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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의 절대 주권(롬9:19~2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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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 주권(롬9:19~29)

 

오늘도 귀한 말씀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에 그 말씀이 조금 옅은 말씀이어서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오히려 더 귀한 말씀이고 그것을 깨닫게 될 때에 더 확실한 믿음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어도 그렇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서 늘 무른 음식만 술술 넘기는 것이면 음식 먹는 재미가 있겠어요? 입맛을 반도 채우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치아만 좋으면 굳은 음식이 좋아요. 와작와작 씹어먹어야 맛이 나고 씹을수록 맛이 나는 법이지요. 소화도 그래야 잘됩니다. 진리도 그와 같습니다. 쉽게 이해되는 말씀도 있지마는 좀 어려운 말씀도 있는데, 그 깊은 뜻을 깊이깊이, 마치 광부가 저 깊은 곳에서 귀한 보화를 캐내는 것처럼 파 들어가 이해하게 되면 더욱 더 많은 은혜가 되고 더 충만함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도 로마서 9장에서 계속 설명해오고 있습니다마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리는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는 이 선택의 교리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핵심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의 교리를 사도 바울은 기독교적으로 해석합니다. 선택된 자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신앙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성격을 말씀합니다. 나아가서는 직선적으로,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바로 선택된 사람이요, 그 선택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인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선택의 교리는 오히려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예언적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된 선택의 교리의 초점은 바로 예수 믿어서 구원 얻는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논조입니다. 그런 중에 이렇게 선택의 교리를 말하자고 하면 언제나 우리는 그 중심부를 어디다 두어야 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은총에다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적 절대주권, 하나님의 불가항적 은혜, 강권적 은혜,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강권적 은혜 안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은혜 속에서 마음이 강팍해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점점 더 마음이 굳어져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이렇게 될 때에 여기에 우리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 그건 공평치 못하다-그런 회의를 가지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구원의 기회가 주어져야 되는데, 누구나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고야 구원받는데, 말씀을 들어야 되는데, 못 들었거든요. 지금 같은 세상에도 복음을 듣지 못해요. 특별히 북녘 땅에 보면 복음을 들을래야 들을 수 없는 사람이 태반이에요.

도무지 들을 수가 없어요. 신문도 없어요. 잡지도 없어요. 신문도 골수공산당 간부들만 조금 보지 일반인들은 못 봐요. 집집마다 자그마한 나무상자가 하나씩 있는데 스피커예요. 그 속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어요. 스위치도 없어요. 소리 나오면 듣고, 안 나오면 꺼야 되고-그런거예요. 완전히 정보빈곤 상태예요. 아무 것도 들은 게 없어요. 아주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이제 앞으로 복음이 전해진다면 정말로 큰 역사가 이루어지리라고 믿어봅니다.

복음이 들려져야 되지 않습니까? 은혜의 기회가 주어져야 돼요.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주어졌다, 이 말씀이에요. 그러니 이거 불공평 한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씀이지요. 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이루어져야지요. 어떤 분은 이런 분도 계세요. 어려운 여건에서 예수 믿는 사람도 있지만, 여건이 너무 어려워서 예수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 교인 가운데 그런 분이 있어요. 형제가 다섯인데, 4형제는 벌써 예수 다 믿어서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목사된 사람도 있다고 해요. 그런데 자기는 맏아들로서 예수 못 믿었대요. 장손이기 때문에 제사드려야 되니까. 그래서 늘 그랬답니다. 나는 장손이니까, 제사 드리니까 교회 못나갈 것이니 너희들만 교회 나가라 했대요. 동생들보고 너희들은 가라, 그래야 바로 살 수 있고, 나아가서는 이 나라를 건질 수도 있다, 라고 얘기하면서 다 내보냈다가 자기는 지금 맨 마지막으로 나이 60이 넘고 70이 가까왔을 때 이제야 교회에 나오는 거예요. 이런 분을 내가 만나보았어요. , 이런 분들은 물론 깨우치면 되겠습니다마는 그런 용기가 없어요. 온 문중에서 숫제 협박을 합니다. 네가 명색이 장손인데 제사는 두고 어디에를 가느냐-이런 분위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핍박하던 사람들 다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해요. 그래가지고 나이 많은 다음에야 이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참 오랫동안도 사실은 믿는 마음으로 있었던 것 같아요. 동생들 다 나가라, 나가라, 내보내고 하면서도 자기는 끝까지 있다가 나온다-이렇게 볼 때에 그 분은 다행히 그렇게 나이 많도록 살았으니 기회를 얻었지, 그렇지 못하고 일찍 죽었더면 예수 못 믿고 죽을 뻔했다고 말씀입니다.

