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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리는 사람〈고전 13:1~7〉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980년도 브리태니카 연감을 보면 '특이한 일, 그러나 주목할만한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샘렌드로(Samlendro) 시에, '블루 돌핀(Blue Dolphin)'이라고 하는 유명한 식당이 있는데, 이 식당에서 방금 결혼한 신랑 신부가 3백여 명의 손님을 초대해놓고 피로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랑 신부가 돈 많은 집 자녀들이라 피로연은 화려하고도 거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인 신랑 신부가 서로 말을 주고받다가 의견충돌이 생겼습니다. 화가 치민 신랑이 결혼 케이크를 집어들어 신부의 얼굴에다 덮어씌웠습니다. 그러자, 신랑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손님들에게도 화가 전달되어 저마다 테이블을 집어던지면서 소동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연회장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끝내는 30여 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겨우 진압시켰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저 간단히 웃어넘기고 말 가벼운 이야깃거리가 아닙니다.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브리태니카 연감에까지 기록될만한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밝히 말씀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로서 소중한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특별히 주어진 몇 가지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거룩한 속성입니다. 비록 땅에서 살고 있지마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속되게 사는 것 같아도 마음 깊은 곳에는 거룩함을 향한 성향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귀한 속성을 은사로 받았음입니다. 지혜와 창조적인 능력, 사랑하는 마음 자유의지 등이 모두 인간만이 가진 소중한 특성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중요한 특권은 바로 다스림의 능력입니다. 이를 정치적 본능이라고도 합니다마는 만물을 다스리는, 만물을 주관하는 특별한 권세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라는 특권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놓고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네 마음을 네가 다스려라. 그리고 그에 따른 운명도 네가 주관하라"라고 하는 엄청난 특권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다스림 속에 자유가 깃들어 있으며, 그 다스림에 따라 인격이 세워지고 그의 사람됨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린다고 할 때에는 그 주도적인 성향에 따라 다스리는 길이 몇 가지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하나가 이성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경우입니다.
이성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지성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지성은 합리성을 생각하며 그 미래를 추구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건을 만나게 되면 그 원인이 무엇이었나? 이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로 인하여 파급되는 영향은 무엇이며 손해는 무엇이고 이로운 것은 무엇인가를 합리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지성인 또는 문화인이라고도 말합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감정주도적인 인간을 야만인, 미개인, 비문화인이라고 하는 반면에, 지성주도적인 인간을 문화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돈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것들은 물을 바가 아닙니다. 그저 언제나 감정주도적인 사람이 되어 자기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채 만사를 기분으로 처리하는 사람은 비문화인인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마음, 자기 감정을 지성과 이성으로 다스리는 사람은 문화인이요 지성인인 것입니다.
한편 자기 양심에 의하여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자극이 있을 때마다 양심에 묻게 되고, 그리고 도덕성을 생각하여 이것이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 남에게 해가 될 것인지 이익이 될 것인지, 이런 것들부터 먼저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립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의지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 의지를 굳게 함으로써 어떤 어려운 시련이 있어도 끝까지 잘 참고 견디어나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일컫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연세가 드신 분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김익두 목사님이라고 하면 왕년에 신천장안의 유명한 깡패요 불량배입니다. 그러던 그분이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었는가 하면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시느라 높은 산길을 걸어 오른 후에 너무도 더워서 웃옷을 벗어놓고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때, 맞은편에서 어떤 술취한 사람 하나가 올라오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고 시비하면서 다짜고짜 마구 때리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직접 들은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이사간 집 굴뚝 헐듯이 패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리 치고 저리 치는 대로 아무 저항 없이 고스란히 맞았습니다.
이윽고 저쪽에서 때리기를 멈추었을 때에 김익두 목사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형님 다 때렸소?" "다 때렸다 왜?" 목사님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상대방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어리둥절해졌습니다. "내가 김익두야." 순간, 사나이는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젠 죽었구나 싶어 싹싹 빕니다. 목사님이 점잖게 말씀합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하던가?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자네는 여기서 장례식을 치렀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내가 예수 믿은 덕에 자네가 살았지 않았나?" 사나이는 그제야 반정신이 듭니다. "그러면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얼 어떻게 해. 따라와야지." 목사님은 그를 데리고 가서 부흥회에 참석시켰고, 후일에 그 사람은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김익두 목사님의 매맞는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유 없이, 말도 안 되는 그 부조리 한 매를, 더구나 그 매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허수아비처럼 맞고만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누가 다스린 것이겠습니까? 지성입니까? 교양입니까?
강한 의지입니까? 학벌입니까? 아니면 체면입니까?
모두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마음을 다스리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인격이 곧 그리스도인의 인격입니다.
잠언에도 보면 계속하여 마음을 빼앗기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불의와 싸우고 정욕과 싸우며, 탐욕과 자존심의 더러운 마음과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허탄한 생각이나 나쁜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싸워서 진다는 것은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내어 주는 것이 됩니다. 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음의 파수꾼을 세우고 기어이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도난 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전혀 감지할 수 없는 무의식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도난 당하여 주인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엉뚱한 것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나를 주관하게 되고, 그 결과 어떤 때에는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혹은 배신자가, 또 어떤 경우에는 물욕이, 그 허황한 자존심이 내 마음을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마음을 도둑맞은 때문이겠으나 자신도 몰랐던 일입니다. 알고 보면 이와 같이 마음을 도둑맞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되지 못하고 엉뚱한 것이 주인이 되어 나를 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사기 당하지 않도록, 다시 말하여 스스로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인격이 그런 대로 제법 갖추어진 줄 알았으나 이제와 보니 참으로 형편없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 때가 가장 후회스럽습니다.
