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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의 윤리관(베드로전서 4장 7~11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어느 축구 경기 실황을 TV를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축구시합 자체도 흥미 있게 진행되었습니다만 그보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그 경기를 해설하고 있는 아나운서의 말이었습니다. 경기 중에 결정적인 순간이 와서 한 선수가 공을 센터링해 골문 방향으로 잘 넘겨주었는데 이를 받아서 차야 할 주장되는 중요한 선수가 이를 전혀 보지를 못해서 그만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자 이 때문에 모두들 아쉬워하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해설하는 아나운서가 말하기를 "그 선수가 뒤에 눈이 없어서 그만 좋은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당연한 이야기입니까? 백번 마땅한 이야기인데 얼마나 우습게 생각되었는지 모릅니다.
옳습니다. 눈은 앞에 있습니다. 뒤에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것은 못 보게 마련입니다. 뒤를 보기 위해서 고개를 돌려서 돌아본다면 결국 이 때에는 앞을 못 보게 되고마는 것입니다. 설사 앞뒤에 다 눈이 있다손 치더라도 앞을 보는 동안은 뒤를 못 보며 뒤를 보는 동안은 앞을 못 볼 것입니다. 앞을 똑바로 보면 뒤는 못 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앞을 멀리 보는 자는 가까운 것을 잘 못 볼 것이 당연합니다. 생각이 멀리 있는 자는 가까운 일에 아무래도 좀 등한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진리일 것입니다.
믿음이란 앞을 보는 마음입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미래를 현재로 보는 것이며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마음으로 확실하게 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눈은 언제나 저 앞에, 그리고 멀리 있으며 동시에 그는 모든 것을 겉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깊이 보며 손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고 온 인격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미래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확실하게 미래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분명히 끝날 것이라고 예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신학자 샤르뗑은 모든 생명을 과정으로 보고 무한한 진화와 발전을 말하면서도 그는 끝이 있다고 즉 오메가 포인트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현 세대가 그대로 영원히 지속되던가 이대로 무한히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질서가 그대로 영원히 어떤 모양으로든지 계속 된다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현 세대가 발전하며 개혁을 통하여 혹은 혁명을 통하여 계속 유지되고 또 향상된다고 보지 아니합니다. 다만 이 세대는 반드시 끝난다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원이 아니고 직선적입니다. 다시 돌고 도는 윤회가 아니고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명을 보아도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듯이 우주적인 문제도 역시 창조가 있고 종말적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영원하며 부활의 신비가 생명의 참된 의미를 높여주고 있지만 그러나 부활 이전에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주적으로도 이 세상의 끝이 있어야 오는 세상(The age to Come)이 새롭게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끝이 곧 다음 세대의 시작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 세대의 끝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 세대가 스스로 폭발하여 자멸되는 그러한 뜻 없는 종말이 아니고 다음 세대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위하여 이 세대가 반드시 끝나야 한다는 소망적인 종말관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왔다고 급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임박한 종말관 안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세워야 하며 차원이 다른 가치관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모든 가치관을 뒤바꾸게 하는 중대하고 근본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어린아이들이 제멋대로 시계 바늘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돌려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시간을 내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내가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힘에 내가 순종해야 합니다. 이 시간을 최대한 선용하여 같은 시간 안에서 일을 많이 했을 때 우리는 시간을 얻었다, 시간을 벌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역설적인 것이고 아무도 시간을 얻지도 고치지도 못합니다. 이 시간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내가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내가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생일을 자기가 정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 역시 내 설계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정하시는 종말을 내가 믿고 그 안에서 생각하며 내 생을 설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종말을 내가 알며 성경이 증거해 주는 종말을 내가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여 그 안에서 종말적인 윤리관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요,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평상시와 비상시의 가치관이 같을 수 없으며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생활 방법이 같을 수 없고 건강할 때 중요한 일과 병들었을 때에의 중요한 일이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년 시절에는 친구와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청년 시절에는 이성을 찾습니다. 30대에는 사업을 찾아 헤맵니다. 장년에는 명예를 찾고 50이 넘으면 모두 철인이 되며 60이 넘어서는 다들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이 따라 관심의 방향이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심지어는 복이란 것과 화라는 것도 다릅니다. 평화시에는 집과 전답, 그리고 옷이 중요한 듯하나 난리통에 보면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피난 때에 시계를 끌러 주고 고구마 4개를 얻어먹는 기억이 있습니다. 배가 부를 때에는 시계가 더 귀하고 값진 것이 틀림없으나 정작 배고픈 지경에서는 고구마 한 개가 훨씬 더 나의 필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평화시의 복이 꼭 비상시에도 복으로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시의 불행이 전란 때에는 다행한 일로 그 가치가 변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의, 같은 선한 일 중에서도 더욱 의로운 것, 더욱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 사도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에 의한 가치 평가를 뜻합니다. 사회학적인 지고선(至高善)의 평가가 아닙니다. 종말론적 의미에 비추어 보면 우선적인 선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한 의와 그러한 선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바울 사도가 기록하여준 고린도서의 문맥에 의하면 가능한 한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애매한 듯하나 분명한 교훈입니다. 정히 가고 싶으면 가라. 그러나 시집가지 아니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말합니다.
