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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지향적 신앙(3장 12절~16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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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지향적 신앙(31216)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귀중한 생의 철학을 확실하게 엿볼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그가 세운 목적만큼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인생의 성공 여부는 그가 세운 목적에 달려 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가지는 고민이나 근심이나 행복이나 불행도 필경은 그가 자신이 세운 목적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라는 것이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목적을 잘 못 세우면 그것이 곧 실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그가 세운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따르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이야 말로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 생을 살았습니까? 그는 과연 위대한 분이었다는 것을 거듭 생각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목적은 자기 스스로 세운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가 목적을 세웁니다. 내 욕망을 따라 세우거나, 어떤 때에는 남이 세운 목적이 좋아보여 그것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처한 입지(立地)나 자신의 달란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세워놓은 게 보기 좋아서 '나도 저렇게 한 번 해보았으며'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결혼에 관하여 쓴 어떤 책을 읽어보았더니, 결혼에 대하여 범하기 쉬운 가장 무서운 생각은 친구가 결혼하는 걸보고 나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친구의 신랑과 비슷한 학벌, 비슷한 조건, 그 아래여서는 안 되고 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하는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실한 자기 뜻이 있어 결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질투로 결혼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출발했으니 실패하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세운 뜻이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하든가 말든가 해야 하는데, 그리고 내처지를 고려해서 결혼을 해야 하는데, 이런 것은 무시하고 결혼의 기준을 친구의 남편에 둡니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그렇게 결정했으니 두고보나마나 그 결혼은 실패인 것입니다.

결혼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내가 가진 직업, 내가 선택한 전공, 내가 선택한 생활 방식이 다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것이 과연 자신의 페이스에 맞고,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능력이나 재능에 합당한 것입니까? 아니면 누구 때문에 선택했습니까? 그 동기가 처음부터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나 아닌지요? 저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버릇처럼 일깨웁니다. "너는 목사를 아버지로 두었으니 애초부터 돈 벌 생각은 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돈 버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벌겠습니까? 그래서 장사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하는데 글쎄요, 자식들이 제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목적을 자신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에게 두지도 않았습니다. 질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놀라운 일입니다마는 그가 스스로 세운 목표나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세워 준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은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12절은 제가 무척 좋아하는 말씀이어서 가끔 다른 사람에게 주는 책 표지에 써 줄 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인지 백번 천번 읽어보고 또 생각해 보아도 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좇아가노라"고 했는데, 이것의 원문은 온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올림픽 경기 때 100미터 200미터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보면 땅에 몸을 기울이고 있다가 ''하고 신호가 나면 총알같이 내닫지 않습니까? 온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달려가는 선수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 선수에게는 딴 생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어디를 돌아보겠습니까? 오로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밖에는 생각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경주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총력을 경주하는 것이고, 자기 생애를 그 과정에다 두었습니다. 좇아가는 과정(Process) 그 자체가 자기의 생애라는 것입니다. 경기장에 선 자기, 이미 출발해서 막 달려가고 있는 그 현장, 그 시간이 '나 바울'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잡힌 바 되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에게는 이것이 추상적인 이론이나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바 윤리학적인 가치관이니 생의 목적 운운하는 이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가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본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모름지기 바울은 예수 당시의 유명한 역사가요 철학자인 필로(알렉산드리아의 Philo) 같은 인물이 되려고 했던 것 같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히브리 종교에 능통하고 정통 바리새파이며, 학문으로는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을 제일 우러러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능통한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어느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못지 않은 공부를 하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을 제일로 쳤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모든 것에 능통한 가말리엘이나 필로 같은 인물이 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그의 본래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 열심은 말로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는 율법적인 해석, 스스로 생각하는 히브리 종교, 또한 스스로 생각하는 철학적 이론에 위배된다고 할 때에는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때려죽이는 데 가담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로마법을 어기면서까지 그렇게 했으니 이 사건 때문에 자신이 죽음을 당한다 해도 좋다는 신념이 아니겠습니까? 