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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궁극적 관심(마태복음 6장 25절~34절)

by 【고동엽】 20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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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 관심(마태복음 6장 25절~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동물은 본능에 이끌려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을 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과 동물을 구별짓는 중요한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본능은 한 사람의 사람됨을 가늠하게 하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육체적 본능에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역시 동물적 수준의 인간이라고 규정지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생각이 앞서고 그 생각에 따라 자기의 모든 것을 복종시켜가며 사는 사람이라면 바른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이 없다면 편안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동물적인 편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이 있기에 행복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어서 인간일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인간의 경우에도 이른바 고상한 인간이 있고 저속한 인간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이런 육체적인 생활이란 어떤 사람이든 너나할것없이 그게 그것이고 거기가 거깁니다. 유별날 것이 따로 있지 않고 대동소이(大同小異)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입니다. 생각과 관심이 언제나 높은 곳에 있으면 고상한 사람이요, 그 생각과 관심이 언제나 횡격막 아래에서 맴도는 사람은 저속한 사람입니다. 이른바 속물(俗物)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요컨대 생각의 바탕, 생각의 고향---바로 여기에 인간됨의 가치 기준이 있다 하겠습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 관심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에 따라 생의 목적이 설정됩니다. 이 목적이 가치관을 결정하고 세계관을 잡아줍니다. 마침내 그 세계관이 그 사람의 운명을 가름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먼저 본능대로 살아놓고 생각을 이에 맞추어 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행동거지를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하면서 살아갑니다. 또 하나는 생각을 먼저 가지고 그 생각에 따라서 오늘을 살며, 본능까지도 지배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최종목적이 무엇이며 궁극적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와 성장에 관하여 메슬로라고 하는 발달심리 학자가 발표한 이론이 있습니다. 간단히 추려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육체적인 욕구입니다.

그래서 음식이 문제가 되고 생리적인 욕구가 문제됩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이 동물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안전의 욕구가 있습니다. 고통과 공포와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될 수 있으면 편안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욕구 다음에 오는 것이 소속(所屬)의 욕구입니다. 친구가 있어야 하고 친구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모임에 끼여들기를 바라고 거기서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런 소속의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자기 존중의 욕구, 자기 실현의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자기 존재를 계속 확인해나가는 데 있습니다. 자기 존재가 확정되지 않으면 남이 볼 때에도 볼 것이 없고 자기가 자기를 볼 때에도 볼품이 없고 쓸모가 없으며, 이렇게 되면 점점 더 자기 절망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자기 실현의 욕구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생각할 가치가 없는 것을 생각하고 관심을 둘 필요도 없는 것에 관심을 둘 때에, 거기에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좀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다가 혼자서 웃어보곤 합니다. 즉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한 마리보다는 아흔 아홉 마리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흔 아홉 마리를 내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가다니-도대체 경제적으로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한 마리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는 기분이 좋아 가지고 함께 기뻐하자며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 잔치하느라고 양을 몇 마리나 잡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당초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쉽게 읽고 넘어가지만 한 번 더 꼬집어보십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양을 위해 사람인 목자가 목숨을 버린단 말입니까? 이것이 말이 됩니까? 부당한 이야기올시다. 어찌 양을 위하여 사람이 목숨을 버립니까? 이 모든 문제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실리적으로, 그밖에 현실적인 여러 측면으로 생각해본다면 전혀 다른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 지금 양 한 마리가 죽어갑니다. 사랑으로 이것을 구하기 위해 나섭니다. 그러다가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양을 사랑했다고 하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까요. 너무 똑똑한 척하지 말일입니다. 만사를 실리적으로 판단하고 경제적 합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들지 맙시다. 그러는 것이 아니올시다. 이를테면 효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옷을 해 입을 때에는 당연히 부모님께나 어른들께도 해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들은 말합니다. "며칠 안 있어 돌아가실 텐데 그런 건 해드려 뭘해?" 잇속을 따지자면 그렇지요. 그러나 그래서는 못씁니다. 비록 어른이 사양을 하더라도, "나야 곧 떠날 텐데 뭐. 입던 것도 다 못 입을 건데 뭐……"하고 말씀하시더라도 해드려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만 생각해서 해드리지 않는다면 불효입니다. 오늘 해드렸다가 내일 버리게 되더라도 오늘은 해드려야 합니다.

너무 잇속만 따지고 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경제적인 이치, 경제적인 손익계산(損益計算)을 밝히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소위 경제적 동물(economic animal)이라고 합니다.

