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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한 믿음(디모데전서 1:18-2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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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한 믿음(디모데전서 1:18-20)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타난 믿음의 파선이라는 말은 바울의 비유 중에서 가장강한 표현을 쓴 매우 심판적인 내용의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파선이라는 말은 배가 깨어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는 실로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입니다. 배가 깨어지게 되면 배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은 사람이든, 보화이든, 화물이든 할 것 없이 모두 다 무효가 되고 맙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난을 믿음의 배에 타고 가는 하나의 항해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배를 타고 하늘나라를 향하여 이 세상을 항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믿음의 배가 크고 튼튼해야 합니다. 만약 이 배가 시원치 않아서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물이라도 새어 들어오게 된다면 이것은 정말 큰일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가끔 바닷가에 가보면 크고 작은 배들이 출항에 앞서 수리를 하고 점검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조선소에를 들렸더니 큰 군함들이 수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만약 그와 같은 거대한 배들이 항해 중 배에 물이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자라면서 많은 배를 타 볼 수가 있었고 저희 집에도 할아버지가 즐기시는 낚시질을 위해 조그마한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도 가끔 배를 타게 될 때가 있었는데 이 배가 조금 낡아지게 되면 자꾸만 물이 새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이면 솜이라도 가지고 가서 칼끝으로 쑤셔가면서 그냥 틀어막습니다 만은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어서 아주 낡은 배는 틀어막을수록 점점 더 구멍이 커지면서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배라는 것은 물이 새지 않고 튼튼해야 합니다.

배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운명은 배의 안전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 타있고 값비싼 좋은 물건이 실려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실은 배가 파선되면 그것으로 그 모든 것이 다 끝장인 것입니다. 배가 뒤집혀지고 침몰되는 한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배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해하는 배는 풍랑을 이겨야 하고 암초를 잘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잘 피하지 못하여 들이받게 되면 아무리 좋은 배라도 침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바다가 깊지 않은 인천과 같은 항구에서는 특별히 외국 선박의 입항을 위해 파일럿(pilot)이라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근 연안의 해저 사항을 그야말로 손금을 보듯이 환하게 보는 사람들로서 몇 십 년 간 외국 선박만을 받아서 손수 조정을 하여 입항을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해도를 보고 인천항 가까이 까지 항해를 해오기는 하였으나, 수면이 깊지 못한 인근 연안의 해저 사항은 잘 모르는 외국 선박의 항해사가 아직은 깊은 황해 바다의 한 지점에서 무전을 치게 되면 이 분들이 즉시 작은 배를 타고 나가서 그 큰배를 받아서 직접 운전을 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이 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가 이제 입항하는 도안 파선이 되거나 좌초되는 것은 바로 이 파일럿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분들에게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동시에 많은 재산의 등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대단한 대우를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중 제가 아는 한 분은 지금까지 몇 십 년 동안 그 일을 해왔지만 단 한번도 잘못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 이분은 인천 앞 바다의 깊은 속을 훤하게 보고 있어서, 큰배만을 조종해 오면서도 암초에 부딪히지 않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배는 거센 비바람과 태풍을 피해야 합니다. 정말 강한 태풍과 해일이 이는 앞에서는 배가 남아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항해하는 배에게는 여러 가지의 많은 위험이 있습니다 만은 그럼에도 배는 잘 보존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믿음 은잘 지켜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배가 가라앉거나 하는 위험 지경에 이르게 되면, 배 안에 있는 짐들은 바다에 던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기 위하여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하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27장 말씀 중에 보면, 바로 그와 같은 장면들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8-19). 