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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3:16-1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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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앞장에서 우리는 집을 짓는 기초가 되는 터에 대한 이야기를 한바 있습니다. 거기에 이어 오늘 본문은 좀더 깊이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쌓아가고 있는 신앙의 인격,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짓는 집은 보통 집이 아닌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 표현은 사도 바울 특유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성전'이라는 말을 대할 때이면 곧장 솔로몬의 성전을 연상하게됩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하여 하나님께 아뢰었으나 잦은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렸다하여 그 아들 대에 가서 짓게 하심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7년간에 걸려 장엄하고 화려하게 지었던 그 영광스러운 성전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 첫째는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집은 사람의 집이 아닌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성전은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다윗의 준비가 있었고 온 국민의 정성이 깃들였으며, 바벨론으로부터 백향목이 오는가 하면 목수들이 나무를 다듬는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솔로몬을 통하여 지어졌으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바는 이 성전은 하나님께서 설계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길이와 높이, 폭은 물론 섬세한 부분에까지 써야할 자재들과 준비해야 하는 기명들을 일일이 지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이 성전이 다윗에 의해 뜻이 정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솔로몬에 의해 완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경륜과 설계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집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이 성전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을 이 집을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습니다. 집이란 하나의 기구입니다. 만약 그대로 세워 놓고 사용하지 않는 집이라면 그것은 집이라기 보다는 마치 하나의 비석과도 같은 것입니다. 집이란 그릇과도 같아서 반드시 어떤 목적을 위해 쓰여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바 하나님의 집은 오직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지는 집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넓은 의미로 말한다면, 온 우주가 모두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시인도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노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특별히 서전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가끔 우리가 피곤할 때이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게시는 분이시니 굳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것 없이 집에서, 더욱이 골방에서 기도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모든 집이 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신 목적은 이 집만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쓰여지게 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성전이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정성을 다할 때에는 보수도 하면서 성전을 잘 보존해 나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향한 믿음이 식어지게 되어 이럭저럭하다가 우상 숭배를 하는 등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집에 대해서 소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집은 먼지가 끼이고 퇴락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요시야 왕이 퇴락한 성전을 수리한 일입니다. 그 때 요시야 왕은 대제사장 힐기야를 통해 오랜 세월 찾지도 않고 버려져 왔던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성전 수리에 대한 보너스를 얻은 셈입니다. 이렇게 하여 율법 책을 대하게된 요시야 왕은 옷을 찢으며 지난날을 회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 성전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존 되느냐하는 것이 곧 그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의 정성과 믿음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당을 잘 짓고 못 짓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배당을 보살피는 정성입니다. 가끔 어떤 교회에 가보면 저 만큼 윗쪽에 유리창이 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오래 전에 깨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전등을 쳐다보면 그 중 몇개가 쭉 나간 채 불이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만 불이 오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에 나가서 미쳐 끼울 여가가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러 개가 나간 채로 그냥 그러고 있으니 마음 아픈 일이란 말입니다. 그 교회 교인이라면 누구인들 그것을 쳐다보지 않았겠습니까? 쳐다보았더라면 어떤 마음으로든 바꾸어 끼웠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그 교회를 출입하는 성도들의 믿음과 정성이 그 성전을 지켜나가는 일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요시야 왕과는 달리 유다 왕 므낫세는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중에 하나님의 성전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며, 성전 뜰에 우상을 세우기까지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서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을 통하여 그토록 귀하게 지은 솔로몬 성전을 헐어버리고 마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집! 하나님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위해 쓰여졌으니 그런 집이 성전의 이름으로 거기에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깨끗이 헐어 버리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는 상당히 크게 부흥이 되었어야할 역사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이 교회는 부흥이 잘 되지를 않는 가운데 안으로 계속문제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영적으로 역사를 관찰하는 이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10년 전 교회가 두 파로 나누어 싸울 때에 2층과 아래층에서 각각 따로 예배를 드리면서 2층에서 찬송을 하면 아래층에서는 기도를 하는가 하면 고함을 지르듯이 설교를 하는 등 아무튼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싸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계속 그렇게 하다보니 사람도 사람이지만 얼마 후에는 예배당이 퇴각되어 폐허같이 되었다는 것이니, 이미 하나님의 영광은 그곳을 떠난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집은 쓸데없는 집이 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헐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성전의 존재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22 말씀에 보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계속해서 성전을 아름답게 지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성전을 비유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로, 너희는 성전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되는 말씀으로 믿는 자의 몸과 인격이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 