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사랑과 심판(요 3:17~21)
앞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사랑의 메시지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아마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 중에는 요한복음 3:16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는 것은 정말 귀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리켜 "작은 복음이다" 또는, "신약의 요절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귀한 복음에 바로 이어서 오늘 본문은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귀한 독생자를 주셨고, 또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는데 이것이 그대로 사랑으로만 전해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라고 믿는다는 중요한 조건 위에 축복이 허락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평양 넓은 바다 위에 하나의 병이 떠 있는데 이 병의 마개가 꼭 닫혔다면 10년을 바다 위에 떠 있어도 병 속에는 한 방울의 물도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넓고 커도, 즉 그 사랑 속에 묻혀서 살아도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 사랑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효력은 믿어야 생기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그를 사랑해도 그가 내 사랑을 믿지 아니하면 무효입니다. 아니 무효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틀어져서 점점 더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돈 많은 집 딸은 자칫하면 노처녀가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가 있어도 "유산이 많으니 나보다 돈을 사랑해서 청혼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일단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을 순수하게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을 때만이 사랑이 사랑됩니다. 즉, 믿어야 사랑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진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는데, 그러나 믿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도 물론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또 다른 면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심판, 심판과 사랑은 역설적인 대조입니다. 사랑은 따뜻한 것이지만, 심판은 차고 무서운 것으로, 하나의 법정을 생각하게 합니다. 서슬이 시퍼렇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하나님의 법정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법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우리가 알 수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 내려지고 집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무서워서 숨을 쉴 수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또 한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따뜻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가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가정과, 무서운 법정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여기서 발견되는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심판이 있는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무시한 사랑이 아니라 심판이 있는 의로운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묵인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는 사랑이 아니라 공의로운 사랑으로서,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치르신 그 대가가 공의를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문제는 이 심판을 누가 받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신 심판을 받은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심판은 진노적인 사랑의 의미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때리고 당기며 때로는 쓰러지게도 하여 바른 관계로 다시 설 수 있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구체적인 계시가 십자가입니다. 이 사랑은 의로운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육학에서 말하기를, 학생이 잘못했을 경우 꾸짖지 않고 그대로 칭찬을 한다면 그 아이는 더 불안해진다고 합니다. 잘못했으면 꾸중을 들어야 편안한 것이지, 봐 준다면 다음에는 칭찬해 주는 말에 대해서도 믿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매맞고 잘하면 칭찬해야 신뢰감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잘못했을 때 때리지 않는 부모는 잘했을 경우에도 역시 칭찬하지 않는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공의와 사랑은 균형을 이루어야만 바람직한 교육인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요 3:17),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39를 보면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심판하러 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심판은 중요한 의미로서 복음 자체가 심판적 요소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종말론적인 의미에서의 심판적 요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받아들임으로 지난날의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게 되는 은혜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면, 이를 거절함으로 오늘까지 지은 모든 죄를 심판 받아야 하는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심판의 시금석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임은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에서 "이처럼"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소원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오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기도해서 병 낫고, 사업이 잘되기 위하여라고 말하지는 맙시다. 소원 성취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참 사랑이란 의롭다 함을 받는 데 있습니다. 죄인이 죄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의인의 신분을 얻을 수 있는 이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는 겁니다. 교회에 나온 목적은 오직 구원을 위한 것뿐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 무서운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의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계,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로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심판의 기준은 죄입니다. 죄란 법을 어긴 것이며 법의 기준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형상이 우리 안에서 이지러졌기 때문에 모름지기 다시 십계명이라고 하는 새로운 법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글로 나타난 법이고, 문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이미 하나님의 법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십계명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법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법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심판의 기준은 죄이며 죄의 근본은 불 신앙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는 우리들이 첫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죽지 않는다"고 꼬인 말을 믿고 따먹었습니다.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뱀의 말을 믿었단 말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입니다. 뱀이 와서 묻기를 "이 동산에 있는 것은 모두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라고 이브에게 "모두"를 강조하면서 살살 꼬이니, 이브의 마음속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왕이면 다 먹으라고 하실 일이지, 하나만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으면 그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뱀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진다"고 한 말을 더 믿었습니다. 뱀의 말을 믿기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죄란,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기준은 네가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죗값은 사망이다"라는 말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죄와는 거리가 멀어지지만, 믿지 않으면 죄를 짓게 는 간단한 원리로써 믿음의 문제입니다. 심판에 대한 불신도 중요하지만 사랑에 대한 불신은 종말론적인 것으로 구제의 길이 없습니다.
