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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변증(사도행전 11:1~10)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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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변증(사도행전 11:110)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가로되 내가 욥바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오늘의 본문 가운데에는 베드로의 변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다시 읽는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을 그대로 다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기자 누가는 왜 두 번이나 같은 내용을 기록했을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있 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선교적 의미를 가지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됩니다.

고넬료가 예수를 믿었고 세례를 받았어요. 그런데 이 이방사람, 예수 믿어온 사람을 이미 예수 믿는 유대사람들이 형제로 영입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대사람 과 비 유대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해서 복음을 받고,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또 성령을 받고 세례까지 다 주었어요. 무슨 뜻입니까? 고넬료와 그 일가가 크리스찬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인 된 고넬료를 먼저 믿어온 유대 기독교인들이 영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본문에 보면 난센스 같은 이야기가 나와요. 보십시오. "이방인들 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우리도 예수 믿고 저도 예수 믿었다, 유대사람도 예수 믿고 이방사람도 예수 믿었다, ,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 이렇게 생각했으며 됐지, 오히려 여기다 대고 저 사람들은 본래 이방사람들인데, 저 사람들 생활 풍습이 우리와 다른데, 그 사람들은 가족관계도 좀 다른데, 하고 딱 벽을 쌓는 것입니다. 심각합니다. 여러분, 확실한 것은 역사가들이 추구할 일이요, 사실 여부는 제가 설명할 수 없습니다마는 기록한대로만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나라에, 서울 안에 연동교회 라고 있습니다. 종로 5가에 있는데 역사가 100년이나 됩니다. 이 교회가 어느 날 장로 투표를 해서 백정 한 사람이 장로가 됐어요. 옛날에는 백정이면 이른바 '상놈'이거든요. 그런 사람이 열심히 예수를 믿어서 온 교인들이 높이 존경한 나머지 장로로 뽑은 것입니다. 그러자 소위 양반 장로들이 되게 기분이 나빴던가 보아요. 그래 ', 이 교회 안 다닌다'하면서 따로 나와 세운 것이 안국동교회입니다. 윤보선씨 나가던 교회로 상당기간까지 '양반교회'였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양반과 상민,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주인과 종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에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거든요. 형제 됐으면 이제는 '형님' '동생'하고 지내면 되겠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사람이 상놈 출신인데 함께 한솥밥 먹는다는 건 말도 안되지. 같이 앉아서 예배본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문제입니다. 그뿐입니까? 오늘 이 자리에는 남녀가 서로 섞어 앉았습니다마는 우리네 교회에서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섞어 앉게 된 것도 그리 오래 전부터가 아닌 것입니다. 따로따로 앉았었지요. 이쪽에 남자, 저쪽에 여자, 그리고 교회 갈 때에도 남편은 저만치 가고 아내는 이만치 서 뒤따라가요. 제가 어렸을 적에 나가던 교회는 자로 지어진 교회였습니다. 목사님이 여기 서면 남자는 이쪽, 여자는 다른 쪽입니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못 보게 되어 있었어요. 들어가는 문부터 따로따로 였습니다. 따로 들어왔다가 따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려고 지을 때부터 자로 했었지요. 장대현교회도 그런 교회였습니다. 조금 지난 다음 초등학교 3학년쯤에 가서 그 예배당을 헐고 다시 큰 예배당을 지을 때에야 합했는데, 그래도 앉기는 여전히 따로따로 앉았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할 때에도 따로따로 앉았어요.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어찌어찌 다 섞이고 말았지만 아무튼 남녀가 그토록 유별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문화의 문제입니다.

