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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늘에 있는 집(요한복음 14 : 1 - 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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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있는 집(요한복음 14 : 1 - 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앞장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7장까지 다섯 장에 걸친 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성만찬 예식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남기신 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아마도 제자로서는 사도 요한 밖에는 들은 사람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보면 지금 이 긴 말씀이 제자들 앞에서의 마지막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그 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곧 떠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거나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등의 어디론가 가신다는 말씀을 계속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럴 때에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생각이 떠오른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구약 성경에서 본 엘리야나 에녹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늘로 올라가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걱정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두번째 생각은 예수님께서는 자꾸만 고난을 당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도대체 어떤 고난을 당하실 것이며 어떻게 돌아가신다는 말인가? 또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면 함께 다니던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로 인해 일어나는 걱정과 어두운 마음을 해결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을 미루어 보면 이 제자들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먼

 

 

유월절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맞아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당시에 60-70만이 모였다는 것이고 보면 이는 굉장한 숫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예루살렘에 모여 축제의 기분에 들떠있는가 하면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지금까지 예수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을 들어온 터이라 이번 유월절에는 심상치 않은 특별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인 기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로마의 정권을 뒤 엎고그 보기 싫은 로마 군인들을 쫓아내며 간사하고 여우같은 헤롯왕을 내쫓은 후 언제나 그리며 오던 지난날의 다윗왕과 솔로몬왕의 치세 때와 같은 왕국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가까이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기대에 대한 확신까지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누가 우편에 앉고 좌편에 앉을 것인가 하는 자리다툼을 할 정도로 메시야 왕국에 대한 정치적 대망은 극에 이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와 같이 들뜬 분위기가 제자들의 마음을 심각하고도 착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 한가지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잔치를 잡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점입니다. 앞장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셨다는 그 자체가 이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고 하는 그 심정을 대표적으로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려면 네가 크냐 내가 크냐를 하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며 완벽한 고백을 한 베드로가 그 분의 발도 씻겨드리지 못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기움을 받았으니 이것은 체면 이말이 아님은 물론 제자들로서는 못할 짓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러나 예수님께서 발을 내어놓으라고 명령하시니 내어놓고 씻김을 받기는 하였습니다마는 이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나 하고 무척 마음이 괴롭습니다.

게다가 더욱 괴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도 하시고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는데 결국은 가롯 유다가 문을 열고 나가버립니다. 앞장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께서 가롯유다의 발은 씻기셨으나 마음을 씻기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가롯 유다는 배신자로 나가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가롯 유다가 나갔다는 사실이 또한 제자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사람이 나가서 무슨 짓을 할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면 꼼짝 못하고 이대로 붙들여 갈 것이 아니냐하는 등등의 어두운 생각들이 계속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렇게 나가는 가롯 유다의 얼굴이 그렇게 밝았을 리도 없고 보면 그 악마가 씌인 얼굴을하고 나간 다음 남아 있는 제자들의 마음은 몹시 불안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다가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꾸만 어디론가 떠나가신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보면 이 제자들의 마음은 보통 걱정을 하고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 걱정들의 원인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불분명한 사건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 한가지도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처지란 말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되시는 것이며, 간다는 것은 어디로 간다는 것이며, 또 온다는 것은 어디로 온다는 것인지, 그리고 고난을 당한다면 어떤 고난을 당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보니 더욱 걱정이 많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심리상태를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그렇게 불안해하고 많은 걱정을 하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하는 걱정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는 고작 한다는 걱정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아니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하는 정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기야 이런 예는 장례식 같은 데서도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 울면서 무엇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전부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느 장례식에 갔더니 딸이 둘이 있는데 약혼을 해두고 있는 큰딸은 내가 시집갈 때 우리 어머니는 못 보겠구나하고 둘째 딸인 동생은 나 졸업할 때 어머니는 못 보겠구나 하고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부가 자기 이야기요 자기 서러움 때문에 우는 것이지 어머니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모두가 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근심 걱정을 해야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할 것인데 저들은 자기자신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화 중에 하나입니다마는 한번은 국민학교 선생님이요 교회학교 선생님이며 집사이기도 한 분이 점심에 저를 초대해놓고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할 터이니 꼭 대답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질문을 하려나하는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지 해 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께서 한참 뜸을 들이다가 조용히 묻기를 "목사님 천당 지옥이 진짜 있습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덧붙이는 말이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는 그만 두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제가 있다가 왜 그것을 묻느냐고 하였더니 아무튼 긴 설명은 성경에 다 있으므로 필요가 없고 목사님 생각에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하고 간단하게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매우 중요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의 이야기인 즉 만약 지옥이 정말 있다고 한다면 내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진실하게 살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없다고 하면 굳이 진실하게 살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되는대로 적당히 살다가 갈 것 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말이 옳은 말입니다. 