, 생각해보세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것도 우리 부득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아무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 같지 않아요.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끼지 않습니까? 이것이 불공평한 것 아니냐 싶지 않습니까? 또 뭐니뭐니해도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마음대로 못하는 게 자기 마음 아닙니까? 겸손하고, 교만하고, 믿고, 의심하고-이거 내 마음대로 합니까? 하나님께서 겸손한 마음을 주셔야지요. 은혜로운 마음을 주셔야지요. 은혜 받은 사람의 간증처럼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 마음을 열어주셔야지요. 그래야 회개할 수도 있고, 믿을 수도 있는 거지, 이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바로 왕처럼 강퍅해지고, 바리새인들처럼 강퍅해지고 거짓되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그리고 세리와 마태처럼 '나를 따르라'하시는 한마디 듣고 ""하고 따라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가하면 한평생 누가 믿으라고 해도 안 믿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그런고로 아무래도 선택받은 자가 있고, 버림받는 자가 있다-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것 아니냐-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공평한 것 아니냐-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중국에 해남자라고 하는 책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운명을 잘 알고 있는 자는 쓸데없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잘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 우리가 신앙적으로 소화해봅시다. 하나님의 큰 은혜의 경륜을 아는 사람은 쓸데없이 이런 일 저런 일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특별히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다는 것, 스스로 죄인됨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 이 큰 은혜 속에서 어떻게 원망을 하겠어요? 이 은혜로운 감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성경말씀은 그래서 우리에게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씀합니다. 하나는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또하나는 내 백성 아닌 자의 비유-호세아서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는 남은 자(remnant), 남은 백성이라는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원망할 것 없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시간,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 이야기를 한번 보십시다. 토기장이 이야기는 예레미야 181절로 6절에 있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14)"-녹로라는 게 잘 안 쓰는 말이어서 서먹하지만 이건 발로 빙빙 돌리는 기구입니다. 이걸 돌리면서 그 위에 흙을 빚어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데 빙빙 돌리면서 만들다보니 잘 안됐어요. 그러니까 확 찍어 뭉개고 짓이겨 다시 만들어요. 그래서 이런 것 만들려 했다가 저런 것 만들고, 저런 것 만들다가 잘 안되면 또 이런 것 만들고 하는 것입니다. , 이게 토기장이 에요. 토기장이 마음 대로지요. 안 그렇습니까? 토기장이가 이런 것도 만들고 저런 것도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왜 이런 그릇 만들었느냐, 왜 나는 이렇게 만들었느냐, 왜 나는 저렇게 만들었느냐,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토기장이의 비유를 듣고 보면 '사람은 질그릇이 아닌데……'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질그릇과 사람은 다릅니다. 질그릇은 하나님의 흙덩이요 사람은 인격입니다. 흙덩이는 감정이 없습니다. 흙덩이에게는 인격도 없습니다. 선택 능력도 없습니다. 분노, 기쁨, 고통, 번민, 의심, 믿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낱 흙덩이일 뿐이에요.

