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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의 증거(요 5:30~4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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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증거(5:304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 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말씀을 증거 하시고 역사 하실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필자의 생각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주지 않았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혹시 남에게서 의심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의심하는 자를 믿게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의심이란, 가장 불행한 자의 마음가짐으로써 하나의 큰 죄악이며 병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의심하는 자에게 믿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의심받는 입장이 되면 그렇게 고독할 수가 없습니다.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는 것은, 때로는 배신보다도 더 큰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을 마감하실 때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에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왜 믿음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가령 여기에 아무리 중요하고 중대한 사건과 진리가 있다 할지라도 그 진리를 믿지 않으면 진리가 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어야만 진리가 진리 되고 사건이 사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밖에서 불이 났다고 하는데 내가 믿지 않는다면 그 불은 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타고,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내게는 불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믿어야만 불이 났다는 것이 사건이 됩니다. 이것이 신앙 사건입니다. 역사적 사건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 사건입니다. 믿지 않는 그 사람에게 한에서는 진리가 진리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비로소 사건이 사건 되고 역사적인 사건이 내 속에 와서 다시 사건으로 재생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쓰라린 경험인 625사건에 대해 해마다 그 때쯤이면 TV에서 생생하게 참혹한 현장을 보여 줍니다. 전쟁을 겪은 어른들은 볼 때마다 가슴이 찡하며 그대로 믿어지지만, 젊은 사람들은 설마 하며 의심을 하고 같은 장면을 계속 보여 준다고 싫증을 냅니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믿고 보는 자와 의심하며 보는 자는 이렇게 자세부터 다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실 때마다 믿어 주지 않는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 복음서를 쓰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믿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에는 새로운 어떤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사건을 믿게 하기 위해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어야 십자가가 내게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고 믿음으로써 구원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객관적 사건이 내게 들어와서 주관적으로 생명을 생산하는 역사를 이루는 것이므로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믿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님을 보게 하셨고, 문둥병도 낫게 하셨으며, 바다도 고요하게 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갖가지 이적을 다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와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온 표적이 무엇이요?" 하고 묻습니다. 사실 표적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고 찾는 것입니까? 믿어지지 않으면 베다니로 가서 나사로를 만나보면 될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다시 찾아온 그들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예수님은 "여호와의 표적밖에 없느니라, 이제 남은 것은 며칠 후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일만 남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증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이런 고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하반절).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말을 참되도다라고 해야 하는 입장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제자들이나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이것을 말해야 하는데, 스스로 증언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는 말은 참말이다." 사실 아무도 다른 증거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떤 증거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대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역사 하는, 즉 어떤 의미로는 하나님의 계시 그대로, 본체대로 역사 하셨기 때문에 다른 어떤 인간의 증거로써 예수님이 옳다고 말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 내 증거는 참되고, 내 판단은 옳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스스로를 나타내신 표현이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that I am, 혹은 I am because I am" 이라고 우리말이나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의 뜻은 대단히 의미가 깊습니다. 세상에서 존재에 대한 증명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설에 보면, 아들을 업고 길을 가던 아버지와 등에 업혀 있던 아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는 네 아버지다"라고 자신을 증명하지만 아들은 "어째서 당신이 내 아버지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먹여 주고 업어 주는 것으로 아버지 됨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아버지가 있으니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있으니 내가 있다라고 자기 스스로가 증거로서 다른 증거를 댈 수가 없습니다. 아니 다른 증거가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간혹 삼라만상을 보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삼라만상이 다 불타버리고 없으면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있으니 하나님이 있다"라고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죽어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증거가 필요 없습니다. 원인이 따로 있고 결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원인인 동시에 결과요,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증거에 대해 제자들이나 누구에게 부탁하지 않으시고 다만 "내 증거는 참되다, 증거가 있다면 하나님이 증거가 될 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임시적인 증거나 소멸하는 증거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증거란 대체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기에 빗나갈 경우가 많습니다. 재판하는 것을 보면, 증거가 불충분해서 엄연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죄 판결을 받기도 하고, 또 증거가 잘못되어서 죄도 없는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되어 감옥살이를 하기도 합니다. 