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34)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하나님의 어린 양(1:2934)

 

일반적으로 선지자라고 하면 앞으로 있을 일만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언의 뜻을 시간적인 개념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선생님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선생님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선지자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딸 위에 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선지자들을 보면, 그들의 백성에게 이미 지은 죄에 대해 책망하고 또 현재에 잘못하고 있는 일이나 미래에 되어질 일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죄나, 죄에 깊이 젖어서 회개치 않는 죄, 또는 죄가 죄 아니라고 변명하는 죄, 그리고 자신들의 지식에 의해서 변증되고 있는 죄에 대해서 여지없이 책망을 합니다. 선지자들은 어떤 권력자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을 살펴보면, 독사의 종류라고 책망하기도 했고,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불같은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판에서 끝나지 않고, 너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돌아보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다고 예언하여 약속된 미래를 동시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일입니다.

또한 선지자들의 메시지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저 앞에 있는 메시야를 바라보면서 그 메시야가 와서 너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라고 대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주제였으며, 메시지의 독특한 형식이었습니다.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선지자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예수님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보다 가깝게 말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보더라도 큰 선지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들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가장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례 요한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이사야처럼 많은 일을 하지도 못했으며, 엘리야처럼 장황한 역사를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짧은 생애에서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크게 훌륭한 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첫째, 예수를 눈으로 보고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눈앞에 계신 예수를 예언한 사실은 얼마나 통쾌하고 복된 일입니까? 둘째는 그가 직접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써 가장 높임을 받을 만한 선지자로서 충분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는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라고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징적인 것으로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들은 어린양을 대할 기회가 별로 없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민으로 어린양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으로 늘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가장 적절한 상징적 표현이 어린양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아프리카 어느 지방에서는 이 본문의 성경 구절을 번역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돼지새끼"라고 옮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양이라는 동물이 없기 때문에 양이란 단어 자체가 없으므로 그대로 옮겨 놓으면 이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 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사용하는 돼지새끼를 양 대신으로 번역해서 이해를 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 문화권에서도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지는 않으므로, 이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무리인 것입니다. 상징적인 용어가 가진 뜻을 바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 상징이 반드시 경험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의미하고 있는 원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을 다루는 문화권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 사람들이 가진 양의 개념을 알고 나면, 이 본문의 뜻을 보다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란 말을 생각하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한 마디 속에 기독론의 전부가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가 누구시냐고 하는 질문에 대해 정확한 해답으로 어린양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어떤 사물을 설명할 때, 철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으로 전개해 나가지만, 히브리 사람들은 상징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확인된 사건을 설명하라는 것이 히브리적인 표현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히브리 사람들이 의미하고 있는 어린 양의 개념은 어떤 내용입니까? 어린 양이란, 첫째, 유월절 양을 말하는 것으로 유월절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12:11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400년 동안 애굽의 종노릇을 하였는데, 그동안 이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임을 알고 있었지만,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었으므로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율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점차적으로 잊어가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그들과 함께 섬겼으리라고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바로 왕을 찾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10가지 재앙이 나타나는데, 마지막 재앙이 장자가 죽는 무서운 벌이었습니다.

장자란 모든 자녀를 대표하는 뜻이 있으므로 장자가 죽는다는 것은 모든 자녀가 죽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렇게 집집마다 장자가 죽는 무서운 재앙에서 예외가 있었습니다.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집은 이 재앙으로부터 면제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애굽 사람들 중에서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서도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무사히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작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한 사람들은 살았지만, 믿지 않아서 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마치 모세의 불뱀의 이야기와 같은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가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매어 달고 이 구리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쳐다보면 살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말씀입니다. 쳐다보아서 살게 되면 살고, 쳐다보아서 죽으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손해 될 것이 없으므로 한 번 쳐다볼 것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구리뱀을 쳐다보지 않아서 죽고 말았습니다. 설마, 그 까짓 것 쳐다본다고 살겠느냐 하고, 보지 않았기에 죽은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미련한 곳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교회에 나오라고 아무리 전도해도 구리뱀을 보지 않는 것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다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넘어가서 장자가 살아난다고 했지만 믿지 않아서 재앙을 받았던 것과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천사가 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절이라는 명절이 생겼으며 영어로는 패스오버(passover), 즉 넘어가서 구원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길이란 그가 과거에 얼마나 의로웠느냐 악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다만 문설주에 피를 바른 자만이 살아났다는 사실입니다. 피는 생명이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피를 발랐다는 것은 벌써 죄값으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재앙이 넘어가는 것이며, 이 뜻은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내가 벌써 죽었으므로 재앙이 유월 되는, 즉 넘어가는 것입니다. 가끔 예수를 믿는다는 뜻을 도덕적 차원에서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은 유월절 양을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인들 집의 문에는 흔히 ○○교회라는 교패들이 붙어 있는데, 필자는 이것을 볼 때마다 양의 피가 생각납니다. 구원의 하나의 조건은 오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재앙을 받았다는 믿음, 즉 이미 재앙을 받아서 내가 십자가와 함께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5:7과 베드로전서 1:19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어린양의 개념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로써의 양입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서 자신도 제사장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을 광야에서 자랐지만, 제사장의 아들이었기에 제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익숙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물로는 소, , 염소 등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가장 흔하고 보편적인 것이 양이었고 양 중에서도 어린양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9:38 이하에 보면, 온 백성의 죄를 위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태어난 지 1년 되는 어린 양)을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이 온 백성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계속 하나님 제단에서 불타야만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어린 양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 제단 앞에 불타서 그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귀중한 의미입니다.