이는 항해를 함에 있어서 배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은 보화도 중요하고 학벌도 중요하며, 가족이나 애인 등,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는 오직 믿음이라는 티켓(ticket)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일단 배가 보존되고 나서야 사람이 있고 보화도 있듯이, 믿음이 있고 난 다음에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가졌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하늘 나라에까지 인도해 가는 배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이 믿음이라는 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배는 금보다도 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 생명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배가 어느 순간 파선이 된다고 하면 모든 것은 거기에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우리가 탄 배, 즉 믿음의 배가 어떻게 하면 무사히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보면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도한 예언!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가 되고 경험과 능력이 되며 방향 제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해도가 되고 나침반이 되어 주심으로 그것을 따라 방향을 바로 정하며 항해를 계속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물어야하는 중요한 과제는 내 믿음의 배가 초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가? 그리고 가야할 방향으로 정확하게 가고 있는가? 또한 나침반에 고장은 나지 않았는가? 내 믿음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을 재점검해 봐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항해를 하는 사람은 풍랑과 싸우는가하면 지루함과도 싸워야하며, 게으름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 등, 참으로 많은 어려운 문제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필요한 자세는 사느냐? 죽느냐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여러 가지 중에서 고르는 하나가 아니라, 이것이 없으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마음으로 붙들어야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유언장과도 같은 디모데후서 4:7 말씀에서도 보면"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주어진 인생을 거의 다 산 사도 바울이 눈앞에 죽음이 가까워 옴을 느끼면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있는 말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달려갈 길을 다 갔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다! 바꾸어 말하면 이제는 건강도, 기력도 없으며 더 이상 일할 것 같지도 않을 만큼 다 없어진 터이나 오직 한가지 믿음만은 내가 끝까지 지켰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습니다하고 자랑할 업적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마지막 요단강을 건너가기 직전 제할 것을 다 제하고 결산을 한 후에 남는 것이 믿음이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제 가진 것은 없으나 믿음하나 지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다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씀에 이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양심을 버렸고 믿음은 배가 깨어지듯이 깨어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양심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말을 헬라어로는 '수네이데시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함께 라고 하는 뜻의 '' 이라는 말과 안다라고 하는 뜻의 '에이데시스' 가 합쳐서 된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그 뜻을 그대로 옮겨 컨션스(conscience)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또한 컨(con)과 싸이언스(science)가 합쳐서 된 말로서, 직역을 하면 함께 얻어지는 지식이라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 혼자서 알고 생각하는 지식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갖게 되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과 함께 얻어지는 지식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와 같은 지식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적인 하나님의 형상에서 나오는 참된 지식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을 이해함에 있어서 동서양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적인 이해를 놓고 보면 대체로 양심을 감정의 소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반면에, 서양적인 이해는 컨션스(conscience)라는 말이 뜻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양심을 지식의 소재로 생각합니다. 이 지식이란 단순한 일반적 지식의 차원을 넘어 보다 깊은 데서 나오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양심을 이해하는 데에는 동서간에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 양심의 문제를 놓고 오늘 본문에서 생각할 것은 사도 바울이이 양심이라는 말을 그냥 쓰지 않고 "착한 양심"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고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양심이라고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착하고 선한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굳이 착한 양심 혹은 선한 양심이라고 하는 데에는 그렇지 못한 양심이 있기 때문이 것입니다.

