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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하는 여인(요한복음 16 : 16-22)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저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자가 없느니라.
오늘 본문의 이 해산하는 여인에 대한 비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만찬 예식을 행하신 다음 이어서 하신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이 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심각하고 그 모습이나 분위기가 엄숙하기 때문에 그 뜻을 다 알지 못하면서도 오늘밤에 하시는 말씀이 아마도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서 "하늘에 있는 집"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자들이 여러 가지로 불안해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말씀을 듣고있는 제자들은 그 뜻은 잘 모르면서도 마음에는 여러 가지 의혹과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향하여 많은 말씀을 하시는 중에 비유로서는 마지막인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실 때에 그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마치 해산하는 여인이 걱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걱정이라면 이것은 보통 걱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어떤 걱정을 한다하더라도 그 걱정이 해산하는 여인의 걱정과 같은 걱정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선은 조금걱정이야 되겠지만 그 걱정은 아무리 하여도 의미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마다하거나 슬퍼할 사람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걱정을 한다하여 동정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크나큰 생명을 얻고 그로 인한 큰 기쁨을 얻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해산의 수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런 수고가 없이도 아이를 낳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아기를 사랑하는 정도가 아무래도 부족하며 아이들 역시 부모에 대한 사랑이 절대적 관계에 있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소위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것으로 잠시 마취된 상태에서 꺼내버리게 되니 해산의 수고를 모르는 것이며 또 한가지들은 바에 의하면 요즈음에는 고통이 극심할 때에는 잠깐 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방법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몽롱한 가운데서 낳았으니 해산의 고통을 알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기왕에 귀한 생명을 얻을 바에는 고생할 만큼 고생을 하고 낳아야 소중할 것 같지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너무 쉽게 낳으면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안 할 수 있다면 안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것은 참 어머니의 마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산의 고통을 다하고 한 생명을 얻게 될 때 그 자녀에 대한 사랑과 소중함이 더욱 크고 많을 것입니다. 게다가 죽는다 산다하며 그대로 생명을 맞바꾸는 듯한 산고를 겪고 얻은 생명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걱정하고 있는 바, 다르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여인이 갖는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당하는 바의 고통이나 걱정이 과연 해산의 고통과도 같이 분명한 약속이 있고 소망이 있는 그러한 약속이냐하는 것입니다.
진정 그럴 수만 있다면 오늘의 그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고난을 두고 "조금 있으면"하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잠깐 있으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제 아내가 해산을 위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저의 장모님 되시는 어머니께서 딸에게 하시는 말씀이 "조금만 기다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더 하시기를 "나도 너 낳을 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조그만 참아라! 나도 너 낳을 때 그랬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렇게 큰 걱정거리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며 "조금" "조금"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조금이라는 말은 헬라원어로 '미크론' 이라고 하여 잠시 잠간이라는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며 요즈음 우리가 자주 쓰고 있는 마이크로(micro)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잠시 잠간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기에 갖는고난을 미래지향적으로 이해하고 이 고난을 잠간의 작은 것으로 소화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고난이든 돌이켜보면 잠간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잠깐"이라고 정해놓은 것이라면 그것은 더 더욱 잠간인 것입니다. 특별히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56명의 어린아이들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는 정말 모든 것은 잠시 잠간이어서 유아 세례를 베풀고 조금 있다가는 다시 그들에게 결혼 주례를 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또 조금 후에는 그들이 낳은 아이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장례식 주례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잠시 잠간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할 때에는 큰 일같이 생각을 하게 되지만 거기로부터 조금만 더 달관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잠깐 지나가 버리는 것이란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는 말로 형언키 어려운 십자가의 고통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시며 그 무거운 십자가의 고통마저도 잠간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조금이라는 말은 다르게 말해 작은 일로 보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고난은 그렇게 크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마저도 잠간의 일로, 작은 일로 보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기쁜 일을 당하고서도 슬픈 일을 생각하느라고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게다가 슬픈 일을 당하게 되면 기쁜 일은 전혀 생각지 않는 가운데 그것이 전부인냥 다른 모든 것을 다 상실해버리는 것을 봅니다. 아이들로 말하자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나머지 부모들이 아무래도 대학을 못 보내겠으니 취직을 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대학을 가는 학생이란 전 인구의 몇 퍼어센트 밖에 안 되는 것이고 보면 충분히 부모님의 말에 순종할 수가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생각은 그런 것이 아니어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마지막에는"언제 어머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때가 있으셨습니까?"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까지 누구 덕으로 살아온 것이냐는 말입니다. 한 가지 문제로 인해, 한 순간에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모두 부정해 버립니다. 실로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그저 내가 당하는 지금의 고난이 잠간인 것으로, 그리고 매우 작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은혜는 크게 생각하고 당하는 고난은 작은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세계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가만히 사람들을 대하면서 보면 그가 가진 믿음의 정도를 따라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세계관이 완전히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즈음 사업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면 "아! 