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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자씨 만한 믿음(마태복음 17 : 14 - 2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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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자씨 만한 믿음(마태복음 17 : 14 - 21)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면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리라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좇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우리는 앞서 예수님의 비유 상권에서 겨자씨의 비유(13:31-32)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거기에서의 겨자씨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적인 능력과 그 확장을 비유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여기에서는 겨자씨는 같은 겨자씨이지만 그 비유하고자 하시는 내용은 다른 것으로서 우리의 가진 바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제 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겨자씨란 매우 작은 것이어서 마치 먼지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얼마나 작은 것인지는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이 안 갈 정도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생명이 있어서 이것 하나가 땅에 떨어졌을 때에 그것이 싹이 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된단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으로부터 나온 이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다가 빠져 들어가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할 때에 예수님께서 저를 붙잡아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십니다(14:28-31). 또한 많은 장애를 넘어서서 딸의 병을 고쳐 달라며 끝까지 애원하는 가나안 여인을 향하여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며 아주 메가톤급이라고 칭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적다" 혹은 "크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기록인 야고보서에 의하면 거기에는 "산 믿음", "죽은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이요, 행함이 없는 믿음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49절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이 바울의 설교를 열심히 들으면서 마음에 한 말씀 한 말씀을 전적으로 아멘,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의지와 지식과 감정이 합쳐서 전인격적으로 위탁하는 모습을 보고하는 말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을 보면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할 때에 그 앉은뱅이가 일어서게 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214절에 보면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그 믿음의 정도를 가르쳐 주는 말씀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적다고 하시는 그 말씀의 뜻을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이를 위해 마태복음 171절부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변화산이라 불리워 지는 높은 산에 오르시어 밤새껏 기도를 하셨으며, 어느 순간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시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이야기하시는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여 주심으로 거기에 있던 세 제자는 참으로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며 아예 천막 셋을 짓겠다고 하는 청원까지 하게 됩니다마는 아무튼 이렇게 영광스럽고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엔 산 아래에서는 어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이 나머지 아홉 제자들은 졸았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푹 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어 이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실 때가 된 바로 그 시간에 이 나머지 제자들이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귀신이 들렸다고도 했고(9: 39), 간질병이라고도 하였는데 아무튼 물에도 불에도 뛰어들어가 넘어짐으로 자기 몸을 몹시 상하게 하는, 어지간히 발광이 심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아이를 그의 아버지가 데리고 예수님께로 온다고 왔으나 마침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시고 안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이 때에 거기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데 조금 있으면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라고 하였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무엇을 한다고 그 아이를 붙들고는 고쳐 보겠다며 이 아홉 제자들이 나름대로 시도를 해본 것입니다. 누가 먼저 했는지 모르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는 등, 별별 소리를 다 해보았지만 영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자니 점점 더 실망은 커져서 제자들 자신도 실망하고 이 아이의 아버지도 실망을 했습니다. 이제 이 아버지는 모처럼의 기회에 자기의 아들이 고쳐질 줄 알았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시자 그 앞에 나아가서는 완전히 실망적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마가 복음에 기록된 같은 내용의 말씀에 보면 이 때에 이 아버지가 예수님께 하는 말 중에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9:22)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는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으셔서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그 아들을 깨끗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 때에 어쩔 수 없이 제자들은 조소를 당하게 되고 아무 능력 없는 떠벌이 사람들로 망신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부끄러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스로들 절망해 하면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며 자기들의 무능을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왜 못하였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믿음이 없는 연고니라!"는 참으로 간단한 한 마디입니다. 이 말씀에 앞서 17절 말씀에 보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아주 개탄하시는 이 말씀 속에는 믿음에 대한 몇 가지의 암시를 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음미해 보면 믿음이란 예수님과 더불어서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 혼자서 "믿습니다"하고 확신한다고 하여 생겨지는 것이 아니예요. 어디까지나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좌우간 단 한 번만이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거기에서 믿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함께 해야 하는 것인가를 보면 여기에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교육적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는 이 말씀은 곧 얼마나 가르쳐야 믿음이 제대로 되겠느냐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하신 것은 교육에 있어서의 인내를 뜻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처음 한번 이야기하며 못 알아듣는다고 하여 퇴학을 시키겠습니까? 마구 쥐어박겠습니까? 교육은 가르치고, 가르치며 오래 오래 참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믿음 역시 만나자마자 마술적으로 번쩍하고 믿음이 생긴다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너희와 함께"란 신비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는 것은 상당한 기간을 그리고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한 것은 얼마 기다려야 제 수준에 도달하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쉽게 이루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 것 같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만약 이 시간에 우리 모두의 믿음의 상태를 엑스레이(X-ray)로 찍어 보듯이 그 속을 들여다본다면 참으로 갖가지 형상의 믿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병이 나올 줄로 믿습니다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어느 때에 제가 경험한 일인데 암환자이신 분을 찾아가 만났더니 그 분이 저를 보며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이 병이 꼭 나을 줄로 믿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제가 있다가 "만일에 안 나으면요?"