예수 믿어서 예수 안에 하나다 하고 모든 것이 변하여야 되겠는데 풍속은 고칠 수 없고 계층의식은 굳어 있습니다. 수십 년 예수 믿고도 여전히 도로아미타불이지요. 보통 때는 곧잘 형제자매라고들 쉽게 말하지만 내심은 그렇지를 않아요. 가정도 완전히 그리스도화하지 못 한 가정이 많아요. 바로 이런 것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이방인이 예수 믿었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심지어는 세례준 것도 문제삼지 않아요.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표면적으로는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 믿기 전의 규범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생활규범입니다. 이 생활규범을 예수 믿은 다음에도 고치지 못했다는 점,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형제인데 왜 함께 못 먹는 것입니까? 왜 오고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그 집에 들어가 잘 수 없느냐, 그 말입니다. 그런 데 유대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 하더라도 이방인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다, 이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집에 들어가도 안되고 들어가 함께 음식을 먹는 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집과 혼인을 해서는 안되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잔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과거의 풍속이 오늘도 문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풍속, 그들의 문화화된 전통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본능 위주로나 지성 위주로 삽니다. 어떤 사람 은 문화적 전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별생각 없이 그저 살던 대로가 제일 옳은 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삽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자기 생활을 고쳐갑니다. 그리스도안에 형제자매 되고 보니까 남존여비 관념에서 벗어나 아내일 도 도와주고 싶어지고 남편의 일도 함께 걱정할 줄 알게 되고-----이렇듯 자연스럽게 달라져야 하는 것이지 예수 믿고도 죽을 때까지 남존여비라니, 안될 말인 것입니다. 노예제도라는 것도 그래요. 노예가 예수 믿을 수 있고 주인이 예수 믿을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에는 노예도 그리스도 안의 형제요 주인도 그리스도 안의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 믿는다고 하는 신앙에 의해서 풍습이나 문화화된 전통이나 재래적인 관습 이 하나하나 고쳐져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풍습과 문화가 걸림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의 이슈입니다. 좀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것은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문화적인 우월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 문화가 더 좋다, 너의 문화는 나쁘다----그런 얘기입니다. 이 같은 이기주의가 문제입니다. 그 결과로 코이노니아----fellowship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유대사람이라고 하는 공동체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서 공동체의 개념이 넓어집니다. 변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기독교라고 하는, 혹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소위 크리스찬 community가 생깁니다. 저마다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대사람이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기독교라고 하는 공동체가 있느냐, 기독교라고 하는 큰 공동체 안에 유대사람이라고 하는 작은 공동체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사람이라는 공동체는 있을 수 있어요. 남자가 있고 여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이런 공동체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큰 공동체 속에서는 이것이 다 흡수되고 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인은 다 하나입니다. 한가지 세례를 받았고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대로 주도하나요, 말씀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예수는 머리요 우리는 지체다,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유대사람이냐 이방사람 이냐 하는 것은 한 몸 안에 오른손 왼손이 있는 것처럼 각각 한낱 지체일 뿐입니다. 손이 있고 발이 있는 것처럼 유대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 헬라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 로마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인 것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풍속도 달라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우리 나라에서야 좁은 곳이니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마는 60년대 초, 유학차 미국에를 갔을 때에 주일날이면 이 교회에 나가고 저 교회에 나가고 해보았어요. 아직 공부 시작하기 전인데 몇 주일 나가 보았더니 교회마다 들어서자마자 누구냐고 물어요. 한국에서 온 목사인데 공부하러 왔다고 말하니까 이것 보십시오, 당장 올라오라고 하더니 축도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설교 같았으면 써 가지고 읽으면 되겠는데 축도를 읽을 수는 없잖아요? 축도를 영어로 하기란 참 어렵거든요. 잘 외었다가도 그 때에 가서 틀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지요. 자신 있게 하기가 어렵다고. 그랬더니 이 사람들은 한국말로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되는 것이니 한국말로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교회에서 축도를 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를 언제 보았다고 그러했겠습니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 한국교회의 목사라는 것, 이것만으로 어서 오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참 좋더군요. 얼마 전에도 우리 교회에 왔었던 라지어스라고 하는 목사님은 제가 미국서 공부할 때에 박사논문을 심사해준 분입니다. 저를 여러 모로 도와준 분인데 이분이 오셨기에 축도하라고 했어요. 그분이 축도를 영어로 하지 않았습니까? 못할 것 없지요. ,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풍속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꼭 같은 수평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유대인, 예수 믿는 이방인의 차이는 어디까지나 문화적 차이로만 남아야 합니다. 결코 수직관계로 남아서도 안되고 종적 관계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의미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형태의 관계, form의 관계로만 남아야 한 다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갭(gap)이 문화적인 격이라는 것이 기독교인의 공동체 속에서 방해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성도의 교제는 똑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여러분이 성도의 교제를 넓혀갈 때에 혹이라도 있는 사람이다 없는 사람이다, 유식한 사람이다 무식한 사람이다 하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안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구별해서 생각해도 안됩니다. 소망교회가 부흥하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아무도 특별 대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상당한 분들이 많이 옵니다. 그분들이 왔다가 돌아가면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다른 데에 가면 "아유 장관님" "아유 장로님"하고 수선을 떠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것이 없어요. 한번은 돈 많은 할머니가 나왔었대요. 이름 대면 알만한 재벌의 부인입니다. 여러 번 나왔는데요. 사실은 다른 교회에 여러 번 나갔다가 '사모님, 사모님'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우리 교회에를 나왔다고 해요. 우리 교회에 나오니 아니나다를까 아무도 특별한 대우를 해주지 않아서 참 좋구나 싶었는데 웬걸 몇 달 나오다보니 나중에는 은근히 좀 섭섭해졌어요. 너무 안 알아주니까요. 답답했던지 마침내는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을 딱 붙들고는 "나 누군지 몰라요?" 하더랍니다. 집사님이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답했더니 이름을 대면서 "아무개도 몰라요?" "모르겠는데요" "그렇게도 몰라요?" 그래서 ", 우리 교회는 이렇게 사람을 몰라보죠.

