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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러 왔노라(마태복음 20 : 25-28)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르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도대체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성공적 인생이란 어떤 것이며 그 누가 나는 성공적인 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몇 가지로 분석하여 성공적인 생의 기준을 생각해 보며 나아가 나 자신의 생을 한번 비판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 성공적으로 살아 왔는가 하는 물음이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생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이 성공적인 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그것을 알고 사는 사람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몸이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 그 날을 생일이라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짜 생일은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는 자기의 존재 의식을 가지는 그 순간이 비로소 자기 생의 시작이요, 생일이 됩니다. 그 이전의 생은 결코 참된 생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프니 먹고, 먹어야겠으니 일하고, 졸리니 자고, 늙으니 죽고 하는 이러한 이야기는 인간답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 때가 언제이든 간에 나는 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을 아는 그 때부터가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전의 생은 무효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어떤 분은 30세에, 어떤 분은 40세에, 더러는 6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를 깨닫습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이렇게라도 깨닫고 단 1년을 살아도 그 1년은 사람으로 산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없다면 그는 완전히 헛된 생을 산 것입니다. 기필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행하느냐, 무슨 업적을 남기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행한다, 무엇을 남겼다는 거기에 기준해서 성공 여부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 존재의 문제로 돌아가서, 무엇이 되었느냐, 어떤 인간이 되었느냐 하는 것에서 자기 성공, 자기 행복, 자기 의미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태어난 목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경륜 중에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우리 인간들이 흔히 좋아하는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 있거나 명예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성공적으로 생을 산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삶의 목적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뒤늦게 안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마도 역사상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이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왜냐하면,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는 명확하게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고 살았습니다.
둘째는 그 목적과 일치한 오늘을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추상적인 목적이 있고 그것에 따르는 구체적인 생을 사는 사람이 성공적인 생을 사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어렴풋이나마 자기 생의 목적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하고 반대로 삽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음으로 미룹니다. 내일로 미루고, 내년으로 미루면서 평생을 살아버렸습니다. 자기 존재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 없는 역행의 생으로 평생을 다 보내는 불쌍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는 어이없는 일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목적과 일치하는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뚜렷한 목적을 놓고, 거기에 모든 정열을 다 기울여 일생을 바쳐도 될까 말까 한데,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며 살아가지고야 무엇이, 어떻게 되겠다는 것입니까? 목적과 분명히 일치하는 합리적인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날부터가 비로소 내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궤도 수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변의 정신, 불변의 사람, 한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우회전, 좌회전을 많이 합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마구 휘청거립니다.
목적에서 어긋나는 길을 너무 많이 갑니다. 따라서 낭비가 너무 많습니다. 시간과 정력의 낭비가 참으로 많습니다. 학교도 무수히 바꿔 보고, 전공도, 직업도 이리저리 바꾸어 보고, 아직도 잡혀진 것은 없는데 그러다가 보니 벌써 세월이 다 갔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적을 이미 알고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성공적인 생을 산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일러 흔히 요즈음에 와서는 "외길 인생"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든 간에 우리는 외길로 살아온 사람을 높이 존경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해 젊은 세대들은 "오죽이나 답답하면 하나 가지고 일생을 살았느냐?"며 오히려 따분한 사람이라는 혹평을 하기도 합니다만, 글쎄올시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궤도 수정 없이, 불변하게, 직선 코스로, 주어진 목적과 사명을 위해 살아온 이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기가 한 일에 후회가 없는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뒤늦게, 그 어느 때라도 지난 생을 후회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고통이라는 것은 대체로 후회와 함께 가중해집니다.
