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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비유(요한복음 15 : 1 - 1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에는 "나는"무엇이다라고 하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천명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고행을 하고 도를 닦으시면서 진리를 찾아 헤매셨다는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기독교의 특징이 있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자체가 갖는 생명적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나는 진리다!"라고 하신 말씀은 내가 진리에 대해서 말한다는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내가 바로 진리 자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리로 혹은 저리로 가면 진리가 있고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안내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혹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포도나무라시며 자신이 그 본체이심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방면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비교 종교학적인 측면에서 공부를 해보면 이러한 표현의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를 깊이 깨닫게 되고 또한 거듭 거듭 감탄을 하게됩니다.
이와 같이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고 하는 표현의 말씀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시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역사이래 단 한 사람도 자신을 가리켜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거니와 말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 만이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라며,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참"이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헬라 말에는 이 "참"을 표현 하는데 '알레세이아' 라는 단어와 '알레씨노스아' 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레세이아'로 표현되는 참은 사실로서의 참을 표현하는 말임에 비해 '알레씨노스'는 거짓의 반대를 뜻하는 참을 말합니다. 그 중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참"은 거짓에 반대되는 의미의 참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거짓 것들이 많지만 그러나 나는 참 포도나무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알레씨노스로 표현된 "참"이라는 말이 무려 21회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요한복음에만 나타나고 있는 특징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하실 때의 이 "참"이라는 말씀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는 뜻뿐만 아니라 생명 있는 포도나무라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말라버려서 생명이 없는 그런 포도나무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 있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정말 살아있는 좋은 포도나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게 되는 그 깊은 뜻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로 설명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를 두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깊은 관계입니까? 이것은 뗄 수 없는 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없는 가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실제적인 것이요 매우 현재적인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이 관계는 완전히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적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잘되고 못되고의 이야기가 아닌 생명 자체에 대한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진정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것이며 생명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그 관계성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며, 그로 인해 열매 맺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직역을 하여 포도나무라고 하였습니다마는 사실 포도나무는 소나무나 밤나무 같은 그런 나무가 아닌 하나의 넝쿨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포도나무의 원줄기를 나무라고 한 것이며 거기로부터 뻗어나가는 줄기를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도 제가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오면서 깨끗하게 잘 전정된 포도원의 모습과 이제 막 줄을 따라 자라기 시작한 짤막한 푸른 줄기들을 보았습니다. 나무되는 원줄기는 그대로 있는데 그 가지 되는 줄기는 해마다 났다가는 잘라지고 또 나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해 봄에 다시 난 줄기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봄을 맞기 위해 넝쿨을 잘라 포도나무를 전정하는 것을 보면 아주 몽땅 잘라 버린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새 줄기가 나오면 거기서 다시 시원치 않은 것들은 잘라 버리고 튼튼하고 좋은 줄기만 몇 개 남겨 놓게 되면 거기에서 꽃이 피고 포도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나무라고 한 것은 그 원줄기를 말하는 것이며그 가지라고 한 것은 해마다 돋아 나오는 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가지와 원줄기와의 관계는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가지가 원 줄기에 붙어있지 않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원줄기에서 떨어져나가게 되면 열매는 고사하고 우선 살수가 없어서 말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튼튼한 가지라 하더라도 원줄기를 떠난 가지 만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5절 말씀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도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사업이나 개업을 하시는 분들에게 가끔 본문으로 들려드릴 때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사업을 할 때이면 몇 가지의 기본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우선 자금이 있어야 하고 그 사업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또한 경험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몇 가지 기본적인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생각하면 다 된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 볼 때에는 예수에게서 떠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많은 자금과 풍부한 지식이 있고 평생 쌓아온 익숙한 경험과 노동력이 있다하더라도 예수에게서 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 사업을 시작하라는 권면을 하고는 합니다.