예쁜 영화배우가 와도 몰라보는데요"하고 말해주었는데, 그 부인은 꽤나 섭섭해하더라고 해요.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특별 대우받을 생각 마세요. 특별 대우를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꼭 특별대우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다 죄인인데 그래서야 되겠어요?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하나라고 하는 것만 크게 여기고 그 나머지는 극소화해야 됩니다. 분명히 차이는 있습니다. 남녀 차이가 있고, 빈부 차이가 있고, 문화 차이가 있고, 언어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극소화하고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기업을 위해서 함께 가는 성도라고 하는, 이것만을 큰 것으로 생각하면 거기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또 한가지, 기득권에 집착하는 저의가 있었습니다. 신앙적 시기심이 있었어요. 참 맹랑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보고 예수 믿으라 예수 믿으라 하면서도 정작 불러다놓고는 나는 집사요 당신은 평신도요, 나는 오래 믿었고 당신은 처음 믿고…… 꼭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못된 심사지요. 그래서 가끔 어떤 분이 좋은 일이나 선한 일 하는 것을 보면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제에 나선다고 눈을 흘겨요. 이 무슨 심사입니까? 저도 안 하면서 남 선한 일 하는 것 왜 시기하는 겁니까? 이런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어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될 자가 많으리라고. 그럴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유대사람들 보십시오. 먼저 예수 믿어놓고 주위의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요. 그들은 특별한 종교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이다, 성전이다, 성전예배다, 제사다, 할례다 하는 풍속과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함께 나누고 싶지 않아요. 이방인이 유대사람과 똑같이 되는 게 못마땅한 것입니다. 왜요? 적어도 종교적으로 높은 우월감을 저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다. 선택된 백성이다, 그리고 저 이방사람들, 저 못된 것들, 저것들은 개 같은 존재들이다 하고 정신적으로 여지없이 멸시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종교적 인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이제 예수 믿고 나서 이런 것 다 털어 버리고 개 같은 사람이라고 멸시하던 사람들과 함께 라니, 이게 못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딱 버티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은 다르다-----먼저 믿은 사람과 뒤에 믿은 사람은 다르지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면 같이 되는 것,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어요. 사람도 여러 가지요 불평도 여러 가지인데,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일단 기본적으로는 남과 같지 못한 것을 괴로워합니다. 다른 사람은 이제 제집에서 사는데 나는 셋방에서 사는구나, 나도 내집 좀 가져봤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남이 가진 것 내가 가져보려고, 다른 사람과 같아지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그러다가 같아지면 이제는 그로써 만족해야 되겠는데 이 또한 그렇지 않아요. 하룻밤도 안되어서 달라집니다. 이제는 좀더 나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는 남과 달라지기를 원해요. 이제는 남과 같은 게 못마땅해요. 같아지는 게 싫어요. 유별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특별한 것 좋아하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옷을 사 입었어요. 아주 비싼 옷을 사 입어서 기분 좋았는데 그걸 입고 시장에 나갔더니 똑같은 것을 입은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하필이면 또 못생겼어요. 그만 기분이 나빠 가지고 돌아와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안 입는다 하고. 이렇게 고약한 심성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불행합니다. 행복할 길이 없어요. 언제나 유별나야 되니까요. 어떻게 항상 특별할 수 있습니까? 그러다가 늙어가기 시작 하니까 주름살이 생기는데, 특별히 이제는 위로 가지 않고 밑으로 터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살하기 좋게 생겼습니다.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불행이라는 것이 이런 고약한 심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더불어 행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 예수 믿으면 ", 좋습니다, 당신도 믿는군요"하고 기뻐하면 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부인은 교회에 나오는데 남편이 안나옵니다. 그 사람보고 교회 나오라고 했더니 "저요? 안나갈랍니다"해요.