단순히 지금, 당장에 괴롭다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지난 날에 이랬어야 하고, 그 때에 좀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라고 하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그래서 더욱 괴로운 것입니다. 보다 더 선할 수가 있었고, 보다 훌륭할 수가 있었으며, 보다 더 진실할 수가 있었는데 어쩌다가 내 모습이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이러한 후회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런가 하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잘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하고 가정 생활을 꾸려가면서 아내나 남편된 입장에서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지금 생각하여도 당신의 아내, 혹은 남편된 것이 참으로 잘된 행운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보다는 대체로 정반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걸려들었나, 이것은 역사적인 실수다 하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망조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잘했어요, 두고두고 생각해 보아도 잘한 것입니다. 내가 택한 직업 잘한 것이예요, 내가 택한 전공 참 잘 택했어요, 내가 하는 사업, 나의 인간 관계, 내가 선택한 교회, 내가 선택한 믿음, 참으로 잘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칭찬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섯째는 플러스 알파(plus alpha)가 있습니다. 더 높은 차원에서 볼 때 여기에 효과적 소명이 있음을 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모르고 선택했으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고, 나는 모르고 살아왔으나 하나님은 아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의 경륜과 그 축복의 섭리가 나를 주장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이후, 앞으로의 운명도 그에게 맡기는 그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 안에서 오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며, 그리고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이러한 자기 존재의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고요. 세상이 잘못 되었고, 여차여차 하여서 운명이 뒤바뀌게 되어 섬기게 되었고 그 결과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예 처음부터 섬기려 오셨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본래적이요, 원천적이며 근본적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섬기려 왔습니다. 이것은 기독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대속물이 되기 위하여,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섬김의 신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본래적 뜻을 이행하여 일관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섬긴다는 말을 헬라 원어로 '디아코니아' 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어비스(service),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어원의 '디아코노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종이라는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만 권력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를 이 디아코노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하는 왕의 권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의미가 있습니까? 섬기는 자가 왕입니다. 서기는 자가 다스리는 거입니다. 섬기는 자의 마음 속에 왕권이 있습니다. 이것이 서기는 자의 신비함이요 그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물론 우리는 예배라고 합니다만 영어로는 워십 서어비스(worship service)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봉사하는 그것이 디아코니아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봉사입니다. 이러한 봉사의 높은 의미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관을 긴 장(長)에다 벼슬 관(官)해서 장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영어로는 장관을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합니다. 미니스터란 섬긴다, 봉사한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장관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관이라고 하는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높임자 "님"자까지 붙여져 장관님이 되셔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 때문에 지극히 관료적이고 봉사 받으려고만 합니다. 이제 여기서, 섬기는 자의 바른 자세를 다시 한번 반성하여야 합니다. 문제는 그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섬김을 받으려 하다가 결국은 스스로 고민의 무덤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 같으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섬김을 행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26절 말씀에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는 오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저들과는 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세계관, 다른 생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좋아합니다. 소유하고, 주관하며, 권세부리는 것을 행복으로 여겨, 높은 자리 자체를 행복으로 알고, 많은 권세를 누리며 정치적 영역을 넓혀 갈 때 거기에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대로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쩌다가 부득이 섬겨야 하는 자리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섬김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그만 낮아져서 형편없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제는 굽신거릴 수밖에 없는 비천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회개해 보시기 바랍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높아지고자 하는마음, 섬김으로 받으려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낮추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언젠가 사회학에 관한 어떤 논문을 읽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논문 중에 우상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설명해 나가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서 밝히기를 맨 처음 우상이 생기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섬김을 받고 싶은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섬김을 받고 권력을 얻어 힘으로라도 높임과 섬김을 받으려 했는데 사람들이 응해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섬겨 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더러는 돈도 얻으러 왔고, 그리고 만세나 사시옵소서 하며 고개를 숙여 굽신거리는 것 같아도 모두가 다 마음에는 없는 가짜란 말입니다. 이러한 위선을 보고는 어떻게 하여야 마음 속으로부터의 섬김을 받을까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이란 본래 이러한 독재자와 권력자들이 존경받고 싶어서 만들어 놓은 허구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네의 양반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한 사람들에 의하면 양반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다 같은 한 인종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부자가 되어 재력이 있고 권력도 갖다보니 좀 구별되게 높은 존경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는 경제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 외에 정신적인, 중심으로부터의 섬김을 받고 싶어서 만든 것이 "종자가 다르다" "뿌리가 다르다" "뼈대가 다르다"며 이 양반의 신분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다르긴 뭐가 다릅니까? 다 똑같은 근원이요, 한 뿌리, 한 종자임에 틀림이 없건만 기어이 섬김을 받겠다고 별별 못된 짓을 다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러가지로 엄청나고도 잔인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제 명에 못 죽었어요. 실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할 때에 그에게 무서운 심판이 떨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섬기는 자만이 진정한 행복, 진정한 삶의 의미를 누리게 됩니다. 이 행복은 오로지 자유에 근거합니다. 지위가 아니요, 권력도 소유도 아닙니다. 의와 진리가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자원성과 자발성이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비록 왕이라 할찌라도 억지로 왕이 되어 있다면 그는 노예요 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비록 남의 집에 가서 허드레일을 하며 지낸다 하더라도 자원해서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면 그 사람이 왕이요, 그 사람이 자유인인 것입니다. 누구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면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뜻을 모르고 하는 일은 괴롭습니다만 그 깊은 뜻을 알고 행하는 자는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더구나 최종 목적과 마지막 결과를 알고 행하는 자는 항상 영광스럽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결코 피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능동적이요, 자원적 봉사며, 즐거운 섬김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자발적 희생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유함과 무한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사랑을 정의하기를 "더불어 기뻐하고 주면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에 주면서도 아까운 마음이 있다든지 받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자꾸만 주는 것이 한없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미입니다.