그러니 어떻게 사람을 흙덩이에 비유하느냐 하고 한번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것도 사실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내가 선택한다고 하나 내가 선택하는 것이 몇 가지나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하나님이 주신 이성, 하나님이 주신 판단력,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왜 나를 질그릇 취급하느냐, 하는 진흙덩이 취급하느냐, 하고 물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또하나, 우리는 하나님이 폭군적인 게 아니냐,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마치 진흙을 취급하듯이, 진흙을 빚었다가 부쉈다가 하는 것처럼 하시는 것이냐, 하나님은 폭군적 절대주권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은혜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의심 많고,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 볼 때에는 하나님은 정말 무서운 하나님이십니다.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노아의 홍수를 보세요. 얼마나 무서운가. 이런 하나님이라는 것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돼요. 그러나 그 쪽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폭군적인 절대주권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깊은 뜻을 생각해야 됩니다. 여기에 신비함이 있습니다. 오묘한 하나님의 진리가 있습니다. 영국의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그의 책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항상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항상 행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믿어야 이해가 됩니다. 의심하고는 이해가 안됩니다. 또 구원받은 자의 의식에서만 이해가 됩니다. 그 각도에서 이해해야만 이해가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저쪽에서 하나님을 쳐다볼 때에 그것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점을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은혜 안에서 소화하게 되면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는데, 은혜를 떠나서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세계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그 신비로운, 비밀스러운 일은 비밀인 채로 두세요. 내가 여기서 그대로 내 이 적은 이성으로 다 판단해버리고, 다 비판해버리고자 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무서운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 이제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제 토기장이의 문제를 놓고 생각해보십시다.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절대은총입니다. 여기에 항의할 것도 없고,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들어주셨건 저렇게 만들어주셨건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내 운명의 길을 이렇게도 인도하시고 저렇게도 인도하시고, 어떤 사람은 좀 부자로, 어떤 사람은 좀 가난하게, 어떤 사람은 재주가 있게, 어떤 사람은 재주가 없게-그러나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질량은 똑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하고 저런 사람은 불행한 게 아니예요. 믿음을 가진 자의,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나가는 데 있어서는 똑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된다고 하는 생각은 아예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셨다는 것, 그것이 절대적 은혜요 강권적 은혜라는 것, 그것만 알고, 그것에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감사하면서 '왜 저 사람은 버리셨습니까? 이 사람은 왜 내버려두십니까? 우리에게 복음 주셔서 이렇게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하신 것은 좋은데 왜 북녘 땅은 저렇게 오래 내버려두십니까?'-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예요.

내가 모르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돼요. 절대은총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어떤 의문도 품어서는 안됩니다. 불평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은 참 질기게도 이 의문에 집착하여 씨름을 합디다. "목사님, 저희 부모님은 예수를 안 믿었거든요. 복음을 듣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못 믿었거든요. 만일에 복음을 들었더면 꼭 믿었을 사람들입니다. 착한 사람들이었는데 복음을 듣지 못하고 세상 떠났고, 나부터 예수를 믿는데, 우리 조상이 구원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왜 우리 조상들은 복음을 듣지 못했을까요?"-이렇게 굉장히 고민을 합디다.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감사하고, 그 밖의 다른 생각은 하지 마세요." 왜 저 사람을 구원하지 않았나, 왜 가룟 유다는 버렸나, 왜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회개시키지 못했나, 능력이 부족하신 것일까-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절대은총에 대한 감사,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절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내 죄는 용서하시고 저 분의 죄는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따위의 질문은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떠나서 묻는 질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인즉 질그릇이 토기장이에게 항의할 수는 없어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서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왜 이런 환경에서 살게 했습니까, 왜 이렇게 했습니까, 하는 것이 아니예요. 누구에게나 은혜의 기회는 똑같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따라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에요. 현재는 차이가 나는 것 같아도 멀리 미래지향적으로 보면 차이가 없어요. 또 피상적으로 볼 때에, 현상적으로 볼 때에는 다른 것 같아도 깊이 들어가보면 다른 게 없어요. 여러분, 이걸 아십니까? 여러분 생각에는 돈 많은 사람은 행복할 것 같지요? 절대 행복하지 않아요. 돈많아 보지 못했으니까 잘 모르겠지요.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요. 요새 보니 절대 행복하지 않아요.

또 가난하고 병들기만 하면 다 불행한 것 같지요? 그런 것도 아닙디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좀 우스운 얘깁니다마는 참 어떤 때에 보면 사흘이 멀다하고 남편에게 맞으면서 사는 사람이 있어요. 남들이 볼 때에 왜 사느냐 싶어요. 그러나 본인보고 물어보세요. 그 재미로 산다고 그래요. 남의 문제를 함부로 쉽게 평가하지 마세요. 그러는 것이 아니예요. 겉으로 보는 게 그렇지 오히려 허수아비 보듯 하고 한평생 싸움 한번 못해본 부부가 시원치 않은 부부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만들었다, 나를 이렇게 조성하신 하나님, 그저 감사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주시고, 이런 운명에 살게 해주신 것 이대로 감사합니다, 할 것이지 왜 저 사람같이 부자가 못됐습니까, 이 사람같이 왜 아이큐를 높이지 않았습니까, 왜 이 사람같이 나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왜 키를 크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왜 작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할 것 없어요.

