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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가편(7,537편)〓/곽선희 목사 설교

택정함을 받은 종(1장 11~17절)

by 【고동엽】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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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정함을 받은 종(11117)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명실공히 택정함을 받은 종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들은 공통적으로 큰 특징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들은 어떤 객관적인 진리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복음에 대한 자기 간증과 고백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이렇습니다' '생명의 길은 이렇습니다'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복음과 나와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 살고 이 복음에 내 운명을 걸었습니다'라는 자기 간증, 자기 신앙고백을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어떤 학술적인 이론을 정립했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 이론이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생명을 지니지 못합니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합쳐졌을 때에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역사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것에 치우치면 고집만 부리게 되고 독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주관은 필요합니다. 또 객관적인 것에만 너무 치우치면 지나치게 이성적이 되고 냉정해집니다. 관념론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합쳐졌을 때에 마침내 큰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하여 천하없는 진리를 논리 정연하게 펼친다 하더라도 자기 체험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경험, 나의 신앙간증, 나의 깊은 신앙체험이 함께 해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복음의 진수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 복음과 자신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복음의 종이다, 나는 복음을 위해 태어났다, 오늘도 복음을 위해 살고 내일도 복음을 위해 죽을 것이다-복음이 나의 생명이며 내 존재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이 본문 말씀을 읽고 또 읽어보십시오. 제가 성경말씀 중에 특별히 사랑하는 본문들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마는 오늘의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늘 가까이에 두고 읽고 또 읽습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은 목사로서 좋아하는 구절이요, 개인으로서 좋아하는 구절이요, 내 체험으로 신앙고백으로 귀히 여기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 번 읽으면서 바울의 마음과 같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든지 절대로 낙심함이 없이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일꾼된 기본적인 자기 정체(正體), 자기 인식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된 정체-한마디로 소명(召命)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그 부름에 따라 부름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설교가로 유명한 스퍼젼(Spurgeon, C. H.) 목사에게 젊은 제자들이 찾아와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소명이 무엇입니까? 소명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끝까지 피곤하지 않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소명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명, 영어로는 콜링(calling)-부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름을 분명히 들었습니까? 분명히 듣고 삽니까?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며 산다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사무엘아" "사울아" 하고 부르신 것처럼 '아무개야' 하고 오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다면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습니까? "" 하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진 삶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개인적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의문입니다. 부부간을 예로 들어봅시다. 결혼해서 얼마동안 살다보면 때로 배우자가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장가를 잘못 들었지' '하나님의 부름을 잘못 들었나봐' 하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하나님께서 '너는 이 사람하고 결혼해서 살아라' 하고 지정해 주었더라면 좀 싫어진다고 해도 열심히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질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 교역자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너는 그 교회를 맡아 그곳에서 평생 일하라' 하고 딱부러지게 말씀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어렵다고 하여 쉽게 지치거나 물러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름이 분명치 않습니다. 그런 부름을 따라 교역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소명(calling)이란 무엇일까요? 스퍼젼 목사는 세 가지로 나누어 대답합니다. 첫째, 심리적으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볼 때에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귀한 직업, 가장 귀한 일로 생각되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둘째, 그 일이 가장 수월해야 합니다. 쉬워야 되지 어려우면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맡기시려고 할 때에는 이미 거기에 필요한 달란트를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미리 다 준비를 해주셨기에 쉬울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쉬운 일이 바로 소명입니다.

셋째,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워야 합니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괴롭다면 부름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가장 쉽고 가장 자신 있는 일을 에스컬레이트해나가는 것, 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이 바른 충성입니다. 굳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겠다고 발버둥칠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 가능한 일을 극대화하면서 충성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소명에 응답하는 자세입니다.