봉사라는 것은 수고하면서 자유로와야 합니다. 여기에 부담이 있고, 억지가 있으며, 슬픔이 있다고 하면 이는 봉사일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 살아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위하여 죽어야 할 이유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기에서 끝나도 좋습니다. 추호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생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섬기는 자! 그는 무한히 자유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습니다. 그는 무한한 양심의 자유를 누리며 즐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요,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봉사의 절정은 대속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속물로 주는 것! 이것이 봉사의 피크(peak)입니다. 물질도 힘도 아닙니다. 오직 마음과 뜻과 의와 그리고 사랑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돈 몇 푼 주었다고 하여 봉사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다. 참된 봉사는 마음과 그 중심을 주는 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께서는 그러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대속물이라는 뜻은 대신 죽는다는 것이요, 희생의 제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내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지혜롭게 하기 위하여 나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상대방이 축복을 누리기 위하여 나는 저주받은 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의 안타까운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골육, 친척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수만 있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라(롬 9:3)고 말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자세입니다. 마지막 생명, 그것 하나까지라도 포기하고, 다시 말해 문장 그대로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지옥으로 가더라도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물입니다. 대신 죽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대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고 맙니다. 그리고 죽어집니다. 말없이 썩어지는 밀알로 묻히며, 썩어지고, 침묵하고 맙니다. 이것이 대속물이올시다.
그러나 대속물, 바로 여기에 진정한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리고 성찬 예식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곧 대속물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친히 보여 주신 바대로 대속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성 괴테(Goethe)가 쓴 시 중에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그 시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훌륭한 것은 한 평생 바칠 수 있는 사업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것은 인간으로 교양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흉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결코 보답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받으려니 문제도 많고 불평도 많습니다. 사랑 받으려니 이제 와서는 불만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나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내가 스스로 권세를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불안에 떨게 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에 언젠가는 실망으로 끝이 납니다. 억지로 섬기고 있기 때문에 노예의 저주스런 생활에서 면할 길이 없습니다.
