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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교인(사도행전 18:24~28)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격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여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신앙에 있어 또 하나의 독특한 형태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음에 공부하게 될 19장 7절까지 자세히 읽어보면 세 가지 모델의 그리스도인, 혹은 세 가지 단계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수준과 단계가 셋으로 구분됩니다. 첫째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아볼로 같은 교인입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한 자요, 주의 도를 배워서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의 도를 배워서 아는, 학습된 교인입니다. 그런가하면 성령의 체험이 없이, 배운 사람에게서 또 배우는, 어쨌든 배우기만 하는 유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고 있고, 기회가 닿는 대로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마음에 확실한 영적 체험은 없습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상식적 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성령을 받은 교인입니다. 성경이 말씀한대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적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를 받고, 역사적 사실을 말씀 증거로 받고,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신앙을 고백한 제자,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심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증거를 들은 사람이 그 증거를 받아들이면서, 그 귀한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사건, 구원의 사건 앞에서 그리스도와 내가 만나면서, 그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사건이 내 안에서 사건화하고 실재화하고, 생명화할 때에야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계속 설명하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우리가 두고두고 여러 말로, 여러 방법으로 깨닫고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냐, 오늘날에도 그것을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 증거를 내가 받아들여서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사건에 내 안에서 사건화할 때, 생명적 사건으로 바꾸어질 때,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그런 체험을 접하게 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많이 외우고 많이 알았다고 해서, 많은 지식이 있다고 해서, 또 모든 종교 예식에 빠짐없이 참석했다고 해서 교인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봉사 생활을 많이 한다고 해서 교인이 아닙니다. 엄격히 따져 말하면, 사도행전적 맥락에서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씀의 증거를 받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그 사람이 교인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아볼로라는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아볼로의 인물됨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24절)"―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고로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이방에서 난 디아스포라, 유대교민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이나 유대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이방 땅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여기서부터 생각을 해야 이 사람이 누군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곳은 지정학적으로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애굽(이집트)의 맨 북단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나일강에서 12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아니한 대도시입니다. 2천 년 전 당시로 돌아가 보면 세계에서 제일 큰 도시가 로마요, 두 번째가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그만큼 큰 도시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수천 년 오랜 역사와 함께 발전해온, 그런 도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이나 혹은 바벨론 같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도시가 아니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상적 도시를 이루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세운 도시입니다. 우리 나라가 분당이라는 신도시를 만든 것처럼 말입니다. 전혀 아무 것도 없던 곳에다가 계획적으로 도시를 세운 것입니다.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영광을 위하여, 자기권세를 자랑하여 좋은 지역을 선택해 가지고, 딴에는 세계중심 이라고 하는 그런 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가 길지 아니한 신도시이기 때문에 이곳의 시민들도 각별합니다. 애굽사람, 로마사람, 헬라사람, 유대사람-이렇게 내 민족의 공존합니다. 그들이 한데 섞여 살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사람이 100만 명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가의 말을 듣고 기록을 보아 분명히 알면서도 의심이 갈 만큼 놀라운 숫자입니다. 이 100만 명이라는 숫자는 굉장한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우리 나라로 치면 종로구, 강남구 같은 구가 다섯개 있었는데 이 중에 두 개의 구다 유대사람의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유대사람이 여기에 많이 살았습니다. 또 유대사람이 여기에서는 자유할 수가 있었습니다. 종교 생활과 학문, 철학적인 생활을 동시에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필로라는 히브리 철학자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종교와 헬라 철학을 잘 조화시켜서 철학적 종교, 종교적 철학이라는 귀한 학문을 이루어놓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연대가 비슷한 사람입니다. 왜 필로가 중요한고 하니, 모름지기 사도 바울도 필로 같은 사람이 되어보려고 하지 않았는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이름을 따서 이름지었습니다. 또 한가지, 이 도시는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사람이 많고, 공통으로 쓰는 언어는 헬라어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당시에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히브리 종교, 헬라 철학, 로마 정치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세 가지가 공존한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하나 더 이야기할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칠십인경」입니다. 칠십 명이 번역을 했다고 해서 흔히들 「칠십인경」이라고 합니다.「칠십인경」이란, 히브리말로 된 성경을 헬라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칠십인경은 매우 소중하게 쓰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말의 본래의 뜻, 곧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바로 이「칠십인경」이 보충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것이 만들어졌느냐, 그 경위는 이렇습니다. 여기에 유명한 도서관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놀랄 만큼 세계적인 도서관입니다. 50만 내지 60만 권에 해당하는 많은 장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히브리말 성경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대 보수파 사람들은 이에 반대를 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책들과 나란히 갖다놓다니 당찮은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은 상당히 생각을 깊이 한 끝에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성경을 가져다놓되, 히브리말 성경은 가져다놓아도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부득불 헬라말로 번역을 해서 갖추어놓자고 한 것입니다. 이래서 「칠십인경」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마가가 이곳과 애굽에 맨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대해서는 더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이만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여기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 종교에 능통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마음껏 연구하며 자랐습니다. 헬라 철학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헬라 철학과 히브리 종교에 대해서 능통한 학자급 인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유대인입니다.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24,25절)"―그는 주의 도를 배워서 알았습니다. 여기에 '주의 도'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도'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데 여러분, 이 말을 오해 없이 받아들여야합니다. 이 말의 뜻을 상식적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도, 주의 도, 혹은 말씀이라고도 표현합니다. 한자로는 길 도(道)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도'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로고스요, 하나는 호도스입니다.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도'라고도 번역하고, '말씀'이라고도 번역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이 말씀을 옛날 번역으로는 "태초에 도가 있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도'는 호도스입니다. 이것 역시 한자로는 길 도(道)입니다. 문자 그대로 길입니다. 그러나 걸어다니는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 의미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진리요, 생명의 길이요, 모든 생명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삶의 원리―이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이런 뜻에서의 '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헬라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도'로 생각하고 그렇게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볼로가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했다(25절)는 것입니다.