하고 한 마디 하였더니 "!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까?"라며 오히려 저를 보고 나무라듯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나는 믿음이 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꼭 낫는다고 그러는데 만약 안 나으면 어떻게 하겠으며, 또 안 나으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낫지 않고 죽게 되면 하나님을 부인할 것이냐?"고 하였더니 "그럴 수가 없지요."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제가 "그렇다면 당신이 믿으면 꼭 낫는다고 생각하는 그것만 믿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요" 하였더니 "하기야 그렇네요"하면서 필요한 이야기를 좀 길게 나눈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것이 믿음입니까?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마는 어떤 때에 보면 큰 소리로 "믿습니다, 주여"하는데 아무리 그래 보아도 그 소리가 별나게 클 때에는 의심이 많을 때인 것 같아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자신이 있는 말은 언제나 음성이 낮고, 그리고 자신있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좋으니까 하고 싶지요. 그렇기 때문이 굳이 음성을 돋구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이제 "좋아요"를 세 번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사실 좋은 것이 아니예요. 무엇에나 강조는 지나치게 하는 것은 좀 수상한 겁니다. 그래서 거짓말은 언제나 말이 길지요. 그러나 진실 된 말은 간단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그저 믿는다고 하여 다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과 사귀면서 그 말씀과 사귀면서, 이 믿음이 교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근본적인 믿음을 향해 다듬어지고 바로잡아지며, 정화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수준의 믿음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하시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난 제자들에게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능력을 행하지 못하였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느 정도입니까? 또한 어떻게 평가하여야 됩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즉 믿음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논법대로 말하면 믿음은 곧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능력과 믿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알고 많은 절수를 외운다고 하여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은 주관적인 어떤 확신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그렇게 될 줄은 확신한다고 하는 자기 마음대로의 결정,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이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믿음은 곧 능력이다! 믿음은 곧 권능이다! 권능 없는 믿음, 그것은 적은 믿음이다! 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어려운 말씀을 드리자면 이 능력 없는 믿음의 원인은 바로 믿음이 병든 데에 기인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신 말씀에 따르면 믿음이 적다, 크다는 것은 믿음의 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는 것은 양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겨자씨만큼만 있으면"하는 말은 아무리 작아도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일지라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도는 모름지기 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차원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제 그러면 양적인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볼 때 여기에는 먼저 일반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믿음, 즉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줄로 믿고 그를 내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며 부활과 하늘 나라의 약속을 믿는 믿음,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누구나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믿음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특별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 특별한 믿음은 사역을 위해 필요한 믿음이요, 은사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한 마디로 말하면 전도하기 위하여, 봉사하기 위하여, 순교하기 위하여, 또한 나아가서는 이적을 행하기 위하여 주시는 바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환자를 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그랬다는 것이지요. 앉은뱅이를 보고는 생각하기를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였다는데 나도 해야지 하고서는 먼저 가까이 가서 사람들이 있나 없나를 보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어나라고 하였을 때에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망신스러울까 해서인데 아무튼 미리 그런 생각까지 하고 한 마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런 게 아니에요. 이것은 믿음의 은사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런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믿어져요. 다른 사람은 그 지경이 되면 그저 죽을 사람이 죽겠지하고 마는데 이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살려 주실 것이라며 마음에 믿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은사올시다. 그 때문에 그를 위해 기도하며, 그를 위해 실지로 능력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을 보면 믿음은 은사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능력을 행하는 특수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믿음을 복음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도행전적인 믿음이라고 불 수 있겠습니다. 사도행전적인 믿음이란 믿음을 가지면서부터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기주의가 다 없어지고 유무상통하며,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저들과 함께 지내기도 하고, 율법도 초월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하고, 순교하는 이러한 믿음! 이것은 결코 간단한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특별한 은사적 신앙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믿음의 양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믿음의 질로 볼 때에는 자기중심적인 신앙, 그것을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어야 하고 은혜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요,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겨자씨라고 하는 것은 가장 작은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작은 것이라도 두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작더라도 살아 있는 믿음! 곧 생명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리! 이것은 살아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큰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죽은 것이라면 소용이 없어요. 이것은 생명적인 차원, 즉 질적인 다른 면에서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 복음 10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기 전에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필요한 권능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내가 네게 권능을 주노라 할 때에 이 쪽에서는 받은 줄로 믿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되는데 이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권능은 그에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믿음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주님께서 말하라 할 때 말하고, 가라 할 때 가며, 병을 고치라 할 때에 고쳐야 합니다. 