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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필자는 몇년 전에 미국 나성에서 우연히 달나라에 가서 여러 시간 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저 유명한 어윈 대령을 만나서 단 둘이서 한 시간여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습니다.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이야기로 생생한 그의 경험과 그의 깊은 신앙간증을 들었으며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어졌습니다. 그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헝가리의 어느 대학에 가서 달나라 탐험의 경험을 강의하였는데 그때 한 학생이 질문하기를 "소련의 우주인들은 달나라에 갔다와서 하는 말이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은 안 보이더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당신은 우주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고 말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어윈 대령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라고. 정말 귀한 대답입니다.
마음의 청결, 그것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된 길입니다. 하나님을 알며 보며 사귀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들의 바른 자세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 하는 대로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이요 적극적이요 효율적인 구원의 사역을 뜻합니다. 그 계시의 본체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인류 역사를 통하여, 또 인간의 도덕성과 그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 되심을 계속 보여주셨건만 인간은 이를 알지 못했고 이제는 배반하고 타락하여 알 수도 없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셔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이 그것이며 그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모두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결정적이요 또 종말론적 계시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문맥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이 계시를 보고 알며,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겠는데, 그 비결은 마음의 청결이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께 "하나님을 보여주세요"라고 부탁드렸고 또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하늘로부터 온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그 많은 이적기사를 역력히 목도하면서도 계속 새로운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이때에 이 "믿음이 없는 세대"를 책망하셨고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마음의 청결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예수를 알지 못하며 그 귀한 이적의 뜻도 알리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할 때에는 잘못보고 비뚤어지게 보며, 하나님을 똑바로 보지 못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가령 노아가 술 취해서 범한 실수,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고자하는 초조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서지 못한 일, 모세가 그의 혈기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불신앙"이라는 무서운 책망을 들은 일(민 20장), 욥이 자기가 당하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나머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하나님께 걱정을 끼친 일,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기며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청하는 일, 이런 일들이 모두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의 소행입니다. 그래서 이 순간마다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이나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자기 고민에 깊이 빠진 일들도 모두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탓에 생긴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청결이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그 뜻을 살펴보면 성경에서 먼저 바리새적인 청결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와 특히 종교적 전승을 따라 행하는 종교예식과 그 의식(儀式)을 중심한 청결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의식적이며 외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릇의 겉을 깨끗이 하고 안은 소홀히 하며,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통으로 삼키는 자들이라는 준엄한 책망을 들어야했던 것입니다. 극단적인 형식주의적 청결이 저들을 교만의 함정에 빠뜨렸고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몰았기에, 하나님도 모세도 율법의 참 뜻도 모르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외적인 청결에 치우칠 때 내적인 청결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엣세네스파적인 청결을 생각케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포기하고 은둔 생활을 하며 금욕주의를 주장하여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체를 떠나서 광야에 거하며 명상과 기도 그리고 금욕하는 생활을 청결의 최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인도주의적 신앙의 단면으로써 자기와의 싸움에서 실패하고 더 무서운 허무주의에로 치닫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하나님을 보는 참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청결이란 지극히 내적인 것이며 신앙적인 것이며 계시에 대한 바른 자세와 겸손한 응답을 전제로한 그러한 신앙적 청결을 뜻하고 있고 또 신학적으로는 복음적인 청결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시 51:6, 삼상 16:7)
본문에 나타난 청결의 어원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헬라어로 '카타로스' 라는 말로써, 여러 가지 물리적 의미를 가진 용어입니다. 첫째, 잘 세탁된 깨끗한 옷 둘째, 겨나 쭉정이를 깨끗이 제거한 순전한 알곡 셋째, 물이나 다른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아니한 우유 또는 포도주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청결입니다. 청결은 결코 무(無)를 뜻하지 아니합니다. 없는 것, 빈 것 또는 공허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빈마음(empty)의 뜻이 아니고 오히려 단순(simple)의 뜻입니다. 순전함, 깨끗함, 단순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오직 한 가지 마음으로 집중하며 단순하게 한다는 뜻이며 어린이의 마음같이 깨끗하고 단순한 하나의 마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원문에는 "간음하지 아니한 단순한 마음"이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깨끗함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뜻하며 하나님과 그 계시를 받는 "동기의 청결함"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처음 동기란 사실상 그리 순수한 것이 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께서 기대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깨끗한 동기로 따랐던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이유, 사회적인 욕구, 그리고 세속적인 욕구가 그 동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그릇된 동기들이 깨어지고 씻기고 순수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동기의 순수화는 실제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놀라운 기적이 있고서야 비로소 이루어졌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으로 돌아가 보아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몸으로나 물리적으로써는 확실히 출애굽하였으나 사실상은 애굽에서 때묻은 노예적 근성과 우상숭배로 인한 타락한 심령과 병든 의식이 계속 문제가 되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지도 못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음을 성경은 똑똑히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선 그 동기가 깨끗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의 제목이 깨끗해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만나게 되는 시간이 곧 기도 시간입니다. 적어도 기도 시간에는 그 심령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시간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자세가 이방종교적이며 비성서적이고 또 그 태도가 하나님 앞에선 바른 태도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죄를 기도 중에 또는 예배 중에 범하게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제목이 자기 자신과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헤어날 수 없는 무서운 욕망의 포로가 되어 이것을 원망과 함께 토론하고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합니다. 그 옛날 지혜의 왕 솔로몬은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오직 한 가지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여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기에, 곧 큰 응답을 듣는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소원과 기도의 제목이 깨끗하여야 응답을 듣는 것입니다.
