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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와 그 가지(요 15:1-10)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가 "나는 무엇이다"라는 선언입니다. 그것은 대개 비유적인 것입니다만 "나는 무엇이다"가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이며, 영어로는 "I am"으로써 이 표현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이미 공부한 것을 돌이켜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상징적인 것으로 빛이 가지는 성격과, 예수님 자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해주는 비유입니다. 또는 "나는 생명의 물이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자신을 생명수로 설명하셨고,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 살을 먹어야 한다"고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생명의 관계에 있음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인해서 잘 살고 출세하는 관계가 아니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명적인 관계에 있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무엇이다라는 표현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표현입니다.
"나는 빛이다, 생수다, 선한 목자다, 생명의 떡이다. 포도나무다"라는 표현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보편적이고 쉬운 낱말들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는 반도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이해하고, 부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알기 쉬운 떡과 물과 빛과 포도나무, 그리고 선한 목자 등으로 일반적인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부분은 목자였고 그들의 농사는 포도와 밀로써, 밀로 빵을 만들어 그들의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고기는 주로 양고기를 먹으며 여기에 곁들이는 음료수가 포도주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친숙한 식물 중의 하나였기에 예수님께서 포도나무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비유에서 착안해야 할 것은 신비로운 비유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적인 연결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생명적 관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관계로 비약하는 설명입니다. 식물학적으로 보면, 가지가 없는 줄기가 없고 줄기가 없는 가지는 살 수가 없습니다. 잘 아는 대로 나무에는 원줄기와 가지가 있고 가지에는 잎이 있습니다. 잎은 가지에 붙어서 태양열을 받아 줄기에게 주고, 또한 줄기는 뿌리에서 오는 진액을 받아 잎으로 연결시켜 서로 의존하고 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줄기가 먼저입니다. 서로 같이 연결되어 있지만 가지는 몇 개 끊어도 줄기가 살수 있지만 줄기를 끊으면 가지는 다 말라 버립니다. 원줄기는 생명의 근원으로써 끊을 수 없는 생명적인 연결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 참 포도나무라는 말에서 가짜 포도나무가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참 포도나무란 좋은 포도로서 종자가 좋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마도 예레미야 2:21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 이것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순전하고도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어째서 악한 가지가 되었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참 포도나무"는 잡종이 아닌 순종으로 순전한 포도나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좋은 포도나무, 참 포도나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모두가 순전할 수밖에 없고 열매는 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병들어 원 나무가 병들면 가지는 자연히 병들고 좋은 열매는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포도나무라고 말하지만, 사실 포도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넝쿨입니다. 성경에서는 원 굵은 줄기를 나무라 했고 가는 줄기를 가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처음 심으면 3년이 지나야 열매가 맺는데 가지는 겨울 동안에 말라죽고 봄에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니까, 줄기는 항상 있고 가지는 해마다 돋아나는 것으로, 줄기는 변하지 않지만 가지는 계속 변합니다. 이 가지에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습니다. 포도나무를 잘 가꾸는 사람들은 포도가 조금 열리면 모두 따 버리고 충실하게 줄기를 가꾸어서 다음에 좋은 포도를 맺게 합니다. 어쨌든 포도나무는 넝쿨이지만 포도나무라 부르는데 소나무와 같은 나무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어쨌든, 포도나무의 원 줄기는 불변하는 가지는 가변적인 것으로 잘라버릴 수 있습니다. 즉, 가지는 나무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일나무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가지와 잎이 무성하면 열매가 충실치 못합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대부분 전정(剪定 : 가지를 쳐주는 것)을 해서 충실한 가지를 남겨 좋은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예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비유로 포도나무를 들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게 하시느니라."(요 15:2) 가지의 첫째 여건은 원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조건으로,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서 죽어버리게 됩니다. 둘째는 열매는 맺어야 합니다. 열매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무자비하게 끊어 버리고 열매맺는 가지는 더 좋은 열매를 위하여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원리에 의해서 깨달아야 할 진리를 본문에서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 : 5) 말씀 그대로가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를 빼면 자신은 아무 것도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고백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원 줄기에서 끊어지면 말라버리고 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나와의 관계가 그만큼 절대적인 관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없이 무슨 일이든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의 길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는 각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부하냐, 가난하냐, 출세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최우선으로, 신앙이 절대 우선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나는 예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는 일을 떠나서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마귀의 자식으로, 죄의 종으로 무엇이 되겠습니까? 