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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의 비유(로마서 4:1-12)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이 사하심을 받고 그 죄가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본 할례의 비유는 사도 바울의 가장 독특한 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한 마디로 대변해 주는 상징적 비유입니다.
이 할례라는 말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조금 생소한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종교적 풍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은 일이 없으며, 할례 예식에 대해서도 성경에서 보고 듣는 그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례 대신에 세례라고 하는 그에 대칭 되는 예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하는 세례의 의미는 할례에서 오고, 그 형식은 세례라고 하는 형식으로 바꾸어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할례라고 하는 것은 유대 사람들의 것이면서도 신학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 중 가장 핵심적인 교리라고 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이 바로 할례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이 유대 사람되는 것은 할례에 있습니다. 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 거기에 대한 정의를 바로 내리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골상학적으로 유대 사람을 말해 보려고 그들 특유의 생김새나 체격의 크고 작음을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다른 유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골상이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 천년 동안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얼굴을 놓고 보아서는 이가 유대사람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유대 사람이냐고 할 때에 그 문제를 논한 글이나 논문을 볼 것 같으면 심리학적인 것으로서 내가 유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유대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짓고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히브리말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유대 사람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사는 그 사람이 유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풍속이 할례입니다. 그 때문에 구약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할례를 통해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와 함께 미국에서 공부를 하던 죠지라는 청년은 빨리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야 하다면서 자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겠다며 준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유대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히브리어를 배우고 율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고 시험을 치러 합격을 하고 할례를 받은 다음 회당에서 하나님 앞에 서약을 하면 그것으로 유대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람이 되는 표 중에 가장 크고 분명한 표가 할례입니다.
그 때문에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구약은 물론 사도행전에서부터 로마서, 고린도서 할 것 없이 쉽게 알아 볼 수 잇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별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 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이방 사람들은 별명은 '할례 받지 못한 자'로 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 사람, 유대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할례 받은 사람' '할례 받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할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인침이요 표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상징입니다. 사실 할례의 풍속은 유대 민족이외의 고대 다른 민족에서도 다소간 찾아 볼 수 있는 풍속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희미한 흔적에 지나지 않으며 할례가 특별하고도 절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유대 사회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할례가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사회적, 윤리적인 그리고 위생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 가운데 보면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부인병, 소위 자궁암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큼 저들은 할례의 문제를 위생적으로도 매우 정결한 것으로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의미로 우리 기독교인이 취하는 신령상의 의미, 곧 신학적 의미입니다. 이사야서 52:1 이하에 보면 무할례자나 부정한 자는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할례받은 자만이 신령한 의미의 거룩한 성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된 할례란 신령상의 영적 의미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석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9절 말씀에 보면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 "이 행복"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자의 행복입니다. 여기 이 행복은 돈을 벌도 출세를 해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의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행복입니다. 우리가 쉽게 쓰는 말로 표현을 하자만 죄 사함 받고 의롭다함을 얻음으로 그로 인해 얻는 행복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의에서 오는 행복을 소홀히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행복을 가장 실제적인 행복으로 생각하고 매일 매일 구체적으로 새롭게 확증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의로 인한 행복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비록 가난하더라도 오늘 하루를 의롭게 산것에 대해서 행복하고, 반면에 돈을 많이 벌었다하더라도 의롭지 못한 것이 있었음에 대해서 마음 아픈 그런 느낌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거짓말을 했든,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오늘 하루 수지맞았다는 생각에 그치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행복, 이 영적인 행복의 근거는 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고난을 당하더라도 의를 지켰을 때에는 행복합니다. 하지만 화려한 꽃방석에 앉았어도 불의의 길에 섰을 때에는 불행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 행복의 뿌리는 의를 행하지 않았음에도 의롭다함을 얻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4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롭게 살고, 의를 행했기에 그래서 의를 인정받는 의가 아니라 사실은 죄인이요, 전혀 의를 행한 바가 없음에도 의롭다고 인정받고 있는 바로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쉽게 표현하면 자기 행위는 없이 공짜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절대적인 조건이 의인데 그 의를 내 행위, 내 선행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거저 은혜를 입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본문은 이런 행복을 가진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약속으로 되는 지극히 행복한 방법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 깃이 있는가 하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겠다는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이란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 형벌이 따르기 마련이며, 비록 율법을 행함으로 다소간의 의를 행했다 하더라도 자기 의에 의존한 의이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며 나아가서는 공포에 떨게 되는 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잘못 생각하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만은 "구원받은 사람은 죄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다소간의 의를 행하면서도 불안에 떤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깊은 신앙적 체험에서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내 의, 곧 내가 의로워지려고 하는 그것까지도 다 바치고, 맡겨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그 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 만은 탕자의 비유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약한 아들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자기의 유산을 내어놓으라며 졸라서는 방탕하며 다 써버린 다음 이제거지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누구의 의가 있는 것입니까? 