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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칠한 무덤
마태복음 23 : 25 - 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앞장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마지막 설교의 내용입니다. 그 마지막 설교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일곱번이나 "화 있을찐저"라고 하신 무서운 저주와 심판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 또는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입니다. 생각하면 심판은 이렇게 함으로써 이상의 죄를 막게 되고 더 큰 악을 중단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무서운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을 보면 모두가 다 외식에 관한 것들입니다. 죄라는 것도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경제적인 죄도 있고, 사회적인 죄도 있으며, 윤리적인 죄가 있는가 하면 도덕적인 죄가 있고, 그리고 종교적인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나타난 죄는 철저하게 종교적인 죄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외식과 그 외식주의를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회개만 한다면 어떠한 죄라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또한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이든 죄 때문에 망한다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므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었다면 이제는 회개할 길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반복하면서 변명하며,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죄가 아니라며 정당화합니다. 그러자니 위선과 외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마음에 두고 생각해야 될 것은 죄를 짓거든 빨리 근본으로 돌아가서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지은 죄를위해서 절대로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느 순간에라도 다시금 이렇게 저렇게 변명을 하겠다고들면 이제는 용서 받지 못할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두 가지의 비유, 즉 그릇의 겉과 안, 그리고 회칠한 무덤에 관한 비유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비유가 실상에 있어서는 같은 내용 한 문맥의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겉만 깨끗이 하는 그릇이나 회칠한 무덤을 한마디로 말해 두 가지 다 겉으로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을 뿐 안에는 더러운 것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는 겉도 깨끗하여야 하고 안도 깨끗해야합니다.
이에 23절 말씀으로 거술러 올라가서 보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의식은 의식대로 의미가 있으며, 내용은 내용대로 의미가 있음을 말함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안도 깨끗하여야 하고 겉도 깨끗하여야지 그저 안에만 깨끗하면 겉은 아무렇게나 하여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은 이 둘 중 어느 것이 근본적이며 우선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나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둘 다를 깨끗하게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무엇부터 생각하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먼저 이 외식이란 어떤 것인가를 두고 생각할 때 이것은 아시다시피 안의 더러운 상태는 생각하지 않고 겉치장만하여 깨끗하게 꾸민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하든지 간에 내용이 충실한 인격, 내용이 충실한 정치, 내용이 충실한 경제 등, 모든 생활의 방향을 내면적 충실에 두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은 텅 텅 비었건만 겉으로는 유식한 척 하며, 속은 병들고 썩었음에도 밖으로는 굉장히 요란하게 야단이니 그 모두가 다 소용없는 짓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을 요즈음 흔히 말하는 내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돌려야 하겠으며,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보다 내적이고 깊은 면에서, 그리고 내 생각의 초점을 예수님의 관심에로 돌려야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비유의 내용을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는 그릇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 옛날 당시 동양에서 제일 많이 쓰여진 그릇은 질그릇이며 그 다음으로 쓰여지는 것이 가죽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나무로, 혹은 쇠붙이로 만든 것이 있었으며, 특별히 동양에서 많이 쓰여진 고급 그릇 가운데에는 뼈로 만든 것까지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그릇들은 놓고 보면 요즈음 흔한 플라스틱이나 스텐레스 그릇에 비해 다루기는 물론 깨끗이 하기가 힘든 그릇들입니다. 아시는 대로 질그릇을 잘못 사용하다가는 다 깨뜨리고 맙니다. 그 때문에 불과 몇 십년 전 우리 나라에서 만하여도 질그릇들이 깨어지면 세면으로 바르고 철사로 띠를 매어가면서 사용하였던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자니 이 질그릇 같은 것을 깨끗이 하기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겉은 조금 더럽다 하더라도 부득불 우선 안을 깨끗이 하는 것으로 그릇을 관리하는 비결로 삼는 것입니다. 어차피 음식은 안에 담겨지는 것이고 목적은 내용물에 있는 것인데 겉만 깨끗이 닦고서는 안에는 여전히 더러운 것이 남아있다면 이것은 분명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주위에서 사용하고 있는 물 주전자 같은 것도 바로 이런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주전자를 가만히 보면 물이 나오는 꼭지를 옆으로 예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꼭지가 이어져 나온 그 사이, 그 부분을 한번 뒤져보십시오, 그러노라면 그 속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릅니다. 