진정 주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능력을 내가 받아서 옮길 따름이지 내가 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고민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내라고 하실 때에 모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을 보며 참으로 답답한 나머지 구구한 설명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이에 출애굽기 410절을 보며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니까 주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나는 나입니다 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는 내게 능력을 주셨다는데도 능력을 받았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가라"고 명하시는 데에도 이 사람에게는 받았다고 하는 믿음이 없어서 발을 옮기지 못하고 계속 표적을 보여 달라며 하나님 앞에 조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차원이 다른 믿음입니다. 이제 누가 복음 10장을 보면 70문도를 파송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파송되었던 70문도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0 : 17)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이 아홉 제자들이 귀신을 내어쫓겠다고 시도해 본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왜냐 하면 바로 얼마 전에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분명 마태 복음 10장에 이어 예수님의 명령을 쫓아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내어 쫓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약간의 주를 단다면 어찌하여 오늘은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바로 며칠 전에는 했었는데 오늘은 왜 안 됩니까?라는 것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 질문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착각을 하고 있어요. 내가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능력을 나타내었다고 하여 이제는 내가 그 수준에 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순종하는 일이니만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내 경건이, 나의 도덕적 수준이, 나의 인격이, 나의 신앙적 수준이 이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을 일으켜 세워 걷게 함으로 모두를 기이히 여기며 놀라 베드로를 주목할 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 : 12)고 합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그리스도의 이름이 한 것이거늘, 나는 그리스도의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마치 우리의 경건이 기적을 낸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얼마나 깨끗한 말입니까? 베드로를 쳐다볼 것 없어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만이예요. 이는 베드로 자신으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셨기에 베드로가 칭찬받을 것도 없고 존경받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우리는 왜 고치지 못했습니까하고 묻게 되는 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한 겨자씨 만한 믿음 그것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 같은 그러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기중심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경건과 자기의 능력이 과거에도 이 같은 일을 하였고, 오늘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나를 쓰실 때에 내가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실 때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 경건의 어느 수준과 그 도가 나로 하여금 이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마가 복음 928절에 보면 같은 내용에 추가된 말씀으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하실 때 다시 묻기를 "그러면 왜 우리는 믿음이 적습니까?"라고 한다면 기도를 안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바로 어제까지 능력을 행했다 하더라도 오늘 기도하지 않았으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오늘 기도하고야 오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겁니다. 기도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믿음은 겨자씨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확신, 자기 마음일 뿐이지 하나님과 줄이 닿은, 말씀과 연합된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으로 말씀과 연합된 믿음이라야만이 그 믿음이 능력을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른 기도! 바른 믿음! 이제 그 믿음은 반드시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저는 이 말씀에서 왜 하필이면 산을 들어 말씀하셨는가를 두고 이렇게 해석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제 사람이나 다른 생물 같은 것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 전혀 움직일 수 없고, 움직여지지도 않는 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면 움직이는 생물은 왜 못 옮기며,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왜 변화시킬 수 없더냐는 말입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변화가 있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까닭이예요. 그렇다면 믿음의 양을 물어야 하고 믿음의 질을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슨 믿음,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졌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매우 깊은 뜻이 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무서운 책망이기도 합니다. 산이라도 마음대로 옮길 수 있겠거늘 그까짓 귀신 하나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문제이냔 말입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산도 움직인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본래 사람의 인심이란 조석변이라는데 매일 변하는 사람 마음 하나쯤 변화시키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냐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도학에서는 한 곳에서 삼대 이상을 내려가면서 살아 온 그런 집안에는 전도해서 예수 믿게 할 가능성이 10%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전도를 잘 받아들이느냐 하면은 1년에 한 번씩, 즉 자주 이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왜냐 하면 이사를 한번 하면은 마음이 일단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해 놓고 생각하기를 그 동안은 티격태격했었는데 이제는 집이라도 이렇게 옮겼으니 오늘부터는 좋은 꿈꾸고 어디 한번 바로 살아 봐야지 하는 마음이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럴 때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하면 그대로 쏙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래 굳어서는 요지부동인 사람은 힘든 거란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본래가 움직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방향을 교회로만 돌리면 되겠으니 생각하면 이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는 말입니다. 산이라도 옮기겠는데 그 마음에 들어왔던 귀신 하나 나가게 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어려우냐? 얼마나 믿음이 시원치 않았으면 그것 하나도 못하느냐? 이것이 오늘 여기에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한 겨자씨만한 믿음! 이것은 매우 질적인 것이요, 생명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은 바른 신앙만 있다면 그 믿음이 비록 작아서 겨자씨 하나만한 것이더라도 산이라도 움직일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쯤은 문제될 것도 없고, 어떤 굳은 사람의 마음도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의미의 말씀인 줄 압니다.

이제 내게 있어야 할 변화가 없습니까? 그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변화시켜야 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에요. 진정 우리의 가진 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우리의 믿음을 한번 진단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제목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믿음을 바로 세워 주시옵소서!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을 키워 주시옵소서! 그리고 모든 것을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극복하며, 믿음으로 사랑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믿음은 곧 능력입니다. 나를 이기는 능력이요, 죄를 이기는 능력이며, 세상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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