자유로운 비하! 이제는 스스로 내가 온 목적을 바르게 생각하십시다. 주님께서는 그 목적을 "섬기려 하고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섬김이 목적이요, 희생되는 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본래성이요, 전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돕는 하나님이십니다. 섬기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의 그 섬김과 그를 통하여 얻어지는 영광을 그의 소유로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높이시기까지는 아무 말도, 아무 짓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 외에는 바라지 말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섬기는 자의 신비로운 행복을 느끼며 오늘도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섬기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섬기는 자의 기쁨 속에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 대신 희생함으로 그로써 얻어지는 아름다운 열매와 함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 그의 영광이 또한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기도
주님! 섬김을 받으려 하다가 섬기는 자가 되어 버렸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 하다가 낮아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사오며,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다가 절망과 낙담으로 좌절된 생을 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기도하오니 이제는 저희들의 생의 목적도 주님의 오신 목적과 일치되게 하사 진정 섬기는 자로 살게 하시고 대속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주께서 주시는 영광과 그 기쁨만을 누리며, 섬기는 자의 능력과 자유와 그 영광에 살아가도록 새로운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섬기러 왔노라(마태복음 20 : 25-28)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르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도대체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성공적 인생이란 어떤 것이며 그 누가 나는 성공적인 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몇 가지로 분석하여 성공적인 생의 기준을 생각해 보며 나아가 나 자신의 생을 한번 비판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 성공적으로 살아 왔는가 하는 물음이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생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이 성공적인 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그것을 알고 사는 사람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몸이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 그 날을 생일이라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짜 생일은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는 자기의 존재 의식을 가지는 그 순간이 비로소 자기 생의 시작이요, 생일이 됩니다. 그 이전의 생은 결코 참된 생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프니 먹고, 먹어야겠으니 일하고, 졸리니 자고, 늙으니 죽고 하는 이러한 이야기는 인간답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 때가 언제이든 간에 나는 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을 아는 그 때부터가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전의 생은 무효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어떤 분은 30세에, 어떤 분은 40세에, 더러는 6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를 깨닫습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이렇게라도 깨닫고 단 1년을 살아도 그 1년은 사람으로 산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없다면 그는 완전히 헛된 생을 산 것입니다. 기필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행하느냐, 무슨 업적을 남기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행한다, 무엇을 남겼다는 거기에 기준해서 성공 여부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 존재의 문제로 돌아가서, 무엇이 되었느냐, 어떤 인간이 되었느냐 하는 것에서 자기 성공, 자기 행복, 자기 의미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태어난 목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경륜 중에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우리 인간들이 흔히 좋아하는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 있거나 명예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성공적으로 생을 산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삶의 목적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뒤늦게 안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마도 역사상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이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왜냐하면,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는 명확하게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고 살았습니다.
둘째는 그 목적과 일치한 오늘을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추상적인 목적이 있고 그것에 따르는 구체적인 생을 사는 사람이 성공적인 생을 사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어렴풋이나마 자기 생의 목적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하고 반대로 삽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음으로 미룹니다. 내일로 미루고, 내년으로 미루면서 평생을 살아버렸습니다. 자기 존재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 없는 역행의 생으로 평생을 다 보내는 불쌍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는 어이없는 일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목적과 일치하는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뚜렷한 목적을 놓고, 거기에 모든 정열을 다 기울여 일생을 바쳐도 될까 말까 한데,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며 살아가지고야 무엇이, 어떻게 되겠다는 것입니까? 목적과 분명히 일치하는 합리적인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날부터가 비로소 내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궤도 수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변의 정신, 불변의 사람, 한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우회전, 좌회전을 많이 합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마구 휘청거립니다.
목적에서 어긋나는 길을 너무 많이 갑니다. 따라서 낭비가 너무 많습니다. 시간과 정력의 낭비가 참으로 많습니다. 학교도 무수히 바꿔 보고, 전공도, 직업도 이리저리 바꾸어 보고, 아직도 잡혀진 것은 없는데 그러다가 보니 벌써 세월이 다 갔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적을 이미 알고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성공적인 생을 산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일러 흔히 요즈음에 와서는 "외길 인생"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든 간에 우리는 외길로 살아온 사람을 높이 존경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해 젊은 세대들은 "오죽이나 답답하면 하나 가지고 일생을 살았느냐?"며 오히려 따분한 사람이라는 혹평을 하기도 합니다만, 글쎄올시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궤도 수정 없이, 불변하게, 직선 코스로, 주어진 목적과 사명을 위해 살아온 이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기가 한 일에 후회가 없는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뒤늦게, 그 어느 때라도 지난 생을 후회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고통이라는 것은 대체로 후회와 함께 가중해집니다.