실상 구제나 선행 그리고 교회생활 전체가 모두 깨끗해야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 이 말씀도 그 동기가 순수하며 온전한 신앙에서 행하여지는 행위가 되여야 함을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단순한 마음은 잡스러운 생각이나 세속적 욕망 등이 전혀 섞이지 아니한 깨끗한 동기, 바른 자세임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깨끗한 마음이어야만 복음을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중생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등도 그 마음들이 깨끗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이 청결해질 것입니까? 다시 기억할 것은 청결이란 비운다는 뜻이거나 무아지경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한 가지 마음 즉 단순한 마음이어야 함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복잡한 마음을 단순화하며, 땅으로 기우는 마음을 하늘을 향하게 하며, 허탈한 것을 좇는 마음을 순전한 진리에로 뜻을 돌리며, 세속으로 기우는 마음을 신령한 것에로 그 방향을 전환하고, 자기중심적인 동기에서 하나님 중심에로 마음을 바꾸는 일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것이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함을 확실히 말해줍니다. 명상이나 고행 극기로써 가능하게 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적으로 역사할 때 비로소 이것이 가능함을 말해줍니다. 이 때문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또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해줍니다."(요 3:1- 7) 그 거듭남이란 위로부터의 출생,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기원적인 출생이 있고야 청결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곧 성령으로 인하여 중생한 자를 뜻한다고 직선적으로 설명해도 결코 잘못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중생하며 또 성화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마술적이거나 기계론적 역사는 아니고 순전히 인격적인 역사입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신비로운 사역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속한 한 깨끗한 심령이 출생하게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청결한 마음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성령은 말씀과 함께 동시적으로 역사 합니다. 말씀이 전해지면서 성령은 함께 역사 합니다. 성령이 역사 하는 은혜의 방편(The means of The Holy Spirit)은 말씀뿐입니다. 그 말씀은 들려지는 말씀과 몸으로 체험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자가 성경이며 설교이고, 후자가 세례와 성찬을 포함한 성례를 뜻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함께 성령이 역사 하여 당신의 사람들을 깨끗케 하고 계십니다. 마음의 청결을 원하는 자는 말씀을 겸손히 받고 성령의 감화하심에 순종하게 될 때 그는 비로소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것을 확실히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실제적인 면과 성경이 증거 하는 맥락 안에서 이해하는 마음 청결 방법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매일매일 우리가 당하는 현실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사건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빛에 조명하여 우리의 현실을 볼 때에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청결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생활 40년동안 모진 고난 속에 이들의 마음을 계속 청결케 하셨음을 똑똑히 봅니다. 그들이 겪은바 많은 시험들의 최종 목적이 무엇입니까? 역시 저들로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한 것입니다. 이대로 더러운 마음으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 믿는 성도들이 당하는 어려운 고난과 시련등은 모두 성도들의 마음을 청결케 하며 또 좀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길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욥의 고백에서 명백한 진리를 듣습니다. 욥은 그 많은 고통을 겪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다 극복하고 나서, 마지막에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0) 욥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그 볼 수 있는 눈은 고난을 통하여 청결케된 바 소중한 마음의 눈이었던 것입니다. 시련과 환란 고통과 핍박 등이 우리의 신앙의 동기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체험과 성경이 증거 하는 대로 핍박과 환란 속에서 전해지는 복음이 순수하며 큰 고통 중에 영접하게 되는 믿음이 더욱더 깨끗한 것입니다. 고통이 사람의 마음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심지어 신학사조도 역시 고난 당하는 교회에서는 그 내용이 순수하게 복음적이고, 환란이 없는 평탄한 시기에는 복잡하고 혼선을 빚어서 신학분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되어온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 속에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깨끗케 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흔히 자기부정(自己否定)이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또는 지식으로는 가능하나 실제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동기를 제공해주시고 힘주셔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에 의하여 친히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하사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다른 한편 "청결"이란 화평을 뜻하기도 합니다.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서 화평케 되는 것이 진정한 뜻에서 마음의 청결이기 때문입니다. 증오와 불화, 분쟁과 시기는 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부정"을 개인적인 청결이라고 한다면 화평은, 윤리적이요 사회적인 관계에서의 청결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고 나아올 때 너희 형제가 원망하는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리고 다시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즉, 화목이 없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그의 형 에서와 불화된 관계에 있다가 20년만에 그 형을 만나서 화목하게 될 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결코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화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되고 그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됨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바로 여기에 "본다"는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보면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헬라어에서는 "본다"는 말이 "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계시의 본체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계시가 보여주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이며, 계시와 말씀이 소통하는 거룩한 교제의 관계를 뜻합니다. 말씀의 소통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시는 큰 축복입니다. 낮에도 별은 있으나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기에 보지 못하며, 깊은 밤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밤에만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듯이 모든 것, 모든 가치가 다 부정되고 청결한 마음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며 곧 주께서 베푸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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