'주의 도'는 기독교를 가리키는 별명의 하나입니다. 아볼로는 예수에 관하여 배워서 안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라고하는, 종교와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파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소위 신학적 방법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하나의 역사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전체 구약의 맥락에서 구약의 뜻을 생각하는 데에 특징이 있습니다. 자, 우리가 구약을 놓고 볼 때에 크게 세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계명입니다. 계율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무엇을 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계율입니다. 두 번째는 제사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이렇게 제사를 드려라, 성정을 지어라, 성전에서 이렇게 제사를 해라…… 제사법에 관한 얘기,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또 하나,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이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이다, 왕이 어떻게 될 것이다,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예언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 입니다. 그것은 저 앞에, 메시야에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유대인들은 주로 메시야 중심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 대망 사상에다 초점을 맞추어 구약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학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한 자요, 주의 도를 배워서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율법적으로, 계율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메시야 대망 사상을 설명해주는 것이 구약성경이라고 하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서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던 중에 세례 요한이 왔고 그 다음에 예수가 오셨다는 사실까지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니 굉장한 것이지요. 구약성경을 통해서 메시야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마지막 주자가, 마지막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고 그 세례 요한이 예언한 메시야가 오셨다―거기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쨌든 그는 이렇게 성경을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구약은 알고 있지만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배워서 알고 그래서 남을 가르칩니다.
또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28절)"―다른 유대사람들을 이기더라 합니다. 워낙 학식이 높으니까 누구도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그 사람의 성격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학문에 대하여 열심이 있습니다. 또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성경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몇 장 몇 절, 하고 자세히 알아요, 아주 용의주도한 사람입니다. 학자적인 사람입니다. 또한 담대히 증거합니다. 자기가 아는 바를 남에게 담대히 설명하고 가르치는, 그리고 변론해서 이기는 사람입니다. 누구한테도 지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확고하게 설명해서 다른 사람을 이기고 극복하는, 그러한 변론적인 사람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바로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도 좋고, 성경도 많이 배웠고,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까지 알고 있지만, 메시야가 오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재림하신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요한의 세례는 알면서도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뜻은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 역사성과 그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케리그마적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증거 하는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볼로,이 사람은 마음 밭은 좋은데, 복음의 씨앗이 없어요. 씨앗이 없으니까 생명이 발생하지를 않아요. 그런고로 복음은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것을 듣고 그 증거를 받을 때에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듣지 못한 복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듣지 않은 복음을 어떻게 믿습니까? 아볼로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을 사도들을 통해서 그 증거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나와 있습니다. 이렇듯 대학자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변론가인 사람이 에베소에 와서 또 성경을 가르쳤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확실하게 예수를 증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곳 에베소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서 예수 믿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볼로와 비교하면 상대도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아볼로는 성경과 모든 일에 대해서 대 학자인 반면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천막 치는 업을 가진 서민입니다. 소시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예요. 그러나 그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믿었어요. 성령을 받았어요. 성경적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볼로와 만납니다. 본문에 보니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26절)"라고 합니다. "여보, 이리 좀 와보시오"하고 아볼로를 불러다가 자기 집에 앉혀놓고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일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배우게 생겼습니까? 그러나 그는 배웠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배움의 자세가 겸손합니다. 가르치기도 잘 하지만 배울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어느 때에 보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계속 가르치기만 하려 하고,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구역장만 해도 배우려고 안 합니다. 어쩌다가 한번 가르치기 시작하면 내내 배울 생각을 안 합니다. 저는 목사님들 앞에서 강연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들은 남에게 설교합니다. 설교하기에 앞서서 설교를 더 많이 들어야 합니다. 직접 듣기도 하고 테이프를 통해 듣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어쨌든 많이 들어야 합니다. 듣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가르친다고 가르치기만 할 줄 알고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은 그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계속 배워야 됩니다. 배움의 자세―아볼로는 아주 겸손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배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배울수록 더 배우려 하고, 가르치면서 더 배우려 합니다. 배우고, 배우고, 더 배워야겠다는 그런 갈급한 마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학자입니다. 