"왜요?" 했더니 "집사람이 천당 간다고 하니 난 지옥 갈랍니다." 못됐지요. 그런가하면 참 답답한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여자가 먼저 믿어서 집사가 되었는데 지금 나가면 나는 평신도다----이것이 못마땅해서 교회 안나오는 남편들도 있더군요. 어떤 사람은 이런 농담을 해요. 나보고 "돈 얼마 내면 장로 되나요?"해요.

"그거부터 먼저 내어 장로 되고 나서 예수 믿겠습니다. 마누라가 권산데 내가 이거 되겠어요?"합니다. 못된 생각이지요. 이런 특권의식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남과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행복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세계관 자체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달라져서 함께 더불어 기뻐할 줄 아는 심령이 되어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행복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절대로 특별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러면 못씁니다. '특별'이란 있을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용납치 않아요. 그렇게 특별 하려고 하다가는 언젠가 한번 되게 맞아요. 다칩니다. 아무쪼록 쓸데없는 생각 마세요.

오늘의 본문을 보니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이방사람 예수 믿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어요.

베드로가 보아하니 한심했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가 이 같은 힐난 앞으로 차례로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며하여 가로되"-----침착했어요. 온유, 겸손한 가운데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명하는 내용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베드로의 의중을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원래 성급한 사람입니다. 대단히 급한 사람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온유하게 차근차근히 설명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운 뿐입니다. 먼저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사실대로 죽 이야기합니다. 논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내 의견이 어떻다, 내 지식이 어떻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 하셨고 나는 그대로 순종한 것뿐이라고 사실대로 차근차근 설명해요. 이야기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건대로 차례대로 설명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의도를 자세히 보면 공감대를 이루고 있어요. 베드로의 마음속엔 적어도 이 마음이 있어요. 나도 당신들과 같은 마음이었소, 바로 그 마음이오-----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화를 여는 길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잠깐 TV를 보니까 계모가 있는데, 남편 전처의 아이 가 말썽을 부립니다. 아빠도 동생도 모두가 죽은 어머니를 잊어버리고 지금 새어머니만 사랑한다고 아이가 불평입니다. "나는 죽은 우리 어머니가 좋다"하면서 그 어머니가 잊혀지는 것이 괴로워서 새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다고 소리치면서 울어요. 어떻게 수습하나 하고 봤더니, 계모는 그 아이를 앞에 놓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의 입장이라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 너의 입장이라면 나도 그런 마음을 가졌을 거다. 얼마나 어머니 사랑을 받았는데 안 그렇겠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니까 아이는 마침내 새어머니한테 굴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여기 사도 베드로가 얘기하는 내용을 가만히 보면 다른 게 아닙니다. "나도 당신들과 같은 마음이었소, 그런데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타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기에 나도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 전에는 당신네나 나나 다 같은 사람이었소. 나도 본래 그런 마음 가지고 있었소."

두 번째로 또 하나 공감대를 이루는 것은 "당신들이 지금 편견을 가지고 오해를 하고 있지만 내가 경험한 것을 당신들이 겪었다면 당신들도 나와 같았을 것이오"-----이런 의중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본 환상을 당신들이 보았다면, 내가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에 고넬료가 엎드려 절하는 것을 당신들이 보았다면, 내가 고넬료에게 설교할 때에 성령 받는 것을 보았는데 당신들도 그 처지에 있었다면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졌을 거요-----이것이 베드로가 말하는 것의 내용입니다. 설득력 있는 말씀이지요. 모름지기 이 같은 공감대가 필요해요. 너와 나는 다르다,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다면 끝난 것입니다. 왜 그리 무식하냐, 왜 이렇게 못됐느냐-----이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러 이렇게 되었다, 당신은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 내 나이 되고 내가 경험한 것을 경험한다면 당신들도 나와 꼭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여기에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위치를 바꾸어 놓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말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이 가진 고집을 고집이라 하 지 않고 그 잘못을 극소화해서 일시적 실수로 생각합니다. 착각과 오해로 생각합니다. 다 같은 마음인데 지금 무엇인가 조금 다른 것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을 저들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본 환상을 보지 못했고 내가 들은 주의 음성을 못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도 원래는 당신과 같았소-----이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이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오해가 풀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의 의지가 경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설명을 하면서 정말 침착합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차근차근히 차례대로 온유하게 설명해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상대방을 비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잘못됐다고 하는 나무람도 없습니다. 다만 사건이 이렇게 된 거요-----이 말끝에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동의를 하게 됩니다. 그렇겠습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잘못됐습니다-----이래서 예루살렘교회는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변증(사도행전 11:110)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가로되 내가 욥바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오늘의 본문 가운데에는 베드로의 변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다시 읽는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을 그대로 다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기자 누가는 왜 두 번이나 같은 내용을 기록했을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있 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선교적 의미를 가지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됩니다.