인간의 고민 중에 가장 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이나 멸시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한 인간이 되었는가를 후회하는 고통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고 사는 사람은 곧 자기의 마음을 사기 당한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성을 낸다는 뜻의 헬라 원문 '파록수네타이'는 그 구성이 재미있게 되어 있는 낱말입니다. 이 말을 어원적으로 분석해 보면 '파라'라고 하는 말은 '곁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옥수네타이'라는 말은 '날카롭고 뾰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날카롭게 찌르는 마음의 상태를 두고 우리는 "성낸다"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낸다는 말은 어떤 대상을 위해 분노한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민감하여 안달을 하며 화를 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을 내는 것과 분노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민감하고 날카롭다는 것은 감추지 못하는 열정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성을 내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 뿌리는 에로스적인 사랑에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에로스와 아가페가 같지 않음을, 그리고 그 현저한 차이와 양상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 여기에는 원치 않았던 결과와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 좋은 예로서 창세기 4장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제사를 드린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그렇지 못한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자, 형 가인의 얼굴빛이 변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4:6)"라고 경고하십니다. 얼굴빛이 변하는 그 순간이 바로 화를 내는 순간입니다.
오직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하기에 상대가 누구이든 자기에게 어떤 피해가 온다고 생각될 때에는 이와 같이 발작을 하는 것이며, 이것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자신 또한 괴로워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아가페가 아닌 자기중심적인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받고 싶은 마음, 그것도 극성스럽게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사랑이 채워지지 않고, 받지 못할 때에는 그 감정이 반사적으로 나타나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현재적이요 찰나적이기에 잠깐도 늦추지를 못합니다. 어쩌면 단 5분만 지나도 사라질 수가 있고 한 시간만 참아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을 참지 못하고 아주 다급하게 발작을 일으켜 그 반사작용이 화를 내게 합니다.
이 순간은 극히 불신앙적이어서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미래도 현재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후에 다시 저의 얼굴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따위는 전혀 생각지 못한 채 그대로 쏟아놓고 발작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성을 내는 일로서, 모두가 에로스적인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잠언 16장 32절 말씀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 노하더라도 시간을 조금만 지연시킬 수가 있다면, 오늘 낼 화를 하루가 지난 내일에만 낸다 하더라도 그는 용사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성을 낸다는 것은 순간적이요 찰나적인 감정의 반사작용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무엇이 위대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무방비 상태에서 잠깐의 인내도 없고, 잠깐의 판단력도 지성도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만다면 거기에 무슨 위대함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사랑의 질에 있습니다. 참사랑에는 결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사랑 자체가 변질되었고 그 사랑이 참사랑이 아닌 까닭에 고통이 있고 복잡한 문제들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가 아가페적으로 바뀌어져서 거짓된 사랑의 노예로부터 벗어나 참된 사랑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본질적 사랑으로 환원되어야 하겠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그 사랑 자체가 결국은 분노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 분노는 현재적입니다 마는 그 뿌리는 언제나 과거에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열등의식이라고도 하고 갈등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이미 있었던 열등의식이나 갈등이 조금만 건드려지면 아차 하는 순간 그대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원인은 과거에 있고 이미 있어온 바의 발로인 것입니다. 반면에 아가페 사랑은 나 자신과 나 자신의 과거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사랑입니다. 과거가 생각나거나 다시금 과거가 문제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에는 성냄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요 신앙인인 에이브러햄 링컨에게는 한때 그를 모질게도 욕하고 비난한 스텐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링컨에 대하여 참으로 못된 소리를 많이 하고 다녔습니다.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대"라느니 "고릴라 같은 사람"이라느니 "고릴라를 잡으려면 아프리카로 가지 말고 링컨의 고향으로 가라"라느니 갖은 악담을 다 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후에 대통령이 되자 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였으며 함께 훌륭한 일을 많이 해냈던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저격을 당하여 쓰러지자 스텐튼은 어느 누구보다도 슬퍼했습니다. "여기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 있다"고 하면서 대통령의 관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링컨 대통령이 이 스텐튼을 국방장관에 임명할 때의 마음과 저를 용서할 때의 마음은 어디에서 다스려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교양입니까? 그의 지성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리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이같이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다스린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그 마음을 주관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가페의 사랑만이 그 마음을 다스리며, 자유케 합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은혜를 잊어버리게 하고, 은혜를 배반케 하며 은혜를 생각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런 가운데 시종일관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고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성을 내는가하면 현재와 미래, 그리고 좌우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사하고 은혜 안에 있는 새로운 나를 생각하면서 감사합니다. 아가페의 사랑만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주인은 이 사랑 외에 그 누구, 그 무엇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 엄청난 사랑에 감격하고 이 사랑을 계속 고백하며 간증하는 동안에 평안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다스려질 것입니다.
스데반이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는 순간, 그에겐들 어찌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이 그를 덮고 그 마음을 다스릴 때에 그는 원수를 사랑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마음을 빼앗긴 자의 얼굴은 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오직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그 얼굴은 언제나 천사의 얼굴처럼 빛납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 이외의 그 무엇으로도 나의 마음을 지배케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 다스릴 때에 참 온유와 감사와 그리고 창조적 능력이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높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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