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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잔치 비유(누가복음 14:15-24)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큰 잔치를 배설하는 중에 손님들을 초청하나 다같이 사양함으로써 또 다른 손님들이 채워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은 이미 앞서 공부한 마태복음 22장의 아들을 위한 왕의 잔치 비유와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 두 비유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말씀하시는 그 경위가 다릅니다. 왕의 아들을 위한 잔치 비유는 그 동기부터가 대단히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나흘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 내용 자체가 심각하며 심판적이고 종말론적입니다. 그런가하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그 말씀하시는 경위가 아주 특별하게 되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시는 초점도 다릅니다. 이와 같이 서로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도 의도하시는 바 말씀의 초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경위를 말하자면 어느 날 바리새인인 두령의 집에서 예수님을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다고 하는 흔하지 않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이렇게 초청을 해서 모셔놓고 같이 떡을 나누게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보통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를 맛보게 됩니다. 누구나 다 느끼며 아는 대로 잔치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분위기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잔치에 있어서는 그 분위기가 기쁘고 흐뭇한 분위기로 무르익어야 잔치다운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언짢은 일들이 생기면 잔치의 분위기는 깨어지고 돋구었던 흥도 식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14:1의 말씀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예수님을 청해놓고 사람들이 엿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손님으로 청했으면 손님 위주로 생각하고 손님을 기쁘게 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이끌어가야겠는데, 그와는 반대로 이상한 눈짓으로 어떻게 하나 보자는 식으로 엿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손님 청하는 자세가 아주 잘못된 이 분위기를 예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한 7절을 볼 것 같으면 예수님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서로 상좌에 앉으려고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앉는 자리에 높은 자리, 낮은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편편한 자리를 놓고도 옛날에는 아랫목, 윗목을 찾아 어른을 윗자리에 모시고 거기를 중심으로 그 다음, 다음으로 모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에서 오늘 여기에 초청 받아온 사람들 중에 적어도 내가 이 정도 윗자리는 앉아도 되겠지 해서 앉았는데 조금 있으니 좀더 웃어른이 옵니다. 그렇게되니 부득불 주인이 나가서 미안하지만 한 자리만 밑으로 내려 앉아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되고, 또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게된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서로 윗자리에 앉았으면 하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초청을 받게되거든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아예 말석에 가서 앉았으라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주인이 와서 "올라앉으세요"하면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올라앉지만 그렇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올라앉았다가 "좀 내려 앉아주세요" 한다면 반대로 얼마나 창피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형편이 이러한 말씀을 하실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살펴보니 대체로 부한 사람들이며 오히려 초청한 주인보다도 더 높은 사람들이 많더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초청을 받아 왔음에도 고마운 생각은 없이 들어서면서부터 큰기침에 여덟팔자 걸음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 초청을 받았으면 고마운 마음이 앞서야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할 것인데 이 사람들은 그러지를 못하고 도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무엇이나 베풀거든, 아예 부한 사람은 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로 청하여 갚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손님을 청할 때에는 다른 생각 없이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찾아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청할 것이지, 저렇게 도도하고 뒷날 도로 청하여 갚아버릴 사람을 손님으로 초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차라리 가난한 자, 병신, 저는 자, 소경들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저들은 갚을 것이 없으므로 그야말로 완전한 선행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청하면 뒷날 더 좋은 것으로 갚아버릴 수도 있고 또한 초청한다는 본래의 좋은 의미가 장사치의 주고받는 거래처럼 완전히 잘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겠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도로 청할 능력이 없는, 받고 고맙게만 생각할 수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불구자들을 초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잔치의 분위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함께 먹고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며 한 마디 합니다.
오늘 여기 잔치라고 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분위기가 썩 좋지를 못합니다. 이 때문에 지금 자기들이 참여하고 있는 잔치에 대한 비판의 소리로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복이 있겠다는 넉두리 같은 한 마디를 한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기회를 잡으시고 하늘 나라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 진리의 내용인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는 "하늘나라 잔치"입니다. 그 잔치는 만족한 잔치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러한 곳이 아니며, 주인의 마음은 단순히 손님을 가득 채워 그로 인해 기뻐하고자 하는 순수한 즐김의 잔치라는 말씀을 하고있습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앞서 이야기한 왕의 잔치 비유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왕의 잔치 비유에서는 초청 받은 사람들이 간단히 사양한 것이 아니라 아주 배반을 하며, 초청의 명을 띠고 간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초청해준 왕에 대해 악하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철저하게 초청 받은 사람의 자세를 비판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판적이요, 종말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인의 마음에 더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거절도 그냥 사양했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이 말씀의 주제는 "천국은 마치 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마치 천국 잔치에 초청 받은 것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잔치!"라고 할 때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 됩니까? 그것은 기쁨을 의미하는 말이요, 축제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기에 잔치에는 슬픔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조금 근심된 일이 있더라도 다 뒤로 미루고 우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잔치입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이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란 감사가 그 마음의 받침이 되어야합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초청해 주었다는 그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고 만족한 마음으로 임할 때에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고 그래야 잔치입니다. 잔치에는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있어야합니다.