고넬료가 예수를 믿었고 세례를 받았어요. 그런데 이 이방사람, 예수 믿어온 사람을 이미 예수 믿는 유대사람들이 형제로 영입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대사람 과 비 유대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해서 복음을 받고,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또 성령을 받고 세례까지 다 주었어요. 무슨 뜻입니까? 고넬료와 그 일가가 크리스찬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인 된 고넬료를 먼저 믿어온 유대 기독교인들이 영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본문에 보면 난센스 같은 이야기가 나와요. 보십시오. "이방인들 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우리도 예수 믿고 저도 예수 믿었다, 유대사람도 예수 믿고 이방사람도 예수 믿었다, ,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 이렇게 생각했으며 됐지, 오히려 여기다 대고 저 사람들은 본래 이방사람들인데, 저 사람들 생활 풍습이 우리와 다른데, 그 사람들은 가족관계도 좀 다른데, 하고 딱 벽을 쌓는 것입니다. 심각합니다. 여러분, 확실한 것은 역사가들이 추구할 일이요, 사실 여부는 제가 설명할 수 없습니다마는 기록한대로만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나라에, 서울 안에 연동교회 라고 있습니다. 종로 5가에 있는데 역사가 100년이나 됩니다. 이 교회가 어느 날 장로 투표를 해서 백정 한 사람이 장로가 됐어요. 옛날에는 백정이면 이른바 '상놈'이거든요. 그런 사람이 열심히 예수를 믿어서 온 교인들이 높이 존경한 나머지 장로로 뽑은 것입니다. 그러자 소위 양반 장로들이 되게 기분이 나빴던가 보아요. 그래 ', 이 교회 안 다닌다'하면서 따로 나와 세운 것이 안국동교회입니다. 윤보선씨 나가던 교회로 상당기간까지 '양반교회'였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양반과 상민,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주인과 종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에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거든요. 형제 됐으면 이제는 '형님' '동생'하고 지내면 되겠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사람이 상놈 출신인데 함께 한솥밥 먹는다는 건 말도 안되지. 같이 앉아서 예배본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문제입니다. 그뿐입니까? 오늘 이 자리에는 남녀가 서로 섞어 앉았습니다마는 우리네 교회에서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섞어 앉게 된 것도 그리 오래 전부터가 아닌 것입니다. 따로따로 앉았었지요. 이쪽에 남자, 저쪽에 여자, 그리고 교회 갈 때에도 남편은 저만치 가고 아내는 이만치 서 뒤따라가요. 제가 어렸을 적에 나가던 교회는 자로 지어진 교회였습니다. 목사님이 여기 서면 남자는 이쪽, 여자는 다른 쪽입니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못 보게 되어 있었어요. 들어가는 문부터 따로따로 였습니다. 따로 들어왔다가 따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려고 지을 때부터 자로 했었지요. 장대현교회도 그런 교회였습니다. 조금 지난 다음 초등학교 3학년쯤에 가서 그 예배당을 헐고 다시 큰 예배당을 지을 때에야 합했는데, 그래도 앉기는 여전히 따로따로 앉았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할 때에도 따로따로 앉았어요.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어찌어찌 다 섞이고 말았지만 아무튼 남녀가 그토록 유별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문화의 문제입니다.