이 부분을 닦기란 쉬운 것이 아니어서 그야말로 겉만 열심히 닦다보니 그 속에 끼인 앙금이 얼마나 더럽고 두꺼운 것인가를 모른단 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애당초 만들 때에 잘못된 것이기에, 저가 인천에서 목회하던 시절 주전자를 직접 만드는 분에게 정식으로 이 부분을 개조할 것을 건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모든 그릇은 내용물을 위해 존재하는 만큼 겉은 다소 지저분하더라도 우선적으로 안을 깨끗이 해야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겉만 깨끗이 하고는 안이 더럽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고도 가증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오늘 여기에서 주시고자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겉은 좀 더러운 대로 내버려두더라도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내실을 기하라는 것인데 이는 매우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회칠한 무덤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동굴로 된 무덤입니다. 이곳은 지역적으로 바위가 많은 곳이기 때문에 여기 저기에 동굴이 있어서 그 속에 시체를 넣고는 돌로 막아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굴인 무덤을 돌로 막아놓은 것인데 이것이 어떤 때에는 막아둔 그대로 있지를 않고 굴러 나가버리기도 하고 굴려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무덤이 열린 상태에서 시체가 들어 있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회칠한 무덤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이것은 결코 종교의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기간을 두고 한번씩 깨끗이 단장을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풍속에 의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무덤을 동네 밖으로 멀리 내다 하지를 않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빈 무덤도 바로 예루살렘 경내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덤을 멀리 내다 두지를 않고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네 한국 사람들은 선산이다 명당이다 하면서 묘지를 멀리 둡니다마는, 사실은 무덤을 동네 한 가운데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침저녁으로 오고 가는 길에 한번씩 들여다봄으로 인생은 결국 이런 것이라고 하는 생각에서 정신을 좀 차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멀리에다 두고 1년에 한 두번 가게 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고 그 무덤은 동네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비롯한 절기 때가 되면 각 지방의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요즈음 말로 표현하여 '호텔이다' '민박이다'하면서 다 동원하여도 숙박시설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은 수 십만 명이 모였고 갈 곳은 없다보니 자연히 길거리에서도 자게 되고 더러는 들이나 산기슭에서 자게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춥게 되면 동굴로 들어가게 되는데 자칫 잘못 들어가는 날에는 시체가 있는 곳에서 하루 밤을 같이 지내게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체를 매우 부정하게 생각하는(민 19:16) 저들에게 있어서는 당장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하고 지나갈 것은 저들이 시체를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샤머니즘적인 도깨비놀음이나 귀신에 관계된 것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위생적인 관점에서 부정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시체는 썩은 것이고 그 썩은 것이 몸에 땋으면 몸에서 냄새가 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부정해진 몸으로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의무적인 절기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먼 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머물 곳이 없으므로 들에서 밤을 지내는 중 그나마 비가 내려 동굴을 찾아 들어가 하루 밤을 지낸 후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시체와 같이 누웠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시체의 오물이 묻어서는 냄새가 나고 부정한 몸이 되어 그 먼 길을 왔음에도 성전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성 밖에 머물다가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하여 큰 절기가 다가오게 되면"여기는 시체가 있는 곳"이라는 표시로서 무덤인 동굴 앞에 회칠을 하게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칠을 해 놓은 것을 멀리서 보게 되면 매우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뜻에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겉으로는 하얗게 보기가 좋으나 속에는 냄새가 나고 시체가 있으며 뼈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를 그대로 연결하면 시체가 없는 동굴에는 회칠을 하지 않지만 시체가 있는 동굴에는 오히려 회칠을 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면 회칠한 무덤에는 시체가 있으나 회칠을 하지 않은 무덤에는 시체가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들의 실생활에 있어서 주는 바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이 바로 외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외식이란 한 마디로 말하여 그 내용이 썩었다는 뜻이며, 이러한 배경에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친히 그 해설까지 해 주셨음을 볼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25절 말씀을 보면 "잔과 대접의 겉"이라 하여 분명히 그릇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거기에 담겨진 내용물을 두고는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탐욕과 방탕이란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한 문장 속에 문제에 따르는 해설도 다 되어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그릇"이란 밥그릇이나 대접 같은 그릇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 사람의 인격을 말함이며 "그 안"이란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마음가짐과 뜻과 성품을 지적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겉'이라는 것은 형식과 밖으로 나타내는 행동이나 행위를 뜻하며 '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내면에 가지고 있는 뜻과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함수관계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속이 더러울 때 겉을 더욱 장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보상심리로서 마치 불결 콤플렉스가 있을 때에 자연히 밖을 더 장식하고 깨끗하게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내면적인 불결 콤플렉스가 있을 때에 화장을 짙게 하게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파마의 유래가 패전한 독일 국민들이 생산성을 올리는데 방해가 되는 긴 머리카락을 짜르게 한 후 그래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보다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지져버리기로 한데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파마의 유래는 그런대로 생산적 의미가 있어서 좋습니다. 