정말로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논어에 있는 공자와 자로의 대화 한 토막입니다. 공자는 자로에게 "육언육폐(六言六弊)를 네가 알고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자로는 대답합니다. "그런 말은 들어보지 못 했는데요." 그러자 공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어진 것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폐단이 어리석음이요, 슬기로움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폐단은 무절제요, 신실하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폐단은 도적질이요, 곧음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가혹함이요, 용맹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굳셈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폐단이 광기 부리는 것이니라." 가만히 생각하면 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항상 새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진실함도 배워야 되고, 슬기로움도 배워야 되고, 용기도 배워야 됩니다. 힘이라는 것도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원한다면 또 배워야 됩니다. 계속 공부하는 자세로 임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더 배워야 됩니다. 몇 배를 더 배워야 됩니다. 공부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볼로는 참 훌륭합니다. 그는 학자입니다. 그러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배웠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봅시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학문 없는 경험이 경험 없는 학문보다 낫다' '학식이 있는 바보들이 가장 한심한 바보들이다. 학식은 지혜로운 자을 더욱 지혜롭게 만들고, 미련한자를 더욱 미련하게 만든다'―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학식이 사람을 지혜롭게 하지 못해요. 어리석은 사람은 공부할수록 점점 더 어리석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할수록 더 지혜로워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체험이 있는 신앙이요, 예수의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아볼로는 바로 이 사람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왜입니까? 그들에게는 체험이 있잖습니까? 자기에게는 체험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체험 없는 지식을 여기서 버리고, 체험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생생한 증거를 받아들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그는 확실히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우리가 이 체험적 신앙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성경을 좀 안다고 해서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 받지 못한 자가 성경을 많이 알면 골치 아파요. 이런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질문을 해도 꼭 이상한 질문만 합니다. 그런 것만 가지고 "목사님, 이것이것 어떻게 됐습니까?"하고 물어봅니다. 그럴 때마다 "모르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그것도 몰라요?"합니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이 있지요." "그러고도 설교하십니까?" "설교하지요." 정말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읽어도 꼭 괴상한 것만 들고 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성경과 함께 성경을 읽어야 되고,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1905년 평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선교사들이 목사님이고,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목사님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세례를 줄 때에는 주로 선교사가 세례문답을 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문답이 아주 까다로웠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을 많이 받는데 거기에 합격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칠십 넘은 노인장 한 분이 예수를 믿어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데, 번번이 불합격입니다. 선교사는 할 수 없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는 다른 것은 묻지 않을 테니까, 사도신경과 십계명, 주기도문만 외어 가지고 오세요. 그러면 합격시켜드리겠습니다." 노인은 열심히 외었습니다. 그런데 일껏 외었다가도 선교사 앞에 딱 서면 갑자기 깜깜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2년 동안을 줄곧 낙제했습니다. 세례는 당연히 못 받았지요. 3년째 되는 해에 노인은 또 세례 받으려고 문답하러 갔는데, 보나마나 또 못 외울 것 같은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왜요?" "유아세례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른 세례는 그만두고 유아세례를 주시지요." 선교사님이 너무 좋아 가지고 "그렇게 합시다"하고는 당장에 세례를 주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신경 못 외운다고 안되겠습니까? 여러분, 너무 많이 안다고 잘난 체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 성경 많이 외우는 것도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많이 아는 게 중요합니까? 많이 믿는 게 중요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지식은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성경을 많이 보고 많이 읽었다고들 하는데, 물론 많이 봐두면 좋겠지요. 그러나 학문 없는 경험이 경험 없는 학문보다 낫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체험적 신앙, 신앙고백이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잊지 말 것입니다.
아볼로는 그런 의미에서 학자적으로도 참 훌륭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고 하는, 아주 서민인 그들에게 몇 마디 딱 듣는 순간에 '아, 이분들은 다르다'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아볼로의 그 자세가 아주 훌륭합니다. 그는 옥토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아직도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체험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지식을 단순하게 만드는 simple message가 필요합니다. '예수는 내 구주'―이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나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고, 나를 위해서 부활하셨고―확실하고 깨끗하고 단순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떤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 있습니까? 내 믿음은 어디에 속하는 것입니까? 내가 정말로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될 때에, 바른 성령적 체험을 가지게 될 때에 내가 가진 지식이 다 유익해집니다.
배울수록 더 유익해집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울수록 믿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증거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내 마음에 아직도 바른 신앙고백이 없고 성령의 체험이 없다면, 그런 자세로 성경을 읽을 때에 오히려 의심과 문제만 많아지고,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고백하는 사도행전적 맥락에서의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가 하는 공부, 그가 하는 봉사, 그가 하는 수고가 다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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