여러분! 진정 이렇게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과연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지금 내게서 예수를 빼고 나면 내 인격도 내 재산도, 내 명예도, 내 건강도 이대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라는 생각! 어디까지나 예수가 있고, 그 예수와 나와의 떨어지지 않는 관계가 맺어짐으로 비로소 나의 모든 것이 의미를 갖게 된다는 확고한 생활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예수를 떠나서도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에 나오지 않고도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는 어떤 이들은 "요즈음 왜 교회를 자주 빠지십니까?"하고 물으면 "사업이 잘되어 워낙 바빠서 빠집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워낙 사업이 안 되서 빠집니다"라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잘되어도 좋고 안되어도 좋으며, 출세를 해도 좋고 못해도 좋으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이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리고 잘못되면 인생이 끝나는 것으로 알아야합니다. 간혹 교역자들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들어보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대체로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잘 믿는 집사님까지도 교회고 뭐고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학교 고등부마다 아예 3학년은 없이 1, 2학년만 있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교회를 나와야지 교회까지 나오지 않고 시험을 보면 떨어진다는 것이 하나의 교리처럼 여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해인가 한번 교회에 잘 나오면서 공부를 하여 시험을 치를 학생들은 거의 합격을 하였으나 교회 나오는 것을 그만 두고 공부 만한 학생들은 다 떨어졌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통계가 여론으로 알려지자 이제는 나오지 않던 학생들도 오히려 3학년이 되면 나와서 열심히 기도도하고, 기도도 받으면서 공부를 해야 대학 예비고사도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아름다운 일이며 이로 인해 우리 소망교회 고등부에는 3학년학생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일을 두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잘 나가던 아이들에게 예비고사 보기 위해서 공부해라! 그 마음씨 가지고 대학을 들어가겠으며, 또 들어가면 무엇을 하고, 졸업을 하면 또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명확한 의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도 무엇이 될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 생각 자체부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빌 1:21) 이 말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는 그대로, 그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없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확고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는 말씀에 이어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포도나무를 전정 하는 사람은 항상 잘 살펴서 열매를 맺지 않는 줄기가 보이면 사정없이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줄기는 충실한 열매로 자랄 수 있도록 깨끗하게 소독을 하며 잘 다듬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매를 맺지 않는 줄기를 잘라버리는 것은 그 줄기 자체로서도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만 그 열매 맺지 않는 줄기가 붙어 있으므로 열매맺는 줄기로 흡수될 진액이 그리로 흘러들어 진액이 낭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3장에 기록된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도 보면 3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는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빨리 찍어버려야 다른 나무, 다른 가지에 도움이 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두고 기어이 맺게 해 보겠다며 계속 시간을 끌다보면 진작 열매를 맺은 가지로 가야될 진액을 충분히 보내지 못하게 되어 열매 맺은 가지까지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실로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의 성경을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맺지 못하는 가지는 맺게 해 주어야 하고 잘 맺는 가지는 좀 덜 맺게 함으로 평준화가 되어야하겠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적은 자의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시며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버리라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도 보면 아버지는 농부로서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제하여 버리고 과실을 맺는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말씀입니까? 이것이 실제적인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자에게 더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안에 거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생명력의 연결을 말합니다.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 있는 것이지 원줄기가 가지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가지는 원줄기로부터 진액을 받아야만 살수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가지가 가지로서 존재되는 근본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아침 대구 동산병원의 직원 수양회를 인도하러 갔던 길에 원장님의 권유로 심장을 수술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심장에서 계속 피를 공급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불과 몇 분만이라도 심장이 멎게되면 모든 것이 썩어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장을 수술할 때에는 잠깐 떼어놓고 수술을 하는 동안 인공 심장을 만들어 기계로 펌프질을 하여 산소와 피를 계속 온 몸에 보내 주어야 된다고 합니다. 만약 잠깐이라도 이 기능이 중단되면 뇌 같은 것은 다 녹아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전이 안되게도 되어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또 다른 펌프를 준비해 놓고 사람이 돌려서라도 산소와 피를 온 몸으로 보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잠깐이라도 멈추고 보내지 못하게 되면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다 썩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매우 중요한 이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포도나무 가지가 원 줄기에 붙어 있어서 그 진액을 계속 빨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잘리어 중단되고 말았다면 이제는 썩어지고 말라지는 길 밖에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포도나무의 원줄기와 가지는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어서 붙어있는 한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계속 진액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는 매우 구체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 교훈이 너희 속에 길이 새겨져 있으면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한 말들이 너희에게 들려지고 깨달아지면 그리고 순종하게 되면 그 말이 진액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순종할 때에만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많은 교인들을 두고 볼 때 말씀의 공급이 한 달만 끊어지면 그 사람은 이방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어느 사이에 안 믿는 사람이 되어지고, 나아가서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봅니다. 말씀의 공급이 끊어진다는 것은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계속 공급되어져야합니다.
이제 다시 10절 말씀은 더욱 구체적인 말씀으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항상 뇌리에 기억되고 마음에 간직되어서 자나깨나 그 말씀이 나를 주관하게 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설명하시기를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곧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감동이 되며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이 또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다시 그 사랑을 받아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소화하고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담뿍 받아서 그대로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소화해 버리고 맙니다. 그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며 사랑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예수님안에 있었고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베푸신 그 놀라우신 사랑과 감격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7절 말씀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이제 여기에 원 줄기로부터 진액을 받아 자라고 있는 가지가 있다면 이 가지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때를 따라 원줄기에게 구하는 바가 있겠다는 것이며 그럴 때에는 필요한대로 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다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자기의 것을 위해서 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디까지나 열매를 맺기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구하는 것인데도 왜 주시지 않겠습니까?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기 위하여 구하는 것인데 왜 거기에 필요한 은사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우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포도열매를 맺겠다는 데 왜 필요한 은사를 안 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따라서 그를 구주로, 선생으로, 주님으로, 생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진액을 공급받는 절대적 생명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거기로부터 끊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코 끊어짐이 없이 꼭 붙어 있으면서 계속 말씀과 성령과 은혜의 진액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제는 가뭄이 와도 문제가 없고 장마가 져도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소화하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며 우리 또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자기 존재의 정체의식을 분명히 하고 그 의식과 그 체험에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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