만사를 돈으로만 계산하려는 사고방식, 이것이 사람을 비인간화시키고 사람의 가치와 행복을 깎아 내리고 맙니다.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탕자의 비유(눅 15:11~32)를 봅시다. 탕자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좋아서 잔치를 베풉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기뻐합니다. 그때 탕자의 형이 바른 소리를 합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먹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나쁜 자식을 왜 환영하십니까? 그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까지 잡으시다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경우입니까?" 사실이지 똑똑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타산, 이해득실(利害得失)의 계산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제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다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까?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고 사는 것입니까? 내 생각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목적될 수 없는 것을 목적 삼고, 아무 소용없는 시시한 일에 너무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곤 합니다. 머리가 터지도록, 몸이 쇠약해져서 마침내 자리에 드러눕도록 마음을 쓰고 애를 태웁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생각해보니 모두 무상한 일이요 쓸데없는 일이라, 그때 가서 가슴을 치고 후회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생명과 바꾸어도 후회할 것이 없는, 그만한 가치에 관심을 두고 살 것입니다.

본문 2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생각하여보라." 깊이 생각하고, 멀리 생각하고, 그 마지막을, 그 궁극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지 않아도 될 것들은 무엇무엇입니까? 첫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주님께서 먹는 것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먹어야 삽니다마는 요즘 사람들은 너무 먹어서 탈입니다. 먹는 것에 너무 기를 씁니다. 미식가(美食家)다 뭐다 하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먹을 것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음식문화의 발달은 정신문화의 퇴보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먹는 일에 정신 팔려 있는 세상에 무슨 가치 있는 일이 있으며, 무슨 정신적인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소위 문화인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사람들은 밥 먹으면서 학술 세미나라도 가지는 것이 아닌데, 한끼 식사하는 데에 세 시간씩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이 먹기 위해 살수는 없습니다. 잘 먹으면 얼마나 잘 먹고, 많이 먹으면 얼마나 많이 먹겠습니까? 많이 모아놓고도 소화가 되지 않아서 못 먹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미국의 휴즈라는 사람은 돈많은 사람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가 얼마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는데 죽기 전 마지막 10년 동안은 오렌지쥬스밖에 먹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우리가 신경쓰고 염려하기에는 너무나도 허망하고 무가치한 문제입니다.

몸을 위해서 잘 먹는다고 하지만, 보십시오, 제가 언젠가 서울대학병원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입원을 했는데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유인즉슨 보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보약 중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보약을 먹기 위해서 일부러 한약방까지 경영했답니다. 그리고는 몸에 좋다는 것은 뭐든지 다 먹었는데 결국은 그것이 간장에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딱한 인간입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요즘 우리 나라에서 뱀을 수입하고 있다 합니다. 오래 살겠다고 어찌나 뱀을 많이 잡아먹었던지 이제는 우리 나라에서 뱀 구경하기도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뱀뿐입니까? 그 징그러운 지렁이에서부터 요즘은 도대체 못 먹는 것이 없고 보약 아닌 것이 없는 모양입니다. 몸에 좋다고만 하면 별것을 다 먹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것을 다 먹으며 몸부림을 쳐봐도 결국은 소용없습니다. 그래봐야 일찍 죽을 사람은 일찍 죽고 다칠 사람은 다칩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것-허망한 일입니다. 사람이 어찌 먹기 위하여 살겠습니까?

이따금 산이나 유원지에 가게 되면 그곳에서 매우 못마땅한 장면을 보곤 합니다. 산을 찾을 때쯤이면 그저 나무와 바위와 계곡에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라도 바라보면서 쉬러 가는 것이지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서나 늘 잘먹으면서 산에까지 잔뜩 싸 가지고 갈 게 뭐 있습니까? 김밥이나 빵 몇 개 정도면 간단히 먹고 시장기를 면할 수 있으련만 요새 사람들은 불고기에다 매운탕에다 상추쌈까지 먹으러듭니다. 그리고 산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정상까지 올라갈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저 먹는 일 끝나면 미련 없이 보따리 싸 가지고 돌아옵니다. 먹으로 가서 먹다가 내려오는 것이지요, 음식 찌꺼기 때문에 산의 정취(情趣)가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래야 합니까? 그 옛날 못 먹고살던 때에 대한 보상(補償)심리일까요? 왜 이렇게 먹는 일에 신경을 씁니까? 이제는 풍속이 좀 바꾸어져야 하겠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배운 인사법은 어른들을 만났을 때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고 식사 여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도 끼니를 다 찾아먹기 힘든 때였으니까요. 그만큼 먹을 것이 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져야 할 것 아닙니까? 먹는다는 것-이것은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는데 이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둘째,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제가 지난번 마닐라에 갔을 때 본 것입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살던 집에 그의 아내 이멜다의 옷가지가 1,200벌이나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 그 중에는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옷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놓아두고 갔습니다. 우리 같으면 한 두어 벌만 있어도 좋을 옷들입니다. 그렇게 좋은 옷들을 한 개인의 옷장에 1,200벌이나 걸어두고 살았다니 분노라기보다 차라리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얼마나 부질없는 욕심입니까? 헛되고 헛됩니다. 옷이 무엇입니까? 대충 입어 둡시다.