레위기 4:24에 보면, 속죄제를 드릴 때 제물인 어린양의 머리 위에다가 죄인은 손을 얹고 회개 기도를 합니다. , 사람이 지은 죄를 양에게 전가시키는 의식으로 회개 기도가 끝나고 나면, 양을 그대로 잡아서 제단에 불을 지릅니다. 이것은 죄인 대신에 양이 죽는 의미로써, 예수께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대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1:19, 이사야서 53:7에 보면, 메시야를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나,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다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메시야가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그와 같이 어린 양의 모습으로 예언한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어린양에 대한 그들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임을 이제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믿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사실, 즉 대속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믿는 자는 지금 내가 당하는 어떤 고난도 죄 때문이거나 저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의인의 고난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고난이라고 의미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바로 믿는 자의 자세입니다. 요한이 증거 하는 그리스도도 이런 의미에서 어린양이며, 십자가 도 하나의 제사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은 이 제사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뇌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 이와 같은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랑에는 희생이 반드시 지불되는 법입니다. 더구나, 죄인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희생이 아주 큰 것으로, 부족한 사람을 사랑할수록 그 값을 많이 치루어야 합니다.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희생의 값을 치루어야 하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 죄인을 사랑해서 의인으로 대우하려면, 의인이 죄인으로 죽는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사랑의 값을 지불하신 구체적인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의 비유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본문 32절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증거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1:32). 세례 요한 자신도 메시야인줄 잘 몰랐었는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고 이 분이 바로 메시야로구나라고 증거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면 세례 받기 이전에는 성령이 없었으며, 예수님께서 이제 처음으로 성령을 받으셨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간혹 성도들 가운데 예수를 믿은 지 10년이나 되면서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거나, 방언을 시작한 그 날부터 처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성령이라고 하면 오순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 할 때도 성령은 있었습니다. 아니, 베드로가 예수의 부름을 받고 따라 나설 때에도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부터 성령을 받았습니까? 지금 세례 받으시는 이 순간부터입니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잉태될 때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셨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성령으로 나셨고 성령 안에서 살았으며 성령과 함께 역사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는 성령을 기능적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례 받기 이전의 성령은 한 개인에게 역사 하는 성령이며, 이제 역사 하는 성령은 공생활로 이끄시는 성령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커다란 구속 사업을 이루시는 공적인 역사로 끌어내는 의미에서의 성령의 역사란 것입니다. 우리 개인적인 입장으로 설명하면 조용히 내 마음 가운데 중생의 역사가 이루어져 구원을 받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성경을 이해하고, 선한 생활에 힘쓰며, 구원받은 심령으로 살아가는 이 생활은 성령을 받은 첫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도 벙어리로서 복음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선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지고, 내 생활의 최우선이 복음 전도가 되어 그 동안 하던 일은 다 그만두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는 공적인 생활로 들어가게 됩니다.

전 생애를 바쳐서 복음을 위해 일하고자 나서는 이 역사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세컨드 디씨젼(second decision)이라고 합니다. 처음 중생 하는 역사가 첫째 결단이고, 두 번째 결단이 공생활의 시작으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께 임하므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남은 생애를 모두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한 이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전도해야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면을 받았다고 극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본 사람 은 예수님이 아니라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면서 비둘기 같은 환상이 나타난 것을 본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에 이것은 예수님을 위한 것보다는 세례 요한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하기를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1:34), 즉 세례 요한이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실히 알고 증거 하게 하기 위하여 이 같은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어도 세례 요한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비둘기 같은 성령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 상징은 세례 요한을 위한 것이므로 그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로 비둘기가 나타난 것입니다. 제사장 입장에서 비둘기는 제물의 뜻입니다. 또한 비둘기는 예수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깨끗하고 순진하고 유순하고 부드러운 동물로서 제물의 대표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비둘기와 어린양은 상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역사가 상징으로 나타나 비로소 세례 요한은 그가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거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린양에서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결론은,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어린양이신 그는 우리 죄를 대신하는 대속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복 받을 생각도 하고 출세할 생각도 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는 제물로서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동일시되어 일체감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이 죽어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죽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가 십자가 안에 죽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 근심이 있습니까? 죽어져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습니까? 한 번 더 죽어져야 합니다. 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까? 또다시 십자가 앞에 죽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매일 세례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매일매일 죽고, 매일 다시 살아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때 부활의 능력을 시간 시간 새롭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