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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심복(2장 19절~24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안에서 확신하노라.
본문 중에는 사도 바울의 신실한 심복이요 동역자인 디모데를 소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디모데와 사도 바울의 관계, 그리고 디모데라는 사람의 하나님의 종 됨을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밖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감옥의 그 답답한 방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 곳에서는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지며, 이 생각 저 생각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 병원에 입원해 본 일이 있습니까? 몸은 불편하지만 혼자 있게 되면 역시 밖의 일이 궁금해집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해 준 빌립보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훌륭하게 성장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그 교회가 어떻게 자라는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이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소식을 들어야 평안한 마음, 바로 이러한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Barth)는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자기의 마음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서로 보고 싶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는 저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데 저 사람은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짝사랑입니다. 이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무던히도 사랑합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사도 바울을 사랑해서 그에게 소식을 전하고 위문금도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교회의 목사를 보내어 사도 바울을 돕도록 했습니다. 교통 수단이 좋지 않은 때여서 빌립보교회의 목사인 에바브로디도는 아예 바울과 함께 로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보교회는 현재 교역자가 없는 상태입니다. 여러 달이나 교역자가 없는 동안 그 교회가 어떤 형편에 있을는지, 바울은 궁금합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의 두 여인에게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조금 있었던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고약한 병으로, 그 시험은 어디에나 있으나, 사랑하는 빌립보교회에 그러한 다툼이 엿보이니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모든 형편이 궁금하여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디모데를 보냅니다. 그 곳 사정을 알고 싶은 마음에서 보내고, 또 빌립보교회에 하고 싶은 말도 있기에 이 편지를 적어 보내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좋은 소식을 들어야 마음에 위로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추천한 디모데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의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요 어머니와 외조모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종교적으로 히브리 전통을 따라 히브리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러한 면에서 참으로 놀랍습니다. 신앙이 모계로 내려갑니다. 부모가 다 히브리인일 경우 그 자녀는 물론 히브리인이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 남자가 이방 여자와 결혼할 때 그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는 이방인입니다. 또 히브리 여자가 이방 남자와 결혼해서 그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이처럼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모계를 따르는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한테는 어렸을 때 어떻게 키웠느냐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구약으로 돌아가 볼 때 모세는 태어나서 잠깐동안만 어머니가 맡아 기르고 젖 뗀 후에 곧 바로의 궁전으로 들여 보내집니다. 거기서 40년을 자랐으나 아직도 모세의 마음속에는 히브리 사람의 혼이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교육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릴 때에는 아무렇게나 키워 놓고 다 큰 다음에야 이래라 저래라 하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디모데도 이방 나라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히브리적인 교육 덕분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됩니다. 디모데에관한 것을 조화 있게 설명하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혈통으로 얻은 헬라 철학과 어머니 혈통에서 온 히브리 종교, 이 두 교육이 합쳐져서 그를 이상적인 선교사로 만들어 놓았다고 말입니다. 일리가있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디모데를 만납니다. 이 때디모데는 바울의 제자가 되고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은 그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에 있는 신앙이 사도 바울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내가 너를 낳았다' 할만큼 디모데는 바울적인 그리스도인이요 바울적인 일꾼이요 또 바울과 함께 하는 동역자였습니다.
