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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언약(3장 15~18절)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네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하나님의 확실한 은혜의 약속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3장 1절로 14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만이 구원의 길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성경적인 지식을 근거로 이 주제를 열심히 설파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는 예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성 또는 인간적인 상식과 지식으로써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추리적 본능, 비판적 본능으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비판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자연계시적인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은혜의 사건들을 정결한 마음으로 충분히 생각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본문에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의 예대로-인간적인 방법, 인간적인 비판 추리의 기능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가 확실할 뿐더러 근본적인 것이라고 말씀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형제들아(15절)"라고 정답게 말문을 엽니다. 그러나 1절에서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시작했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성경적인 근거나 인간이 가진 영적 체험의 사건을 들어서 말할 때에는 이처럼 가차없는 비판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의 본문, 즉 이성에 호소할 때에는 좀더 부드럽게 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일단 따뜻하게 불러놓고 권면(勸勉)하면서 변론을 벌입니다. 그 변론의 요점인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입니다. 이것이 본래적이요 보다 더 오래 전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우월한 은혜의 약속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성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간혹 우리 가운데 보면, 구약에서는 행함으로 구원받고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말세에는 성령으로 구원받는다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리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하는 사도 바울의 이 철저한 구원론은 사실상 창세기 1장부터 있어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있었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대립시켜 생각하거나 혹은 양자택일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 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신학적으로 반드시 정리되어야 합니다. 사실 본 갈라디아서는 다른 성경에 비해 내용이 좀 어렵습니다.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바로 이해하고 나면 다시는 신학이 흔들릴 염려가 없습니다. 말씀마다 깊이가 있기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즉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과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씀은 결코 두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 즉 율법주의자들은 이를 대립시켜 양자택일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 이론이나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어 율법도 은혜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먼저이지만 이 은혜를 바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율법이라는 부정적인 수단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언급될 것입니다. 율법이 몽학선생(蒙學先生)이 되어 우리를 은혜에로 인도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간접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따로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직선적이며 조화 있게 이해해야 합니다. 은혜 중심으로 율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문제 해결의 키워드(key word)로 '약속'이라는 말이 본문에 나옵니다. 약속이 있음으로 문제는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애쓰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보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미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없다면 헛일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제사를 드린다고 합시다. 아무리 푸짐하게 바치면 무얼합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제사를 드려라'하고 말씀하신 다음에 드려야 효력이 있습니다. 내 멋대로 수만 마리의 양을 잡아 바친다고 하여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고 하는 우리네 속담이 적절한 표현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없이 내 편에서 아무리 발버둥친들 이루어질 것이 없습니다. 구원에 관한 한 약속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길로 약속을 주셔야 합니다. 그 약속을 따라야만 구원의 길이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은혜의 길에 먼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백 년 후에 가서 이제 율법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에 있기에 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약속은 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나왔다고 하여 이제와서 폐하든가 더하든가 방법을 고치든가 변덕스럽게 다른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폐기하지도 수정하지도 않고 더하지도 감하지도 않습니다. 약속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약속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또하나의 방법으로 율법이 간접적인 역할을 할뿐입니다. 율법과 은혜를 대립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신학적 이론입니다.
본문 내용을 좀더 신학적으로 분석해보기로 합시다. 15절에 보면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또 14절 끝부분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약속'이라는 말과 '언약'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약속'은 헬라말로 '에팡겔리아' 혹은 '에팡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에팡겔리아는 '먼저'라는 뜻의 '에피'와 '소식'이라는 뜻의 '앙겔로스' '앙겔리아'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건 소식, 먼저 전해지는 소식-이것이 약속입니다. 이는 사건이 있기 전에 미리 주어집니다. '내가 내일 아침에 너에게 무엇을 주겠다'-약속입니다. 아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리 그 소식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입니다. 복된 소식 즉 복음은 '유앙겔리온'입니다. '복되다'의 뜻인 '유'와 '소식'이라는 뜻의 '앙겔리온'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결국 에팡겔리온이 유앙겔리온이 되고 유앙겔리온이 에팡겔리온이 됩니다.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언약'이라는 말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언약'이라는 말은 원 낱말의 뜻이 '디아데케'-'유언'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베리트(berith)'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마지막으로 하는 말 라스트 워즈(last words)가 유언입니다. 