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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한 자에 대한 책임(누가복음 13장 6~9절)

by 【고동엽】 202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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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한 자에 대한 책임(누가복음 13장 6~9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비유하여 "아기 예수께서 누워 계시는 요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구유는 구유이며 요람은 요람이지만 그 속에 아기 예수께서 누워 계심으로서 매우 귀중한 구유가 되고 또 소중한 요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증거하여 주는 책은 성경 중에서도 역시 복음서들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역사적으로 증거 하여 주고 있으며 서신들은 이를 여러 가지 상황 안에서 변증하며 확증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 안에는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그의 사역, 그리고 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장 밝히 설명하여 주신 것은 역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비유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비유들 중에서도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하여 주는 비유가 더욱 소중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는 그런 뜻에서 가장 중요한 비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비유는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씀해 주시고 계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그 어떤 말씀보다도 가장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는 비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중에서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1장 18절 이하와 마가복음 11장 12절 이하에 나타난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열매가 없어서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심판 받은 이야기인데 비해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비유의 말씀이며 역시 열매가 없어서 책망을 들었으나 과원지기의 훌륭한 중보적인 역할로 인하여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Happy end로 끝난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는 주인이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는 관상나무가 못되는 나무입니다. 그 존재의 목적이 관상에 있지 않고 열매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목적대로의 열매가 없을 때 그 나무는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땅만 버리느냐 찍어 버리라"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심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목적으로 창조하신 것이며 그 목적이 또한 오늘의 생의 가치와 의미의 기초가 되고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실 때에도 뚜렷한 목적으로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내시고 보호하시며 오늘 이 땅에 있게 하심에도 확실한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 목적에서 빗나가거나 목적에서 떠날 때 그것은 존재의 가치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과 오늘 나를 여기에 있게 하신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도 그 열매가 없으므로 마침내 심판을 내리십니다. "찍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종말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와 면양, 산양 비유 등에서 가르쳐 주듯이 세상 끝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의인이 악인의 대접을 받기도 하고 죄인이 의인의 받을 영광을 대신 누리기도 합니다. 현세는 분명히 부조리와 모순이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도 그의 실천이성 비판에서 최대한으로 선한 사람의 복된 길을 설명하였으나 끝내는 내세를 긍정하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변명하려해도 이 세상만 가지고서는 상선벌악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역사의 종말에 "행한 대로" 공평히 갚으시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공평히 갚으시는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년 전에 타임지에 난 기사중에서 무서운 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한번 한 말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전파로써 이 우주 공간에 그대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한 말은 오늘 녹음기로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연구가 진행되면 2,000여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오늘 녹음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한갖 인간인 과학자의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살아온 모든 생을 장차 세상 끝날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게 된다는 이 사실을 어찌 이상한 일로만 생각하며 믿을 수 없는 일처럼 생각할 문제이겠습니까? 당연하고 또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심판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적인 심판도 있는 것입니다. 끝내 회개하지 아니할 때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케 하였다는 사실도 그것을 뜻하며 예수님께서 바리새교인과 서기관의 위선과 외식을 책망하사 "화 있을진저"라고 심판하신 것도 이러한 현재적 심판을 뜻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롯 유다에게 여러 번 회개의 기회를 주었으나 끝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 하심도 실상은 심판이었습니다. 유다가 그후로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는 여러 번 "내 버려 두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와 우상숭배와 더러움에 내버려둔 상태, 이것은 곧 현재적 심판을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불의에 길이 막히고 악한 계획은 실패되며 죄의 길로 줄달음치려 할 때는 오히려 병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증거일 것입니다. 불의가 통하며 죄된 일이 성공된다면 이는 곧 심판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심판은 오늘도 확실히 있으며 더딘 것 같으나 빠르고 무딘 것 같으나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3년간 기다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즉각적으로 찍어 버린 것이 이니라 3년을 참아서 심판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한다고 즉시 천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내하시되 무한히 인내하신 것이 아니고 3년동안 참으시고 그리고는 심판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음을 말하여 줍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길이 참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무한히 참으신 것은 아니고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할 때는 결국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참으셨고 어떤 때에는 참을 수 없어 심판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구약의 문맥 속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며 죄를 범하고 음란하며 멸망의 길에 섰을 때에도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선지자를 보내시어 깨우치고 돌아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상화할 때에는 진노하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겨도 참으셨으나 하나님을 우상화 해버린 때에는 참지 못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의 크기를 말해주는 상징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한계를 보여 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으나 동시에 십자가의 한계 이상으로 사랑하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계요, 인내의 한계입니다. 이를 넘어설 때에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되시면서 곧 심판도 되시고 구주이시자 심판주도 되시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구원이 있고 동시에 심판적인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요 5 : ).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음으로 이제 심판을 받았습니다. 3년이나 기다려 주시다가 내리신 심판인 까닭에 나무는 무슨 변명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이 심판을 받아 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고맙게도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주인의 심판을 가로 막으며 섰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한 순간입니까?

