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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자기 본성〈고전 13:1~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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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자기 본성고전 13:17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 요한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거듭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교과서이겠습니다 마는 선명하게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라 고백한 것은 요한 서신의 큰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이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고백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고백은 우리가 어떤 결정적인 시간에 이르렀을 때에 하게 되는 고백입니다. 깊은 체험 가운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가슴깊이 느끼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따라서 사랑의 채널(channel)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통해서만 알게 됩니다.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의 의미도 그 능력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할 줄도 모르거니와 사랑을 받을 줄도 모릅니다. 이 사랑한다는 말과 사랑 받는다는 말이, 어떤 경우에는 동시적이면서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이는 사랑을 아는 순간이 사랑을 하는 순간이요, 사랑을 하는 순간 사랑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상(感傷)이 아닙니다. 매력에 끌리는 마음도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의 사랑은 곧 능력입니다. 창조의 능력이요 중생케 하는 능력이며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이 사랑의 능력 앞에서는 변화를 받게 됩니다.

만일 사랑을 운운하면서도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도 사랑을 파악하지 못한 증거요, 사랑이 사랑으로 역사 되지 않고 있음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느 수준의 사랑을 알고 있는 것이며 어느 정도까지 사랑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아는 바, 체험한 바의 그 영역만큼 인간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내 사랑의 지식, 내 사랑의 체험에 따라 그만큼의 인간 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 안에서 태어나고 사랑을 배워가면서 인간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하는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주제를 놓고 연결시켜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하시는 부분은 사랑을 뜻합니다. 그리고 "저를 믿는 자"란 믿음을 말합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표현하면 "사랑을 믿으면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믿으면 영생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요 존재의 문제입니다.

사랑의 자기 본성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는 자에게는 자랑이나 교만, 무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생을 사랑 속에 살면서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이요 자기사랑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원수이며 방해 자는 바로 자기 자랑과 교만과 무례함입니다. 이것이 제거되기 전에는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평생을 같이 산다고 하여 그 자체가 사랑인 것은 아니며, 일생동안 사랑을 외친다 하여 사랑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랑과 교만과 무례함이 사라지게 될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자랑이란 자기를 높이 보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과 행위입니다. 이 자랑은 언제나 자기 됨의 이상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며 떠들지도 않거니와 이 사랑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 무엇이든 자랑하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거짓말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자랑하는 사람 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랑을 하다보면 과장을 하게 되고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알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맙니다. 결국 자기 자랑은 스스로 속는 자기 허위에 빠지게 합니다. 교만이란, 자신의 연약함을 알면서도 그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해보고자 어떤 권위를 가져보려는 마음의 발로입니다. 이 교만은 언제나 사실에서 이탈하여 진실을 상실하게 합니다.

또한 무례함이란 자기를 높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불의하고 불손하며, 질서에서 이탈하며 버릇없는 방자한 행위로 빠지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자랑, 교만, 무례함을 함께 생각해본다면, 이것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자기 됨을 잃어버렸을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의 실상이, 나의 진실 아닌 거짓된 것들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사랑은 허다한 거짓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진실된 나를 되찾아줍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어진 바요 받은 바이기에 결코 자기를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 내가 사랑하는 그를 자랑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면서 그의 자랑을 나의 자랑으로 삼아 아낌없는 칭찬을 하게 됩니다. 사랑을 하는 자이면 나의 자랑이 없으며 저를 위한 칭찬과 자랑함에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빌리라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는 어느 날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를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아들의 성적표를 받아든 이 아버지는 왜 이렇게 씨이(C) 밖에 없느냐며 공부가 시원찮다고 나무랐습니다. 그래서 아들 빌리는 열심히 공부하여 이번에는 모두 비이(B)를 받아 가지고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왜 에이(A)는 없느냐며 불만입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칭찬을 받아보고 싶은 이 빌리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이번에는 전 과목이 에이(A)인 성적표를 갖다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본 이 아버지가 무어라고 하였을 것 같습니까? "요즈음 선생들은 성적을 되는대로 주더라"----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빌리는 이 딱한 아버지 앞에서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진정 자식을 사랑하십니까? 그런데 왜 이 사랑이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아버지의 사랑, 자식에게 자기 자랑을 앞세우는 어머니의 사랑, 이러한 사랑은 자식에게 통하지도 않거니와 반갑지도 않습니다.