제가 군인으로 있을 때에 한 번은 어떤 친구가 도저히 해서는 안될 나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다른 한 친구가 "너는 양심도 없느냐?"하고 묻자 대답하는 말이 "625때 다 불타버렸지 지금 그게 있나?"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어떤 친구는 "그 귀찮은 것 집에 두고 다니지 무엇 때문에 가지고 다니느냐?"며 반문을 하는 것인데, 두 가지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가지고 다니면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양심을 마취시키고 묶어 버리려고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술에 취하는 일입니다. 맑은 정신 하에서 양심이 살아 말하는 동안은 그 부정한 일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결정할 수도 없겠기에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그 사업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만은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살아있는 자기 양심으로서는 못하겠기에 그런 방법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이라고 하면 특별히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슈바이쳐 박사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슈바이쳐박사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목사님이 농촌 목회를 하면서 꿀벌을 좀 키웠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이 목사님이 벌통을 열어 놓고 꿀벌의 상태를 살펴보는 중이었는데 그때 마침 윗통을 벗고 놀고 있던 슈바이쳐 박사가 그만 벌에 쏘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어린 슈바이쳐 박사가 아프다며 엉엉 울게 되었고, 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는 놀라서 달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가 나와서 보니 아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지라 남편을 향하여 "당신이 정신이 있소 없소? 아이가 윗통을 벗고 노는데 벌통은 왜 만지는거요?"라며 야단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내가 잘못했다며 그야말로 쩔쩔매게 된 것인데 슈바이쳐의 기록에 의하면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욕을 먹는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소리로 울었고 그럴 때이면 아버지를 향하여 나무라는 어머니의 음성도 포르띠씨모(fortissimo)로 커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사가 이렇게 한참 동안 소리를 지르며 울다가 보니 사실 나중에는 아프지도 않은 것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마음속에서 양심이하는 말이 "야 이 녀석아 그만 울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이 일을 기록한 슈바이쳐 박사는 "이것은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말은 하지 않지만 다들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양심은 하나님이 주시는 판단력이요 지성이며 인간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마음의 청결 여부에 따라 양심의 상태가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깨어진 거울과 같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 자체가 이미 병이 들어 기능을 상실한 채 마치 고장난 시계와도 같이 제 구실을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공산주의자의 책자에서는 아무리 뒤져보아도 양심이라는 말이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양심이란 가장 자본주의적인 것으로서 있어서는 안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모 자식지간에도 서로 고발하고 죽일 수 있어야하는 사상과 체계 속에서 양심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면 나약해져서 소위 말하는 혁명적 영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북한에서 이제 넘어온 사람들에게 양심이라는 말을 물어보면 그 단어도 잘 모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가면 머지 않아 북한에서는 양심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장난 양심, 버려진 양심, 파괴된 양심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착한 양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착한 양심이란 중생한 양심, 성령으로 거듭난 양심을 말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를 해 보면 먼저는 깨끗하고 순수한 양심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중에서도 보면 정말 때묻지 않고 난대로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정말 때묻지 아니한 양심이 착한 양심입니까? 거기에 반하여 어떤 사람들은 빤질빤질하게 닳고닳아서 양심이 어느 구석에 있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자기 이권만을 생각하는 비인간적인 양심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의 주위에는 요즈음 세상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깨끗하게 된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는 깨끗지 않던 양심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함으로 거듭난 양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의 기능을 회복한 양심입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구속받고 자유로워진 양심입니다. 그 때문에 과거에는 거리낌과 부끄러움으로 감추고 살아야 하는 양심이었으나 이제는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깨끗하게 자기를 내어놓고 살수 있는 거듭난 양심이요, 자유로워진 착한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착한 양심은 예민한 양심입니다. 불의와 의, 진리와 비진리, 다른 사람의 고통과 나의 안일함 등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착한 양심의 구조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스팔트처럼 굳어버린 화인 맞은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야 어떤 고통을 당하던 심지어 옆에서 누가 죽어간다고 하여도 까딱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피와 눈물도 없는 무서운 양심의 소유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민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유다의 멸망을 탄식하여 너무도 괴로워한 나머지 창자가 끓고, 간이 땅에 쏟아져 내린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이는 기록하기를 예수님은 비록 33년 밖에 이 세상을 살지 않으셨지만, 가장 깨끗한 양심을 가지셨기에 제일 어려운 고통을 당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예민한 양심이 없으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제에서부터 시작하여 625, 버마, 칼기 사건 등, 워낙 끔찍한 사건들을 많이 겪고 보니, 웬만한 일에는 동정심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 밭이 되어버린 것이란 말입니다. 가끔 저는 저 자신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사람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해보고는 합니다 만은 어쨌든 우리가 예민한 양심이 못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양심은 어디까지나 민감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는 순간에는 정말 괴로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고통으로 육체에까지 아픔을 느끼게 되는 그와 같은 민감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감정이나 공감하는 바도 없는 그저 나 하나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뿐 다른 사람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상당히 많은 돈을 가지고 와서 이 돈을 등록금을 못내는 학생들을 위해서 써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분이 대답하기를 이번에 저의 아들이 정말 어렵게, 어렵게 해서 대학에 들어가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대학에 합격을 하고도 돈이 없어서 못 다니는 학생이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괴로워서 그런 학생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대학에 들어갔다고 축하파티 한다며 몇 십 만원씩 없애고는 하는데 자기 자식 합격의 기쁨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하는 그것이야말로 민감한 양심의 발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딘가 모르게 예민한 양심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깨끗한 양심인 것입니다.