본래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 라고 하는데 이는 기쁨이라는 말과 그 어원을 같이 합니다. 신령한 기쁨!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오는 넘치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은 곧 잔치요, 우리의 예배는 축제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축제인 예배가 눈물겹고, 억울하며, 한숨짓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항상 기쁨에 넘쳐야합니다.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다보면 "지금 어떤 분이 은혜를 받는구나" 하는 나름대로의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제일 흐뭇하고 반가운 것은 환한 얼굴로 웃으면서 나가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한 마디의 짧은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엇갈려 나가지만 그 얼굴에 은혜 받은 증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올 때에는 어떠한 얼굴로 왔던지간에 하나님의 축제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모습에는 기쁨이 있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눈물 있는 참회의 기도도 있어야 하고 또 기도하다 보면 눈물이 흐르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멘" 하고 나서는 울지 말아야합니다. 만약에 "아멘" 하고 나서도 줄곧 운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불신하고 기쁨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돈들이지 않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한다는 것은 먼저는 내 마음의 만족이요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도 밝고 편하게 해줍니다.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는 모두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숨짓고 울면서 하는 이야기는 듣는 사람까지 마음을 상하게 하는 나쁜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령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감사와 기쁨의 생활로 매일 매일을 축제의 기분과 마음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잔치라는 것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기쁨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청을 받아 어떠한 잔치에 갔다면 그것은 남의 기쁨에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 내 잔치가 아니라 저들의 잔치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도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나에게 아무리 기쁜 일이 있더라도 상대방이 슬퍼하는 것을 보게되면 그 기쁨의 표시는 중지를 하고 바로 그 아픔에 공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가하면 내 마음에 큰 근심이 있어 슬프고 뒤틀려도 상대방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을 볼 때에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함께 기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을 보면 남 기뻐하는데 가서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 기쁨의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기쁨의 원인은 저쪽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잔치, 우리 집 잔치처럼 기뻐해야 합니다. 남의 아들 장가가는 것을 보고 내 아들 장가가는 것처럼 기뻐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잔치를 나의 잔치로, 그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동참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며, 그 사람만이 은혜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간혹 보면 요즈음 세상은 어찌된 영문인지 자기 딸 시집가는 것보고도 질투하는 어머니가 다 있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자기는 늙었고, 옛날 자기가 시집갈 때는 그렇게 못해갔기 때문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내가 못 먹어도 그가 먹는 것을 보면 즐겁고, 내가 쓰지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쓰는 것을 보며 그가 좋아하면 나도 좋은 것입니다. 이 마음가짐이 천국 가는 마음이요, 잔치 집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개인주의, 시기, 질투하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 가지고는 생전가야 웃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사실 나의 기쁨도 다른 사람이 거들어주어야 완전한 기쁨이 되는 것이지 나 혼자만으로는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미국에 살다가 다시 한국에 나와 살기로 하였다기에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하였더니 "기분이 나빠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기분 나쁘냐하면 자동차를 캐디락, 좋은 것으로 샀는데 아무도 그 차에 관심을 가져주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 차가 참 좋다든지, 아니면 얼마 주었느냐는 등 한 마디쯤 건네주는 인사가 있을 법도 한데 그저 사면 샀는가보다 하는 정도이지 어느 누구 하나 부러워해 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분이 나빠서 못살겠더라 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집을 마련했을 때에도 손님들이 찾아가서 "집이 참 좋군요, 경치도 좋고요, 용케도 이렇게 좋은 곳에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한다든가, 자동차를 샀다고 하면 좀 옆에 가서 만져보면서 "야, 참 좋습니다. 굉장히 비싼 것이겠지요? 이런 차 한 번 타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는데"하고 말해준다면 그것이 봉사입니다.