로마법이 허용하지 않았는데 왜 히브리법으로 멋대로 처형했느냐 -- 이러한 구실로 끌려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어이 그 일에 가담한 것입니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런 자는 죽여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극성이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열심 있는 사람이고, 얼마나 목적이 분명하며 생의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었는지를 족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을 수가 없어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공회에 세워놓고 말살을 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 때에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옵니다. 그는 그 빛이 내려온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오입니다. 만약 밤 12시에 그랬다면 꿈으로 돌릴 수도 있고, 혹 산 속에서 보았다면 내가 환상을 보았나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기도 시간도 아닙니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대낮하고도 정오에 환한 빛이 내려옵니다. "사울아"하고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는 꿇어 엎드리게 됩니다. 그는 아주 야무진 사람이라 그런 경황중에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묻습니다. "주여, 뉘십니까?" 얼마나 대담한 사람입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마침내 바울은 예수의 포로가 됩니다. "잘못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어떤 요구나 무슨 소원이나 그런 것은 아랑곳없이 예수님은 직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다메섹으로 가라.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일방적인 통고입니다. 바울은 그 길로 다메섹으로 들어가 아나니야를 만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한마디로 예수의 포로가 됩니다. 지금까지 가던 길을 멈추고 지금까지 하려고 했던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 수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마침내 바울은 생활 철학을 일신해 버립니다. 그는 온전히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몸만 포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신앙이, 이상(理想)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적까지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곧 바울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5절에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수단을 예수께로 바꾼다는 것이 아니고 목적을 예수께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목적은 내게 있고 수단은 예수께 둔 사람이 있습니다. 필자가 서교동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찬송 부를 때에 보니까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면서 열심히 불러요. 그런데 이 아주머니 보십시오. 설교가 시작되니까 감쪽같이 달라져요. 입을 딱 벌린 채 한잠이 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맨 앞자리에 떡 버티고 앉아 천연스럽게 이러고 있으니 여간 민망스럽니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 중에 주먹으로 강대상을 딱딱 쳐 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어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사흘 동안을 내리 그랬습니다. 부흥회가 끝나고 그 교회 목사님께 물어보았더니 아주 재미있는 사연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서교동 일대에서 이름난 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한번 믿기 시작하니까 새벽기도다 철야기도다 빠지지도 않고 열심인데, 아직은 무당기가 덜 빠져서 시끄러우면 정신이 들고 조용해지면 잠에 빠진다고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인천서 목회할 때, 이이를 낳지 못해 세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의사의 설명으로는 그 여자에게 잘 못된 데가 없다는데도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절간에도 가보고 약도 먹어보고 무당굿도 해보는 등 별의별 방법을 다 썼지만 소용이 없는데, 누군가가 예수 믿으면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지금은 세례까지 받고 열심히 교회에 다닙니다.

, 이 두 사람을 놓고 봅시다. 그 무당기 덜 빠진 여인은 목적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방법에는 약간 무당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든 여인은 목적이 아이 낳는데 있고, 그 수단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이제 묻겠습니다. 어느 쪽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방법이나 형식은 조금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좀 못마땅해도 용납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께 있으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꽤나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잘 믿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 자신의 욕망에 목적이 있고, 나 자신의 명예에 목적을 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기를 알아달라는 교만이 있습니다. 결코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런 중요한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목적이 그리스도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어느 때 어느 형편에서도 그 목적은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중생(重生)이란 바로 이런 것을 뜻합니다. 혹 방법이야 문화적일 수도 있고, 자기가 살아온 배경에 따라서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 목적이 하나님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목적에 대한 문제를 심각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께 잡혔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나에게는 자유가 없다. 나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에게 자유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내가 똑똑해서 예수 믿었다는 사람은 한 번 더 회개를 하여야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절대로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닙니다. 이 생각이 깊숙히 들어가면 '예정'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선택하시고 이렇게 정하셨다, 나는 믿지 않으려 애썼고, 나는 멀어지려고 애썼고, 나는 도망가려고 애썼는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나를 붙드셨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다 끊어 버렸습니다. 마지막에 꼼짝없이 붙잡혀서"주여!"하고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자유가 없다." 그는 다메섹에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기야 그가 어떤 처지에서 붙들린 사람인데 딴 길로 가서 살아 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간증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수요일 이 저녁에 나온 교인은 상급입니다. 새벽에 나오는 교인은 좀 고급입니다. 주일 낮에만 나오는 사람은 중급이고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사람은 하급입니다. 