착한 양심은 행복으로 이끄는 양심입니다. 양심이란 본래 착한 양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한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함과 동시에,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을 주며 나를 격려합니다. 그러나 병든 양심! 파괴된 양심! 버려진 양심은 자꾸만 나를 불행하고 나쁜 방향으로만 이끌어 갑니다. 그 결과 부끄러움과 두려운 마음이 쌓이게 하며, 나아가서는 원망과 복수에 찬 마음으로 불행을 자초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양심이 아니라 마귀와 더불어 생각하는 양심입니다. 그러니 만큼 무서운 양심입니다. 그런 양심을 가리켜 파괴된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착한 양심이 없는 사람에게 좋은 믿음이 세워지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조심할 것은 좋은 양심으로 인하여 믿음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어디까지나 좋은 믿음이 있음으로 거기로부터 좋은 양심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믿음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양심은 그 나무에 달린 열매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에 그 믿음으로부터 착한 양심적 지식이 발동하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잇는 파선한 믿음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진리에서 떠난 믿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본 궤도에서 떠난 믿음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가 하면 자기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정죄 합니다. 그러자니 회개가 없으며 끝까지 교만한 가운데 자기를 스스로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언제나 자기의 주장이나 판단이 옳은 것으로 굳어져 있는 것인데 이것이 곧 화인 맞은 양심이요 파선된 믿음인 것입니다. 마치 배가 부서지고 깨어져 버리듯이 끝나 버린 구제 불능의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끝까지 강퍅케 된 마음입니다. 이제는 이것으로만 치닫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신학적으로는 현재적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파선된 상태라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모든 것들, 즉 보화와 지식과 명예, 가정과 건강 등 가진 바의 일체가 그대로 물 속에 저장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결론을 내리고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동안 많은 애를 써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어이 파선한 믿음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를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제는 저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동안은 저 사람이 잘되게 해달라고 여러 가지로 기도해 왔으나 이제는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하는 악한 일을 중단시켜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내가 사탄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구체적인 인물로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들고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파선된 믿음의 소유자로서 사도 바울의 복음선교를 끝까지 방해하며 괴롭힌 자들입니다. 실로 얼마나 괴롭혔던지 마지막 유서와도 같은 디모데후서 4:14에 가서 다시 이 사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믿음이 파선된 자들은 사탄에게 내어 주어 징계를 받아 훼방하는 일을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죠지 팍스는 "마귀도 병이 들면 천사가 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아무리 거칠고 악한 사람이라도 병들면 별 수 없이 약하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어느 편을 축복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차라리 병이 들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지금 행하고 있는 악을 중단시키는 것이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고린도전서 5 : 5 말씀에서도 보면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함이라."며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괴로움을 겪었으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매사가 뜻대로 이루어져서 거칠 것이 없다면 그로 인한 교만으로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믿음의 손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저 사람의 저 짓을 좀 중단시켜 주십시오."하고 부탁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매우 두렵고도 단호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에 있어서 배와 같은 믿음! 이 믿음의 배는 끝까지 온전해야 합니다. 항해하는 자에게 있어서 이 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따라서 이 믿음이 흔들리고 깨어져 파선이 되는 날에는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들도 파선과 동시에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이 없는 가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착한 양심과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로서 우리가 가진 바 중생한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지켜나가도록 힘써야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바로 거기에 축복이 있고 약속이 있으며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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