단순히 지금, 당장에 괴롭다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지난 날에 이랬어야 하고, 그 때에 좀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라고 하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그래서 더욱 괴로운 것입니다. 보다 더 선할 수가 있었고, 보다 훌륭할 수가 있었으며, 보다 더 진실할 수가 있었는데 어쩌다가 내 모습이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이러한 후회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런가 하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잘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 결혼을 하고 가정 생활을 꾸려가면서 아내나 남편된 입장에서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지금 생각하여도 당신의 아내, 혹은 남편된 것이 참으로 잘된 행운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보다는 대체로 정반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걸려들었나, 이것은 역사적인 실수다 하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망조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잘했어요, 두고두고 생각해 보아도 잘한 것입니다. 내가 택한 직업 잘한 것이예요, 내가 택한 전공 참 잘 택했어요, 내가 하는 사업, 나의 인간 관계, 내가 선택한 교회, 내가 선택한 믿음, 참으로 잘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칭찬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섯째는 플러스 알파(plus alpha)가 있습니다. 더 높은 차원에서 볼 때 여기에 효과적 소명이 있음을 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모르고 선택했으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고, 나는 모르고 살아왔으나 하나님은 아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의 경륜과 그 축복의 섭리가 나를 주장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이후, 앞으로의 운명도 그에게 맡기는 그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 안에서 오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며, 그리고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이러한 자기 존재의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고요. 세상이 잘못 되었고, 여차여차 하여서 운명이 뒤바뀌게 되어 섬기게 되었고 그 결과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예 처음부터 섬기려 오셨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본래적이요, 원천적이며 근본적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섬기려 왔습니다. 이것은 기독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대속물이 되기 위하여,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섬김의 신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본래적 뜻을 이행하여 일관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섬긴다는 말을 헬라 원어로 '디아코니아' 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어비스(service),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어원의 '디아코노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종이라는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만 권력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를 이 디아코노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하는 왕의 권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의미가 있습니까? 섬기는 자가 왕입니다. 서기는 자가 다스리는 거입니다. 섬기는 자의 마음 속에 왕권이 있습니다. 이것이 서기는 자의 신비함이요 그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물론 우리는 예배라고 합니다만 영어로는 워십 서어비스(worship service)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봉사하는 그것이 디아코니아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봉사입니다. 이러한 봉사의 높은 의미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관을 긴 장(長)에다 벼슬 관(官)해서 장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영어로는 장관을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합니다. 미니스터란 섬긴다, 봉사한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장관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관이라고 하는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높임자 "님"자까지 붙여져 장관님이 되셔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 때문에 지극히 관료적이고 봉사 받으려고만 합니다. 이제 여기서, 섬기는 자의 바른 자세를 다시 한번 반성하여야 합니다. 문제는 그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섬김을 받으려 하다가 결국은 스스로 고민의 무덤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 같으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섬김을 행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26절 말씀에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는 오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저들과는 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세계관, 다른 생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좋아합니다. 소유하고, 주관하며, 권세부리는 것을 행복으로 여겨, 높은 자리 자체를 행복으로 알고, 많은 권세를 누리며 정치적 영역을 넓혀 갈 때 거기에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대로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쩌다가 부득이 섬겨야 하는 자리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섬김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그만 낮아져서 형편없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제는 굽신거릴 수밖에 없는 비천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회개해 보시기 바랍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높아지고자 하는마음, 섬김으로 받으려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낮추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언젠가 사회학에 관한 어떤 논문을 읽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논문 중에 우상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설명해 나가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서 밝히기를 맨 처음 우상이 생기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섬김을 받고 싶은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섬김을 받고 권력을 얻어 힘으로라도 높임과 섬김을 받으려 했는데 사람들이 응해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섬겨 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더러는 돈도 얻으러 왔고, 그리고 만세나 사시옵소서 하며 고개를 숙여 굽신거리는 것 같아도 모두가 다 마음에는 없는 가짜란 말입니다. 이러한 위선을 보고는 어떻게 하여야 마음 속으로부터의 섬김을 받을까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이란 본래 이러한 독재자와 권력자들이 존경받고 싶어서 만들어 놓은 허구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네의 양반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한 사람들에 의하면 양반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다 같은 한 인종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부자가 되어 재력이 있고 권력도 갖다보니 좀 구별되게 높은 존경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는 경제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 외에 정신적인, 중심으로부터의 섬김을 받고 싶어서 만든 것이 "종자가 다르다" "뿌리가 다르다" "뼈대가 다르다"며 이 양반의 신분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다르긴 뭐가 다릅니까? 다 똑같은 근원이요, 한 뿌리, 한 종자임에 틀림이 없건만 기어이 섬김을 받겠다고 별별 못된 짓을 다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러가지로 엄청나고도 잔인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만 그 결과는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제 명에 못 죽었어요. 실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할 때에 그에게 무서운 심판이 떨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섬기는 자만이 진정한 행복, 진정한 삶의 의미를 누리게 됩니다. 이 행복은 오로지 자유에 근거합니다. 지위가 아니요, 권력도 소유도 아닙니다. 의와 진리가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자원성과 자발성이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비록 왕이라 할찌라도 억지로 왕이 되어 있다면 그는 노예요 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비록 남의 집에 가서 허드레일을 하며 지낸다 하더라도 자원해서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면 그 사람이 왕이요, 그 사람이 자유인인 것입니다. 누구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면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뜻을 모르고 하는 일은 괴롭습니다만 그 깊은 뜻을 알고 행하는 자는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더구나 최종 목적과 마지막 결과를 알고 행하는 자는 항상 영광스럽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결코 피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능동적이요, 자원적 봉사며, 즐거운 섬김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자발적 희생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유함과 무한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사랑을 정의하기를 "더불어 기뻐하고 주면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에 주면서도 아까운 마음이 있다든지 받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자꾸만 주는 것이 한없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미입니다.
