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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믿음(마태복음 8장 5~13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로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기적입니다. 은사를 받는 그릇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축복과 은혜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그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로 믿음으로입니다. 고귀한 믿음, 진실한 믿음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은사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훈이 그러하고, 모든 진리가 그러하고, 모든 대화가 그러합니다. 모든 것에 믿음이 기본이 됩니다.
내게 믿음이 없으면 제아무리 중요한 진리라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충고도, 교훈도, 그 귀한 지혜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 그 믿는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때로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보고 "왜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왜 믿음이 적으냐"라고 책망하실 때도 있습니다. 큰 믿음, 작은 믿음-곧 큰그릇과 작은 그릇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큰그릇을 가지고 있으면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마는 작은 그릇을 가지고 있으면 작은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믿음이 있고, 병든 믿음이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믿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가리켜 "이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요, 믿음의 질을 말하는 것이요, 믿음의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만한 믿음, 이렇게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고 극구 칭찬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실 것 같습니까? 너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냐, 어느 정도의 믿음이냐-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사람이 아닌 이방사람입니다. 더구나 로마군인입니다. 그런 그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깜짝 놀라십니다.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10절)"하고 크게 칭찬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5장으로 7장까지는 그 유명한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이어 행적으로 옮기십니다. 8장 1절로 4절에 문둥병 환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5절로 13절에 오늘의 본문인 이방사람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치신 이야기가, 그리고 14절로 17절에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 사람 모두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당시에는 문둥병자 만큼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노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구나 이방사람 백부장 집의 노예이니 말해 무엇합니까? 또한 여자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점을 보면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인종차별 의식을 초월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한 병자요, 이방사람이요, 노예인 그들의 신분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우선 이방사람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십시다. 오늘의 본문에 이어 마태복음 15장에서는 가나안 여자, 곧 수로보니게 여자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가리켜 '메갈레 피스티스'-'네 믿음이 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은 메가톤급이다, 아주 위대하다'라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큰 믿음의 소유자들, 곧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자는 이스라엘사람이 아닙니다. 둘 다 이방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이냐 이방사람이냐는 하등 문제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위대한 믿음만 있으면, 그 믿음의 그릇 만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믿음이라는 조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이방사람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시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신분은 묻지 마십시다. 과거도 묻지 마십시다. 지금 바로 이 사람이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신분이나 민족에 관계없이, 과거 생활에 관계없이 지금의 믿음으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믿음만큼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대체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가 무지입니다.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깨달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 둘이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사람이건 노예이건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과거도 묻지 않으십니다. 모름지기 현재의 믿음만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노예의 신분을 생각해보십시다. 그 당시 노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哲人) 아리스토텔레스의 글 가운데에도 이러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주인과 노예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생명 없는 종이 도구라면 생명 있는 종이 노예이다.' 세인이 존경하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하물며 이렇게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행적이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종을 사람대접 하셨습니다. 당시로 보자면 사람 아닌 종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종을 사람대접 하지 않는 것은 당시의 문화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농업전문가인 바로의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농사에 사용되는 도구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가 말하는 도구-종입니다. 그 둘이 말 못하는 도구-가축입니다. 그 셋이 무거운 짐을 옮기는 도구-운반기구입니다. 이렇듯 노예는 생활을 꾸려 가는 수단이요 농사를 짓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 옛 속담에도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당나귀와 노예의 차이는 말을 알아듣느냐 알아듣지 못하느냐에 있다.' 옛날의 노예는 이토록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노예를 사고 팔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러려니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이 노예를 인간으로 대접하고 영접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셈입니다. 오늘날은 인종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고 귀족과 노예라는 신분의 차별이 없는 사회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직․간접으로 기독교의 혜택을 입은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로마의 고급 장교인 본문의 백부장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라 할만합니다. 