결혼을 최선(The Best)으로 말하지 않고 둘째 최선(Second Best)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결혼은 축복이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제일의 계명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결혼 자체는 축복임이 틀림이 없으나 마지막 때에는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종말적인 세대에는 그것이 최고선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홀로 있으면서 아무 일에도 메이지 않고 자유로이 힘써서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하다가 환난 때에 거리낌없이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것은 홀로 사는 자의 특권이라는 독신주의를 주장합니다. 근거는 오직 임박한 종말 의식에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이 밴 여인에게 화가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는 원수가 집안 식구들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상에 비추어 보면 출산은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 주셔야만 가능한 큰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기다렸으며 사라나 한나가 그 출산을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수치가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오, 둘째는 결혼은 하였으나 어린애를 못 낳는 일이요, 셋째는 여자로서 머리가 다 빠지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출산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요, 어머니가 못되는 일이 여인으로서는 가장 큰 치욕으로 생각되는 당시 유대 사회에 있어서 임산부에게 화가 있다는 것은 전혀 예외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말적인 위기 마지막 때에는 특수한 윤리관을 가지게 되며 종말적인 세대에는 완전히 가치관이 달라지고 부귀가 복이 아니라 대신 저주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 뜻이 있다고 봅니다. 자녀가 복이며 부한 것도 복이지만 말세에는 이것들이 다 화가 되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이것들이 방해가 되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데 있어서 이것들이 큰 시험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비상한 윤리관이 세워져야 합니다. 보세요! "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옷은 가정 보화 중에 하나입니다. 아간이 옷을 감춘 것은 그처럼 옷이 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하신 것은 아주 급박한 종말에 대하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한가한 때는 옷이 더욱 중요하지만 싸움터에 나가는 것 같은 임박한 큰 환란 앞에서는 전쟁터에서 검이 필요하듯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가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임박한 종말 앞에서 우리에게는 이를 중심 하여 버릴 것과 취할 것이 따로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이었고 유무 상통하는 교회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근본 원인은 그들의 인간성 변화에서 온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에서 나온 자연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신앙(Waiting Faith)이 그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다리는 신앙이 준비하는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윤리관을 세우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적인 윤리관이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마지막 때이기에 먼저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나는 바쁘면 바쁠수록 더 많이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쁜 일은 실수하기가 쉽기 때문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도 시간을 늘여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며 만남에서 오는 대화를 뜻합니다. 앞에 만나야 할 분을 오늘 먼저 기도를 통해서 만나는 일입니다. 종말을 의식할 때 우리가 먼저할 일은 기도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더 힘써야할 것입니다. 멀어지는 세상을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앞에 다가오는 세상을 미리 생각하면서 기도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과거는 멀어집니다. 현재에 머물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운명을 생각하면서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다음은 윤리 문제로써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끝을 의식할 때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망하지 말 것이며 잘 했다, 못했다 불평도 말 것입니다. 이제는 사랑 이외에는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마가를 데려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으나 모름지기 그 옛날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마가가 따라나서려고 했으나 제 1차 전도여행하는 중에 도중에서 귀가했다고 해서 바울은 끝내 허락지 아니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이 때에 마가는 몹시 섭섭했었다고 전설은 말하며 이 때문에 더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고도 전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의식하니 이 일이 생각나서 떠나시기 전에 마가에게 꼭 한마디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용서하며 화목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종말을 의식하면서 우리는 이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그리고 열심히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선한 청지기로서 봉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를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가진 바는 내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건강도, 지혜도 그리고 귀중한 시간도 내 것이 아님을 분명히 재확인하고 그리고 맡은 바에 대한 주인의 결산이 앞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내다보아야 합니다. 그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그 주인 앞에서 분명한 결산을 보아야 합니다. 주어진 권력, 주어진 능력과 기회 안에서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가를 묻게 될 것입니다.