행위는 물론이고 지혜도, 능력도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벌써 망했을 것이다. 또는 상상할 수도 없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출세했고, 돈을 벌었을 것인데 예수 믿다 보니 이렇게 되었노라"고 오히려 이상한 자기 변명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로서 예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절대로 열매 맺지 못합니다. 지식이 있습니까? 예수없는 지식은 소용없습니다. 예수 없이 배운 지식은 오히려 무서운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없이 돈을 잘 버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나라까지 망치는 수가 허다합니다. 예수없는 모든 것이 무효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본문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많이 벌고 적게 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 안이냐 밖이냐가 문제입니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음에 대해 성경은 복음적인 성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좋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평가에 합격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그런 율법적이고 공로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붙어 있으므로 인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적이며 은총 중심의 세계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해서 예수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어서 예수께로부터 받은 진액을 가지고, 즉 원줄기에서 진액을 받아 그리스도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맺는 것이지 내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내가 나된 것은 은혜로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지금 내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소, 의를 생각하고, 지혜를 생각했더라도 나의 나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 인격이 존재하고 내 선행이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노력할 것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꼭 붙어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누구를 사랑하지 못해서 괴로와하십니까? 그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힘을 얻어서 원수라도 사랑하게 됩니다. 나 스스로 진실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러나, 예수를 사랑하면 진실할 수가 있습니다. 혹시 게으르다고 생각되십니까? 열심히 예수께 붙어 있으면 부지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성격을 이기지 못해 고민하십니까? 사실 자기를 콘트롤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니, 예수님으로부터 중생의 역사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노력해야 할 것은 얼마나 예수님께 붙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진액을 받아야 예수적인 열매를 맺을 것 아닙니까? 언제나 은총과 은혜가 먼저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먼저입니다. 그리하여, 열매를 맺으면 더 맺게 하시기 위해서 깨끗게 하시는 은혜 중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때때로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마저 빼앗아서 있는 자에게 더 주시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속에 사는 사람에게는 더 주고 더 주십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감사할 일만 생기고, 원망하는 사람에게는 원망할 일만 생깁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공평하려면 있는 자의 것을 빼앗아서 없는 자에게 주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있는 자에게 더 줍니다. 본문 말씀처럼 열매맺는 가지는 더 충실하게 더 깨끗하게 하시고, 충실치 못해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는 끊어버려 밖에서 불사르게 됩니다. 목적이 열매에 있기에 열매 맺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원 가지에 붙어 있다는 것, 즉 연합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 : 7)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불도 발전소에서부터 여러 가지 과정을 지나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데, 그 도중에 부도체가 있으면 전기는 끊어집니다. 원 줄기에서 바로 전기가 오고 가야 하는 것처럼, 말씀이 항상 우리 마음에 있어서, 생각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 모두가 그 말씀대로 하여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일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원 줄기에서 끊어진 가지이므로 제멋대로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그것은 원 줄기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며, 잘 수용해야 하며,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내 생활 내 운명을 책임져 줍니다.
아버지는 농부입니다. 사랑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으면 농부되시는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말씀의 열매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사랑 안에 거하라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사랑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 사랑이란, 내 뜻보다 상대방의 뜻이 더 좋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생각이 항상 옳다고 하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나보다 더 지혜롭고 옳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주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순종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순종함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기쁜 마음으로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에 기쁨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수고에 기쁨이 동반될 때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기쁨이며 항상 만족이 있습니다. 희생에 기쁨이 보태어지는 것이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과 순종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될 때 그의 진액을 받아서 그의 열매가 내 생활에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열매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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