소명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신학적 이론 몇 가지가 본문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소명이 의식 이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자기가 깨닫는 날부터 소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모두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예컨대 중생(重生)의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은 '내가 어느 달 며칠 몇 시에 중생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중생을 깨달은 것이지 중생 자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생은 의식 이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알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기억하지도 못할 때, 미처 깨닫지도 못할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놓으셨고 그 다음에 그 부름에 대한 깨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도 한가지입니다. 생명에 대한 의식이 오늘에 있는 것이지 생명에 대한 신비는 그 이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기억합니까? '내가 너를 젖먹여 키우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었다'하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실감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저귀 차던 시절을 상기하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세 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주가 좋아서 어머니 뱃속에 있던 일을 기억한다고 합디다마는 거짓말입니다. 아는 사람 없습니다. 가끔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수 믿었다'고 하는 사람을 봅니다. 모태적 언제 예수를 믿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냥 어머니 뱃속에 있어 딸려 다닌 것이지요. 무릇 중요한 일들은 의식 이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도 의식 이전에 받은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아느니 모르느니 말하지만 실인즉 아는 것은 조금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받은 바 그 사건, 그 사랑은 엄청난 분량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바 그 사건, 내가 깨닫는 것은 1만분의 하나도 못될 정도로 극소합니다. 미처 모르고 지나간 것들,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고 큰 것인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실과 사실에 대한 이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내가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요, 사건은 그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지상에는 사건과 일들로 꽉 차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 좋은 기자라 해도 그 사건 하나 하나를 고스란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또 사실대로 밝히겠다고 듭니다마는 아무리 밝히려고 해도 사실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있는 것이지 누구도 사실을 바로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본 측면일 뿐입니다. 한 면을 보고 전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보아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건과 사건에 대한 이해 또한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로 돌아가 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소명을 깨친 것이 언제입니까? 바로 다메섹 도상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인 사람입니다. 이집저집 숨어 있는 사람들까지 끌어내 관청에 넘기고 공회에 넘기는 등 핍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다메섹으로 멀리 도망가 있는 기독교인들을 붙잡겠다고 끈덕지게 쫓아가는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에 가까운 도상에서 벌건 대낮에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놀란 그는 얼른 대꾸합니다. "뉘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바울은 그자리에 쓰러져 완전히 무릎을 꿇었고 마침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위대한 사도로 탄생합니다. "사울아!"-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 그 순간에 부름을 받은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부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에야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문에서는 굉장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만세 전부터 예정하시고 나를 점찍어 놓으셨다는 귀중한 고백이올시다. 하나님의 영원한 플랜, 영원한 경륜, 신비로운 섭리 중에서 부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두 문화권에 걸쳐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두루 유창했습니다. 부모가 이민을 가 미국에서 성장한 아이들을 보니 영어를 잘합디다. 그런가하면 한국에 돌아와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한국말도 잘해요. 두 나라 말이 다 가능합니다. 제가 언젠가 보니 김장환 목사님의 아들도 한국말과 영어를 똑같이 잘하더군요. 통역도 잘합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한국사람이고 어머니가 미국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선교사로 일하기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유리한 처지에 있습니까? 이처럼 환경과 문화를 타고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여 중학교 가서 배우고 고등학교 가서 배우자니 어렵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수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 문화권에 걸쳐서 성장하는 것은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요즘은 한국에 있는 사람은 영어를 잘해야 출세하고 미국에 있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잘해야 출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포 아이들이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반가운 소식입니다. 국제화시대에 살아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선교사로 나가려면 헬라어에 능통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는 헬라어가 세계의 통용어였기 때문에 헬라어를 못하면 선교가 어려웠습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로서는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통역관을 세우고 다녀야 하니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마가가 통역관이었다고 전해오지만 그 정도로는 인사나 하러 다닐 수 있지 선교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철저한 히브리 가정에 태어나 히브리 문화에 정통하고, 헬라어와 헬라 철학에도 정통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도 철학을 공부합니다. 