선한 청지기로서 자기 신분을 확실히 하고 선한 청지기로 나타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끝 날을 생각할 때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각각 은혜를 받은 선교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생의 끝을 의식하셨을 때 음식 잡수시는 일까지 잊어 가시면서 전도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를 부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구제도 봉사도 심지어는 사회 정의도 아니고 오직 복음 전파에 힘쓰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이요 우선적이며 종말적인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힘쓸 일은 오직 선교뿐입니다.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그 근본은 선교에 있어야만 합니다. 말세라! 또는 말세지 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인색한 마음은 열지 못하고 있고 세상은 끝났다고 매일처럼 부르짖으면서도 한치의 변화도 없는 신앙생활! 이것이 어찌 종말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정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끝내야 하느냐를 항상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대로 끝나도 좋겠습니까? 이 순간 이대로 나의 생이 끝나고 만다 해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물어 보십시다. 이제는 단순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인생의 본래적인 목적을 물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 본래적인 목적과 일치한 오늘을 사는 생이 곧 성공인 것입니다. 나의 미래를 재확인해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나의 생명을 똑 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작이 희미했고 과정 또한 불충실하였을지라도 끝만은 아름답고 충성되게 결국 끝이 그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바 마지막 때를 진정 나의 마지막답게 그리스도 안에서 충성하여 가장 보람있는 종말이 되도록 하십시다. 이러한 종말은 끝이 아니오 곧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종말은 영원한 새 생명의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의 윤리관(베드로전서 4장 7~11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어느 축구 경기 실황을 TV를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축구시합 자체도 흥미 있게 진행되었습니다만 그보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그 경기를 해설하고 있는 아나운서의 말이었습니다. 경기 중에 결정적인 순간이 와서 한 선수가 공을 센터링해 골문 방향으로 잘 넘겨주었는데 이를 받아서 차야 할 주장되는 중요한 선수가 이를 전혀 보지를 못해서 그만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자 이 때문에 모두들 아쉬워하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해설하는 아나운서가 말하기를 "그 선수가 뒤에 눈이 없어서 그만 좋은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당연한 이야기입니까? 백번 마땅한 이야기인데 얼마나 우습게 생각되었는지 모릅니다.
옳습니다. 눈은 앞에 있습니다. 뒤에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것은 못 보게 마련입니다. 뒤를 보기 위해서 고개를 돌려서 돌아본다면 결국 이 때에는 앞을 못 보게 되고마는 것입니다. 설사 앞뒤에 다 눈이 있다손 치더라도 앞을 보는 동안은 뒤를 못 보며 뒤를 보는 동안은 앞을 못 볼 것입니다. 앞을 똑바로 보면 뒤는 못 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앞을 멀리 보는 자는 가까운 것을 잘 못 볼 것이 당연합니다. 생각이 멀리 있는 자는 가까운 일에 아무래도 좀 등한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진리일 것입니다.