고린도전서 6:19 말씀을 한 곳 더 찾아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몸이라는 말은 반드시 육신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의 요점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라가 하는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 성전이 되었고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또한 성령이시란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성전 된 것은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이 내 몸은 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피 값으로 샀으니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생각이나 행동을 계속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오직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성전이라고 할 때에는 임마누엘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초월해 계시면서도 우주에 충만한 분이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비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상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머무는 동안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열두지파가 하나님의 명하신 바에 따라 천막을 치고 살면서 행진을 한 것인데 그 한 가운데에는 넓게 터를 잡은 고급 천막, 즉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덮개를 한 특별한 천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천막은 천막인데 질이 다른 천막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성막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양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성전 건축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노라면 성전 건축에 관한 신학적인 의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발언은 성전건축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실증해 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 때에는 내 집도 천막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백향목으로 궁전을 짓고 좋은 재료로 집을 지을 때에는 내 집도 백향목과 좋은 것으로 지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양을 같은 것으로, 장소는 중앙에, 질은 최고급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그 자료들을 보면 당시에 있어서는 제일 좋은 가죽과 금, 은으로 만들어지고 덮여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이므로 그만큼 정성을 들여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성전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은 높은 보좌에 계신 분이 여기 이렇게 낮고 천한 우리와 함께, 그보다는 나와 함께 계신다는 감사의 마음으로 언제나 성전을 출입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성경이 말씀하는 바에 의하면, 그 구조상으로 보아 완전한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의 중요한 또 다른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가 성전의 뜰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은 넓은 뜰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칫 우리 생각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컸기에 수십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예배를 들일 수 있었나 합니다 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성전 뜰에 그대로 서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좋은 의자에 앉아서도 춥다 덥다 하면서 말이 많습니다만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춥고 덥고 에 상관치 않고 뜰에 선 채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가끔 영화 같은 것을 통하여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큰 성당 같은 데서는 서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도 교황이 미사를 드릴 때에 보면 군중들이 바깥마당에 모두 서있는 장면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린 장소가 성전의 뜰이라면, 그 뜰 자체도 성전인 것이며 또한 그렇게 부릅니다. 여기가 바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을 파는 자들을 내어쫓았다고 하는 그 뜰인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성소입니다. 이것은 건물 내부에 속한 것으로 휘장을 사이로 하여 지성소와 구분되어지는 다른 한 부분입니다. 이 성소에는 향단과 등대와 떡상이 있으며, 제사장들은 이곳을 출입하며 제사를 드리게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는 성소에 비해 훨씬 작은 공간으로 법궤가 있으며, 그 법궤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비가 있고 그리고 선택의 상징이 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셨던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 세 가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들이기에 여기에서 그 설명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말씀하시며, 선택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소 안에는 이러한 상징적인 궤짝이 하나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기억할 것은 이러한 것을 가지고 성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위의 속죄소를 향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덮여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임재, 이 영광이 떠나면 이미 그것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비록 굉장한 규모로 성전을 지었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집이 진정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러한 성전이 해야할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제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씀을 전하고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만은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제사란 무엇인가 할 때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 선물이나 뇌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자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만은 제사가 갖는 신학적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사야서 1장에 보면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 시며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13)고까지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기 타는 냄새를 좋아하거나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과 정성을 드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란 하나님 앞에 뇌물이나 선물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제사를 지은 죄에 대한 보상 행위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죄를 지었으니 이 양 한 마리를 잡아서 드리면, 그 죄가 보상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만 사실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제사를 죄의 값을 치루어 하나님의 진노를 막으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근본적인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제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무엇이냐고 할때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에 대한 계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양과 소를 잡아 바치는 일은 우상 앞에서도 행해지는 일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자칫 잘못 생각하면 우상 앞에 드리는 것처럼 혼돈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은 신의 진노를 막기 위하여 제물을 드린다는 식의 우상 이야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곧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영접하시고 사랑하시기 위하여 치르시어야 했던 엄청난 희생 그 자체입니다. 