또 바리새인으로서 철저한 히브리적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그가 자라 온 생애와 공부한 경력은 선교사가 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더구나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까지 했으니 훈장까지 달았습니다. 괴롭히고 죽인 경험까지 있기에 예수를 전하다가 봉변을 당해도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옥에서 죽어도 할말이 없습니다. 남을 죽였으니 나도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사울아!' 불러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이 부름 받은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모두 부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그 아들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명을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름 받는다고 하여 행여나 꿈속에서라도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아무개야'하고 부르시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꿈속에서 한두 번 들어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에 일이 뜻대로 안되면 '그때 내가 잘못 들었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손바닥에 새겨나주시면 소용이 있을까, 환상 중에 들은 것은 이다음에 다시 의심하게 마련입니다. 꼭 딴소리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부름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왜 사업에 실패했을까? 왜 연애에 실패했을까? 왜 공부에 낙제했을까? 왜 이렇게 지내왔을까?-후회하고 불평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에 부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부름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80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실인즉 갈대상자에 실려 떠내려가기도 전부터입니다. 갈대상자에 실려 떠내려가다가 갈대밭에 걸렸고 바로의 공주가 주워가는 바람에 궁전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로 나와 40년 동안 목자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80 세에 부름을 받습니다. 80년 동안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려면 적어도 애굽의 그 당시 문물을 다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한마디로 높은 지성을 얻어야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키셨던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광야로 보내어집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만드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목자로서 처가의 양을 칩니다. 처가살이 40 년이라면 남자로서는 볼장 다 본 것입니다. 끝난 인생입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호렙산 기슭에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찾으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보십시오. 80년 세월이 그냥 덧없이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전부가 부름입니다. 귀에 들리는 것만이 부름입니까? 그가 귀로들은 것은 80 세 때이지만 사실은 어머니 태로부터 80년 동안 줄곧 부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높은 경륜 안에서, 필요한 문화권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의 경험과 생애를 통하여 부르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전적인 은혜를 뜻합니다. 이는 역사적이요 사실적이며, 또한 고백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은혜로 부르셨다'-공짜로 받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무자격한 그를 부르신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殘害)하고(13)"-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를 핍박한 죄인의 괴수(魁首)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름 받았으니 감지덕지할 따름입니다. 더는 할말이 없습니다. 오늘 부름을 받았으니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매를 맞아도, 감옥에 들어가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부르셨다는 사실을 전적인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름 받은 자의 자아의식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성격이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14절에서와 같이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바리새 교인 중에서도 특별히 열심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주께서 부르셨다고 그는 말합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오직 은혜-이 은혜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자격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내가 있게 된 모든 것을 은혜로 돌립니다. 재간이 있음도 아니요 능력이 있음도 아니며, 정결함이 있음도 아니요 의가 있음도 아니요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내가 주의 종이 된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도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했다면 오늘도 내가 하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은혜입니다. 그렇게 알고 사는 사람이 주의 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계시성(啓示性)입니다. 11, 12절을 보면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세컨드 핸드(second-hand)가 아니라 다이렉트(direct)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어디로 한번 거쳐서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들은 것입니다. 이 직접성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한테 들었고 누구한테 배웠으며 누구와의 관계가 어떻고 하면서 돌려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책에서 볼 수도 있고 남의 경험을 통할 수도 있으며 간증과 설교를 들어서 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내가 직접 만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직접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지식이 아니요 체험입니다.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사실이요 사건입니다. 그래서 계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해서 당신의 전권적인 능력으로 이끌어 나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것이 계시입니다. 내 지식, 내 능력, 내 감정, 내 체험-나의 모든 것을 다 이용해서 하나님의 전권적인 능력으로 나를 주장하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적극적이요 창조적이요, 효과적인 역사입니다.

'계시'란 원래 '아포칼뤼프시스'-'너울을 벗긴다'는 뜻입니다.

