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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마 7:1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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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종적인 관계로 종교적이라고 하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횡적인 관계로 윤리적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해 온 산상보훈을 뒤돌아보면 거의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인 종교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산상보훈은 대체적으로 윤리적인 내용보다 신앙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즉 윤리적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은 산상보훈 중에서 절정에 이르는 말씀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황금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동양적인 윤리 가운데서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면에서는 이와 유사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내가 싫은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는 내용 등으로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황금률과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면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입장에서는 오늘 본문과 같은 도덕률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창의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산상보훈에 나타난 많은 내용들이 구약의 것과 일맥상통하거나 또는 구약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서 하신 말씀들이 대부분입니다만, 그러나 황금률은 전혀 새로운 방향의 것입니다.

구약과 헬라 철학의 문헌에 통달한 윌리암 버클리는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전설이나 헬라사람의 교훈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열심히 찾았으나 없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교훈에서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예수님의 완전한 독창적인 것이라고 학자들이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방 사람이 랍비에게 찾아와서 "내가 이제부터 개종해서 이스라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랍비는 그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하라고 가르쳤고 이방 사람은 그것을 다 지키고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서는 어떻게 하면 온전한 이스라엘인이 되겠는지 율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랍비는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체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율법의 해석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나에게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이 율법의 근본이며 나머지는 다 율법의 해설이니 나머지는 가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공자의 말씀에도 "네가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모두가 '하지 말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내용이기에 특이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기서 '대접'이란 우리들의 개념으로는 주로 먹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접을 받고 싶거든 먼저 남에게 대접하라는 뜻으로 들리게 됩니다. 본래의 의미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가끔 번역상으로 오는 모순 때문에 본래의 개념을 잘못 소화할 때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이 본문을 보면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고 보다 본래의 뜻에 가깝게 옮겨져 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의 문제는 기도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말씀을 먼저 하시고, 그리고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말씀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람에게도 대해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선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세를 가진,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크리스천이 되지 않고서는 그 다음 순서로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남에게 어떤 대우를 받고자 하는 소원이 나에게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소원이 잘못된 것이라면 남에게 대접하는 것도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소원(wish) 자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소원이 먼저 바로 되어야 그 다음 일이 바로 됨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봉사와 대접하는 일을 늘 생각합니다만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원한다고 해서 그 소원을 다 들어주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까? 때로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말아야 하고 거절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거절이 오히려 더 강한 사랑의 표현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처세술을 가진 사람은 적절할 때에 ''라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절하면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느 면에서는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거절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불의와 부정과 죄에 대해서는 당연히 거절해야 합니다. 어떻게 바로 되지 못한 소원까지 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들어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또한 돈이 많다고 구제와 봉사가 쉽게 될 것 같습니까? 구제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하여 무절제하게 돈을 뿌렸다가는 오히려 욕을 먹고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구제란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마음과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뜻하는 대접(wish)의 기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의 소원이 기준이 되어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는 동기나 목적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약 동기에 두면 대접받고 싶으니까 대접하고, 갖고 싶으니까 먼저 준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대접받고 싶을 때에 대접하라는 뜻으로 오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것이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접받기 위해서 하는 대접은 옳은 대접이 아닙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로 도덕적 향락주의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즐기기 위해서, 즉 내 향락 내 기분으로 남을 돕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나의 즐거움 때문에 도우는 것으로, 고등한 죄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거나 대접할 때 그 자체가 목적이나 동기일 수 없고 단지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이 본문의 뜻입니다. 본문을 헬라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을 고쳐보면 "그 사람이 너에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그 모든 것을 그대로 그에게 네가 대하라"(do to him)고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있어서 그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행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 어떤 마음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그를 섬기려고 하는데 섬기는 방법에 있어서, 그가 원하는 대로 즉 그의 입맛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내가 원하는 대로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선하기를 바랍니다. 저 사람도 나에게 선해지기를 바란다면 내가 그에게 선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가 내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으로 그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모든 사람이 나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적인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으로 내가 먼저 남을 용서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내 허물을 다 덮어주기를 바란다면, 나 또한 남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신학대학에서 목회학을 강의하는 중에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회하는 중에 교인 가운데서 마음이 틀려진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습니까?" 필자는 대답대신 이 본문을 학생에게 읽으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길게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가진 허물과 부족을 가리워 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 허물을 들추어 내고 다닌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또한 그 약점을 덮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좀 덮어줄 수 있지 않습니까? 가령, 키가 작은 사람은 그것이 문제되어 키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또한 키가 지나치게 큰 사람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늘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서 조금이라도 낮추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럴 때에는 좀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뚫린 구멍은 있습니다. 우리말에 다 나은 상처도 긁으면 피가 난다는 말이 있듯이 지나간 아픔에 대해서도 모르는 척 해야 합니다. 과거의 부끄러운 자리, 아픈 자리를 다시 기억나게 해서 괴롭힌다는 것은 잔인한 짓입니다. 그가 잊고 싶은 과거라면 생각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옛날에 어느 재상이 친구들과 함께 기생들을 불러서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재상은 기생들 중에서 특별히 총애하는 기생이 있었으므로 그를 자기 옆에 앉히고 시중들게 했습니다. 그녀의 미모는 특출하여 모든 남자들이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불이 꺼졌습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누군가가 그 예쁜 기생의 손목을 덥썩 잡자 그녀는 그 사람의 갓 끈을 잡아채서 갓 끈을 끊어놓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 손목을 잡은 자가 있는데 그의 갓 끈을 끊었으니 빨리 불을 켜시오" 이 소리를 들은 재상은 불을 켜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친구들에게 다같이 갓 끈을 끊자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모두 갓 끈을 끊자 불이 켜졌습니다. 이 재상은 얼마나 현명한 사람입니까? 누가 그 여인의 손목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건은 복잡하게 되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됩니다. 덕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하는 마음, 정말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가진 변변치 않은 장점을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무엇인가 남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상대방이 원한다면 인색해 하지 말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대체적으로 칭찬에 인색한 백성들입니다. 필자의 아버님은 특히 칭찬할 줄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8등을 했습니다. 그 당시 8등은 우등생의 마지막 선이어서 그래도 괜찮은 성적인데 야단을 맞았습니다. 너무 섭섭해서 돌아서서 울었습니다.