그는 오늘의 본문과 같은 내용의 말씀인 누가복음 7장에서 "사랑하는 종(2절)"이라고 저의 노예를 부르고 있습니다. 보통사람도 아닌 군인입니다. 한마디로 군인은 사람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로마를 반대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죽이는 방법도 오늘날에 비하여 잔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이야 비행기에서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멀리서 총을 쏘아 죽입니다마는 당시는 창으로 찌르고 칼로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살벌한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군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백부장은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사랑했습니다. 저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습니다. 얼마나 어진 사람입니까? 흔치않은 특별한 인격의 소유자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요즈음 돈푼깨나 만진다고 시건방진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언젠가 택시를 타고 가는데 운전기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힘들고 피곤한 것은 문제가 아닌데, 가끔씩 아니꼬운 사람을 태워야 하는 일이 곤욕스럽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벼락부자가 된 듯한 사람이 택시 뒷좌석에 떡하니 앉아서 마치 제 종이나 부리듯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며 좁은 골목까지 들어가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운전기사는 그런 아니꼬운 사람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당장 내리게 한다고 합니다. 돈 몇푼 가졌다고 세상사람이 제 밑에 있는 양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혹 식당에 가서라도 심부름하는 아가씨들에게 말조심할 일입니다. 고작 몇천 원짜리 사먹으면서 이것 가져와라 저것 가져와라 하며 큰소리쳐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신분이나 지위가 남보다 좀 높다고, 남보다 돈푼이나 더 가졌다고 안하무인인 사람이 많은 오늘날입니다. 하물며 노예 제도가 존재했던 2천 년 전이겠습니까? 주인 마음대로 사고 팔고 심지어 죽일 수조차 있었던 노예입니다. 노예를 죽이는 것에는 살인죄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노예에게는 인권은 물론 도덕성 따위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백부장은 노예를 사랑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노예에게 인간적으로 대한, 인도주의 정신이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을 합니다. "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어가나이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선뜻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이렇게 나서시는 일은 생각 만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와서 간청합니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지 않습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여기서 백부장의 간청에 응답하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다. "내 사랑하는 종이 병들었나이다." "내가 가서 고쳐주마"--예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실 수 있었던 것은 '내 사랑하는 종'이라는 바로 그 말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사랑에는 꼼짝을 못하십니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인도주의가 마침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참사랑은 누구의 마음도 감동시킵니다. 참사랑은 돌같이 굳은 마음조차 감동시킵니다. 하물며 "내 사랑하는 종"이라는 말을 듣고 사랑의 주님께서 어떻게 가만히 계실 수 있었겠습니까? "내가 가서 고쳐주마"-예수님께서 하신 응답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헬라 원문에서 보면 '당장 가서 고쳐주겠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시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계신 곳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시거나 어떻게 하라고 일러도 얼마든지 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가셔서 고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복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사랑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이 종을 사랑한 것처럼, 높은 신분의 사람이 천한 신분의 사람을 먼저 사랑하는 그 마음이 아니고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다닐 때에 함께 공부하던 백인 친구 하나가 흑인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 예쁘게 생긴 여자도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흑백의 인종문제는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는 골칫거리입니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 이후로 계속하여 근 150여 년을 두고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바로 이 흑백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백인 청년은 결혼하는 것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두가 평등하다느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인도주의를 부르짖어도 다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소리까지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흑인과 결혼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지방색 문제가 참으로 심각합니다.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결혼을 하고 서로 사돈을 맺으면 해결될 것입니다. 노예를 사랑하는 로마의 고급 장교, 예수님은 그의 사랑을 보시고 마음을 놓으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마음을 여십니다. 백부장, 그 사람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었습니까?
먼저, 그 사람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 하겠사오니(8절)"하면서 극구 사양을 합니다. 당시 유대사람은 이방사람의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사람은 유대사람의 집을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군인은 얼마든지 유대사람의 집을 출입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초대받아서 비교적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마는 유대사람이 로마사람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율법적으로 금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풍속으로 금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방사람의 집에는 우상이 있기에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집에 들어가시면 예수님께서는 비난을 받으셔야 합니다. 세리의 집에 들어가신 일로 예수님께서 세리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실을 백부장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집에 들어오시는 날에는 당연히 비난을 받으실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나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예수님을 위해서는 안됩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마음입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합니다.