마치 드리워진 면사포를 위로 벗겨서 서로 마주보게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너울을 벗겨서 우리로 하여금 직접 하나님을 뵙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직접 보았다, 직접 내게 가르쳐 주었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관한 한은 언제나 직접성을 강조하면서도 그의 말 가운데에 보면 그의 행정이라든가 행한 일, 조직 등에서는 직접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고 세움 받은 것은 안디옥교회에서입니다. 거기서 추천하여 세우고 안수하여 파송한 것입니다. 또한 선교하다가 문제점이 발생하면 그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교회로 올라가 공회를 열어 해결한 다음에 다시 이방 교회로 떠났습니다. 이처럼 회의를 통해서, 때로는 지도자를 통해서, 또는 윗사람의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 것만은 '노우(N0)'-직접 들었다고 말합니다. 제반 행정상의 문제들은 얼마든지 간접적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계시에 관한 한, 말씀에 관한 한, 복음에 관한 한에는 직접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 두 측면의 성격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는 자칫 거꾸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가고 오는 일에 대해서는 마치 직접 받은 것처럼 말하고 복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남으로부터 배운 것처럼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복음은 직접 받은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직통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책도 보고 다른 사람의 것도 참고하는 등 여러 모로 준비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점은 계시성입니다. 카리스마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사 직접 설교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고 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설교를 듣는 자세도 매우 중요합니다. 듣기는 목사인 저의 음성을 듣습니다. 제가 설명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 육성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내게 직접 들려지는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없이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 말씀 저 말씀 다 듣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는 사람만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을 듣는 사람이라야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것을 듣지 못한 사람은 은혜 받으러 왔다가 졸기만 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배운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재미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설교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이미 기록된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읽어나가고 해설하는 동안 성령으로 감동하사 내게 직접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것에 진실하게 응답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아니다, 오직 주께로서 직접 받은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6, 17절에 보면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라고 합니다. 이 또한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 계시받은 사람은 문제를 이렇게 해결합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볼 때에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말은 부모님께 의논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선배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아라비아로 갔다가"--아라비아로는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흔히 '아라비아 3'이라고 말하듯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다메섹으로 돌아옵니다. 복음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왔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최종 해결도, 구체적인 해결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고자 했습니다.

가끔 저를 찾아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개하고 결혼하려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닐까요?" 참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만 해도 부모님께 여쭈어볼 수도 있고, 목사님께 의논드릴 수도 있고 친구에게 조언을 들을 수도 있지마는 그 누구도 바르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내 운명을 책임질 타인이 없습니다. 마지막 결정은 기도하여 마침내 스스로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직접 통하여야 합니다. 얼마전 한 처녀가 프로포즈를 받아 마음이 착찹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척 한 분을 모시고 교회에 들어가 이틀 동안 철야기도를 하고 나서야 결단을 내려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과연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는 일생을 두고 살아봐야 알 일이지만 그 자세가 참으로 바람직합니다. 적어도 프로포즈를 받고서 결정하기까지는 하룻밤이라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좋다느니 싫다느니 하며 아무렇게나 대답해 놓고는 뒤에 가서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매사를 기도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고교생들이 진학할 대학을 선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기 가서 물어보고 저기 가서 물어보고 하지만 결국 마지막 결정은 기도로써 해야 합니다. 회사 일도 그렇습니다. 여러 의견과 지혜를 다 동원해보되 언제나 마지막 결정은 기도로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세를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은 이러합니다. 마지막 결정에 대해서는 어느 타인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중대한 궁극문제에 관해서는 혈육과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선배와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그 연후에야 다메섹으로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기도로써 결정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인 누가 나를 책임질 수 있습니까? 누가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최종 결정, 궁극적인 결정은 기도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가는 고독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순교자가 부모님께 물어보고 순교합니까? 집에 가서 아내에게 물어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기 위해 부모에게 인사하고 오겠다는 제자를 막았습니다. '가지 마라'-왜 그랬을까요? 인사하러 가면 못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의논하지 말라, 뒤를 돌아보지 말라, 보습쟁기를 든 사람이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심각하게 새겨들을 이야기올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기도하고 '아멘'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다가는 세월 다 가고 맙니다. 기도하고 결정하고 그대로 추진해 나갑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된 자가 지닐 최종판결의 능력입니다. 명심하십시다.