괜히 복잡한 미사여구로 의롭게 살고 진실 되게 살고라고 주석을 달면서 윤리적인 용어를 다 쓰고 있습니다마는 그것 다 잊어 버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예수 믿는 이유는 천당입니다. 다른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만 확실 하다면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크고 작은 고난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어쩌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사회가 좀 혼란하기로서니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 문제가 복잡하느냐 할 때 그 근본 뿌리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당과 지옥이 정말 있느냐 하는 것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 외에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저런 생각들로 복잡하고 초조하며 불안과 근심에 쌓여있습니다 마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오직 하나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 마디 속에 저들의 모든 문제에 대한해결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앞뒤의 말씀 속에서 나타나고있는 제자들의 질문을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는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네 제자들이 각각 한 마디씩의 질문을 하고 있는데 그 질문 속에는 바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고민의 절정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먼저는 베드로의 "주여 어디 가시나이까?"(13:36)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꾸만 가신다 가신다 하시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이 세대는 어디로 가며, 당신은 어디로 자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마치 버려진 아이처럼 말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음 두번째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14:5)라고 하는 도마의 질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디"라고 물은 것에 비해 도마는 그 "어디"로 가는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가시는 곳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으며, 그리고 그 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보다 협의의 구체적인 질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질문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64:8)라고 하는 빌립의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저것도 잘 모르겠으니 하나님을 좀 만나게 해 주신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제 네번째 질문은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 하려하시나이까?"(14:22)라는 가롯 유다가 아닌 유다의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귀한 진리를 우리들에게는 말씀을 하시면서 왜 세상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이상 네 가지의 질문이 있습니다마는 그 깊은 내용에 대한 대답은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하는 이 한 마디에 귀결이 됩니다. 어떤 분이 임종이 가까운 시간에 있을 때 목사님이 찾아가서 지금 머리 속에 떠오르는 성경 말씀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바로 이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말씀이라면서 지금 이 시간 제게 주시는 유일한 위로의 말씀입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은 그 거할 곳을 환히 바라보고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이 제자들을 보노라면 근심이 많습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어떻게 가는 것인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시면서 아버지의 집을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거기에 대한 해답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여러분! 믿음이 없을 때에 걱정거리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걱정거리를 어떤 문제 그 자체에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는 그 사건 자체에 의한 객관적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믿음의 소재에 있습니다. 흔히들 돈 때문이다. 자식 때문이다. 환경 때문이다. 하면서 별별 이유들을 붙이고 하지만 그런 것 가지고 시달릴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오직 믿음의 유무에 있습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떠난 다고 아주 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 나를 믿으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많은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 결과 무려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는 시련의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들이 그와 같이 불행한 생활을 해야했던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겠노라고 하셨으면 주시는 줄로 믿을 것이지 다시 생각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믿지 못해 번민을 하고 원망과 불만으로 일관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미래학과 종말론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미래학이란과거와 현재를 근거로 미래를 추리 전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날 이렇게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될 것 이라는 가상적 전망을 하는 것으로 이것은 걱정거리만 만들어 내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에 먼저 들어가 놓고 오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미래로부터 현재를 생각하는 것이 종말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나로서는 수긍이 가든 안가든, 상식선 밖에 있든 안에 있든 간에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가끔 어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무리 들어주어도 계속 걱정을 하는 이들을 보면 부득이 "그만 하시지요"라는 말을 하고서는 제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묻기를 "과거에도 이렇게 걱정을 많이 하셨오?"라고 하면 "옛날에도 그랬죠"합니다. 그러면 다시 "그렇게 걱정해서 되는 게 무엇 있습니까?" 하면 "그거야 없지요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럴 바에야 그만 둘 것이지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걱정을 하고 앉았노라면 생각 만점점 혼잡해져서 될 일도 되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좋은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걱정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사업을 하는 분들 중에 보면 사업상의 어려움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 이들을 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사업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밤에 잠을 못 잘 만큼 걱정이 많은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걱정도 정도 있게 해야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잠까지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건강을 해칠 만큼 걱정을 하고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걱정을 하는 처지라면 믿음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물위로 걸어오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한 나머지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갈 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14:31)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실로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제자들은 아직도 믿음이 불안한 가운데 흔들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보았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것과 5천명을 먹이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문둥병 걸린 사람, 나면서 소경 된 사람 등 무수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정도로 보았으면 이제는 믿을 만도 한데 아직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능이 나타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다 믿은 다음에는 근심이 머물 곳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심이라는 것은 언제나 믿음이 내려갔을 때에 