예수 믿어서 예수 안에 하나다 하고 모든 것이 변하여야 되겠는데 풍속은 고칠 수 없고 계층의식은 굳어 있습니다. 수십 년 예수 믿고도 여전히 도로아미타불이지요. 보통 때는 곧잘 형제자매라고들 쉽게 말하지만 내심은 그렇지를 않아요. 가정도 완전히 그리스도화하지 못 한 가정이 많아요. 바로 이런 것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이방인이 예수 믿었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심지어는 세례준 것도 문제삼지 않아요.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표면적으로는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 믿기 전의 규범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생활규범입니다. 이 생활규범을 예수 믿은 다음에도 고치지 못했다는 점,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형제인데 왜 함께 못 먹는 것입니까? 왜 오고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그 집에 들어가 잘 수 없느냐, 그 말입니다. 그런 데 유대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 하더라도 이방인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다, 이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집에 들어가도 안되고 들어가 함께 음식을 먹는 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집과 혼인을 해서는 안되고,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잔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과거의 풍속이 오늘도 문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풍속, 그들의 문화화된 전통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본능 위주로나 지성 위주로 삽니다. 어떤 사람 은 문화적 전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별생각 없이 그저 살던 대로가 제일 옳은 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삽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자기 생활을 고쳐갑니다. 그리스도안에 형제자매 되고 보니까 남존여비 관념에서 벗어나 아내일 도 도와주고 싶어지고 남편의 일도 함께 걱정할 줄 알게 되고-----이렇듯 자연스럽게 달라져야 하는 것이지 예수 믿고도 죽을 때까지 남존여비라니, 안될 말인 것입니다. 노예제도라는 것도 그래요. 노예가 예수 믿을 수 있고 주인이 예수 믿을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에는 노예도 그리스도 안의 형제요 주인도 그리스도 안의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 믿는다고 하는 신앙에 의해서 풍습이나 문화화된 전통이나 재래적인 관습 이 하나하나 고쳐져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풍습과 문화가 걸림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의 이슈입니다. 좀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것은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문화적인 우월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 문화가 더 좋다, 너의 문화는 나쁘다----그런 얘기입니다. 이 같은 이기주의가 문제입니다. 그 결과로 코이노니아----fellowship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유대사람이라고 하는 공동체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서 공동체의 개념이 넓어집니다. 변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기독교라고 하는, 혹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소위 크리스찬 community가 생깁니다. 저마다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대사람이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기독교라고 하는 공동체가 있느냐, 기독교라고 하는 큰 공동체 안에 유대사람이라고 하는 작은 공동체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사람이라는 공동체는 있을 수 있어요. 남자가 있고 여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이런 공동체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큰 공동체 속에서는 이것이 다 흡수되고 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인은 다 하나입니다. 한가지 세례를 받았고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대로 주도하나요, 말씀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예수는 머리요 우리는 지체다,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유대사람이냐 이방사람 이냐 하는 것은 한 몸 안에 오른손 왼손이 있는 것처럼 각각 한낱 지체일 뿐입니다. 손이 있고 발이 있는 것처럼 유대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 헬라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 로마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인 것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풍속도 달라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우리 나라에서야 좁은 곳이니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마는 60년대 초, 유학차 미국에를 갔을 때에 주일날이면 이 교회에 나가고 저 교회에 나가고 해보았어요. 아직 공부 시작하기 전인데 몇 주일 나가 보았더니 교회마다 들어서자마자 누구냐고 물어요. 한국에서 온 목사인데 공부하러 왔다고 말하니까 이것 보십시오, 당장 올라오라고 하더니 축도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설교 같았으면 써 가지고 읽으면 되겠는데 축도를 읽을 수는 없잖아요? 축도를 영어로 하기란 참 어렵거든요. 잘 외었다가도 그 때에 가서 틀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지요. 자신 있게 하기가 어렵다고. 그랬더니 이 사람들은 한국말로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되는 것이니 한국말로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교회에서 축도를 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를 언제 보았다고 그러했겠습니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 한국교회의 목사라는 것, 이것만으로 어서 오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참 좋더군요. 얼마 전에도 우리 교회에 왔었던 라지어스라고 하는 목사님은 제가 미국서 공부할 때에 박사논문을 심사해준 분입니다. 저를 여러 모로 도와준 분인데 이분이 오셨기에 축도하라고 했어요. 그분이 축도를 영어로 하지 않았습니까? 못할 것 없지요. ,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풍속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꼭 같은 수평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유대인, 예수 믿는 이방인의 차이는 어디까지나 문화적 차이로만 남아야 합니다. 결코 수직관계로 남아서도 안되고 종적 관계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의미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형태의 관계, form의 관계로만 남아야 한 다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갭(gap)이 문화적인 격이라는 것이 기독교인의 공동체 속에서 방해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성도의 교제는 똑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여러분이 성도의 교제를 넓혀갈 때에 혹이라도 있는 사람이다 없는 사람이다, 유식한 사람이다 무식한 사람이다 하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안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구별해서 생각해도 안됩니다. 소망교회가 부흥하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아무도 특별 대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상당한 분들이 많이 옵니다. 그분들이 왔다가 돌아가면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다른 데에 가면 "아유 장관님" "아유 장로님"하고 수선을 떠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것이 없어요. 한번은 돈 많은 할머니가 나왔었대요. 이름 대면 알만한 재벌의 부인입니다. 여러 번 나왔는데요. 사실은 다른 교회에 여러 번 나갔다가 '사모님, 사모님'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우리 교회에를 나왔다고 해요. 우리 교회에 나오니 아니나다를까 아무도 특별한 대우를 해주지 않아서 참 좋구나 싶었는데 웬걸 몇 달 나오다보니 나중에는 은근히 좀 섭섭해졌어요. 너무 안 알아주니까요. 답답했던지 마침내는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을 딱 붙들고는 "나 누군지 몰라요?" 하더랍니다. 집사님이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답했더니 이름을 대면서 "아무개도 몰라요?" "모르겠는데요" "그렇게도 몰라요?" 그래서 ", 우리 교회는 이렇게 사람을 몰라보죠.