부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이를 결정했는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명실공히 택정함을 받은 종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들은 공통적으로 큰 특징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들은 어떤 객관적인 진리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복음에 대한 자기 간증과 고백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이렇습니다' '생명의 길은 이렇습니다'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복음과 나와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 살고 이 복음에 내 운명을 걸었습니다'라는 자기 간증, 자기 신앙고백을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어떤 학술적인 이론을 정립했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 이론이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생명을 지니지 못합니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합쳐졌을 때에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역사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것에 치우치면 고집만 부리게 되고 독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주관은 필요합니다. 또 객관적인 것에만 너무 치우치면 지나치게 이성적이 되고 냉정해집니다. 관념론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합쳐졌을 때에 마침내 큰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하여 천하없는 진리를 논리 정연하게 펼친다 하더라도 자기 체험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경험, 나의 신앙간증, 나의 깊은 신앙체험이 함께 해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복음의 진수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 복음과 자신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복음의 종이다, 나는 복음을 위해 태어났다, 오늘도 복음을 위해 살고 내일도 복음을 위해 죽을 것이다-복음이 나의 생명이며 내 존재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이 본문 말씀을 읽고 또 읽어보십시오. 제가 성경말씀 중에 특별히 사랑하는 본문들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마는 오늘의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늘 가까이에 두고 읽고 또 읽습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은 목사로서 좋아하는 구절이요, 개인으로서 좋아하는 구절이요, 내 체험으로 신앙고백으로 귀히 여기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 번 읽으면서 바울의 마음과 같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든지 절대로 낙심함이 없이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일꾼된 기본적인 자기 정체(正體), 자기 인식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된 정체-한마디로 소명(召命)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그 부름에 따라 부름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설교가로 유명한 스퍼젼(Spurgeon, C. H.) 목사에게 젊은 제자들이 찾아와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소명이 무엇입니까? 소명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끝까지 피곤하지 않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소명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명, 영어로는 콜링(calling)-부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름을 분명히 들었습니까? 분명히 듣고 삽니까?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며 산다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사무엘아" "사울아" 하고 부르신 것처럼 '아무개야' 하고 오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다면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습니까? "" 하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진 삶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개인적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의문입니다. 부부간을 예로 들어봅시다. 결혼해서 얼마동안 살다보면 때로 배우자가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장가를 잘못 들었지' '하나님의 부름을 잘못 들었나봐' 하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하나님께서 '너는 이 사람하고 결혼해서 살아라' 하고 지정해 주었더라면 좀 싫어진다고 해도 열심히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질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 교역자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너는 그 교회를 맡아 그곳에서 평생 일하라' 하고 딱부러지게 말씀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어렵다고 하여 쉽게 지치거나 물러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름이 분명치 않습니다. 그런 부름을 따라 교역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소명(calling)이란 무엇일까요? 스퍼젼 목사는 세 가지로 나누어 대답합니다. 첫째, 심리적으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볼 때에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귀한 직업, 가장 귀한 일로 생각되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둘째, 그 일이 가장 수월해야 합니다. 쉬워야 되지 어려우면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맡기시려고 할 때에는 이미 거기에 필요한 달란트를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미리 다 준비를 해주셨기에 쉬울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쉬운 일이 바로 소명입니다.

셋째,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워야 합니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괴롭다면 부름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가장 쉽고 가장 자신 있는 일을 에스컬레이트해나가는 것, 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이 바른 충성입니다. 굳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겠다고 발버둥칠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 가능한 일을 극대화하면서 충성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소명에 응답하는 자세입니다.