물적 증거나 과학적인 증거를 총동원한다 해도 사람의 증거란 완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본인이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말해도 물적 증거가 없으면 그 말은 참말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없는 증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있는 증거를 없애기도 하는 등 허점이 많고 변화무쌍한 증거로써 믿을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증거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참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너무 가까운 관계일수록 서로의 허물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사랑과 감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의 실수를 바르게 보지 못하는 맹점이 있습니다. 사랑과 감정 때문에 증거가 불충분해지고 흐려지는 것입니다. 흔히 많은 의사들 중에서 자기 가족에게는 진찰이나 주사를 바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증거를, 예수님께서는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증거를 가지고 판단을 바로 하겠다고 하면, 이제는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남의 일에 대해서는 바늘 끝처럼 비판을 하고 자기 일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자기 일에 대해서는 바늘 끝처럼 비판하고 남의 일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용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결국 사람은 판단이 지나치면 사랑을 잃게 되고 사랑이 지나치면 진의를 잃어버리게 되니 사람의 증거란 불충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공의, 완전한 사랑을 지닌 하나님의 판단만이 옳은 판단이므로 하나님이 내 증인이 되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날부터 신명기 17:6에 있는 말씀에 의거해서 어떤 사건에 두 증인만 있으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재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증인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증인만 되면 죄인을 돌로 쳐죽일 수도 있는 재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억지로 두 증인을 세워 거짓말을 하게 해서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사실 증인이란 필요 없습니다. 두 사람의 증인, 아니 몇 사람의 증인이라 해도 사람의 증인은 불완전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치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5:33-35)라고 요한의 역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등불로서, 빛의 본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잠깐 빛이 나는 임시적인 것이요, 특정 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빛 자체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나름대로 열심히 외쳤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그리고 사두개파 교인들이 와서 무슨 권세로 이와 같은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대답을 기피하시며 도리어 질문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냐"하는 묘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의논하다가 결국은 모른다고 대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에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하면 왜 믿지 않았느냐고 힐책을 받을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특히 세례 요한이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있는데 이 말을 했다가는 돌을 들어 칠 것이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궁색한 대답을 찾는 중에 "모른다"는 좋은 대답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대답을 회피하십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도 분명히 증거가 말살되고 증거가 기피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억지로 부정하고 기회주의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이 핑계 저 핑계로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넣어 줄 방법이 없습니다. 증거를 기피하는 자의 마음속에 구원의 길이나 믿음의 역사는 나타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 증거를 받기 어려운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5:37).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으려면 우선 보든지 듣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님이 되었고 귀머거리가 되었으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습니다. 증거가 없어서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눈을 감아서 볼 수가 없었고 증거를 받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닫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보고도 그 표적으로는 알지를 못합니다. 분명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지마는 그것을 거역하고 나니, 이제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다시는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신체 장애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듣지 못하는 장애가 가장 불쌍한 장애라고 생각합니다. 믿음도 우선 들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필자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농아로서 전도사 되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농아 교회를 한번 해보겠다고 해서 좋은 생각이기에 허락을 했습니다. 잠깐만에 50-60명의 농아들이 모였고 전도사님은 참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주일날 아침부터 나와서 수화로 예배드리고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오후에 다시 성경 가르치고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노량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집으로 가는 중에 노량진 역에서 좀 빨리 돌아갈 생각으로 정식 플랫포옴으로 내리지 않고 반대쪽으로 내리다가 저쪽에서 붕!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 그만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기차 소리를 듣지 못하여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도 불쌍한데 듣지 못한 것이 이유가 되어 죽었다고 그의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사실 영적인 귀가 막히고 영적인 눈이 멀면 더욱더 불쌍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 속에 거할 수가 없고 증거를 받을 길이 없으니까요. 예수님이 비유하신 돌짝밭과 가시밭이 바로 이런 마음 밭을 말씀한 것입니다. 마음 밭이 부드러우면 말씀 듣는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요, 한 말씀 한 말씀 그대로 다 받아들이지만 가시덤불 밭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되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깨끗하고 단순한 마음이라야 하나님 말씀을 바로 받고 바로 증거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사람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증거는 성경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5:39). 유대인들은 성경을 보고 있지만 마음밭이 흐려 있기에 보는 것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죄로 가득하고, 자기 교만이나 고집으로 가득 차 있고 거짓 속에 있으면서 성경을 보면 말씀이 들어오질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상고하고 있지만 성경 속에 가득한 증거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무슨 소용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성경에 내게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여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인도네시아에서 부흥회를 하시는데 간증 시간에 대학교수 한 분이 질문을 했답니다. "저는 이 성경을 암만 읽어도 옛날 역사 이야기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어째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까?" 