오직 아버지의 의가 그 아들을 덮어서 전혀 자격이 없는 그 아들을 내 아들이라 부르며 기뻐서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게 할때에 아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얼마나 죄스럽고 입장이 곤란했겠습니까? 이 장면을 두고 율법적으로 생각을 하면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면 나올수록 탕자의 체면은 더욱 말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는 외양간으로 가는 것이 마음이 편하겠습니다."하고 나온다면 이는 율법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 못 받을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죄가 많고 과거는 허물 되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면 나는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체면도 잊고 좋은 옷을 입은 채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께서 그 염치없는 아들의 모습이 어떠했을까하고 알고 싶은 분들이 있거든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그 염치없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만을 생각합니다. 만일 이 시간 내가 이 일을 거절하면 지난날 아프시게 해드린 것도 괴로운데 또 얼마나 아프시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아버지 고맙습니다하고 시치미를 떼고 앉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 마음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 믿음 하면서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게 과연 그 믿음이 무엇을 말하고 잇는 믿음입니까? 여기 이 믿음은 이제 기도했으니 복 주실 줄로 믿는 믿음, 아이들 시험쳐 놓고 합격될 줄로 믿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이에 오늘 본문에도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고 말합니다. 오직 믿음그것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이 막중한 교리를 한 마디의 상징적인 비유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할례의 교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떠나라시는 명령 앞에 갈 바를 모르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해서 남달리 선행을 더한 것도 아니요, 남달리 깨끗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약점과 허물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훌륭한 점은 쓸어질듯 비실, 비실 하다가도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그저 "예"하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로마서 4:18-19 말씀을 상고해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들을 주신다고 해서 믿었다가 자그마치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동안에 물론 실수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실 때에 바랄 수 없는 중임에도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실수한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자, 엎드려 웃으면서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는 마음에서 제가 편법으로 얻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고 살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가하면, 장막 뒤에서 네 아내가 잉태하리라는 말을 들은 사라 역시 나이들이 몇 살인데 망측스럽게도 이제 와서 무슨 아들이냐며 웃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면서도 믿었습니다. 이에 19절 말씀에 보면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 하였습니다. 인간 상식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자기도, 아내도 생리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과 같은 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니 아멘하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시어 의롭다라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은 것은 17:10에 있고 보면 약 14년 후에 할례의 예식을 주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얻는 내용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내용을 확증하고 몸에다 싸인을 하는 그 순간, 그 예식이 바로 할례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소중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할례가 무엇이냐고 할 때 이것은 첫째, 모세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백여 년 전의 인물입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기어이 율법을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브라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사도 바울에게는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율법에 훨씬 앞서 있었던 원천적인 교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이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할례는 요즈음 우리가 받는 세례와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베풀고 있는 유아세례의 뿌리는 할례입니다. 할례는 특별한 경우, 즉 나이가 많아서 유대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여 서약을 하고 할례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남자일 경우에는 정확하게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아야합니다. 그 때문에 안식일에도 할례는 주는 거십니다. 이와 같이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주는 것은 본인의 의식 이전에 할례를 베푸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윤리적인 행위나 율법적 의에 훨씬 앞서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언약에 의한 것으로 이미 우리로 하여금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고 자녀로 키우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방적이요 절대적이며 창조적인 사랑이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녀를 낳았을 경우에 조금 키워보고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여 쓸만하다고 생각이 될 때에 호적에 올리거나 그때에 가서야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그저 낳자마자 아무 것도 모르는 핏덩어리인 그것을 놓고도 이것은 내 아들이라며 사랑을 하고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만은 들은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사람들은 아이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말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는 엄마를 가르치고 다음으로 아빠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는 동안 가끔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며 물어보고는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엄마를 찾고 아빠를 찾게된 것은 솔직히 말해 내가 듣고 싶어서 가르친 것이지 저들이 엄마 아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어서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엄마의 존재가 어떻고 아빠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알려면은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려야합니다. 사실 완전히 알려면은 저들이 커서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서 엄마 아빠가 됨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어린아이들이 엄마 아빠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당연히 알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엄마 아빠로 부르라고 하니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를 낳아놓고 "엄마"라고 해라 "아빠"라고 해라하고 가르치면서 훌륭한 자녀로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을 시험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키워나가시는 이것이 할례의 교리입니다.