소명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신학적 이론 몇 가지가 본문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소명이 의식 이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자기가 깨닫는 날부터 소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모두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예컨대 중생(重生)의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은 '내가 어느 달 며칠 몇 시에 중생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중생을 깨달은 것이지 중생 자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생은 의식 이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알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기억하지도 못할 때, 미처 깨닫지도 못할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놓으셨고 그 다음에 그 부름에 대한 깨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도 한가지입니다. 생명에 대한 의식이 오늘에 있는 것이지 생명에 대한 신비는 그 이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기억합니까? '내가 너를 젖먹여 키우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었다'하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실감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저귀 차던 시절을 상기하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세 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주가 좋아서 어머니 뱃속에 있던 일을 기억한다고 합디다마는 거짓말입니다. 아는 사람 없습니다. 가끔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수 믿었다'고 하는 사람을 봅니다. 모태적 언제 예수를 믿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냥 어머니 뱃속에 있어 딸려 다닌 것이지요. 무릇 중요한 일들은 의식 이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도 의식 이전에 받은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아느니 모르느니 말하지만 실인즉 아는 것은 조금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받은 바 그 사건, 그 사랑은 엄청난 분량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바 그 사건, 내가 깨닫는 것은 1만분의 하나도 못될 정도로 극소합니다. 미처 모르고 지나간 것들,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고 큰 것인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실과 사실에 대한 이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내가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요, 사건은 그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지상에는 사건과 일들로 꽉 차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 좋은 기자라 해도 그 사건 하나 하나를 고스란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또 사실대로 밝히겠다고 듭니다마는 아무리 밝히려고 해도 사실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있는 것이지 누구도 사실을 바로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본 측면일 뿐입니다. 한 면을 보고 전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보아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건과 사건에 대한 이해 또한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로 돌아가 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소명을 깨친 것이 언제입니까? 바로 다메섹 도상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인 사람입니다. 이집저집 숨어 있는 사람들까지 끌어내 관청에 넘기고 공회에 넘기는 등 핍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다메섹으로 멀리 도망가 있는 기독교인들을 붙잡겠다고 끈덕지게 쫓아가는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에 가까운 도상에서 벌건 대낮에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놀란 그는 얼른 대꾸합니다. "뉘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바울은 그자리에 쓰러져 완전히 무릎을 꿇었고 마침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위대한 사도로 탄생합니다. "사울아!"-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 그 순간에 부름을 받은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부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에야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문에서는 굉장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만세 전부터 예정하시고 나를 점찍어 놓으셨다는 귀중한 고백이올시다. 하나님의 영원한 플랜, 영원한 경륜, 신비로운 섭리 중에서 부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두 문화권에 걸쳐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두루 유창했습니다. 부모가 이민을 가 미국에서 성장한 아이들을 보니 영어를 잘합디다. 그런가하면 한국에 돌아와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한국말도 잘해요. 두 나라 말이 다 가능합니다. 제가 언젠가 보니 김장환 목사님의 아들도 한국말과 영어를 똑같이 잘하더군요. 통역도 잘합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한국사람이고 어머니가 미국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선교사로 일하기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유리한 처지에 있습니까? 이처럼 환경과 문화를 타고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여 중학교 가서 배우고 고등학교 가서 배우자니 어렵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수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 문화권에 걸쳐서 성장하는 것은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요즘은 한국에 있는 사람은 영어를 잘해야 출세하고 미국에 있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잘해야 출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포 아이들이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반가운 소식입니다. 국제화시대에 살아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선교사로 나가려면 헬라어에 능통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는 헬라어가 세계의 통용어였기 때문에 헬라어를 못하면 선교가 어려웠습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로서는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통역관을 세우고 다녀야 하니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마가가 통역관이었다고 전해오지만 그 정도로는 인사나 하러 다닐 수 있지 선교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철저한 히브리 가정에 태어나 히브리 문화에 정통하고, 헬라어와 헬라 철학에도 정통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도 철학을 공부합니다. 