여기에 비해 입술에 바르는 루우즈는 그야말로 회칠한 무덤에 속하는 좋지 못한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의 와중에서 유독 창녀가 많았던 프랑스에서 부정한 행위로 인해 여성들의 피부가 나빠지고 입술이 퍼렇게 죽어 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빨갛게 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짙게 칠했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불결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마음으로부터 자신이 없고, 불결하며 꺼림칙한 것이 있게 될 때 이렇게 화장이 짙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디서든 화장이 지나치게 짙은 여성을 보게 되면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장은 좋은 것이로되 아주 적당한 선에서 우아하게 해야지 그렇지 못하고 조금 선을 넘어가게 되면 당장에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불결 콤플렉스가 있다 보니 그 반사 작용으로 이와 같은 위선을 낳게 된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의도를 두고도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마음속에 악한 것을 도모하고 있는 때에는 밖으로 표현하는 말이나 행동이 더욱 친절하게 보입니다. 그 때문에 친절이 지나치면 위험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친절이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수준 이상으로 친절하면 그 속에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선물도 그렇지 않습니까? 적당한 수준에서 마음을 담은 것이어야지 거기에서 지나치게 되면 그것은 뇌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소의 관계나 처지로 보아 저 사람이 나에게 이런 선물을 줄 사람이 아니고 보면 이것은 분명 수상한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도 이러한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고 미안하다보니 선물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좋은 명목에서 예절이니 선물이니 하는 이모든 것들이 잘못하면 회칠한 무덤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교훈대로 먼저 안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이것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프라이어리티(Priority) 즉 우선권의 문제입니다. 사실은 안도 중요하고 겉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냐 할 때에 안이 먼저인 것입니다. 다른 예로서 잘 사는 것과 진실한 것이 있다면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진실이 먼저라고 하는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이제 두 철학을 놓고 한번 비교해 본다면 칼 막스와 예수님과를 대조 할 수 있습니다. 막스는 생각하기를 사회가 먼저다. 그러므로 사회를 개조하라. 그래야만 이후에 개인도 개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는 반대로 개인이 먼저이며 개인이 먼저 바로 됨으로 사회가 바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맑스의 입장에서는 구조가 먼저요 물질적 여건이 먼저이며,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인격이 먼저요 정신이 먼저 입니다. 맑스의 입장에서 언뜻 생각하면 세상이 이렇게 악해지는 것은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물질적인 평등이 주어져 똑 같은 수준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런 문제는 해결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관점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정신이 먼저이며, 그 때문에 아무리 가난하여도 좋은 사람이 있고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나쁜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맑스가 전개하는 이론의 중심이 부와 평등과 여건에 있다면 예수님의 중심은 회개와 중생과 영혼이 먼저라고 하는 데에 그 차이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사회에서도 보면 물질적으로 먼저 풍요로워져야 되겠다는 조급함에서 생산이 먼저라며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동원하는데 우선을 둡니다마는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격이 먼저요 신앙이 먼저 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신앙이 생산적인 것이며 이 신앙에서 나온 진실성이 가장 훌륭한 생산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자체가 생산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며 나아가서는 그 사람의 인격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겉도 중요하고 안도 중요하며, 개인도 중요하고 사회도 중요합니다마는 그러나 그 우선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에는 반드시 내적인 것 심령적인 것 그리고 개인적인 것이 먼저라고 하는 것이오늘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27절 말씀을 보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즉 그 보이고자하는 마음에 문제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이고자할 때 그것이 바로 회칠한 무덤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도 하는 주변의 이야기입니다마는 평소에 전혀 선물을 사오지 않던 남편이 원인 모를 선물을 두둑히 사오는 날은 수상한 날이라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다름아닌 보상심리의 발로인 것입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짓을 하고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결국은 자기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선물을 사온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회칠한 무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가하면 지성인들의 위선이 또한 그러합니다.