여러분도 옷장을 한 번 열어보십시오.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생각을 다시 해야 합니다. 여러분, 거울을 좀 보십시오. 내 마음속에 있는 슬픔과 공허함은 어떤 좋은 옷으로도 감출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낡고 값싼 옷을 걸쳤다 해도 마음속에 감추어진 기쁨은 빛을 잃지 않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착각에서 이젠 그만 벗어납시다. 너무 야단스럽게 입지 말고 대충대충 입읍시다. 무엇을 그리 걱정합니까? 무엇을 입을까-이것은 우리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그런 것쯤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삽시다. 떠나게 좋게, 이사하기 좋게, 나그네처럼 살아갑시다.

옷이라는 것에는 상당한 허영이 깃들어 있습니다. 옷은 나 자신에게 보이려고 입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의 눈을 생각해서 단정하게 입어야 하는 것이 옷입니다. 저 자신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목사된 탓에 할 수 없이 넥타이를 맵니다마는 한창 더운 여름에는 이 넥타이를 맬 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왜 강아지처럼 이것을 목에 묶고 다녀야 하나' 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다 봉사입니다. 봉사도 큰 봉사입니다. 내가 입은 옷은 어차피 내가 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단정한 옷차림이라는 것이 나 자신한테는 얼마나 불편합니까? 앉고 서기가 얼마나 거북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옷을 단정하게 입어야 합니다.

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지나친 허영, 쓸데없는 관심으로 흐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아줄까 하는 데에 너무 신경을 쓰고,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평판과 명예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지나쳐서 허영으로, 거짓으로, 위선으로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중요한 것은 음식이나 옷이 아니라 목숨과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음식과 의복 따위는 도무지 염려할 것이 못된다고 하십니다. 아니, 염려 자체를 부정하십니다. 어차피 염려는 염려로 끝날 뿐, 염려해 보아야 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키를 더 크게 할 수도 없고, 더 오래 살수도 없고, 더 건강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염려란 어차피 무효한 것이요,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먹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 입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 영광도 행복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음식보다 생명 자체가 중요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하면 이것도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그리고 오래 살아보겠다고 애쓰지만 이것이 다 허욕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그리도 좋은 일일까요?

어느 보험회사 직원이 나이 많은 어른을 따라다니며 생명보험에 들라고 권했답니다. 드십시오, 드십시오 하니까 그 어른이 묻더랍니다. "그래, 그 생명보험에 들면 내가 안 죽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 다른 사람이 도움을 받게 되지요" "그렇다면 생명보험이라는 것이 내 생명과는 관계가 없구먼?" 생명보험-알고 보면 참으로 맹랑한 이름입니다. 남을 위하여 내 목숨을 거는 것이 생명보험입니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집안에 풍파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그 나이든 어른과 보험회사 직원이 생명보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몇 마디 주고받다가 나이 드신 분이 말했습니다. "정 권한다면 내가 그 보험에 들어줄 터이니 자네도 내가 말하는 진짜 생명보험에 들게." 보험회사 직원이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진짜 생명보험이라니요? 그게 어떤 것인데요?" "하늘나라 생명보험 말일세." 생명과 관계없는 생명보험이 아니라 생명 자체와 관계되는 생명보험, 그 참생명보험에 들라고 말해서 그 청년을 전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생명 자체를 생각하지만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7절을 보면,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못합니다. 나 자신을 위하여 죽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별수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반드시 있을 일, 영원한 것, 거기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그 밖의 나머지 일들도 해결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여기 '목적'과 '수단'이 있다면,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목적'입니다. 어떻게 살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 사느냐고 물으십시오. 결혼생활을 어떻게 끌어나갈까 묻지 말고, 왜 결혼했는가를 물으십시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물으십시오. 먼저 이 '왜'라고 하는 문제, 이 목적의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얻으면 그 다음의 '어떻게'라는 수단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관심을 목적에 두십시오. 수단은 뒤따라옵니다.