믿음이란 앞을 보는 마음입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미래를 현재로 보는 것이며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마음으로 확실하게 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눈은 언제나 저 앞에, 그리고 멀리 있으며 동시에 그는 모든 것을 겉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깊이 보며 손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고 온 인격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미래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확실하게 미래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분명히 끝날 것이라고 예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신학자 샤르뗑은 모든 생명을 과정으로 보고 무한한 진화와 발전을 말하면서도 그는 끝이 있다고 즉 오메가 포인트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현 세대가 그대로 영원히 지속되던가 이대로 무한히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질서가 그대로 영원히 어떤 모양으로든지 계속 된다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현 세대가 발전하며 개혁을 통하여 혹은 혁명을 통하여 계속 유지되고 또 향상된다고 보지 아니합니다. 다만 이 세대는 반드시 끝난다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원이 아니고 직선적입니다. 다시 돌고 도는 윤회가 아니고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명을 보아도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듯이 우주적인 문제도 역시 창조가 있고 종말적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영원하며 부활의 신비가 생명의 참된 의미를 높여주고 있지만 그러나 부활 이전에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주적으로도 이 세상의 끝이 있어야 오는 세상(The age to Come)이 새롭게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끝이 곧 다음 세대의 시작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 세대의 끝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 세대가 스스로 폭발하여 자멸되는 그러한 뜻 없는 종말이 아니고 다음 세대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위하여 이 세대가 반드시 끝나야 한다는 소망적인 종말관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왔다고 급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임박한 종말관 안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세워야 하며 차원이 다른 가치관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모든 가치관을 뒤바꾸게 하는 중대하고 근본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어린아이들이 제멋대로 시계 바늘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돌려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시간을 내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내가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힘에 내가 순종해야 합니다. 이 시간을 최대한 선용하여 같은 시간 안에서 일을 많이 했을 때 우리는 시간을 얻었다, 시간을 벌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역설적인 것이고 아무도 시간을 얻지도 고치지도 못합니다. 이 시간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내가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내가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생일을 자기가 정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 역시 내 설계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정하시는 종말을 내가 믿고 그 안에서 생각하며 내 생을 설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종말을 내가 알며 성경이 증거해 주는 종말을 내가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여 그 안에서 종말적인 윤리관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요,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평상시와 비상시의 가치관이 같을 수 없으며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생활 방법이 같을 수 없고 건강할 때 중요한 일과 병들었을 때에의 중요한 일이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년 시절에는 친구와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청년 시절에는 이성을 찾습니다. 30대에는 사업을 찾아 헤맵니다. 장년에는 명예를 찾고 50이 넘으면 모두 철인이 되며 60이 넘어서는 다들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이 따라 관심의 방향이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심지어는 복이란 것과 화라는 것도 다릅니다. 평화시에는 집과 전답, 그리고 옷이 중요한 듯하나 난리통에 보면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피난 때에 시계를 끌러 주고 고구마 4개를 얻어먹는 기억이 있습니다. 배가 부를 때에는 시계가 더 귀하고 값진 것이 틀림없으나 정작 배고픈 지경에서는 고구마 한 개가 훨씬 더 나의 필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평화시의 복이 꼭 비상시에도 복으로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시의 불행이 전란 때에는 다행한 일로 그 가치가 변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의, 같은 선한 일 중에서도 더욱 의로운 것, 더욱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 사도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에 의한 가치 평가를 뜻합니다. 사회학적인 지고선(至高善)의 평가가 아닙니다. 종말론적 의미에 비추어 보면 우선적인 선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한 의와 그러한 선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바울 사도가 기록하여준 고린도서의 문맥에 의하면 가능한 한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애매한 듯하나 분명한 교훈입니다. 정히 가고 싶으면 가라. 그러나 시집가지 아니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말합니다.
