이 싸늘하고, 한인교회에 오면 전혀 알지 못해도 가슴이 따뜻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그들이야말로 국제 고아가 되었구나 하는 서글픔을 느꼈습니다. 두 문화권에서 두 나라의 언어를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 같은 말을 가지고도 생각을 전하는 것이 어려운데, 서로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를 경우의 의사전달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면, 가장 효과적인 언어는 어떤 것입니까? 언어란 가족들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처세학적으로나 모든 인간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이제 효과적인 언어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면, 첫째로 언어는 역사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갑자기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말은 하면 이해가 힘들지만, 역사적인 것은 잘 통합니다.

둘째로는 추상적인 것보다는 사실적인 언어가 효과적입니다. 추상적인 이야기는 어렵고 복잡하여 여러 가지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사실적인 이야기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셋째로는 그가 가진 문화권에 적중해야 합니다. 쉬운 말로 설명하면,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말로 하라는 뜻입니다. 가끔 필자는 국제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는데, 영어가 서툴러서인지 국제대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언어의 장벽으로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서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저쪽에서도 잘못할 수 있으니 내용의 깊은 이야기는 피하고 쉬운 말만 왔다갔다하다가 미리 작성해 놓은 결론을 가지고 후의를 끝내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대로 토론하고 수정하여 회의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미리 다 만들어서 회의 결과라고 내어놓게 되니, 그럴 때마다 언어의 한계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또한, 문화권에 적중해야 된다는 말은 젊은이에게는 젊은 사람들에게 알맞은 언어가 있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알맞은 언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보다 쉽게 설명하면, 젊은 세대에게는 은혜를 가르칠 때 한 마디로 "화끈하다"라고 하고, 장사하는 이들에게는 "예수 믿으면 본전 찾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받아들이는 자의 언어권, 문화권에 적중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넷째, 언어는 경험에 적중해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세계 이외의 말은 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어른들과 어린아이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부부 문제에 있어서 결혼한 사람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미혼자들에게 걸핏하면 "자네들은 잘 몰라, 가만있어"라고 대화에 끼워 주지도 않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언어란 경험한 것과 하지 못한 것의 차이가 대단한 것입니다.

다섯째는 무엇보다도 보편적이라야 합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 중에는 박사가 있는가 하면 국민학교를 나온 사람이 있고, 나이 많은 어른과 젊은이들이 함께 있으며, 각종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다 모여 있으므로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이토록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귀한 말씀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사형수가 사형집행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바랄 것도 없이 마음속에 원망하는 생각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사형수에게 한 여집사님이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열심히 썼지만, 그의 마음은 "뭐 이따위 편지가 있어" 하고 이죽거렸습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인간을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집사님은 심지어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열렬하게 썼지만 "당신이 왜 나를 사랑해요?"라고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마지막에는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이 재판받는 것을 보았어요. 당신은 정말 훌륭했어요. 당신이 관계된 살인 사건에는 공범 세 사람이 있는데 당신은 말하기를 그들에게는 죄가 없고 모든 일을 혼자 다했다고 고집했어요." 공범들은 모두 용서해 주고 당신 혼자 무서운 형벌을 다 받겠다고 말하는 당신의 모습은 너무 훌륭하게 보였다고 구체적으로 편지를 썼더니 그때서야 고맙다고 사형수가 회답을 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서로 편지를 교환했으며 만나기도 했고, 마지막에 그는 예수를 믿고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더라도, 그저 추상적으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달이 잘 안됩니다. 사랑한다고 수백 번 말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힘드는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어려운 언어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할 때에 보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효과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역사 안에 오셨고 사건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화권 속에, 즉 히브리 문화권 속에 오셔서 그들의 종교의식 속에 양을 잡아 제사 드리는 언어로 사랑을 계시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이렇습니다.