다음에는 3등을 했기에 아버님의 말씀이 좀 나아지겠지 기대하고 보여드렸더니 "이놈아 3등이 뭐냐, 할려면 1등을 해야지"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 다음에 공교롭게도 1등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만 일등하냐? 누구도 하고 누구도 했는데……" 정말 맥빠지는 말씀이었습니다. 좀 자랑스러워하고 나타내고자 할 때는 그 기분 맞추어서 칭찬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슬픔은 나누면 절감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된다는 말처럼 기쁜 마음일 때는 함께 칭찬해서 그 기쁨을 배로 확대시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내가 칭찬 받고 싶은 일이라면 남에게도 칭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상으로 저는 길게 해설을 해 주었습니다. 존경을 받고 싶습니까? 남을 존경하십시다. 더 이상 필요한 설명이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알면 다른 모든 것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금률인 것입니다. 진실한 친구를 원합니까? 내가 먼저 진실한 친구가 되면 나머지 문제는 자연히 해결됩니다.

가끔 필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친절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와도 알아주지 않고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긴 합니다만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인사할 사람 따로 있고 인사 받을 사람 따로 있습니까? 누구는 인사하고 누구는 인사 받습니까? 친절한 교회란 따로 없습니다.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친절을 베풀면 됩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옛날 황 은준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납니다.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랑의 길을 떠난 한국 교인들이여, 어느 교회가 친절한가 기웃거리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먼저 내가 친절을 베풉시다"라고 먼저 솔선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행하면 됩니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좋은 대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 받고 싶은 방법으로 남을 먼저 사랑하십시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남의 것을 귀하게 여기면 됩니다.

이 말을 신학적으로 바꾸면 내가 대접받고 싶은 마음을 돌려서 대접하는 마음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즉 내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이제 대접받고 싶은 마음을 일단 끊고 그 마음으로 남을 대접하십시다. 평소에 필자가 자주 느끼는 것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예배 시간에 자리를 잡고 앉는 작은 일에 대해 자신을 한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긴 좌석에서 먼저 오신 분이 가장자리에 앉아 있으면 뒤에 오신 분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까? 먼저 오신 분이 가운데로 앉으면 오시는 차례대로 정리가 될 것인데 꼭 그 자리를 고집하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나가실 때 급한 일이 있어서 얼른 가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조금만 양보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작은 일에서부터 남을 대우하고 귀하게 여기면 결국 내가 대접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황금률은 모든 계율과 도덕률을 합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하나만 잘 지키면 다른 계율은 다 지킨 것이 되므로 그만큼 중요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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