결혼을 최선(The Best)으로 말하지 않고 둘째 최선(Second Best)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결혼은 축복이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제일의 계명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결혼 자체는 축복임이 틀림이 없으나 마지막 때에는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종말적인 세대에는 그것이 최고선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홀로 있으면서 아무 일에도 메이지 않고 자유로이 힘써서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하다가 환난 때에 거리낌없이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것은 홀로 사는 자의 특권이라는 독신주의를 주장합니다. 근거는 오직 임박한 종말 의식에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이 밴 여인에게 화가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는 원수가 집안 식구들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상에 비추어 보면 출산은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 주셔야만 가능한 큰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기다렸으며 사라나 한나가 그 출산을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수치가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오, 둘째는 결혼은 하였으나 어린애를 못 낳는 일이요, 셋째는 여자로서 머리가 다 빠지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출산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요, 어머니가 못되는 일이 여인으로서는 가장 큰 치욕으로 생각되는 당시 유대 사회에 있어서 임산부에게 화가 있다는 것은 전혀 예외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말적인 위기 마지막 때에는 특수한 윤리관을 가지게 되며 종말적인 세대에는 완전히 가치관이 달라지고 부귀가 복이 아니라 대신 저주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 뜻이 있다고 봅니다. 자녀가 복이며 부한 것도 복이지만 말세에는 이것들이 다 화가 되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이것들이 방해가 되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데 있어서 이것들이 큰 시험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비상한 윤리관이 세워져야 합니다. 보세요! "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옷은 가정 보화 중에 하나입니다. 아간이 옷을 감춘 것은 그처럼 옷이 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하신 것은 아주 급박한 종말에 대하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한가한 때는 옷이 더욱 중요하지만 싸움터에 나가는 것 같은 임박한 큰 환란 앞에서는 전쟁터에서 검이 필요하듯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가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임박한 종말 앞에서 우리에게는 이를 중심 하여 버릴 것과 취할 것이 따로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이었고 유무 상통하는 교회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근본 원인은 그들의 인간성 변화에서 온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에서 나온 자연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신앙(Waiting Faith)이 그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다리는 신앙이 준비하는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윤리관을 세우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적인 윤리관이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마지막 때이기에 먼저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나는 바쁘면 바쁠수록 더 많이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쁜 일은 실수하기가 쉽기 때문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도 시간을 늘여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며 만남에서 오는 대화를 뜻합니다. 앞에 만나야 할 분을 오늘 먼저 기도를 통해서 만나는 일입니다. 종말을 의식할 때 우리가 먼저할 일은 기도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더 힘써야할 것입니다. 멀어지는 세상을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앞에 다가오는 세상을 미리 생각하면서 기도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과거는 멀어집니다. 현재에 머물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운명을 생각하면서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다음은 윤리 문제로써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끝을 의식할 때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망하지 말 것이며 잘 했다, 못했다 불평도 말 것입니다. 이제는 사랑 이외에는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마가를 데려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으나 모름지기 그 옛날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마가가 따라나서려고 했으나 제 1차 전도여행하는 중에 도중에서 귀가했다고 해서 바울은 끝내 허락지 아니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이 때에 마가는 몹시 섭섭했었다고 전설은 말하며 이 때문에 더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고도 전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의식하니 이 일이 생각나서 떠나시기 전에 마가에게 꼭 한마디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용서하며 화목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종말을 의식하면서 우리는 이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그리고 열심히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선한 청지기로서 봉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를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가진 바는 내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건강도, 지혜도 그리고 귀중한 시간도 내 것이 아님을 분명히 재확인하고 그리고 맡은 바에 대한 주인의 결산이 앞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내다보아야 합니다. 그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그 주인 앞에서 분명한 결산을 보아야 합니다. 주어진 권력, 주어진 능력과 기회 안에서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가를 묻게 될 것입니다.
선한 청지기로서 자기 신분을 확실히 하고 선한 청지기로 나타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끝 날을 생각할 때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각각 은혜를 받은 선교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생의 끝을 의식하셨을 때 음식 잡수시는 일까지 잊어 가시면서 전도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를 부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구제도 봉사도 심지어는 사회 정의도 아니고 오직 복음 전파에 힘쓰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이요 우선적이며 종말적인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힘쓸 일은 오직 선교뿐입니다.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그 근본은 선교에 있어야만 합니다. 말세라! 또는 말세지 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인색한 마음은 열지 못하고 있고 세상은 끝났다고 매일처럼 부르짖으면서도 한치의 변화도 없는 신앙생활! 이것이 어찌 종말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정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끝내야 하느냐를 항상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대로 끝나도 좋겠습니까? 이 순간 이대로 나의 생이 끝나고 만다 해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물어 보십시다. 이제는 단순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인생의 본래적인 목적을 물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 본래적인 목적과 일치한 오늘을 사는 생이 곧 성공인 것입니다. 나의 미래를 재확인해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나의 생명을 똑 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작이 희미했고 과정 또한 불충실하였을지라도 끝만은 아름답고 충성되게 결국 끝이 그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바 마지막 때를 진정 나의 마지막답게 그리스도 안에서 충성하여 가장 보람있는 종말이 되도록 하십시다. 이러한 종말은 끝이 아니오 곧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종말은 영원한 새 생명의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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