그러는 중에 당장 친해집니다. 그런데 잔뜩 뒤틀려 가지고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식의 마음 가지고는 천당 못 갑니다. 그래서야 어떻게 천국적인 기쁨을 맛볼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 이 잔치의 기쁨은 소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기쁨에 참여하는 기쁨, 곧 존재의 기쁨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잔치에 내가 청함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한 기쁨이지, 내가 장가가는 것도 아니요 내가 잔치하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초청 받은 기쁨, 인격적인 기쁨, 믿음의 기쁨, 사랑의 기쁨, 이 기쁨이 곧 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기쁨이요 또한 이 기쁨이 곧 천국적인 기쁨입니다. 좀더 깊이 나아가 생각하면 이것은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산에 올라가서 수도하면서 느끼는 그러한 기쁨이 아닙니다. 잔치란 본래 모여서 같이 즐기는 것이지 혼자 하는 잔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공동체적인 기쁨을 즐깁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함께 찬송하며 같이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우리가 혼자서 기뻐하는 것과 잔치의 기쁨은 다릅니다. 그 분위기에서 오는 공동체적인 인격, 서로 마음을 모으는 거기서 오는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체질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고 개인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러한 기쁨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이 기쁨은 또한 받아들이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저 분의 기쁨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내가 저 분을 좋아하고 고맙게 생각하기에 그래서 함께 기뻐하고 더불어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제 잔치의 격조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잔치의 격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우선 분위기에서 출발이 됩니다. 잔치에는 기쁨과 만족이 있어야하고 거기에는 음식이 있어야합니다. 음식과 풍악과 분위기가 어울리는 격조 높은 잔치는 그 누구도 섭섭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어야합니다. 이 때문에 옛날 우리 어른들께서 잔치를 할 때에는 반드시 한 쪽에 거지들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푸짐한 대접을 하며 거지들의 잔치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잔치를 하는 동안 이쪽 안에서는 신랑, 신부가 좋아하며 기뻐하는데, 행여 저쪽 밖에서는 섭섭하거나 슬퍼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저희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는 신랑 신부에게는 꼭 두 가지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반주해주시는 분과 청소하는 이들에게 조금씩 사례를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얼마든지 교회에서도 인사를 치룰 수 있는 것이겠지만. 당신들 좋은 날 남 수고 시켜놓고 그 분들도 좋아야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결혼식 끝난 후에 차 타고 떠나는 뒤에다 잘들 살아보라면서 한숨 쉬는 소리가 나서야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같이 좋아하고 더불어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잔치란 전체가 얼마나 다같이 즐기며 기뻐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사람 하나라도 돌아서서 울었다면 그 잔치는 잘못된 잔치입니다. 다같이 배부르고 다같이 기뻐해야 원만한 잔치요, 격조 높은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한가지는 손님이 우선 많아야 합니다. 그러고 그 손님들의 생각이 순수하여야 합니다. 모처럼 잔치에 왔다가 빚 받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코 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이들은 결혼식 축하하러 왔어도 밖에서 빙빙 도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신랑, 신부 잘 생겼다는 말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좀 앞자리에 나와 신랑 신부를 쳐다보면서 잔치 깊숙이에 들어가 축하해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부조만 내고 가면 인사는 치룬 것이지 하는 사람은 값있는 손님은 못됩니다. 게다가 다른 생각이 다소라도 있다면 그것은 불순한 것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잔치의 순수성을 흐리게 합니다. 오직 순수한 동기, 이것만이 잔치의 격을 높여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오직 주인의 마음에 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의 초청에 대해 감격하고 있어야합니다. 참으로 그런 사람들만 모일 때에 그 잔치의 격은 높게 올라갑니다. 더우기 잔치의 정도는 그 주인이 누구이냐? 하는 것에 달렸습니다. 그 주인이 왕이면 그 잔치는 왕의 잔치가 되는 것이고, 그 주인이 대감이면 대감집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 잔치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잔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 우리의 주님을 모신 잔치입니다. 이 이상 격조 높은 잔치가 있겠습니까? 이제 문제는 그 주인을 기쁘시게 하자는 데 있습니다. 나 기쁘자는 것이 아니요, 얻어먹으러 간 것도 아닙니다. 이 잔치의 근본 목적은 주인이 기뻐하기 때문에 우리가 참여하여 더 기쁘게 해드리자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갔었다면 신랑 신부를 기쁘게 해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인공이기에 그 외에 이 시간에 기쁨을 받아야할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그 분들이 좋고 그 분들이 기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만약 신부를 울리거나 신랑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 잔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초청 받은 모든 사람은 오직 주인공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즐겁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 기쁨은 나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주인의 기쁨에 내 마음을 바치는 수용적 기쁨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에 아버지가 너무 기뻐하시기 때문에 사실 그는 하고싶은 말을 못합니다.