언젠가 집안 일을 도와주러 온 한 부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자기가 항상 가서 도와주고 있는 집인데 왜 그렇게 사는지 아무래도 모를 집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용인 즉 주인 내외가 사회적으로도 신분이 높은 의젓한 사람들인데 집에 들어와서는 전혀 서로 말도 하지 않고 각각 별거를 하면서 식사는 물론 일체의 행동을 따로 하면서 지낸지가 1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를 것은 이렇게 지내다가도 외부의 초대를 받아서 나갈 때에는 버젓한 모습으로 문 밖에서 부터 팔짱을 끼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밖으로 소문이 나기로는 잉꼬부부로 났다는데 집에 들어오면 각각 자기 방으로 "꽝"하고 들어가니 그렇게 하면서까지 왜 같이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럴길래 저가 있다가 "아주머니는 그것을 모를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만 아는 비밀입니다"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인의 위선이요 회칠한 무덤이며 여기에 철저히 겉만 장식하는 외식적 행위가 있고 도덕적 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여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이는 그저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려 하는 것으로 이런 세계관을 타인 주도적 인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의 가치 판단이나 기준에 의해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에 비취는 자신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위신이다 체면이다 체통이다 하는 것으로 이것 때문에 망조가 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격을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28절에 기록된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라는 말씀 역시 무덤에 대한 이야기에 연결되는 것이고 보면 앞에서 말한 "아름답게 보이나"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부분에서 그 설명을 비약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무덤이 옳거나 옳지 않게 보이는 대상은 아님으로 이를 "아름답게 보이나"라는 표현으로서 그 인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칠한 무덤 같은 인격이라고 하게 되면 "사람에게는 옳게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됩니다. 생각하면 사람에게 옳게 보이겠다고 하는 이 외식적 노력만큼 처절한 것도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침묵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노라면 언젠가는 다 알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누가 뭐래도 변명은 안 하기로 작정하고 살아봅니다. 이는 왜냐하면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슨 변명이 필요하거나 어떠한 긴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문제이든 그것이 사실이면 도리가 없는 것이겠고 사실이 아니라면 4개월만 지나면 끝이 나게됩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그렇게 잘난 인격이라고 좋은 소리만 듣고 살수가 있겠습니까? 가끔 나쁜 소리 좀 듣는다한들 무엇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쩌다 좋은일 했다고 하여 다 좋은 소리 듣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나쁜 일했다고 하여다 나쁜 말 듣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서든 변명은 없어야 합니다. 변명은 가능한 한 사람에게 옳게 보이고자 함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러기에 이는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하며 많은 봉사를 하게 될 때 이 모두를 하나님 앞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만일의 경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이 일들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그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큰 병이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진실한 척, 부지런한 척, 열심히 믿는 척 하다가 결국은 쓰러지고 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에는 집에 가서 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는 아무튼 어디서든지 터져야 살지 그렇지 않으면 정신병원에 가야할 판이니 그것은 더욱 힘드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름 아닌 이것이 바로 회칠한 무덤의 말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매우 명확한 설명으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마침 내일이중 추절이라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가만히 보면 대개 불효한 자식들이 묘지에 가서 많이 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전에는 언제한번 제대로 돌보아드리지 않다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뻔질나게 묘지를 찾으며 비석을 세우는 등 유별나게 열성을 부리며 효자인 척하는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으로서는 읽지 않았습니다마는 2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엄청난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계십니다. "화 있을찐저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무덤을 꾸미며 가로되" 이 얼마나 적중하는 이야기입니까? 지난날 핍박을 당해 죽은 선지자들을 기리며 그 무덤을 장식하고 비석을 세우면서 저들이 하는 말이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감히 의로운 선지자를 죽이다니"하면서 그들의 무덤을 꾸미면서도 당장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늘 여기 있는 저 예수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굉장한 변증법적 논리로서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하시는 말씀으로 저들의 심중을 찔렀던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회칠한 무덤과도 같이 가장 의로운 자인 것처럼 선지자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세우고 있으나 그러한 행위를 하는 너희 마음속에 다시 한번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선지자의 무덤을 장식하는 그 행위 자체가 바로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과 같이 하지 말고 안을 깨끗이 하라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계속하여 진실을 재촉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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