또한 중심이 되는 것에 우리의 관심을 둡시다. 주변적인 것은 잠깐 잊어버립시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강의한 지도 벌써 30년이 되었는데, 시험을 보여보면 학생들이 내 강의를 잘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를, 또는 내가 강의를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읽어보면 어떤 학생은 제대로 알고 썼지만 어떤 학생은 문제가 무엇을 요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쓰기는 참 많이도 써놓았는데 중심이 없습니다. 내가 찾는 중심만 잘 드러나 있으면 아무리 짧게 썼다 해도 A학점을 주겠는데 쓸데없는 사설(私設)이 왜 그리도 긴지요. 그래서 시험 때가 되면 그런 답안지들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입니다. 더욱이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겠으니까 이것저것 엉뚱한 것만 주워섬겨 놓고 답안지 밑에 '교수님, 죄송합니다.'라고 아양을 떨어놓는 학생도 있습니다. 쓸데없는 짓들입니다. 중심 없는 답안지는 무슨 말을 썼어도 반갑지 않고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생의 중심, 아주 소중한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름지기 거기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시시한 것, 주변적인 것, 중심으로부터 아주 먼 것, 볼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그런 것만 열심히 따라다닌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들 중심에다 관심을 둡시다.

일에는 하나님의 일과 나의 일(His part and our part)이 있습니다. 자, 어차피 나의 일은 지나간 일이요, 하나님의 일은 성취될 일입니다. 나는 없어져야 할 존재요, 하나님의 일은 완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관심은 하나님의 일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거기에 내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관심을 나 자신에게 두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목적을 둡시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반드시 이루어질 이 거룩한 역사, 하나님의 경륜과 마음과 뜻에 우리의 관심을 둡시다. 그리할 때에 그 밖의 모든 일도 자연히 해결됩니다. 최우선적인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시간이 바쁩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행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생각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관심의 초점을 최우선적인 것에 모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은 첫째가 될 수 없는 것을 강조하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결단코 최우선적인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못해도 좋으나 이것만은 꼭 해야 합니다. 다른 일은 다 잊어버려도 좋으나 이것만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물리학자 아이잭 뉴턴은 세상을 떠날 때에 그만 건망증이 생겨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자신의 나이도 생일도 잊어버렸습니다. 친구나 후배들이 찾아와 인사를 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천재가 일생을 통해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한테조차 "자네 누군가?" 하고 물었다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한번은 누가 하도 답답해서 뉴턴에게 물었답니다. "선생님,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있어요"하고 뉴턴이 대답한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것, 이 두 가지는 기억하고 있어요"

여러분, 다 잊어버립시다. 그러나 두 가지만은 잊지 맙시다.

최우선적인 것, 이것은 꼭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고합니다.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 마리아는 놀랍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덮어서 내가 그 거룩하신 분을 잉태하게 된다고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민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약혼한 남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이 내게 일어난 이 신비한 일을 이해해 줄까, 창녀 취급당하지는 않을까, 돌을 던지지 않을까…… 그러나 마리아는 말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참으로 귀한 고백입니다. 최우선적인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관심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내게 어떤 이득이 있으며 어떤 행복이 있을는지, 내게 어떤 명예가 돌아올는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떠한 고통, 어떠한 희생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여기에 궁극적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 39)." 이 기도 뒤에 일어날 일들이 어떤 것입니까? 빌라도의 법정에 서셔야 합니다. 모순투성이의 재판과 갖은 비난과 모욕을 당하십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가고 맙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암담합니다. 암흑과 같은 일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 : 42)"--하나님의 뜻, 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궁극적 관심을 하나님의 뜻에 두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내 생명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마땅히 여기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이웃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3F(three F)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째 F는 믿음(Faith)입니다. 염려를 이기는 길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한다고 염려가 그칩니까?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불안합니다. 산너머 산입니다. '문제의 해결'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궁극적 해결의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둘째 F는 아버지(Father)-모름지기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셋째 F는 the First-'무엇이 먼저냐'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먼저요, 이웃이 먼저요, 나는 나중입니다. 이 순서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선순위(優先順位)를 바로 알아서 먼저 할 일을 먼저 할 것입니다.

무너지는 세상을 그리워하지 말 것입니다.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두고, 가까워지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을 것입니다.

무너지는 장막집은 제쳐두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영원한 집을 생각합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우리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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