아버지가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할 때에 탕자의 마음은 "아닙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외양간으로 가겠습니다"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너무도 기뻐하니까 그 말을 못하고 그냥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이것이 잔치에 참여하는 마음가짐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이 주인이 큰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이 잔치가 혼인 잔치인지 아니면 출세한 잔치인지 그 명분은 분명히 나타나있지를 않습니다만, 어쨌든 모든 것이 다 준비된 큰 잔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음식에 좋은 풍악도 갖추어 모든 것을 준비하였으니 함께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라도 내 집을 가득 채워 함께 즐기자는 것입니다. 이 주인의 마음은 거기에 있습니다. 단지 함께 모여 같이 즐기고, 같이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더불어 기뻐하자는 일에 초청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양하며 불응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양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가보아야 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내 사업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잔치는 당신이나 기뻐할 것이고, 나는 내 사업이 먼저이기 때문에 당신의 잔치에는 못 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여야겠으니 못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지금은 잔치에 참석할 때가 아니라 소를 시험할 때이며, 나를 위해서 써야할 시간인데 당신을 위해서 시간을 쓸 수가 없다는 마음입니다.
이제 세 번째 사람은 나는 장가를 갔으니 못 가겠다고 합니다. 내 기쁨이 지금 한창인데 남의 기쁨, 남의 잔치는 아랑곳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명기 24:25에 기록된 대로 결혼한 남자는 1년 동안 군대에도 내어보내지 않고 아내와 더불어 즐겁게 지내도록 되어있으니 지금은 내 기쁨을 내가 즐기는 날이므로 당신 잔치에는 못 가겠다며 당당하게 거절을 합니다. 이상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모아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 자기 중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사업이요, 내가 하여야할 일이 따로 있고, 그리고 내 기쁨이 따로 있기 때문에 당신의 잔치에는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불응의 원인은 모두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의 주인은 시간을 재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7절을 보면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잔치는 준비가 다 되었으나 손님들은 제때에 오지를 않고 아예 못 오겠다고 까지 합니다. 이에 화가 난 주인은 종에게 명하여 빨리 시내와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불행한 사람들, 오라는 말 한 마디면 고마와서 감지덕지할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장가가서 한창 좋은 그런 사람은 그만두어라, 밭을 샀다는 돈 많은 그 사람도 그만두어라, 출세하여 이름 높은 그 아무개도 그만두어라. 그저 배고픈 사람, 자기 몸뚱이를 가누기에도 어렵고 힘든 그러한 사람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고도 빈자리가 남았다면 산울가에까지라도 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가득 채우라고 재촉하십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특별히 주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세 가지 말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빨리 데려오라!" "내 집을 채우라!", "강권하여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은 기어이 손님을 꽉 채워놓고 시작한 잔치를 성대하게 끝내야만 되겠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은 절대로 실패할 수가 없다는 것으로 간절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에 하시는 두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청함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도 이 귀한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오지않았던간에 일단 와보면 생각 밖에 특별한 은혜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더는 다시 맛보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금번 이 한번의 기회가 지나가면 그 후에 소문을 듣고 "나도 갈걸"하며 후회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적 통첩입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딱 한 번 있는 부름입니다. 그 때문에 처음 청함 받았던 사람들은 오지 않았으니 모르며, 뒤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이 잔치를 맛보게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일찍이 선민이었던 유대 사람들은 맛보지 못하고 이방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하여 그 맛을 보게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먼저 초청 받았던 유대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사양을 하고 오히려 이방 사람들이 먼저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며 이 큰 즐거움을 맛보게될 것을 예언적으로 하시는 말씀인 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준비된 잔치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슬픔도 많고 내 고통도 많지만, 그러나 이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여야겠습니다. 내 문제, 내 처지, 내 기분을 생각하려 들지 말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 그 잔치, 그 주인의 기쁨에 내 마음을 바치게되면 상상 밖의 큰 은혜를 받게될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과 이러한 기쁨이 있는 축제의 마음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큰 잔치에 부름 받았다고 하는 유일한 자격을 가지고, 부족하기를 말하면 가난한 자요 절름발이요 병신 소경이지만, 그러나 이 초청에 응함으로써 하늘나라 잔치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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