그저 그렇지요 뭐,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라고 하는가하면 또 어떤 이들은 "제가 남대문 시장에서 산지가 20년인데 밥이야 굶겠습니까? 걱정 없습니다. 잘 안되어도 밥은 먹습니다"라고도 하고 "6․25때 생각하면 괜찮아요"하면서 아주 여유 있게 이야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하는 고난을 그저 그렇게 소화해 나가면서 너무 크게 생각을 안하는 분들인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저 믿음으로 잘 참고 견딥시다 라는 한 마디로 위로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가만히 보면 괜찮은 것 같은데도 늘 큰일이요 다 망했다는 생각으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밤 낮 큰일났다는 지가 벌써 20년인 사람, 신문을 보다가도 그저 "큰일 났구먼"을 연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언제 신문이 그런 사건 없이 깨끗한 때가 있었더냐 말입니다. 처음부터 그래 온 것이라면 새삼스레 놀라고 야단스러워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튼 우리는 고난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위기 의식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위기라면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 이상의 위기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가며, 3년 동안 수고한 일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만 세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뜻은 물론 사회 정의와 공의는 깡그리 사라져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암담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한 위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간단한 한마디로 이를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위기라고 하는 것들이 별 것이 아니며 잠깐만 지나가 버리면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십자가의 고통과 위기를 작게 보았다는 데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고통을 제한적으로 보는 문제입니다. 여인이 해산을 하는 일은 제한된 시간 내에 치루어 지는 일입니다. 고생이 되는 것은 사실이고 사람에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있기도 하겠지만 정상적인 해산을 한다면 불과 몇 시간이면 되는 것이고 보면 이것은 분명 제한적인 문제입니다. 사실 모든 고난은 제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나이에 따라 달라지고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며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내가 죽음으로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심한 고난이 있다하더라도 내 육체가 죽는 그 이상의 고난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내 육체가 죽어 주님 앞으로 가게 되면 그것으로 고난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는 누군가 나를 괴롭히더라도 육체를 괴롭히고 죽이는 것이지 영혼을 죽이지는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고난은 제한적인 것이기에 조금만 기다리고 있노라면 해결되는 길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간이 문제의 해결"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고난은 반드시 끝난다는 의미에서 이 "해산"이라는 말을 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끝난다는 약속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난은 결코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언젠가 망우리 공동묘지에 장례식을 인도하러 갔다가 잠시 시간이 지연되는 동안 이 무덤 저무덤을 돌아보면서 비석을 읽어보고는 하였습니다. 그 중에 저의 마음을 끄는 한 작은 비석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린아이가 죽은 무덤인 것으로 보여지는 그 비문에 아무개야 하고 이름을 쓰고는 "애야 답답해도 조금만 기다려라 주님이 곧 오신다"라고 씌여 있는 것 이였습니다. 어린 자식을 묻어놓고 가는 부모의 심정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얘야! 답답하지만 잠깐만 기다려라 주님이 곧 오신다! 우리의 고난이란정말 잠간이요 제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고난이란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고난이 계속 고난으로만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해산의 고통이 생명의 기쁨으로 연결되듯이 고난이 다시 영광과 행복으로 바꾸어지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란 하나의 과정에 불과 한 것이지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두운 밤이 있으면 그 다음은 밝은 아침이 오듯이 고난은 영광의 내일을 맞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베드로전서 1장 6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빌립보서 1장 29절 말씀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 세상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고하고 애쓴 자에게 그 만큼의 상이 주어지고 영광과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고난을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바의 고난을 해산하는 여인이 갖는 고난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고 소화하는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종말론적인 역사 의식을 가지고 오늘 현재를 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이 고난 당하는 과정을 두고 설명하시기를"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순간 죄인이 기뻐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악인들은 기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 동안 가야바와 빌라도, 헤롯왕의 패거리들은 자기들의 뜻을 다 이루었다며 승리의 축제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것이 다시 한번 뒤집혀지게 될 때 이제는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기쁨도 크다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때 한번 본의가 아니게 신학교의형편에 따라 전공도 아닌 계시록 강의를 2년 동안 계속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공이 아닌 강의인지라 특별히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가면서 연구를 하고 책들을 읽어야만 했는데 그러면서 제가 마음에 느낀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늘나라에는 가겠지만 예수의 이름을 위해 고난 당하거나 희생함이 없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온통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한 사람의 영광만을 높이 설명하고 있는 터이고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지 않은 사람은 부끄러워서 아예 문간에도 들어서지 못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세상에서 고난 당하는 것으로 인해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당해야 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고난을 그 당한 만큼 하나님 앞에 가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진정 미래의 분명한 영광과 보상을 바랄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고 또한 믿을 수가 있다면 현재의 이 고난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요즈음은 가만히 보면 임산부들이 산부인과 병원을 통하여 뱃속의 아이가 크고 작은지 그리고 건강한지 안한지, 심지어는 남아 여아까지도 미리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걱정을 하게 될 때 의사는 순산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을 시켜줍니다.