이 유언이 곧 언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나누어 신약(新約)․구약(舊約)이라고 부릅니다. 줄여서 신구약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구신약'이라 해야 됩니다. 영어로도 구신약, 올드 앤 뉴 테스터먼츠(Old and New Testaments)라고 말합니다. 구약이 먼저입니다. 유독 한국교인들만이 신약을 먼저 말해서 신구약이라고 합니다. 이는 단지 구신약이 발음상 어색했기 때문이지 딴뜻은 없습니다. 아무튼 약속이라는 말이 거기에 있습니다. 낡은 약속, 새 약속-이 약속이 디아데케, 유언입니다. 유언이 사람이 죽을 때에 하는 말이기는 합니다마는 여기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떠나서 잠시 유언이라는 것의 성격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유언은 죽는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은 일방적입니다. 죽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저 논밭은 네게 준다, 이 집은 둘째한테 준다, 이 돈은 누구에게 준다-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일방적으로 말해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은혜의 약속이요 축복의 약속입니다. 약속이지만 일방적이며 약속을 받는 사람의 의사를 묻지 않습니다. 죽는 사람이 옆에서 우는 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변입니다. 번복할 수 없습니다. 말을 해놓고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약속은 해약을 할 수 있습니다. 결혼했다가도 이혼이라는 것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해약입니다. 어떤 약속이든지 이처럼 해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약할 수 있습니다. 해약 못하는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 유언밖에 없습니다. 유언한 사람이 죽어버렸으니 어디 가서 고치겠습니까? 천국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가장 불변하는 약속이 유언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약속을 해주었더라도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효력을 발생하는 약속은 유언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개 유언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래 살 것처럼 유언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어 유산 문제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은 유언문제만큼은 확실히 해둡니다.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서 자기 변호사에게 맡겨 놓습니다. 죽은 다음에만 유언장이 공개됩니다. 죽은 날부터 효력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6, 17절을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유언-이것이 바로 '디아데케'입니다. 라틴어로는 '테스타멘툼(Testamentum)' 영어로는 '테스터먼트(Testament)'라고 합니다. 요즘은 이 유언이라는 말이 귀에 좀 거슬린다 하여 '커버넌트(Covenant)'라고 고쳐서 번역하기도 합니다. 언약이라는 우리말에 그런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언은 그 유언을 따라 지키는 자에게만 약속된 기업(基業)이 효력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집의 아들이라 하면 아들 노릇을 해야 비로소 그 유언이 나와 관계가 있지 내가 그 약속을 저버릴 때에는 약속이 준 효력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 기업이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약속을 많이 해주셨습니다마는 우리편에서 그 약속을 받아 믿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게 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만 엄청난 의미가 발생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본문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12,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는데 그 약속이 일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아들을 주마, 고향을 떠나라, 네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 온 백성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약속을 믿고 고향과 친척을 떠납니다. 믿고 떠나니까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유효하게 이루어나가십니다. 떠나라 했는데 안 떠났다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믿고 실천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불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정말 믿음직합니다. 한번 약속한 다음에는 하나님 편에서 계속 이루십니다. 사람이 휘청거리지 하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몇번 휘청거립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왜 휘청거리느냐고 깨우쳐주십니다. '엘 샤다이(El Shaddai)'-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니 내 약속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은 참으로 강합니다. 우리가 혹 잘못하든가 흔들리면 때려서라도 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다 지키십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태도에 따라 약속을 취소하시거나 번복하시지 않습니다. 강권적으로 그 약속을 끝까지 스스로 이루어나가십니다. 다윗 왕에게도 '너는 내 집을 지을 것이요 나는 네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하고 약속하십니다. 또 사무엘하 7장에서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14절)"-때려서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겠다, 이 약속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너희들이 변덕부리는대로 내가 변덕부리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너희들이 변한다고 해도 나는 함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리라-약속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약속에 합당하도록 내가 훈련할 것이요, 가르칠 것이요, 인도할 것이다-하나님의 약속은 미덥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고 강권적이며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십자가로 이니시에이션(initiation)하셨습니다. 사인(sign)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 약속은 확증되고 효력을 냅니다. 그를 지키는 자에게,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에게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모두 내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를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게 되면 그 약속이 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신실한 교인을 심방하여 성경을 같이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교인이 성경에 빨간색 펜으로 영어의 T자와 P자를 자꾸 써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써넣고 있는 글자 외에도 이미 성경에는 T자와 P자가 가득합니다. 궁금해진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T자는 무엇이고 또 P자는 무엇이오?" "T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제가 그대로 시행해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트라이드(tried)의 T자를 썼습니다." 그대로 행했을 때 되나 안되나, 한마디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을 주나 안주나 시도해본 항에는 T자를 썼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시행했더니 정말로 복을 받았다, 확증이 되었다고 여기는 항에는 프루브드(proved)의 머릿글자인 P자를 쓴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트라이해보았나-시행해본 것에는 T자를 쓰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에는 P자를 쓰십시오.