 

우리 교인들 보면 조금 키가 큰 분들은 힐을 신지 못해요. 언제나 낮은 신을 신읍디다. 우리 학생들도 보니까 아주 낮은 신을 신어요.

그것만이 아니예요. 구부정하게 다녀요. 못마땅해요. 그런가하면 조금 키가 작은 아가씨들은 위험할 정도로 굽이 높은 것을 신었어요. 위험해요. 저는 이 둘 다 잘못한다고 생각해요. 작으면 작은대로 좋아요.

크다고 해서 작게 보이려고 할 필요 없어요. 창조주에게 반항하는 거예요. 크면 큰대로 살아요. 작으면 작은 대로 살아요. 작으면 아담하고, 크면 늘씬하고, 그런 것이지요. 생긴 그대로 행복하세요. 절대로 창조주를 향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마세요. 이게 공평이에요. 이게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토기장이가 만들었으면 만든 것이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어디다 대고 항의해요? 하나님은 넉넉히 주셨어요. 필요한 것 다 주셨어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도록 주셨어요. 여기서부터 생각하고 출발해보세요. 분명히 넘치는 은혜에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어요. 우리가 볼 때에는 조금 덜 행복하고, 덜 불행할는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마찬가지로 다 쓸모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다 아름답게 보세요. 그것만은 알아야 돼요. 그릇이라는 것은 하나의 phenomenon이에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제는 절대가치가 있고, 상대적 가치가 있는 거예요. 주인은 주인이에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주인이세요. 모든 그릇의 주인은 하나님이세요. 이런 그릇이건 저런 그릇이건. 또하나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거예요. 귀하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귀할 수도 있지마는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귀하게 쓰이면 귀한 거예요. 디모데후서 221절에 보는 바와 같이 깨끗하면 쓰여져요. 금그릇, 은그릇 논할 것 없어요. 다만 깨끗하기만 하라, 그러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다---그 말씀입니다. 왜 내가 질그릇입니까, 하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 깨끗하기만 해요. 얼마든지 쓰실 테니까. 금그릇이어도 더러우면 소용없는 거예요.

절대적 가치를 생각하고, 다시 상대적 가치를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그릇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쓰임에 문제가 있고, 쓰여질 때에는 깨끗하기만 하면 쓰여지는 것이고, 또 주인의 의도대로 쓰는 거예요. 이런 것은 이렇게 쓰여지고, 저런 것은 저렇게 쓰여져요. 천한 그릇도 필요합니다. 천한 일도 있으니까 천한 일에 쓰여져야 될 것 아니예요? 무엇엔가 쓰여져야 되지요. 또 고귀한 일은 고귀한 대로 또 쓰여져야 되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주인이신 하나님이 쓰시는 목적 앞에 우리는 공평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 불공평은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신다 할 때에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쓰십니다. 어떤 사람도 쓰십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순간적으로 볼 때에는 오해가 있어요. 부분적으로 볼 때에는 거기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요. 그러나 영원한 빛에 비추어볼 때에는 다 쓸모 있어요. 전체로 하나님의 구원의 큰 드라마 속에서 볼 때에는 다 필요한 거예요.

다 필요한 일들이에요.

우리가 영화 같은 것을 봅니다. 작품 가운데서 깡패가 나오고 총을 쏘고, 하지요. 그럴 때에 잔인하다, 왜 저런 장면을 보여주나, 할는지 몰라도 그 장면이 있어야 저 마지막에 가서 착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잘 나타날 수가 있거든요. 그 작품성은 그것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림을 보세요. 더구나 서양화 같은 것은 기름으로 그린 것, 가까이 가서 더덕더덕 갖다붙인 것못봐줍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그림은 멀리서 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눈 감고 보라고 해요. 그럴 때에 그 그림이 확 살아 오르는 거예요. 전체적으로 보아야지 부분적으로 보면 안돼요. 순간적으로 보면 안돼요. 그와 같이 우리의 모든 생활은 하늘나라에 가서 다시 되돌아보면 알 거예요. 내가 왜 가난했던가, 내가 왜 고독했던가, 내가 왜 어려운 일을 당해야 했던가-아마 그 때가서는 그 어려운 일, 당했던 일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있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무 질문 할 것이 없어요. 왜 악한 사람을 버려둡니까, 원망할 것 없고, 왜 선한 사람을 고통에 내버려둡니까, 그런 질문도 할 것이 못돼요. 하나님은 대답하실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봐라, 전체적으로 봐라, 하고요. 그 모든 일이 다 있어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에요. 본문에서 귀한 그릇이라고 하면 유대사람이요, 천한 것이라면 이것은 이방사람이에요. 유대사람은 유대사람대로, 이방사람은 이방사람대로, 천하고 귀한 그릇이 다 하나님 앞에는 필요한 그릇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꼭 필요하고, 만백성을 구원하는 이 선교적 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견해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21절에 보면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는 말이 있어요. 준비된 진노의 그릇.