앞장에서 공부한 것처럼 이미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서 뱀에 물렸습니다. 이제 은혜로 구리뱀을 만들어서 쳐다보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구원의 길을 구하셨습니다. 살게 하기 위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기 위하여, 구원하기 위하여 은혜로 만들었던 것인데 믿지 않은 자는 쳐다보지 않고 죽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신 하나님이 살려 줄 리가 없다고 쳐다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에 대한 불신으로 마지막 심판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에게 벌을 준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더 큰 문제는 내가 너를 용서한다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 즉 은혜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마지막 관계인 것입니다. 옛날 유월절 잔치 때에 집집마다 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면 사망의 천사가 넘어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다 벌겋게 칠해 놓고 안에서 죽음이 넘어가기를 기다리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느니라"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심판 받은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심판 받은 결과로써 버려진 사람입니다. 오래 전에 필자가 학교 일을 할 때입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학 총학장 모임이 있었는데 시작 30분전에 파이프 오르간 독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제 옆에 않은 분은 시작부터 끝까지 코를 골며 자는 것이 아닙니까? 웅장한 오르간 소리가 울려나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코만 골았습니다. 연주가 끝난 다음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니 이 분께서 하는 말씀이 "이거 공해 아냐" 그러더군요. 잠을 주무시는데 시끄럽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 연주되어도 그 분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음악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는 것을 방해했다고 야단이니 이런 것이 심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비뚤어져 있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징계도 선한 사람에게는 더욱 선하게 만들어 주는 교훈이 되지만 못된 사람은 매맞으면 맞을수록 점점 더 나빠집니다.
교도소가 안고 있는 문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교도소에서 사람되어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다음 범죄를 위해 더 잘 준비해 가지고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 악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심판 받을 사람은 여전히 심판 받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징계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 앞에서도 겸손하지 못합니다. 사랑해 주었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해 주는 그것을 악의 기회로 삼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지막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받지 않고 믿지 아니하므로 스스로가 정죄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즈음 가끔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남편이 해외로 근무간 사이에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남편에게서 매달 월급이 부쳐옵니다. 드디어, 몇 년만에 고국에 돌아오는 그 날, 아내는 정부와 자살을 합니다. 남편은 외롭게 지내다가 가족들을 만난다는 기쁨으로 돌아오는데, 바로 그 날 왜 죽어야 합니까? 이것이 심판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요. 설사 남편이 과거를 다 용서했다고 해도 아내 자신이 그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이 세상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형제의 사랑, 이웃의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는 사랑을 먹고 마시며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잠시라도 세상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못 믿어서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있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에 미움이 있는데, 어찌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나올 수가 있습니까? 내가 죄 가운데 있는데, 어찌 의를 만날 것입니까? 내가 악하므로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빛으로 나온다는 것은 회개를 말하고 빛으로 나오는 용기는 진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계속 죄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 또는 조를 변명하기 위해서는 어두움을 사랑하게 됩니다. 밝은 빛 안에서는 더러움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므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모든 불의를 다소나마 덮어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보십시다. 나는 진실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편안한지, 아니면 조금 불의한 가운데 사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편안한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진실하고 거룩한 사람들을 만나면 부끄럽고 두렵다 해도 피하지 말고, 사귀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빛으로 나오는 길입니다. 부끄럽고 두려워도 빛 앞으로 나와야 하며 빛 안에서 쓰러지는 일이 있어도 돌아서서는 안됩니다. 부끄러워도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더 이상 변명하거나, 빛을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말고 빛 앞 에 겸손히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심판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복이 되며, 믿지 못하여 받아들일 수 없는 자에게는 사랑 자체가 저주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고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심판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거듭 되새기면서 빛과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론(요 1:1~5) (0) | 2024.03.19 |
---|---|
생명의 떡(요 6 : 32~40) (0) | 2024.03.19 |
신실한 심복(2장 19절~24절) (0) | 2024.03.19 |
씨뿌리는 비유2(마태복음 13:18-23) (0) | 2024.03.19 |
씨뿌리는 비유1(마태복음 13:3-8)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