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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3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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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나를 팔리라(13:21-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리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에 일어났던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나 성만찬을 나누실 때, 가룟 유다가 계속 마음에 걸리었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읽고 있는 13장에서도 여러 곳에서 가룟 유다를 지적하는 구절들이 눈에 자주 띕니다. 그것은 바로 가룟 유다가 가시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이 말씀들이 성만찬이 끝난 바로 다음날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몇 십 년 후에 (60년 내지 70년 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질 때와 사건을 기록할 때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성만찬을 나눌 때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들을 제자들이 몰랐고, 사건이 지난 다음에야 그때 그 말씀들이 무슨 뜻이었는지를 알았으므로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는 그 상황들을 비교하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나타나지만, 사건 당시에는 예수님과 가룟 유다만 알았고 제자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깨닫고 부활하심으로 다시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옛날 몰랐을 때를 상기해 가면서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을 함께 기록한 것입니다. 가령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발을 씻기신 일이나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실 때 몹시 괴로워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의미를 몰랐고, 또한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도 그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과, 후에 깨달은 바와 느낀 것을 대조해가면서 이 말씀들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건이 일어났던 때와 사도 요한이 이 복음을 기록할 때의 상황이 크게 달랐다는 것을 알고 말씀을 읽으면 보다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이 사건에 하나의 업적처럼 남은 것이 가룟 유다입니다. 빌라도나 가야바만 있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하필이면 제자인 가룟 유다가 개입되었어야만 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유다가 예수를 팔아야만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그렇게 불가피한 것이었느냐고 묻고 싶은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지 아니하면 빌라도가 예수를 체포할 수가 없었고, 또 가야바가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 줄 수 없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지 않았어도 이 사건은 충분히 진행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드는 것입니다. 시간적인 문제일 뿐,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다니셨고 복음을 전하셨으므로 체포하는 문제는 그렇게 어렵거나 비밀스러웠던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12제자 중에 하나가 예수를 팔아서 십자가에 못박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초대교회에서는 가룟 유다의 사건을 말하기를 아주 싫어합니다. 특히,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유다는 제 갈 곳으로 갔다"고 간단하게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서적인 대답은 없습니다.

사도신경에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사건 중에 가룟 유다의 이름이나 가야바의 이름은 없습니다. 단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라고 빌라도의 이름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사도신경이 우리의 신앙 고백을 중요한 부분만 대충 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장면을 말하려면, 분명히 가룟 유다에게 팔려서 가야바에게 붙잡히시고, 그리고 빌라도의 재판으로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고 말해야 될 것 같은데, 사도신경에는 오직 빌라도 혼자서 십자가 사건의 원흉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억울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십자가의 사건에 왜 가룟 유다가 개입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사건이 이루어지는 데 가룟 유다가 반드시 끼어서 예수님을 팔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긍정적인 자세로(성경적인 문맥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하면, 이것은 계시적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라는 사건 속에서 우리를 향한 계시적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 사건은 진행되지만,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사건이 있으므로 계시적 사건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는 저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다 결정하고 찾을 때에 안내자가 된 것뿐입니다. 이 때에 유다가 앞장서지 않았다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없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제자가 스승을 팔게 되는 사건에서 계시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하게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 아니고 3년 동안 함께 생사를 같이 하며 가장 가까이 따르던 제자 중의 하나가 가룟 유다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내가 은혜를 받고 말씀을 깨닫고 교회의 한 멤버가 되고 혹인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12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음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끔 목회자들 중에 몇 사람의 교인들 때문에 목회를 못하겠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일이 있습니다. 필자는 그들에게 "예수님보다 목회를 더 잘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격려를 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서도 가룟 유다가 있었는데, 하물며 많은 교인들 가운데 몇 사람쯤 말썽부리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그들이 12제자 중 가룟 유다라고 생각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교인 모두가 다 성자요 거룩하리라고 바란다면 낙심을 하게 되지만, 어디서나 12분의 1은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다소 편안할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내가 바로 가룟 유다가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자세에서 신앙 생활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 중에서 유달리 신임을 받은 제자로서 회계를 맡은 중책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11제자들은 모두가 갈릴리 지방 사람들인데 유독 가룟 유다만 남방 사람으로 똑똑하고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가버나움에서 전도할 때, 베드로는 자기 집이나 장모님 댁을 좀 왔다갔다하면서 편안하게 제자 노릇을 했지만, 가룟 유다는 고향을 멀리 떠나 제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으로, 남보다 더 극성스럽고 열심이었다고 봅니다. 