제사란 바로 그 희생을 치르는 계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때 보면은 남편의 외도로 인해 헤어져야할지 같이 살아야할지의 문제를 두고 의논을 해 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이면 저는 먼저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어떻게 영접하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러노라면 음식이고 옷이고 간에 모든 것을 정성껏 잘 대접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더러워서라고 하는 것인데, 그럴 때 이 면제가 있다가 "이제는 더러워진 남편을 사랑하려면 당신이 더러워지는 아픔을 겪지 않고는 남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주고는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누구이든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 되는 아픔과 희생을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흔히 보면 사랑은 한다고 하면서도 화해는 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러한 희생을 치루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더러워지는 것 같아서"라는 자기 결벽증에 빠져 있는 도안은 끝까지 저를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사랑을 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사랑을 받는 사람도 그 사랑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할 이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부득불 양을 잡아 드리는 제물을 통하여, 그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생명이 죽는 희생을 지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희생이 계시되는 곳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성령이 우리 몸의 주인이 될 때 우리의 몸은 곧 성전이 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인격적으로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역사 하십니다. 성령은 결코 마술적인 힘이 아니며 군주적인 폭력으로 역사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마치 다정한 사람이 곁에 앉아서 위로를 하며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은 인격적 관계로 우리 안에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성령과 영이 만나는 장소가 되는 것이며, 이 때에 성령이 우리의 몸을 주관하게 되고 우리의 몸은 성령에 순종하게 될 때 성전으로서의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성령을 거역하게 되면 성령께서 떠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떠나면 그 집은 빈집이 됨과 동시에 예수님의 비유에서와 같이 마귀가 들어와 차지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마귀의 집이 되고 나면 그 집은 마귀가 주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술 취한 사람을 향해 술도깨비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정신이 아니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술이 사람을 지배하면서 도깨비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의 인격을 지배하고 우리의 인격이 거기에 순종할 때,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전제하며 경고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17)고 하였습니다. 다시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보면, 솔로몬 성전, 곧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자를 하나님께서 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집을 더럽힌 자를 용서하시기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죄목을 만들 때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26:61)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과정은 아니었습니다만 은 아무튼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전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것과 하나님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일과는 꼭 같은 죄로 다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성전을 더럽히며 훼방한 사람은 끌어내어 돌로 쳐죽였던 것입니다. 이는 동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잘못 성전 가까이에 가서 오물이라도 배설했다면 그것 역시 돌로 쳐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전을 더럽히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집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 왕입니다. 이를 위해 사무엘하 7장을 보면 다윗이 자원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는 등 여러 가지로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집을 사랑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리고 그만큼 그는 축복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너희도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전인 우리의 몸은 언제나 거룩하고 깨끗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본래 구별이란 뜻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으로 구별하는 것이 됩니다. 저는 가끔 음식을 놓고 많이 먹기 대회를 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미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 더욱이 성전이 되는 귀한 몸에 음식을 마구 집어넣어서야 되겠느냔 말입니다. 아무리 젊고 건강하다하더라도 몸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의 간장을 보면 아예 간장을 뽑아서 술독에 담갔다가 꺼내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그것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것도 신앙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는 소중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도 절제해야 하며, 자고 깨는 시간도 정해진 시간에 할 수 있어서 건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가끔 저에게 "목사님 건강의 비결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비결은 오직 하나, 생활의 리듬(rhythm)입니다. 그저 먹는것 과식하지 않고 제때에 먹고, 자고 깨는 것 제시간에 해나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건강은 곧 일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제하는 가운데 우리의 몸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지킬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정신을 지켜야 합니다. 몸이 성전의 뜰이라면 정신은 성소입니다. 성소는 복잡하고 구질구질한 것들을 놓아두는 곳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이 잡스럽고 쓸데없는 일들을 생각함으로 복잡해지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하여 물에 가서 귀를 씻었다고도 합니다 만은 어쨌든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야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영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영은 지성소와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영이 깨끗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3:10말씀에 보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찬송을 하고 전도를 해야할 입에서 악한 언어와 저주가 나왔다면, 그는 이미 성전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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