또 바리새인으로서 철저한 히브리적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그가 자라 온 생애와 공부한 경력은 선교사가 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더구나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까지 했으니 훈장까지 달았습니다. 괴롭히고 죽인 경험까지 있기에 예수를 전하다가 봉변을 당해도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옥에서 죽어도 할말이 없습니다. 남을 죽였으니 나도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사울아!' 불러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이 부름 받은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모두 부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그 아들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명을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름 받는다고 하여 행여나 꿈속에서라도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아무개야'하고 부르시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꿈속에서 한두 번 들어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에 일이 뜻대로 안되면 '그때 내가 잘못 들었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손바닥에 새겨나주시면 소용이 있을까, 환상 중에 들은 것은 이다음에 다시 의심하게 마련입니다. 꼭 딴소리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부름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왜 사업에 실패했을까? 왜 연애에 실패했을까? 왜 공부에 낙제했을까? 왜 이렇게 지내왔을까?-후회하고 불평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에 부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부름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80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실인즉 갈대상자에 실려 떠내려가기도 전부터입니다. 갈대상자에 실려 떠내려가다가 갈대밭에 걸렸고 바로의 공주가 주워가는 바람에 궁전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로 나와 40년 동안 목자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80 세에 부름을 받습니다. 80년 동안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려면 적어도 애굽의 그 당시 문물을 다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한마디로 높은 지성을 얻어야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키셨던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광야로 보내어집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만드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목자로서 처가의 양을 칩니다. 처가살이 40 년이라면 남자로서는 볼장 다 본 것입니다. 끝난 인생입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호렙산 기슭에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찾으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보십시오. 80년 세월이 그냥 덧없이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전부가 부름입니다. 귀에 들리는 것만이 부름입니까? 그가 귀로들은 것은 80 세 때이지만 사실은 어머니 태로부터 80년 동안 줄곧 부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높은 경륜 안에서, 필요한 문화권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의 경험과 생애를 통하여 부르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전적인 은혜를 뜻합니다. 이는 역사적이요 사실적이며, 또한 고백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은혜로 부르셨다'-공짜로 받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무자격한 그를 부르신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殘害)하고(13)"-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를 핍박한 죄인의 괴수(魁首)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름 받았으니 감지덕지할 따름입니다. 더는 할말이 없습니다. 오늘 부름을 받았으니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매를 맞아도, 감옥에 들어가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부르셨다는 사실을 전적인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름 받은 자의 자아의식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성격이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14절에서와 같이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바리새 교인 중에서도 특별히 열심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주께서 부르셨다고 그는 말합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오직 은혜-이 은혜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자격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내가 있게 된 모든 것을 은혜로 돌립니다. 재간이 있음도 아니요 능력이 있음도 아니며, 정결함이 있음도 아니요 의가 있음도 아니요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내가 주의 종이 된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도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했다면 오늘도 내가 하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은혜입니다. 그렇게 알고 사는 사람이 주의 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계시성(啓示性)입니다. 11, 12절을 보면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세컨드 핸드(second-hand)가 아니라 다이렉트(direct)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어디로 한번 거쳐서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들은 것입니다. 이 직접성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한테 들었고 누구한테 배웠으며 누구와의 관계가 어떻고 하면서 돌려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책에서 볼 수도 있고 남의 경험을 통할 수도 있으며 간증과 설교를 들어서 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내가 직접 만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직접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지식이 아니요 체험입니다.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사실이요 사건입니다. 그래서 계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해서 당신의 전권적인 능력으로 이끌어 나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것이 계시입니다. 내 지식, 내 능력, 내 감정, 내 체험-나의 모든 것을 다 이용해서 하나님의 전권적인 능력으로 나를 주장하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적극적이요 창조적이요, 효과적인 역사입니다.

'계시'란 원래 '아포칼뤼프시스'-'너울을 벗긴다'는 뜻입니다.