또한, 그는 회계의 책임을 맡았기에 변변치 않은 재정으로 예수님의 일행이 움직이는 데 수발을 담당하느라고 특별히 수고를 한 제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왜 예수를 팔았어야 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은 30 때문에 예수를 팔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여기 상당히 복합적인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는 예수님을 정신적인 메시야로 믿고 끝까지 따라왔는데, 즉 기대를 걸었는데, 예수께서 유대 왕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시자 실망한 나머지 예수를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더 극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데, 정치적인 혁명은커녕, 점점 사태가 불리해지니, 급한 마음에 십자가를 지도록 사태를 몰고가면 그 때는 능력을 나타내시고 혁명을 일으켜 유대 나라의 왕이 될 것이 아닌가, 즉 예수님의 잠재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도록 한쪽으로 몰았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죽은 자를 살리시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기가 막힌 가룟 유다는 자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제일 신빙성이 있고 일리가 있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똑똑한 사람이기에 반드시 돈이 목적이었다고 생각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 돌아가는 대세를 보니, 제사장 편에 붙어야만 자기 생명이 살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면 상황에 관계없이, 예수님이 불리하면 불리한 대로 운명을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가졌어야 하는데, 예수가 죽고 베드로가 죽어도 자기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많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혹은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결정을 한 것을 미리 알고 예수당으로부터 빠져나와 제사장 편에 붙어서 자기 생명을 연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예수를 팔게 되었다는 정치적 해석이 제일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어쨌든 그는 약은 사람으로서 스승을 배반한 결과로 먼저 죽는 비참한 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를 위해 충성하겠다고 결심한 제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을 각오는 하지 않고 나 자신만 살려고 이기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스승을 배반하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만 살겠다고 하면, 나를 위하여 남을 배반하기도하고 죽여야 하는 일에까지 본의 아니게 빠지게 됩니다. 항상 남을 위하는 자는 언젠가는 내가 희생을 해야 할 때가 오고, 나만을 위하다 보면 언젠가는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기적인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를 팔 수밖에 없는, 즉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죽여야 하는 순간에까지 이르렀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미리 말씀하시기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믿게 하려 함이로라"(13 :19)고 미리 알려 주는 이유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너희들 중에 나를 팔자가 있다고 미리 말하는 이유는, 모르고 그냥 속아서 팔려 넘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알고 속는 것과 모르고 속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지만, 이 유다의 사건 뒤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즉 십자가와 부활을 내다보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결과에 의해서 방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유다대로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께서 이 사건을 미리 말씀하신 뜻은 하나님의 섭리 중에 이 일을 알고 허락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13:21) 하시며 몹시 괴로워 하셨습니다. 왜 괴로워 하셨을까요? 저기 제자에게 팔렸다고 하는 메시야의 이름 때문입니까? 아니면 명예 때문입니까? 또는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귀중한 복음 사업에 오점이 생겼기 때문입니까? 혹은 십자가의 아픔을 생각하신 것입니까? 그런 이유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민망해 하시는 이유는 요한복음 13:1에서 본 바와 같이 "끝까지 사랑하시더라"는 제자들에 대한 그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에 민망한 생각으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께서 유다에게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뻔 했다. 하필이면 너냐?"고 왜 네가 이런 일에 걸려들었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의 비참한 운명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생각이 예수님의 마음속에 아픔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배신당하는 자신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배신하는 제자를 생각하여 고민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누구에게 맞았다고 합시다. 이 때에 맞는 나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때리는 자의 고민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부부 싸움을 할 때, 만약 육박전이 벌어질 눈치가 있으면 일단 피해야 합니다. 매를 맞는 자는 어느 면으로는 착한 사람이 될지는 모르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때리는 입장에 서게끔 만들어버린 셈이 됩니다. 나는 맞는 것으로 끝나지만, 상대방을 때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두고두고 후회하게끔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때리는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민망함이 있고, 아픔이 있고, 고민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다음,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서로 의심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13 : 22) 정말, 이 광경은 보기가 흉합니다. 필자는 이 구절이 그렇게 마음에 걸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혹시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상대방만 의심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내가 무사한 것 같아도 어느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을까, 내가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고 자신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네가 수상하다고 상대방을 의심했으니,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유다의 완벽한 위선 앞에 그를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의심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남을 의심하는 자는, 사실 자기 속에 의심할 요소가 다분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살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 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죽을지언정 나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하며 큰소리를 쳤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남만 의심했습니다. 사실, 가룟 유다 못지 않게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어느 면으로는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오십 보, 백 보로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께서 가장 어려운 시간에 다 도망갔으면서, 자기 마음들을 한 번쯤 의심하지 않고 서로 남만 의심한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떠나게 되고 배반한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13 : 24) 그 당시의 식사하는 모습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식탁을 놓고서는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는 사랑하는 제자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생각할 것도 없이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자기 이름을 기록해야 할 부분에서는 반드시 "예수의 사랑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좋은 일이나 잘한 일에 있어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여전히 예수의 사랑하는 자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표현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다고 하는 그 마음 자체가 귀중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는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내가 제일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자아 의식, 즉 그런 정체감이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다음 본문에 보면 이상하게도 베드로는 머리짓으로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는 제자, 즉 요한에게 예수를 팔 자가 누구냐고 제스쳐로 물어보게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리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13:24) 베드로 자신이 분명하게 누구냐고 예수님께 묻지를 못하고 요한에게 부탁하는 것이 좀 수상합니다.