예쁜 영화배우가 와도 몰라보는데요"하고 말해주었는데, 그 부인은 꽤나 섭섭해하더라고 해요.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특별 대우받을 생각 마세요. 특별 대우를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꼭 특별대우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다 죄인인데 그래서야 되겠어요?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하나라고 하는 것만 크게 여기고 그 나머지는 극소화해야 됩니다. 분명히 차이는 있습니다. 남녀 차이가 있고, 빈부 차이가 있고, 문화 차이가 있고, 언어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극소화하고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기업을 위해서 함께 가는 성도라고 하는, 이것만을 큰 것으로 생각하면 거기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또 한가지, 기득권에 집착하는 저의가 있었습니다. 신앙적 시기심이 있었어요. 참 맹랑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보고 예수 믿으라 예수 믿으라 하면서도 정작 불러다놓고는 나는 집사요 당신은 평신도요, 나는 오래 믿었고 당신은 처음 믿고…… 꼭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못된 심사지요. 그래서 가끔 어떤 분이 좋은 일이나 선한 일 하는 것을 보면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제에 나선다고 눈을 흘겨요. 이 무슨 심사입니까? 저도 안 하면서 남 선한 일 하는 것 왜 시기하는 겁니까? 이런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어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될 자가 많으리라고. 그럴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유대사람들 보십시오. 먼저 예수 믿어놓고 주위의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요. 그들은 특별한 종교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이다, 성전이다, 성전예배다, 제사다, 할례다 하는 풍속과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함께 나누고 싶지 않아요. 이방인이 유대사람과 똑같이 되는 게 못마땅한 것입니다. 왜요? 적어도 종교적으로 높은 우월감을 저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다. 선택된 백성이다, 그리고 저 이방사람들, 저 못된 것들, 저것들은 개 같은 존재들이다 하고 정신적으로 여지없이 멸시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종교적 인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이제 예수 믿고 나서 이런 것 다 털어 버리고 개 같은 사람이라고 멸시하던 사람들과 함께 라니, 이게 못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딱 버티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은 다르다-----먼저 믿은 사람과 뒤에 믿은 사람은 다르지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면 같이 되는 것,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어요. 사람도 여러 가지요 불평도 여러 가지인데,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일단 기본적으로는 남과 같지 못한 것을 괴로워합니다. 다른 사람은 이제 제집에서 사는데 나는 셋방에서 사는구나, 나도 내집 좀 가져봤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남이 가진 것 내가 가져보려고, 다른 사람과 같아지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그러다가 같아지면 이제는 그로써 만족해야 되겠는데 이 또한 그렇지 않아요. 하룻밤도 안되어서 달라집니다. 이제는 좀더 나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는 남과 달라지기를 원해요. 이제는 남과 같은 게 못마땅해요. 같아지는 게 싫어요. 유별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특별한 것 좋아하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옷을 사 입었어요. 아주 비싼 옷을 사 입어서 기분 좋았는데 그걸 입고 시장에 나갔더니 똑같은 것을 입은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하필이면 또 못생겼어요. 그만 기분이 나빠 가지고 돌아와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안 입는다 하고. 이렇게 고약한 심성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불행합니다. 행복할 길이 없어요. 언제나 유별나야 되니까요. 어떻게 항상 특별할 수 있습니까? 그러다가 늙어가기 시작 하니까 주름살이 생기는데, 특별히 이제는 위로 가지 않고 밑으로 터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살하기 좋게 생겼습니다.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불행이라는 것이 이런 고약한 심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더불어 행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 예수 믿으면 ", 좋습니다, 당신도 믿는군요"하고 기뻐하면 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부인은 교회에 나오는데 남편이 안나옵니다. 그 사람보고 교회 나오라고 했더니 "저요? 안나갈랍니다"해요.