봉사라는 것은 수고하면서 자유로와야 합니다. 여기에 부담이 있고, 억지가 있으며, 슬픔이 있다고 하면 이는 봉사일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 살아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위하여 죽어야 할 이유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기에서 끝나도 좋습니다. 추호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생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섬기는 자! 그는 무한히 자유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습니다. 그는 무한한 양심의 자유를 누리며 즐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요,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봉사의 절정은 대속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속물로 주는 것! 이것이 봉사의 피크(peak)입니다. 물질도 힘도 아닙니다. 오직 마음과 뜻과 의와 그리고 사랑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돈 몇 푼 주었다고 하여 봉사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다. 참된 봉사는 마음과 그 중심을 주는 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께서는 그러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대속물이라는 뜻은 대신 죽는다는 것이요, 희생의 제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내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지혜롭게 하기 위하여 나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상대방이 축복을 누리기 위하여 나는 저주받은 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의 안타까운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골육, 친척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수만 있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라(롬 9:3)고 말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자세입니다. 마지막 생명, 그것 하나까지라도 포기하고, 다시 말해 문장 그대로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지옥으로 가더라도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물입니다. 대신 죽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대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고 맙니다. 그리고 죽어집니다. 말없이 썩어지는 밀알로 묻히며, 썩어지고, 침묵하고 맙니다. 이것이 대속물이올시다.
그러나 대속물, 바로 여기에 진정한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리고 성찬 예식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곧 대속물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친히 보여 주신 바대로 대속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성 괴테(Goethe)가 쓴 시 중에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그 시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훌륭한 것은 한 평생 바칠 수 있는 사업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것은 인간으로 교양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흉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결코 보답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받으려니 문제도 많고 불평도 많습니다. 사랑 받으려니 이제 와서는 불만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나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내가 스스로 권세를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불안에 떨게 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에 언젠가는 실망으로 끝이 납니다. 억지로 섬기고 있기 때문에 노예의 저주스런 생활에서 면할 길이 없습니다.
자유로운 비하! 이제는 스스로 내가 온 목적을 바르게 생각하십시다. 주님께서는 그 목적을 "섬기려 하고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섬김이 목적이요, 희생되는 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본래성이요, 전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돕는 하나님이십니다. 섬기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의 그 섬김과 그를 통하여 얻어지는 영광을 그의 소유로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높이시기까지는 아무 말도, 아무 짓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 외에는 바라지 말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섬기는 자의 신비로운 행복을 느끼며 오늘도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섬기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섬기는 자의 기쁨 속에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 대신 희생함으로 그로써 얻어지는 아름다운 열매와 함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 그의 영광이 또한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기도
주님! 섬김을 받으려 하다가 섬기는 자가 되어 버렸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 하다가 낮아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사오며,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다가 절망과 낙담으로 좌절된 생을 사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기도하오니 이제는 저희들의 생의 목적도 주님의 오신 목적과 일치되게 하사 진정 섬기는 자로 살게 하시고 대속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주께서 주시는 영광과 그 기쁨만을 누리며, 섬기는 자의 능력과 자유와 그 영광에 살아가도록 새로운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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