저로서야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렇지만 예수님을 모시고 갈 일이 아닙니다. 감당치 못할 일인 것입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 하겠사오니"-여기 '내 집'이라는 말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백부장의 집은 일반적으로 보아 훌륭한 집입니다. 유대사람의 집과는 비교가 안될, 로마 고급장교의 집인 것입니다. 화려하고 훌륭한 집이기도 합니다마는 정치적 권위로 보아도 아주 격이 높은 집입니다. 반면에 영적으로는 형편없는 집입니다. 저의 집이 영적으로 형편없으며 자격이 없다고 겸손해하는 마음, 그 귀한 마음과 인격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이사람, 예수님을 영접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부족하다'-늘상 이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사람, 참으로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도 그러합니다. 팽팽하게 맞서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내가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남편은 '내가 시집 못갈 여자 하나 구제했지'라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나보다 아내가 더 낫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아내도 '내 남편이 참으로 훌륭하다, 나에게는 과분하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흑자 인생입니다. 늘상 상대방이 나만 못하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손해보았다는 기분으로 살아보십시오. 그 생각 그대로 그의 인생은 적자뿐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둔합니까? 내가 모자라다, 부족하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한가지입니다. 교회에도 직분이 많습니다. 내가 집사건 권사건 장로건 과분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셨다고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진대 '내게 왜 직분을 주지 않나?' '내가 왜 자격이 부족한가?'라고 대듭니다. 이것은 참으로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부족하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는 자격이 없다, 감당할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은혜가 참으로 분에 넘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백부장은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는 더러운 사람입니다. 내 집은 우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도덕한 집입니다.' 신앙과 겸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일수록 겸손합니다. 끊임없이 겸손해집니다. 내가 자격이 없다는 마음만큼 귀중한 마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고백합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8~9절)." 언제나 부족하다는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하는 그 마음은 그실 가장 높은 자격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또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절)." 곧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최우선에 두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이 자리에서 입으로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믿음입니다. 직접 찾아오셔야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저의 집으로 와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 하나로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목사가 심방을 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여기서 기도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안 된다고, 꼭 오셔야 된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가면 또 응접실도 아니고 안방이어야 된다고 합니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교회로 나오면 안됩니까? 직접 나와서 목사님들을 만나 기도 드리면 될 터인데 집안에 앉아서 왜 오지 않느냐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대 심방이라는 것이 없습니다마는 저는 심방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년에 두 번은 심방을 합니다. 많이 하는 날에는 하루 서른 네 가정을 심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평균 잡아 하루 스물 대 여섯 가정을 심방 한 셈입니다.
일반적으로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이웃사람들이 모두 모입니다. 마치고 옆집으로 옮겨가면 또 그 집으로 우 몰려갑니다. 늘상 그러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기왕에 모두 모였으면 함께 예배를 드리면 될 것을 꼭 나의 집에서, 그것도 안방에서 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생각 잘못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어디에서든지 말씀만 들으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예배시간마다 교회에 나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얼마나 더 큰 은혜를 받겠다는 것인지, 부흥회마다 이리 저리로 쫓아다닙니다.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대개들 조금씩은 병든 심령일 것입니다. 새벽예배에 나오고, 수요저녁예배에 나오고, 주일예배에 빠짐없이 나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말씀만으로,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만져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안수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만으로 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말씀에 있다고 믿는 그 믿음, 말씀의 생명력을 믿는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린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순종의 약속이 있습니다. 들어보고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데려오라 하시면 업어서라도 데려오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마음입니까? 만일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버지, 말씀만 하세요. 학교에 가라면 가고, 공부하라면 공부하고, 놀라고 하면 그때에 놀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요즘은 부모가 뭐라고 한마디할라치면 일단 "알았다니까요" 해놓고는 제 마음대로 하기 일쑤입니다. 더는 말을 못하게 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살 것이든 죽을 것이든 말씀이면 족하다고 하는 믿음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순종을 미리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백지수표입니다.