과연 몇 자나 쓸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된다 안 된다 비평부터 합니다. 안될 리가 없습니다. 일단 시도해보고 이야기합시다. 성경에는 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큰 약속, 작은 약속, 종말론적 약속, 현실적인 약속, 가정적인 약속, 심령적인 약속, 물질적인 약속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해보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해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입증이 됩니다.
말라기를 보십시오.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라-한번 그대로 바쳐 보십시오. 창고가 넘치도록 주십니까 주시지 않습니까? 뒤에 확증을 얻게 되면 거기에 P자를 크게 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절대로 폐기하시지 않습니다.
본문 18절에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업은 약속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고 하나님 스스로 보증하신, 즉 미리 정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약속이 여기에 있는데, 문제는 율법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지 430년 후에 모세가 받은 율법이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요, 좁은 의미에서는 '모세 오경'을 가리킵니다. 좀더 좁은 의미에서는 '십계명'을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좁은 의미의 율법을 말합니다. 그 율법이 아브라함과의 은혜의 약속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은혜와 율법을 대립적으로, 또 양자택일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율법이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약속이기 때문이요, 효력을 취소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과 은혜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해해야 합니다.
은혜가 먼저 있었습니다. 은혜를 떠난 자에 대한 경고 또는 은혜로 다시 이끌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나아가서는 율법도 은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지 말라 저러지 말라 하지만 예수님의 해석을 들어봅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율법이요 은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근본이다'-율법도 은혜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은혜 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항상 은혜적이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때때로 심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말 안 들으면 때린다"-언제는 사랑한다고 했다가 지금은 때리겠다고 합니다. 자녀로서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양자택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선물을 줄 때는 사랑하는 것이고 때릴 때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매를 맞으면서 '두고보자'하고 벼릅니다. 조금만 더 크면 집을 나가버리겠다고 작정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가출하게 되는 데는 이런 까닭도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은혜 안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기억하여 내게 선물을 줄 때도 사랑이요, 때릴 때도 사랑이요, 공갈협박해도 사랑이요, 심지어 내가 못되게 굴어 부모가 너는 내 아들 아니다, 너에게는 유산이 없다라고 하여도 사랑입니다.
다 사랑 안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은혜 안에서 소화해야 합니다. 은혜 안에서 율법을 소화하라-이 말은 사랑과 은혜에 대한 전적인 신뢰, 즉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신뢰, 이 믿음이 점점 자라나야 합니다. 이미 제 아이들은 다 커서 결혼하여 나가 삽니다마는 그 아이들을 키울 때에 잘못한 점이 많아 저는 지금도 후회가 됩니다. 그때 좀 배웠으면 바로 키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아쉽기만 합니다. 언젠가 어느 신학서적을 읽다보니 이런 구절이 나옵디다. 아이들에게 약속과 성취의 긴장관계를 똑바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아이들이 뭘 달라고 하면 당장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뭘 달라고 하면 내일 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하룻밤 잔 다음날에 줍니다. 일단 이렇게 약속을 했으면 울든 말든 당장에는 절대로 주면 안됩니다. 그러나 다음날에는 비록 아이가 잊고 있더라도 반드시 주어야 합니다. 전날 약속한대로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약속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뭘 달라고 하게 되면 사흘 후에 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약속을 지켜서 사홀 후에 줍니다. 이렇게 해나가면 십년 후에 준다고 해도 약속을 약속으로 받게 됩니다. 약속에 믿음이 가게 됩니다. 준다고 하다가 안 주고, 안 준다고 하다가 주고-당초에 신실치가 않습니다. 생각하면 제가 그것을 잘못했습니다. 약속과 성취에 대한 믿음을 확실하게 가르쳤어야 합니다. 이거 하나만 제대로 가르쳐놓으면 성경을 보면서도 그 안에 있는 약속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믿게 됩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배신당하고, 아버지로부터 배신당하고, 친구로부터 배신당했습니다. 평생 배신당하며 살아왔기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까지 못 믿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정신적 차원에서 말하면 완전히 패륜아입니다. 약속과 성취의 관계를 한번도 믿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안 믿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한번도 믿어본 일이 없고 성취를 맛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은혜의 약속입니다. 약속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에 조명하여 율법도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라고 하여 '자손'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참 천재적입니다. 여럿을 가리켜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고 단수(單數)로 ‘자손’이라 지칭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이삭을 가리킨 것이요, 그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은혜의 약속을 따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를 '대표적 개인'이라고 합니다. 대표적 개인-이 은혜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된 것이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습니다. 또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오직 믿음으로'란 오직 은혜요, 당신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 안에 우리는 신실해야 합니다. 그 약속을 믿기에 그 약속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그 약속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이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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