'아들'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바울은"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선생은 얼마든지 많지만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철저하게 그 아버지를 닮고 그 아버지를 따릅니다. 바울은 그래서 그의 편지 가운데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도여행 때 디모데는 늘 바울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동행했고,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는 물론 심지어 로마 감옥에까지 동행했습니다. 결국 동행한다는 것은 아들 됨을 의미합니다. 아버지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들 노릇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해서 멀리 있는 아들은 아들이 아닙니다. 요즘 자녀들이 멀리 가 버려서 부모가 돌아가셨다 해도 오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우리가 부득이하여 외국에 나가 살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부모 공양하는 아들은 멀리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어야 아들입니다. 우리가 효도를 하려면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는 용돈만 좀 부쳐 드리면 효도 다한 듯 안다면 큰 착각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상당 부분을 함께 다녔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전세방에 감금되어 있었을 때, 디모데는 그 셋집에 가서 함께 불편한 생활을 하며 그를 도왔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의 대필가도 되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눈이 좋지 않아서 손수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 중 적어도 다섯 편이상은 디모데가 대필을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등은 디모데가 대필한 것입니다. 바울이 불러 주면 디모데가 받아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훌륭한 비서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장 23절을 보면, 그는 사도 바울만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특별히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이 디모데를 대신 보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일거리를 맡겨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한경직 목사님이 강연을 맡으셨다가 갑자기 몸이 불편해서 하루나 이틀 전에 못 참석하시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스케줄이 다 잡히고 순서지에 한경직 목사님 이름까지 프린트되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부득이 다른 사람보고 대신 가 달라고 하면 대부분 머뭇머뭇하면서 대신 가기를 꺼립니다. 순서지에 이미 한경직 목사님 이름이 나와 있으므로 자기가 대신 선다는 것이 외람 되기도 하고, 또 더러는 이름 없이 나가서 수고만 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이처럼 난처한 경우, 한목사님은 주로 제게 전화를 하십니다. "곽 목사, 또 한 군데 가 줘야 하겠구먼. 차 보내 줄까?" 그러면 저는 "괜찮습니다. 저도 차 있습니다"하고 한 목사님 이름으로 된 순서에 따라 대신 가서 설교도 하고 강연도한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이것은 참 아름답고 귀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갈 곳에 대신 아무개를 보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때에는 제게 부흥회 요청이 들어오지만 부득이 사양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상대방은 대신 다른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저는 선뜻 누구를 추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가 가야 할 곳에 대신 디모데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훌륭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살전 3:6)에, 고린도교회(고전 16:10-11)에, 그리고 빌립보교회에 디모데를 보냅니다. 둘 사이는 참으로 귀한 인간 관계요, 스승과 제자의 관계요, 동역자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성격이 강인하지 못하고 위장병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개 성격이 꼼꼼하고 예민한 사람들한테 위장병 증세가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한테도 그런 면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과 디모데는 성격적인 조화가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뜻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서로 친하려면 성격이고 뭐고 꼭 같아야 좋을 줄 알지만 실은 다르기 때문에 친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는 다르기 때문에 같이 살 수 있습니다. 성격이 꼭 같아야만 된다는 생각은 소아병적인 생각입니다. 취미가 다르고 생활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는 적극적이요 하나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훌륭한 조화가 됩니다. 더욱 하나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타협 없는 일치야말로 가장 귀중한 조화를 이룹니다. 우리는 서로 타협하고 양보하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야 되는 줄 알기 쉽지만 그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하나됨이란 전혀 타협이 없는 가운데서 하나가 되는 그런 조화 있는 일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하나됨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성격을 보면 거의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그래서 두 사람은 잘 조화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추진력이 있고 디모데는 사고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정열적인 사람입니다. 잘못된 점을 보면 베드로까지도 신랄하게 몰아붙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한테 그런 정열이 있는가 하면 디모데한테는 자제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일시적 기분도 있는 주도적 인물이요, 디모데는 협조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좋은 동반자이자 협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자기 대신 대사격으로 간단하게 추천하면서 빌립보교회에 보내고 있습니다. 대신 보내는 사람이나 보냄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믿고 여러분대신 어디에 보내 본 적이 있습니까? 혹은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보았습니까? 당신이라면 틀림없으니 내 대신 가 달라는 부탁을 받아 보았습니까? 이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대행자가 되려면 몇 가지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뜻을 같이해야 합니다. 목적, 사고 방식, 신학 방법이 같아야합니다. 이를테면 어느 복음주의자가 대신 누구를 보내야 할 경우, 그 누구란 적어도 같은 복음주의자이어야지 자유주의자일 수는 없습니다.
신학 방향, 방법, 그 중심이 같아야 합니다.