수요일 저녁에 나오는 것은 좀더 열심히 믿으려는 것인데 사실인 즉 여기 나오기까지는 매도 많이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 쉽게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포로됨에는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저 막연히 나를 붙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지향적인 경륜이 있어서, 하나님의 Something이 있어서 나를 붙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큰 경륜 속에 깊으신 뜻이 있어서, 그것을 위하여 쇠사슬에 딱 묶어 놓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하는 말씀 중에서 잡혔다는 것은 노예 되었다는 것이요 수동적인 것이요 불만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은 능동적이요, 자원적이요, 지적이요, 그리고 감사에 넘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울의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끌려가면서도 죽을 때까지 징징거립니다. 이리 가다 얻어맞고 저리 가다 얻어맞아 만신창이입니다. 기왕에 붙잡힌 줄 알았다면 곱게 끌려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일단 붙잡힌 이상 "아이구 틀렸다" 하고는 전에 좋아하던 것 다 내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됩니다. "붙들린 것 감사합니다" "실패한 것 감사합니다" "다 망한 것 감사합니다."하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좇아갔습니다. 그래서 잡힌 바 된 그 것, 주님이 세운 목표, 그 길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좇아가는 것이 그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감사하는 노예, 찬송하는 노예입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곳으로 불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본문에는 좀더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달려가는 그 현장에서 그가 느끼는 것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다시 말하면 미완성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히 이루었다'는 것은 '테텔레이오마이'인데 이 말의 어원은 '텔레이오스'입니다. 완성을 뜻하는 철학적 용어입니다. 충분히 성숙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이루었다'함은 성숙한 제자, 그리스도의 의로써 세례 받은 완전한 교인, 순교까지도 할 수 있는 교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순교하게 되면 언제라도 ""하고 죽을 수 있는 성숙한 교인을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아직 순교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만한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만 가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진실하고 솔직한 고백입니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천사의 얼굴로 찬송하는 것을 본 그로서는, 스데반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완성이요 성숙인데, 자기는 아직도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때로 자신을 너무 과시합니다. 남 순교하는 것 보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남이 참았다 하면 그까짓 참을성이야 내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훌륭한 교인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과연 나는그 절반에라도 낄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을 살피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오히려 더 강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완성 중에서 스스로 완성을 생각하는데, 여기에 두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 뒤의 것은 잊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건망증도 좀 있어야 합니다. 건망증도 은사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하던 못된 것, 취미, 그릇된 습관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려야 하는데, 한 마디로 입맛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아서, 이를테면 지난날에 빠지던 취미 같은 것에 미련이 남아서 심심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니까 심심해서 못 견디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예수 믿는 취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체험하는 일입니다 마는 우리는 보통 기억이 안 나서 괴로울 때보다는 잊어버려야 할 것을 못 잊어서 괴로울 때가 더 많습니다.

그 악몽같은 추억, 부끄러운 기억, 나빴던 관계, 실수했던 일, 이런 것은 빨리 잊어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잊어버려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아 좀처럼 가슴 펴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88올림픽 때, 선수들이 게임하는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어떤 선수는 거듭거듭 실패를 합니다 .그것을 중계하던 한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저 선수, 지난번에 실패한 것을 어서 잊어버려야 하는데……" 참으로 정곡을 찌른 말입니다. 잊어버리지 못함으로 해서 너무 조심하다가, 또 실패할까봐 벌벌 떨다가 또다시 실패하는 것입니다. 실패한 것만이 아니라 지난 날 이겼던 것도 기억할 것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입니다. 다 잊어버리고 언제나 처음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대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날의 화려한 경력도 어두운 이력도 이 시간에는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둘째,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말씀입니다. 온몸을 기울여 앞을 향해서 달리는 선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 달려가는 일에 그는 두 가지를 더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푯대입니다. 둘째는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상만 받아들입니다. 사람의 칭찬이나 비판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푯대를 바로 보고 위에서 부르는 상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다녀와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낸 것을 자랑하자 예수님은 대수롭지 않은 일 인양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7:20)." 지금의 우리가 볼 때에는 사도 바울이 위대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데살로니가,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믿는 사람, 종교인, 유대인, 그리고 주님의 일꾼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그렇게 높이 칭찬 받던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바울은 끝까지 위에서 부르시는 상만 바라보고 좇아갔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또 한번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계시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16절에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어디까지 달려왔는지 다시 뒤돌아보지 말고, 궤도 수정하지 말고 그대로 앞으로 밀고 나가라, 추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귀한 명령이요 또 자기 신앙의 간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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