그러면, 이 계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자세이어야 합니까? 받아들이는 입장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저쪽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내가 믿지 않으면 그 사랑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의심하면 받아들일 수가 없고, 믿어지지 않으므로 사건이 사건화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겸손히 받아들이며, 역사적인 사건임을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 한 가지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내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입니다. 경험이란 내가 직접 부딪쳐서 경험하는 것도 있지만, 반드시 내가 경험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보면서 그것을 내가 경험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믿어지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제자와 예수님과 만나서 일어난 사건을 내가 만난 사건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건은 내게 주신 사건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와의 만남에서 있었던 대화나 사건을 내가 믿지 않으면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영생문제에 있어서는 이 자세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면 이 말씀은 민수기 21:4-9까지의 말씀을 오늘 여기서 역사적인 증거로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화요 사건이며 그들에게 나타난 역사성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건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여러해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는 길이면 만사형통할 것인데, 왜 이토록 어려운가를 여러 가지로 불평했습니다. 첫째는 길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바로 들어가려면 방금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멀리 돌고 돌아서 40년이 걸렸으니까요. 둘째는 먹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건만, 왜 이것만 먹어야 하느냐고 먹을 것이 신통치 않음을 불평했습니다. 셋째는 시간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긴 세월을 방황하게 되니 초조하고 원망스러워 왜 이렇게도 오랫동안 고생하게 하시는가 하고 불평했습니다. 이 불평들이 모여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마침내 모세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원성을 높이며 모세를 죽이겠다고 야단할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사람들이 물리기만 하면 죽어 넘어졌습니다. 광야의 뱀은 무섭습니다. 독뱀이라 할지라도 햇빛을 못 받으면 독이 빠지는데 여기는 광야로서 사막이기에 햇빛을 많이 받은 뱀이라 독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뱀에 물리기만 하면 즉사했습니다. 사정이 어렵게 되자 백성들의 대표들이 모세에게 와서 잘못되었으니 하나님께 기도해서 살려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착한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살 수 있는 방법을 얻었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다 높이 매어 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뱀을 쳐다보는 자만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냥 용서하시고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쳐다보라는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쳐다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 그런데 그 말을 믿지 못해 쳐다보지 않고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한 번 바라보기라도 했으면 살 수 있는 일을 고집스럽게도 쳐다보지 않고 죽다니 미련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목이 곧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려 엘리사에게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는 문도 열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전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더러운 요단강 물에 목욕하라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돌아갈 때, 같이 있던 수행원이 조언을 합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하라고 하면 해야 할 터인데, 왜 못하겠느냐고 좋게 일렀습니다. 결국 의심하면서도 일곱 번 목욕을 한 결과, 병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의심스러워도 괜찮으나, 순종은 해야 합니다. 모세의 구리뱀도 쳐다보면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쳐다보지 않고 죽는다는 것은 미련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뱀을 보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 뱀에게서 어떤 마술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오랫동안 구리뱀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8:4 이하에 보면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부셨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와서야 부수었던 것입니다.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구리뱀에게 어떤 마술적인 힘이 있어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다만 쳐다보라 하신 말씀에 믿고 순종하면 너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구리뱀 자체를 섬겨서 우상 숭배하는 또 하나의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본문의 말씀에서 이 "들린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하늘로 영광 중에 들리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들리우는 것과 영광 중에 들리우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들리우는 일 없이 영광에 들리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이 있고야 영광에 들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들리운다"라는 말은 요한복음 8:28, 12:32와 사도행전 2:34, 5:31과 빌립보서 2:9 등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가 위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본문 15절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는데, "믿는다"라는 무슨 뜻입니까? 역사성에 비추어 보면,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즉 쳐다보면 산다고 하는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쳐다보면 산다는 것은 십자가를 믿으면 살고 예수를 믿으면 산다는 뜻으로,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 편에서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자기를 늘 포기하고 겸손하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리뱀을 쳐다보듯이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보고 우러러보아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에게 전적으로 나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고 하시면 그것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이 말씀도 바로 그런 뜻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으므로 독생자를 보내사 높이 들리어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즉 쳐다보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산다는 말입니다. 구리뱀을 높은 든 것처럼 예수님이 매달리시고, 이미 뱀에 물린 우리들로 하여금 쳐다보기만 하면 영원히 산다고 하신 말씀, 얼마나 오묘한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벌써 이런 사건을 주시고 그 역사성에 의해서, 문화적인 언어에 의해서,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새롭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구리뱀을 든 사건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사건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미 광야에서 구리뱀을 통하여 예표로, 즉 상징으로 보여 주시고, 그리고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알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느니라, 이제 저를 믿는 자마다, 즉 쳐다보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말씀의 중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하나님이나 심판의 하나님으로서 무서운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의 죄가 앞을 가로막고 모세가 나를 심판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다"라고 심판할 때,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보면 심판이 내게서 물러가고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격이 있다, 없다 논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시므로 사랑을 받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포기하지 말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뜻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부가 아니고 결정적인 것입니다. 이미 벌써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 앞에서 자기 부족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 감사해 하고 감격해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3:16 하반절). 이 말씀은 뱀으로 인해 죽지 않고 산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영생을 얻으리라"는 하나님과의 화평된 관계, 자기 자신과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한 삶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현재나 미래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된 관계, 즉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생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진노 안에 사는 것은 사망이며 사랑 안에 사는 것은 영생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믿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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