둘째, 상황 판단이 정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냉정함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사람은 보내지 못합니다. 가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좀 냉정하고 객관성을 지닌 사람, 자기 주관이나 편견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야 추천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뜻을 주어서 보냈는데 그 곳에 가서 자기 본분을 잊고 현지인(現地人)에게 동화되어 버린다거나, 지엽적(枝葉的)인 문제로 좋다 나쁘다 하다가 일을 망쳐 버린다거나 - 이렇게 감정 주도적인 사람은 도저히 추천할 수가 없습니다. 냉철하고, 객관적 통찰력을 가진 사람만이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변덕이 없는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그 사람 자체를 믿는 것이고, 다음은 그 사람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과 능력을 함께 다 믿을 수 있을 때에 라야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제가 처음 운전을 배워서 남의 차를 빌려 타고 집에 왔더니 아이들이 아버지 운전하는 차 타겠다고 좋아라며 올라탑니다. 그러나 집사람은 안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를 못 믿느냐니까 "당신은 믿지만 당신의 운전 기술을 못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그 사람과 능력을 둘 다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틀림없는데 재주가 없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내 남편은 믿으나 운전 솜씨가 엉망이면 그 차는 못 탑니다. 이와 같이 남을 믿고 파송하려면 그 사람의 진실은 물론 그의 판단력과 능력까지 다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이기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보냄 받은 사람이 자기를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저희가 다 자기일 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2:22)"고 말씀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자기 욕심-자기 명예, 자기 소득을 위하는 개인적인 욕망들을 뚝 떼어 버려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고 칭찬을 받을 수도 있으나 칭찬 받기 위해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일을 하고 보수를 받을 수도 있으나 원급 바울 생각만 하고 앉아서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다 버렸기에 디모데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도 바울 앞에서나 협력자, 대리자,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디모데와 같은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때에 말이 많게 됩니다. 자기를 위하는 마음, 자기를 알아 달라는 마음, 이런 것들이 문제입니다. 일을 부지런히 하고 열심히 하면서 자기를 꼭 알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찬송가 355장 "이름 없이 빛도 없이"를 부르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어떤 교수는 이 찬송가 구절을 부를 때에는 짐짓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하니까 안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을 떼어버려야 신임 받는 그리스도의 심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넷째,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존경을 겸한 사랑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함과 같이, 보냄을 받은 사람은 보내는 사람을 아버지인 양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아버지 이름으로 수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하면서 아버지 이름보다 내 이름을 내고 싶어집니다. 또 '내가 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느냐, 왜 바울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느냐, 디모데의 이름으로 일을 해야지' 이런 생각이나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보냄을 받은 자는 언제나 보내는 자를 아버지인 양 존경하고 사랑하고 그 이름을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끝으로 본문 22절에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디모데가 훈련 과정을 거쳐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택한 것은 일시적이거나 충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서, 여러 사건을 통해서 디모데의 됨됨이를 경험했습니다. 책망도해보고 칭찬도 해보았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맡겨 보고 그의 진실함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두 가지를 시험해 보면 된다고 합니다. 첫째 돈을 줘서 어떻게 쓰는가를 살피는 것이요, 둘째는 칭찬을 해서 겸손한지 교만한지 그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지내보니까 디모데는 역시 훌륭합니다. 10여 년 동안 함께 지내보니 훌륭한 사람이므로 안심하고 그를 보내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라고 맹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일을 맡겨 주시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서원하고 맹세까지 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그 동안 너무나 신용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바치겠다 맹세하고 자기 것을 챙겼고, 충성하겠다 해놓고 열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와서 '하나님, 과거에는 이러저러했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하고 기도하니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어떻게 신용하시겠습니까?
이처럼 진실이란 하루아침의 맹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손가락으로 혈서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진실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회를 정말로 사랑하는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인정받게 됩니다. 바울은 긴 시간 디모데를 경험하고 살핀 후 그를 추천하고, 이 사람의 말을 잘 들으라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것은 디모데와 같은 동역자입니다. 지도자도 좋지만 협력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지도자는 한 명이면 되지만 협력자, 동역자는 많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 지도자가 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름 없이 빛 없이, 마치 디모데가 바울에게 평생 협력한 것처럼 그 '뒤에 있는 사람(behind man)'이 필요합니다. 그런 동반자, 그런 협력자가 아쉽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를 추천한 것처럼 마음놓고 안심하고 추천할 수 있는 그런 일꾼들이 되도록 우리가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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