지금 이 잠간의 고통만 지나면 신비로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 나라 장로교 선교사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한국명으로는 마포삼열(馬布三悅;Maffett Samuel Austin)로 불리워 지는 목사님은 많은 선교 활동을 하는 중 어느 날 술주정꾼이 던진 깨어진 유리병에 얼굴을 맞아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얼굴에는 큰 흉터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여러 차례 수술을 거쳤으나 여전히 한 부분이 푹패인 흉터로 남아 있어서 보는 이의 시선을 모으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아들들의 말에 의하면 이 마포삼열 목사는 그렇게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자기들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도 아니신데 미국에서 모금을 하실 때에는 그 얼굴의 흉터로 인해 쉽게 가장 많은 모금을 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은 잘하지 못해도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생긴 흉터만 보여도 모금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고난의 흔적! 그것은 곧 훈장을 말하는 것이요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고난이란 그 당한 고통만큼 기쁨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번에 교회를 증축하면서 헌금을 하는 것을 보아도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분들은 자기처지와 비교하여 분수에 넘치게 많은 헌금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일수록 이 예배당을 드나 들 때의 기쁨이 더 큰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헌금을 안한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이 예배당으로 인한 기쁨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느냐에 따라 기쁨의 무게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 제일 교회에서 교회를 지을 때에는 참으로 어려운 과정 속에 6년이 걸려 교회를 완공하였습니다. 그러자니 헌금을 또 하고 또 하고 하느라 이것 저것들을 팔기도 하고 어떤 분은 집을 팔아 전세를 드는 등 갖가지의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아무튼 6년 동안 교회를 지어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자 의견이 모아지기를 기왕이면 새벽 기도회부터 그리고 성찬식과 함께 드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만 하여도 한 200여명 정도로 오겠지 하고는 그렇게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새벽 기도회에 나가서보니 무려 500명이 넘는 교인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준비한 것은 모자라고 하여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예배당에 들어서는 모든 분들이 문간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무슨 일이든 그 일을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 일이 성취되었을 때의 기쁨도 큰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뒤에서 빈둥거리며 지낸 사람에게는 그 일로 인한 기쁨은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고난만큼 기쁨은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의 고통이란 뜻 있는 고통이요 제한된 고통이며 그리고 약속 있는 고통입니다. 태동이란 결코 허무가 아닙니다. 현대 철학의 과제는 니힐리즘(nihilism;허무주의)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이란 절대로 허무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되 소망은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고난! 확실한 약속이 있는 고난! 바로 그것을 가리켜 해산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해산의 고통 뒤에 오는 기쁨을 두고 "사람 난 기쁨"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생명이 태어난 기쁨처럼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고난 뒤의 기쁨을 바로 이 사람이 태어난 생명에 대한 고귀한 기쁨에 비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지금까지 당한 그 모든 고난은 다시 기억치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이야기하기를 만약 천당에 가서도 자기가 과거에 고생한 일이나 현재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천당에 있어도 기쁨이 없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는 것을 봅니다마는 분명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은 다시는 기억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해산하는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든지 저의 아내가 첫 아이를 낳은 후에 다시는 더 낳지 않는다고 하기에 저도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도 또 낳고 또 낳아 셋이나 된 것입니다. 처음 낳을 때 같아서는 다시 낳지 않겠다고 하지만 낳고 나니 재미가 있고 사랑스럽더란 말입니다. 만약 고통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또 낳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그 얻어진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에 고통을 다시는 기억되지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지난날 집에서 아이를 낳던 시절에 이 해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한번은 제가 어느 집에 심방을 가면서 보니 옆집에 사람들이 쭉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지금 해산의 고통을 하면서 남편 욕을 하는데 별별 악담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남편 신발을 내다 버려라며 소리를 질렀다가 낳은 다음에는 신발 들여놓으라고 한다는 것이니 얼마나 극적인 이야기입니까? 고통은 다 잊어버리고 다시는 기억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빼앗을 자가 없는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기쁨은 고난을 당한 본인만이 가질 수 있는 가슴 벅찬 소중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주거나 빼앗을 수도 없는, 그리하여 도독 맞을 염려가 없는 완전한 기쁨인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고통을 말하거나 다시 돌아보며 기억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해산의 고통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란 해피 엔드(Happy end)로 끝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저 앞장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미래학과 종말론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이란 확실하게 약속된 미래에 의해서 오늘의 고난을 평가하는 것이며 미래로부터 현재로에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근심하고 있느냐? 너희들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걱정하고 있지만 나는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당하는 근심은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잠깐만 잘 참고 기다려라 그리하면 곧 기쁨의 날이 임하여 그 모든 근심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 주시는 약속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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