"왜요?" 했더니 "집사람이 천당 간다고 하니 난 지옥 갈랍니다." 못됐지요. 그런가하면 참 답답한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여자가 먼저 믿어서 집사가 되었는데 지금 나가면 나는 평신도다----이것이 못마땅해서 교회 안나오는 남편들도 있더군요. 어떤 사람은 이런 농담을 해요. 나보고 "돈 얼마 내면 장로 되나요?"해요.

"그거부터 먼저 내어 장로 되고 나서 예수 믿겠습니다. 마누라가 권산데 내가 이거 되겠어요?"합니다. 못된 생각이지요. 이런 특권의식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남과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행복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세계관 자체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달라져서 함께 더불어 기뻐할 줄 아는 심령이 되어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행복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절대로 특별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러면 못씁니다. '특별'이란 있을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용납치 않아요. 그렇게 특별 하려고 하다가는 언젠가 한번 되게 맞아요. 다칩니다. 아무쪼록 쓸데없는 생각 마세요.

오늘의 본문을 보니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이방사람 예수 믿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어요.

베드로가 보아하니 한심했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가 이 같은 힐난 앞으로 차례로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며하여 가로되"-----침착했어요. 온유, 겸손한 가운데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명하는 내용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베드로의 의중을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원래 성급한 사람입니다. 대단히 급한 사람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온유하게 차근차근히 설명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운 뿐입니다. 먼저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사실대로 죽 이야기합니다. 논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내 의견이 어떻다, 내 지식이 어떻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 하셨고 나는 그대로 순종한 것뿐이라고 사실대로 차근차근 설명해요. 이야기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건대로 차례대로 설명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의도를 자세히 보면 공감대를 이루고 있어요. 베드로의 마음속엔 적어도 이 마음이 있어요. 나도 당신들과 같은 마음이었소, 바로 그 마음이오-----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화를 여는 길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잠깐 TV를 보니까 계모가 있는데, 남편 전처의 아이 가 말썽을 부립니다. 아빠도 동생도 모두가 죽은 어머니를 잊어버리고 지금 새어머니만 사랑한다고 아이가 불평입니다. "나는 죽은 우리 어머니가 좋다"하면서 그 어머니가 잊혀지는 것이 괴로워서 새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다고 소리치면서 울어요. 어떻게 수습하나 하고 봤더니, 계모는 그 아이를 앞에 놓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의 입장이라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 너의 입장이라면 나도 그런 마음을 가졌을 거다. 얼마나 어머니 사랑을 받았는데 안 그렇겠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니까 아이는 마침내 새어머니한테 굴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여기 사도 베드로가 얘기하는 내용을 가만히 보면 다른 게 아닙니다. "나도 당신들과 같은 마음이었소, 그런데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타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기에 나도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 전에는 당신네나 나나 다 같은 사람이었소. 나도 본래 그런 마음 가지고 있었소."

두 번째로 또 하나 공감대를 이루는 것은 "당신들이 지금 편견을 가지고 오해를 하고 있지만 내가 경험한 것을 당신들이 겪었다면 당신들도 나와 같았을 것이오"-----이런 의중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본 환상을 당신들이 보았다면, 내가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에 고넬료가 엎드려 절하는 것을 당신들이 보았다면, 내가 고넬료에게 설교할 때에 성령 받는 것을 보았는데 당신들도 그 처지에 있었다면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졌을 거요-----이것이 베드로가 말하는 것의 내용입니다. 설득력 있는 말씀이지요. 모름지기 이 같은 공감대가 필요해요. 너와 나는 다르다,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다면 끝난 것입니다. 왜 그리 무식하냐, 왜 이렇게 못됐느냐-----이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러 이렇게 되었다, 당신은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 내 나이 되고 내가 경험한 것을 경험한다면 당신들도 나와 꼭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여기에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위치를 바꾸어 놓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말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이 가진 고집을 고집이라 하 지 않고 그 잘못을 극소화해서 일시적 실수로 생각합니다. 착각과 오해로 생각합니다. 다 같은 마음인데 지금 무엇인가 조금 다른 것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을 저들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본 환상을 보지 못했고 내가 들은 주의 음성을 못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도 원래는 당신과 같았소-----이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이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오해가 풀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의 의지가 경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설명을 하면서 정말 침착합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차근차근히 차례대로 온유하게 설명해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상대방을 비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잘못됐다고 하는 나무람도 없습니다. 다만 사건이 이렇게 된 거요-----이 말끝에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동의를 하게 됩니다. 그렇겠습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잘못됐습니다-----이래서 예루살렘교회는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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