다음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이 할례는 철저히 순종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할례 받으라고 하는 명령 앞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받으라고 했으니 받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를 받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명령에 따라 세례를 주고 또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10년 20년 교회에 다니고도 좀더 있다가 세례를 받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세례 자체를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주 말하듯이 둘이 살더라도 기왕이면 결혼식을 하고 살아야 하듯이 예수를 믿는 것도 세례를 받고 믿어야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합니다 만은 세례를 받아보면 받고 안 받고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됩니다.
얼마전 한 퇴역 장교로부터 "요즈음도 그 무더기로 세례를 줍니까?"하는 질문을 받는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였더니 70 년대에 천명, 이천명씩 무더기로 세례를 줄 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요즈음은 그렇게 잘 못 줍니다. 하고서 왜냐하고 물어 보았더니, 자기는 그 때에 대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새로 오신 사단장이 참 좋은 분인데다가 기독교인이어서 그분이 세례 받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하니까 우선 그분에게 잘 보이려고 교회에는 나가 보지도 않은 사람이 열심히 외워 가지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다음에 신상카드를 써야하는 일이 있어서 요구한 사항을 적어 나가다가 종교란이 나오자 세례를 받았으니 기독교로 쓸 수밖에 없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상이나 미신적인 것 앞에 도저히 나갈 수가 없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지금은 장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사랑하기에 하는 결혼도 있지만, 결혼하고 사랑하며 살아나가는 경우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할례 받으라"고 하면 할례 받고, "세례 받으라"고 하면 세례 받고, "성찬의 떡을 먹으라"고 하면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그 자체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순종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할례 그 자체가 순종이요, 그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그리고 할례는 몸에다 둔 표징입니다. 이 표징은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 고백을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그로 인해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 법을 기어이 실천합니다. 어떤 기록에 보면 한 덕망 높은 랍비가 유대 사람이기 때문에 순교를 당하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돼지고기를 갖다 주면서 이것을 먹으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유대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터이라 이 랍비가 그것을 먹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자 이 덕망 높은 랍비를 구하고자 하는 형 집행원 중의 한 사람이 몰래 소고기를 가지고 가서 "랍비여 이것은 소고기입니다! 이것을 잡수시고 살아서 멀리 섬으로 가서 마음대로 사십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랍비가 "나도 그것이 소고기인 줄 압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은 돼지고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이 몸에 표징을 가지듯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확고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옷깃에 십자가 뺏지는 달지 않았어도 예수 믿는 교인이라는 자기 신분은 공개적이라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책도 조그마한 수첩 같은 것으로 편리한 대로 감추고 다닐 것이 아니라, 아예 큼직한 것으로 보임직하게 하고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서 주일 낮 서울 시내가 전부 그런 모습으로 깔려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나는 교인이라는 신분 표시는 분명해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이것은 지울 수 없는 표입니다. 그 때문에 히틀러 정치 하에서 많은 유대 사람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옷만 벗겨 놓으면 다 발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몸에 지울 수 없는 영원한 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는 확실한 표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친히 할례의 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성별이요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성별은 이방으로부터, 세속으로부터,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인간 스스로의 자기 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그러한 구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시에 사용하는 기도문을 보면 "모태로부터 거룩히 구별된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그 자녀 된 인 침을 받는 자는 복이 있을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떤 표가 있습니까? 진정 우리가 선택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자아 의식과 하나님의 의를 받은 증거를 가지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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