언젠가 저는 참으로 미련한 기도를 드려보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기에 앞서 며칠동안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 돌아갑니다. 갈 직장이 약속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공항에 내려서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가장 먼저 부르는 데로 가겠습니다'-하나님 앞에 서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도착하고 4개월이 지나도록 오라는 데가 없습니다. 참으로 큰일났습니다. 5개월이 넘어서려는 즈음에 세 곳으로부터 이야기가 들어왔습니다. 숭실대학교 교목실장, 연세대학교 교목실장, 숭의여자전문대학 학장 자리였습니다. 셋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잘 아는 목사님을 찾아가 무조건 가라는 곳으로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 말씀이 교목실장이라는 자리는 금방 그만두어서는 안될 자리이니 조금 맡아서 하다가 나올 수 있는 학장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한 터엄(term)만 하고 그만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마는 사실은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무슨 학장입니까? 그러나 이미 약속을 한 일입니다. 마침내 이사회에서 결정이 되어 학장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결재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 대학의 학장이 된 것입니다. 주일날에는 이 교회 저 교회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세운 교회가 지금의 소망교회입니다. 미국에서 돌아오면서부터 큰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면서 제 나름대로 온갖 방법을 동원했더라면 아마도 이 소망교회는 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처음 가게 된 곳이 비록 마음에는 들지 않았을지언정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마침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리는 때로 '말씀만 하소서, 그대로 따르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말씀이 있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딴소리를 합니다. '말씀만 하소서' 했으면 무슨 말이 떨어지건, 살라고 하건 죽으라고 하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순종하기로 한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백부장은 순종의 약속뿐만 아니라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9절)"-자신의 힘만으로 모자라면 수하에 있는 사람까지 동원하겠다고 합니다. 들것에라도 실어 오라시면 수하의 사람을 시켜서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다 발휘하여 순종하리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십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10절)." 이 말씀을 받은 백부장 또한 얼마나 기뻤을 것입니까? 미안한 말씀입니다 마는 저는 목사로서 우리 교인들이 다 이러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다 이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엇이든 하라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병이 나을 줄 압니다마는 데려 오라 하시면 데려오겠습니다, 기다리라 하시면 기다리겠습니다, 모셔가야 한다면 모셔가겠습니다-이럴 때에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십니다. 말씀만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기억이 있는 전설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산을 오르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산밑에서부터 돌을 하나씩 들고 올라가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돌을 하나씩 듭니다. 들어보니 꽤나 무겁습니다. 그 착한 베드로만이 큼직한 돌을 들고 낑낑거리며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의자 대신 깔고 앉으시려나보다' 생각하고 우직하게 둘러메고 오르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자꾸만 돌을 바꾸었습니다. 좀 올라가다가는 작은 돌로 바꾸기를 여러 번 하다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주먹만한 돌도 못되었습니다. 산에 다 오른 후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각자 가지고 올라온 그 돌을 떡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무겁다고 더 작은 것으로 거듭 바꾼 사람은 이제 먹을 것이 없습니다. 반면에 베드로처럼 큰돌을 가지고 올라간 사람은 여러 사람과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올시다.
무조건 순종할 것입니다. 나의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고쳐서는 안됩니다. '말씀만 하소서.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나의 지위, 나의 능력을 다하여 말씀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이 귀한 믿음을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하시고는 마침내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1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십시다. 이 사람이 믿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병이 낫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은 대로, 곧 믿는 만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믿지 않았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백 퍼센트 믿으면 백 퍼센트의 은혜가 있을 것이요, 오십 퍼센트 믿으면 오십 퍼센트의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위대한 믿음, 큰 믿음으로 예수님께로서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서야 그 위에 은사를 더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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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계시적 의미(사도행전 2장 22~23절) (0) | 2024.03.19 |
이것까지 참으라(누가복음 22장 47~53절) (0) | 2024.03.19 |
원하노니 깨끗하여라(마가복음 1장 40~45절) (0) | 2024.03.19 |
옷가를 만진 여인(마가복음 5장 25~34절) (0) | 2024.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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