무엇인가 선명하지 못하고 꺼림직한 것이 있단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재판장에 따라갈 때에도 멀리서 따라갔습니다. 따라가려면 가까이 가든지 아니면 아예 포기하는 쪽이 분명한데, 주춤하며 멀리서 따라갔습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나쁘게 말해서 사태가 불리하면 도망가고, 유리하면 내가 그의 제자였다고 나설 작정입니까? 어쨌든 멀리서 따라간다는 것은 기회주의자로, 좋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도 직접 담대하게 누가 주님을 팔 것이냐고 묻지 않고 요한에게 부탁해서 묻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떡 한 조각을 찍어 주시며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13 : 26)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 요한은 그 상황을 설명하기를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13 : 26-27상반절)고 사탄이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처음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 당시에는 사탄이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뒤에 생각하니, 즉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이 생기고 나서 지난날을 더듬어 보니, 그때 가룟 유다의 얼굴이 어쩐지 좀 달랐다고 회상하는 것입니다. 다시 132절로 되돌아가서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2절에서도 마귀가 들어갔다고 표현했습니다. 결국, 2절과 27절을 연결해서 보면, 그 당시의 가룟 유다의 얼굴 표정과 마음가짐이 사탄에 씌어 있었다고 지금 회상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을 씻기시며 성만찬을 나누시는데, 가룟 유다는 뻔뻔하게 위장하며 주님이 주시는 떡을 받고 태연히 밖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평소의 가룟 유다라기 보다는 사탄에게 포로된 유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탄은 유다로 하여금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 함은, 회개의 기회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들을 버리고 끝까지 회개치 않고 태연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고까지 말씀하셨지만, 가룟 유다는 전혀 동요치 않고 위장을 했기에 제자들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쪽같이 넘어간 그 순간을 회상하며 유다의 태도는 사탄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그 때는 사탄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회개가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늦게 깨닫고 사도 요한은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완전히 포로되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를 유혹합니다. 때로는 권고로, 때로는 달콤하게 우리에게 접근하지만 여기까지는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사탄의 포로가 되면, 그 순간부터는 회개할 기회가 없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가룟 유다의 완벽한 위선이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몰랐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13 : 27-30) 완벽한 위선 때문에 엄청난 배신자의 모습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악은 이만큼 완벽하게 가장할 수 있으므로 속기가 쉽습니다. 성경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가룟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받을 때에 오히려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천연덕스럽게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이때, 예수께서 직선적으로 "가룟 유다야, 네가 나를 팔기로 다 작정하지 않았느냐?" 하고 바로 말씀하셨다면 어찌되었을 것 같습니까? 상상하기로는 성미 급한 베드로가 유다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목을 졸랐던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감금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 간접적으로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명절을 준비하거나 구제하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했으므로 유다는 무사히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 유다의 음모를 허락하십니다. 아니, 허락보다는 걸었던 브레이크를 풀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시며 하나님의 뜻에 맡겨버렸습니다. 또한, 유다를 빨리 내보내고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기 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전해야 할 중요한 말씀을 가룟 유다를 보내놓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를 은혜에서 제외시켰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지낸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고 항상 자기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따랐습니다. 아마, 가룟 유다에게도 변명할 기회를 주었다면 "배신하려고 해서 배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 한은 예수를 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계시적 말씀의 뜻을 다시 한 번 재음미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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