마치 드리워진 면사포를 위로 벗겨서 서로 마주보게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너울을 벗겨서 우리로 하여금 직접 하나님을 뵙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직접 보았다, 직접 내게 가르쳐 주었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관한 한은 언제나 직접성을 강조하면서도 그의 말 가운데에 보면 그의 행정이라든가 행한 일, 조직 등에서는 직접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고 세움 받은 것은 안디옥교회에서입니다. 거기서 추천하여 세우고 안수하여 파송한 것입니다. 또한 선교하다가 문제점이 발생하면 그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교회로 올라가 공회를 열어 해결한 다음에 다시 이방 교회로 떠났습니다. 이처럼 회의를 통해서, 때로는 지도자를 통해서, 또는 윗사람의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 것만은 '노우(N0)'-직접 들었다고 말합니다. 제반 행정상의 문제들은 얼마든지 간접적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계시에 관한 한, 말씀에 관한 한, 복음에 관한 한에는 직접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 두 측면의 성격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는 자칫 거꾸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가고 오는 일에 대해서는 마치 직접 받은 것처럼 말하고 복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남으로부터 배운 것처럼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복음은 직접 받은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직통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책도 보고 다른 사람의 것도 참고하는 등 여러 모로 준비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점은 계시성입니다. 카리스마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사 직접 설교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고 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설교를 듣는 자세도 매우 중요합니다. 듣기는 목사인 저의 음성을 듣습니다. 제가 설명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 육성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내게 직접 들려지는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없이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 말씀 저 말씀 다 듣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는 사람만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을 듣는 사람이라야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것을 듣지 못한 사람은 은혜 받으러 왔다가 졸기만 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배운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재미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설교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이미 기록된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읽어나가고 해설하는 동안 성령으로 감동하사 내게 직접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것에 진실하게 응답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아니다, 오직 주께로서 직접 받은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6, 17절에 보면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라고 합니다. 이 또한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 계시받은 사람은 문제를 이렇게 해결합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볼 때에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말은 부모님께 의논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선배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아라비아로 갔다가"--아라비아로는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흔히 '아라비아 3'이라고 말하듯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다메섹으로 돌아옵니다. 복음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왔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최종 해결도, 구체적인 해결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고자 했습니다.

가끔 저를 찾아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개하고 결혼하려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닐까요?" 참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만 해도 부모님께 여쭈어볼 수도 있고, 목사님께 의논드릴 수도 있고 친구에게 조언을 들을 수도 있지마는 그 누구도 바르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내 운명을 책임질 타인이 없습니다. 마지막 결정은 기도하여 마침내 스스로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직접 통하여야 합니다. 얼마전 한 처녀가 프로포즈를 받아 마음이 착찹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척 한 분을 모시고 교회에 들어가 이틀 동안 철야기도를 하고 나서야 결단을 내려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과연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는 일생을 두고 살아봐야 알 일이지만 그 자세가 참으로 바람직합니다. 적어도 프로포즈를 받고서 결정하기까지는 하룻밤이라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좋다느니 싫다느니 하며 아무렇게나 대답해 놓고는 뒤에 가서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매사를 기도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고교생들이 진학할 대학을 선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기 가서 물어보고 저기 가서 물어보고 하지만 결국 마지막 결정은 기도로써 해야 합니다. 회사 일도 그렇습니다. 여러 의견과 지혜를 다 동원해보되 언제나 마지막 결정은 기도로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세를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은 이러합니다. 마지막 결정에 대해서는 어느 타인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중대한 궁극문제에 관해서는 혈육과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선배와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그 연후에야 다메섹으로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기도로써 결정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인 누가 나를 책임질 수 있습니까? 누가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최종 결정, 궁극적인 결정은 기도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가는 고독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순교자가 부모님께 물어보고 순교합니까? 집에 가서 아내에게 물어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기 위해 부모에게 인사하고 오겠다는 제자를 막았습니다. '가지 마라'-왜 그랬을까요? 인사하러 가면 못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의논하지 말라, 뒤를 돌아보지 말라, 보습쟁기를 든 사람이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심각하게 새겨들을 이야기올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기도하고 '아멘'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다가는 세월 다 가고 맙니다. 기도하고 결정하고 그대로 추진해 나갑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된 자가 지닐 최종판결의 능력입니다. 명심하십시다.

부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이를 결정했는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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