생기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정 높이 올라간 확실한 믿음에서 사는 동안은 가도 가도 걱정거리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걱정할 만한 객관적 이유는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걱정이 있다는 것은 주관적인 것으로 내 믿음이 약할 때 생기는 부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두 번째 해답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이 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면 거기에서부터 절망을 합니다마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은 그 다음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나면 내세가 있고, 이 사건 다음에는 그 다음 사건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절대로 내가 생각하는 이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결코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분명 이 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고 더 큰 역사, 더 먼 미래가 있는 것이기에 지금 이것 가지고 염려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을 공간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하나의 질적인 문제, 시간적인 문제로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처소를 예비한다는 것은 목수가 집을 짓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비로소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 의의 길을 예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승천하시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다시 영접하러 오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내 아버지 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천당"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면 성경에는 없는 말이 아니냐고 합니다마는 여기 "내 아버지 집"이 바로 천당이 아니겠습니까? 집이라는 말이 나라라는 말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우리 한국 사람에게 마찬가지인 동양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천당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집!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둘러앉아 사랑과 평화를 누리는 그 은혜로운 질서와 사랑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 집은 곧 내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집은 천막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집을 짓기도 하고 수리도 하면서 살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있고야 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은 너무 좋고 큰데 내가 자꾸 늙어만 간다면 집에 그 사람이 좀 치인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이미 사람은 고물인데 집이 새것이라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 집은 아무리 좋아도 어차피 임시적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육체라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역시 천막과도 같아서 낡아지고 찢어져서 깁기도 하고, 요즈음은 심장까지도 갈아넣는 것을 봅니다마는 결국 그러다가는 예외 없이 주님 앞에 다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의 질서가 있고 영원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땅의 것이 끝남으로 하늘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질서를 그림자로 보여 준 것이 이 땅의 가정입니다. 저기가 본체요 여기는 천막이고 임시며 그림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면 하나님의 전이요 하나님의 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성전 안에는 계급이 많아서 제사장들이 앉는 자리가 따로 있는가 하면 장로들의 자리, 레위 족속들의 자리, 남자의 자리, 여자의 자리 이방인의 자리 등으로 구분 아닌 차별이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집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 집은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두가 하나같이 평등하게 지내는 집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도 인간인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너무도 아름답고 귀한 것이기에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1)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빨리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도 좋은 일이거니와 이 땅에 머무는 것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생명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은 저쪽이요 필요한 것은 이쪽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음은 머물러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좋은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갈수록 태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세에 대한 예언은 아무리 읽어보아도 유토피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하기 위한 역사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하루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괴로워서 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더 아름답고 귀하기에 그 시간을 바라보고 그 집을 바라보면서 오늘 여기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1:14)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그때 가서 보자는 말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무척 좋아하여 집필을 하고 연구를 할 때 언제나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하였다고 합니다. 그토록 모짜르트의 음악을 좋아한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 앞으로 가면 죄송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모짜르트부터 만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짜르트가 만들어놓은 좋은 음악 때문에 좋은 시간을 많이 가졌으니 그 말을 가서 꼭해야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서 만날 생각을 해 보십시오, 바로 그런 소망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해답은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다 준비해 놓고 들어오라고 하시거나 자격이 있나 없나를 심사한 후에 들어오게 하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장소는 거기가 아니고 여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해 가시겠다는 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의 모습 이 대로를 영접하여 그곳으로 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은 신분으로 그리스도가 계신 그곳에 함께 거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천국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 현장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공간적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이런 저런 설명들을 해왔고 요즈음에 와서는 전자공학이나 천문학적으로도 설명을 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은 모두 사람의 노력에 불과한 것이며 가장 분명한 것은 오늘 이 본문이 보여 주는 이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내가 가서 처소를 너희를 위하여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리스도가 계신 곳! 아버지의 집! 곧 우리의 집! 이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세계를 보여 주시면서 이 소망, 이 약속, 이 믿음이 너희의 모든 근심을 풀수 있는 매스트키이(master-key)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가 많다하더라도 천당만 보여지면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바로 눈앞에 그리스도가 환히 보이는데 그 앞에 어찌 원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는 것은 당연히 그럴 것이었습니다. 멀리 하늘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가 일어서셔서 스데반아 어서 올라오라시며 부르고 계시는데 무엇 때문에 스데반이 얼굴을 찌푸린단 말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미래에 있고 영원한 생명에 있는 것이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기에 불안해하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이여 확실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에 살아가게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고 그리하여 모든 문제가 그 안에서 해결되어나갈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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