목사님은 대답 대신에 "성경은 얼마나 읽었소?" 하고 물었더니 "열 번 정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오늘 저녁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성경을 읽으실 수 있겠습니까? , 하겠습니다. 그럼, 성경책을 펴기 전에 먼저 성경책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라고 입을 벌려서 고백한 다음, "이 성경을 통해서 내게 말씀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책을 펴서 읽어 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다음 날 간증 시간에 그 교수는 성경책을 머리에 이고 나와서 다음과 같은 간증을 했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경책을 머리에 이고 고백하고, 기도한 다음 책을 펴서 읽었더니 역사책이 아니라, 정말 달고 오묘한 말씀이어서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읽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를 알아보겠다는 자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과 함께 "이 성경을 통하여 내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읽어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누워서 읽거나 잠옷바람으로 읽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능하면 바른 자세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읽고, 기도하면서 듣는 자세여야 말씀이 바로 내게 다가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The word of God waiting for us in the Bible.)"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나갈 때 비로소 귀가 열리고 마음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둘째 여건은 성령이 조명을 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빛을 보여 주셔야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만약 빛이 없다면, 아무리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열심히 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기록된 계시입니다(written word of God).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책을 소중히 여겼고 여기에다 플러스 알파로 전승까지 합쳐서 열심히 읽었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막상 그를 거역했습니다. 얼마나 넌센스입니까? 가령, 필자가 어느 독자에게 편지를 했다고 합시다. 그는 이 편지를 귀중하게 여기며 언젠가 한번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기다렸었는데 드디어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독자가 저를 반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잘 생겼든 못 생겼든 실물을 만나고 나면 편지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은 귀중하게 여기면서 성경의 본체인 예수님을 거역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마치 설교 카세트만 듣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격입니다.

여기서 잠깐 계시론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계시의 본체는 첫째로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는 이 성경은 기록된 계시일 뿐 계시 자체는 아닙니다. 계시 자체는 그리스도로서 곧 인격 계시입니다. 둘째는 역사 계시입니다. 역사란 액션(action)을 말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종이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역사, 곧 사역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하고 계시는 계시의 역사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나왔다는 사실을 종이에 기록한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그 자체가 계시로써 중요한 것으로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 세 번째가 역사에 대한 증거로써, 성경책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중한 진리 자체를 외면한다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들이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를 모르느냐, 너희들이 정말 성경을 알았다면 나를 알았고 믿었을 것이라고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바로 보았기에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성경을 이해했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기독론으로, 교회론으로 읽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애굽은 세상이요, 홍해는 세례며, 광야는 교회이고, 요단강은 죽음이며, 가나안은 천당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가 없다면 그 동안 예로부터 내려온 그림자같은 예표의 제사는 모두 헛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본체는 여기에 있는데 어찌해서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이 나를 못 믿느냐고 잘못된 신앙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잘 모르고 기록 자체만을 소중히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읽는 목적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몇 장 몇 절은 어떠하고 무엇이 서로 잘 맞지 않고 따지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읽을 때도 그 편지를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인격을 만나는 것이지 글자의 맞춤법이나 표현 방법을 보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든지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 가노라"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보는 것이며 증거는 성경과 성령과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입니다. 매일매일 당하는 사건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증거로서 하나님의 역사 아닌 것이 없음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증거는 충분하고도 넘쳐 있습니다. 문제는 증거 받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 증거를 들을 귀가 없고 증거를 볼 눈이 없으며, 증거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몰라보았고 예수를 영접할 수 없었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사실을 다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증거를 받지 않는도다. 내 말이 참되다", 즉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그 이유를 내가 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 장에서 취급하겠지만 성경 말씀만 소개하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5:42), 즉 사랑하지 않으므로 믿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면 믿게 됩니다. 지나친 표현입니다만 사랑하면 속을 때 속더라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한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표시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온 우주에 가득 차 있고, 성경 안에 가득 담겨 있는 증거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서 주님의 역사와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확실히 믿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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