그리고 오래 참으세요. 하나님께서 관용하세요. 이건 진노의 그릇인데 왜 깨버리지 않고 왜 오래 둡니까-이 불평이지마는 아니예요.

오래 참으시며 관용하시고 또 긍휼의, 은혜의 그릇이 있어요. 이건 이방인을 향한 것입니다. 은혜의 그릇이 지금은 고난 중에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영광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은혜의 그릇에 구원의 영광이 주어집니다. 이제 우리가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다시 호세아 223절과 110절을 인용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2:23)"-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멜이라는 여자가 본래 창녀입니다마는 하나님의 은혜로 호세아의 아내가 됩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아내가 되어 있으면서도 또 나쁜 짓을 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았는데 호세아가 아무리 봐도 자기를 닮지 않았어요. 그래서 '로암미'라 합니다. 내 백성이 아니다, 아무래도 수상하다-그러나 호세아는 저를 사랑합니다. 이 가정적인 사건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해주십니다. 내 백성 아닌 자를 내가 사랑한다, 내 백성 아닌 자를 내가 내 백성이라 부르리라-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백성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 자를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르셨어요.

이제 우리가 할말이 없어요, 감사할 뿐이지요.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의니 공의니 하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아무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두 가지 결과가 옵니다. 회개하든지, 절망하든지.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사야에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1022, 23, 1310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남겨둔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남겨둔 자, 만군의 여호와께서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요, 다 멸망 받아 마땅해요. 다 죽어야 마땅해요. 다 지옥으로 가야 마땅합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다가 남겨둔 게 있어요. 종자를 남겨두셨어요.

그리함으로 이 종자를 통해서 다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요. 남겨둔 자를 가리켜 remnant라 합니다. 이 남겨둔 자, 남은 자, 이건 하나님의 절대 은혜입니다. 왜 그것까지 다 멸하지 않았습니까-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공의가 실천되는 게 아닙니까, 멸할 바에야 싹멸해야지 왜 남겨두셨습니까-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여기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그 속에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씨를 남겨두셨어요. 그래서 그를 통해서 많은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의로 판단해서 다 죄대로 심판하신다면 살아남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얼마를 남겨두셨어요. 그래서 그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은 남겨둔 자, 그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30절에 가서 보면 의를 좇은 자를 말씀합니다. 의를 좇은 자는 유대사람이요, 의를 좇느라고 애를 썼는데 좇지 못하고 그만 거절당하고 말아요. 구원의 밖으로 밀려나요. 의를 얻은 자가 있어요. 얻은 자 그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구원을 좇는 자와 구원을 얻는 자, 은혜를 얻는 자,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도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자기가 깨끗해서, 자기가 옳아서, 자기가 선행을 해서, 자기가 공로를 세워서 하나님 앞에 나가겠다고 부득부득 애를 쓰는 사람이 있어요. 그 가운데는 신비주의자도 있어요. 내가 신비적인 체험을 하고, 내가 금식하고, 내가 철야하고 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의를 좇는 일이에요. 그것은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본문 말씀대로 돌에 부딪히게 됩니다. 부딪힐 돌에 부딪힙니다.

스스로가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고 말아요. 그리고 의를 얻는 자, 무조건적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요. 그 사랑을 믿고 받아들여요. 이방인을 대표한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얻는 자만이 은혜 속에 살아가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딪히는 돌을 말씀합니다. 이 돌 위에 서면 살 것이고, 부딪히면 부서질 것이에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친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오직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간증할 때에 은혜와 공의는 함께 이루어집니다. 아무 불평도, 아무 원망도 없이 오직 감사로 이 은혜를 수용해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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