부모들이 어쩌다 무엇을 가르친답시고 "그것도 모르냐?"며 쥐어박고 구박을 할 때면 아이들은 속으로 "나도 크면 알아. 무얼 좀 안다고 재냐?"하고 나온답니다. 무슨 일에서나 자기사랑이 앞서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말로는 자식을 위함이라고 하지만 보다 먼저 자기사랑이 앞서 있으면,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통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진정으로 그 누군가를 칭찬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어떤 분은 평생토록 남 칭찬 한번 못해보는 분이 있습니다. 지금 옆에서는 모두가 한마디씩 칭찬을 하는데도 끝까지 함께 거들어줄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한마디 한다는 말이 꼭 자기 속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라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칭찬을 해왔는지, 아니면 비판만 하고 살았는지를…… 사랑은 결코 비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남의 장점을 크게 보며 칭찬합니다. 자기 자랑은 묻어버리고 상대방을 높이며 자랑하게 됩니다. 자기는 낮아지고 작아질 뿐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비하입니다. 이 점을 역사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유에 누우신 사건입니다. 사랑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되도록 높은 위치에서 자기의 자랑을 앞세우며 사랑이라 말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노릇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인간적인 요소와 배경으로 보아 지난날에는 누구보다도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명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석학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참으로 갖출 것을 다 갖춘 당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순간부터 그는 그 모든 자랑거리를 오히려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말씀합니다(3:7-8). 지금까지 나에게 유익했던 것은 모두 십자가 밑에 깨끗이 묻어버리고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할 뿐 나를 위한 자랑이라면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고후 12:9). 진정 이러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내 속에 사랑이 있는 한 교만은 사라지고 녹아 없어지게 됩니다. 이는 본래부터 그 누구에게도 교만해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랑 앞에서도 교만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사랑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9절에서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참사랑이 있는 곳에 교만의 허세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사랑하기에 그 사랑 앞에서는 겸손해지고 어느 사이에 진실해진다는 말입니다.

사랑에는 교만이 머물 데가 없습니다.

여러분! 일생을 바쳐 함께 살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문제로 번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문제의 원인은 오직 교만함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뒤늦게 이런저런 말로 긴 설명을 하지만 알고 보면 교만 외에 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그 높은 콧대와 비뚤어진 교만만 빠져나가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아서 그야말로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을 극복하고 겸손해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더욱 겸손이 귀한 것입니다.

때로는 조금은 겸손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당하여 정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러다가 조금 나아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교만하던 요소가 다 끊어질 때에 비로소 겸손해진다는 것을.

돈으로 인해 교만한 사람은 거지처럼 가난해지면 겸손해지고 지위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지위가 없어지거나 낮아지면 조금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겸손은 억지로 하는 것이어서 근본적으로 교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은 사랑 앞에서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겨나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앎으로써 자기의 교만이 깨끗이 사라져버리는 그때, 거기에서 비로소 참된 겸손을 맛보게 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양자라는 사람이 송나라에서 여행을 하면서 어느 주막집에 들렀습니다. 그 집 주인은 두 여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한 여인은 미인이고 다른 한 여인은 못생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상하게도 이 주인은 그 두 여자 중에서 잘생긴 여자를 향해서는 외면을 하면서 못생긴 여자는 극진히 사랑해주더랍니다. 그래서 이 양자가 주막집 주인에게 "내가 보기에는 미인이고 매력적인 여자는 이쪽인데 이 여자는 사랑하지 않고 당신은 왜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시오?"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주인의 대답인즉 "저 잘생긴 여자는 잘생겼다는 것 때문에 너무 교만하여 코가 높아졌어요. 그래서 내 눈에는 그 잘생긴 것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못생긴 여자는 자기가 못생겼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겸손하기 때문에 나는 그 못생긴 것이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명답입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잘생기고 못생기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느리고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이든 사랑을 받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장 사랑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내가 사랑 받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사랑도 알 수가 없고 사람의 사랑도 모릅니다. 그저 고독하고 외롭기만 합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내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스스로 겸손하여 낮추십시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단순한 덕으로서 운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할 때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교만은 스스로를 감옥으로, 지옥으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성격을 두고 좋다, 나쁘다, 혹은 순하다, 포악하다 하면서 문제를 삼습니다마는 여기에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진정한 사랑만 있다면 맹수도 길을 들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진정한 사랑 앞에 녹아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어느날 프랑스의 로앙가리 대통령이 한때 그를 가르쳤던 소르본대학의 라비스 박사를 위한 교직 50년 축하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식순에 따라 라비스 박사가 단에 올라 답사를 하려고 보니 저 아래 학생들 틈에 대통령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놀라서 대통령을 보고 앞으로 올라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아닙니다. 나도 당신에게 배운 제자입니다. 오늘은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로서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여 다시 한번 말씀을 듣고 싶어 여기에 앉았습니다." 라비스 박사는 연설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겸손한 대통령을 모신 이 나라는 만만세로 부강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교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이는 남의 필요에 따라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에 따라 자기를 내어주며 살기 때문입니다. 나 아닌 저의 필요와 행복 속에서 나의 보람을 찾으며 살기에 결코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나의 의견이나 내 고집은 접어둔 채 저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며 거기에 박수를 보내며 만족해하기에 결코 무례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아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 완전한 사랑인 아가페가 나로 하여금 진실케 하고 겸손하게 하며 바른 자세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오직 참사랑이 인간을 새롭게 창조합니다. 이 사랑이 핍박자 사울을 변화시켜 사도 바울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진실하려고 하거나, 스스로 겸손하려고 하며, 스스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간에 있었던 스스로의 노력을 다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로 계시된 그 엄청난 사랑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거짓 아닌 진실과 겸손으로 사랑하는 자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느라면 마침내 그 이웃도 진실한 가운데 겸손해질 것입니다. 사랑 안에는 자랑도 교만도 무례함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오직 진실과 겸손과 능력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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