이 과원지기의 중보적인 간청은 결코 단순한 감상이나 동정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확실한 신앙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열매 없는 이 사건을 과원지기는 생리적 현상으로 본 것이 아니고 병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질적으로 이 나무가 나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병적으로 잘못 되었기에 열매가 맺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본래성은 선한 것이며 잠재적인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그를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이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기 때문"이란 그 신앙은 놀라운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계속하여 쓰러져 자는 베드로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마음에 없어서 잤다고 해야 바른 말일 것입니다. 정신상태가 건전치 못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위기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의 깊은 진실만은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또 신앙이기도 합니다.

뮌헨 올림픽촌에서 북한선수 하나가 사격부문에서 금메달을 탔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소감을 묻는 말에 대답하기를 "김일성 수령님께서 교시하시기를 원수의 심장을 쏘는 마음으로 쏘라"고 하셨는데 그대로 하여서 이겼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서독 선수들을 비롯하여 모든 선수들이 저런 사람들과는 경기를 계속하지 않겠다고 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던 일을 기억합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 청년이 나쁜 것입니까? 본래 그렇게 나쁜 것이었겠습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배웠고 그것 밖에는 들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도 본래부터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선한 본래성과 깊은 진실을 알아주며 숨겨져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람이 한번 죄를 범하면 그 죄를 회개한 뒤에도 그 허물은 남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중에서 죄와 허물을 구별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 장로님과 함께 양조장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술 냄새가 몹시 나는 길이었는데 장로님이 "그 냄새 참 좋다"고 하기에 이상한 마음과 더불어 놀랐습니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30년 전에 술을 끊고 다시 마신 일이 없지만 아직도 술 냄새가 그처럼 유혹적으로 느껴질 때가 간혹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회개하였으되 허물은 언제나 약점으로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 곳으로 다시 빠지기가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런즉 죄의 종된 자와 종 되었던 자가 어찌 온전히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이 과원지기는 무화과 나무의 열매 없는 책임을 자기가 같이 지려고 합니다. 주인은 분명하게 판단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동안 주인이 보아온 바에 의하여 과원지기는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많은 수고와 정성을 기울였음을 인정하고, 잘못은 오직 나무에게만 있다고 판단하여 과원지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나무가 나쁘니 "찍어 버리라"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원지기는 그 책임을 같이 지려고 합니다. 자기에게도 분명히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인이 찾아와 상담을 하는데 남편이 나쁜 사람이 되어서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으며 이제는 이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허물과 잘못을 이야기하며 이혼해야만 한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가 한마디만 묻겠는데 이 말에 대답하고 나서 이혼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결혼 전에도 그 남자가 그와 같이 불량한 사람이었을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의 대답이 "본래 그런 남자이었으면 어찌 내가 결혼을 하였겠느냐"고 하면서 그 전에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분명하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래 좋던 사람이 부인과 함께 사는 7년 동안에 그와 같이 나쁜 사람이 되었으니 그 책임이 당신에게는 전혀 없는 것입니까?"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게도 책임이 좀 있겠지요." 저는 다시금 말하였습니다. "좀이 아닙니다. 둘이서 산 일이니 부인에게도 50%의 책임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나머지 50%는 기도하시며 믿음과 사랑으로 채우십시오."라고. 그후 그 여인은 돌아가서 아직도 이혼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에게는 전혀 잘못이 없고 내 책임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게 될 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라도 내게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자에게는 결코 원망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책임 없는 자에게 불평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책임한 자의 책임을 대신 지는 것이 곧 사랑이며 믿음입니다. 과원지기는 열매 없는 책임이 자기 책임인 것처럼 생각하여 마침내는 같이 책임을 지려 하며 좀더 나아가서는 대신 지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비판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말없이 책임을 함께 지며 나아가서는 대신 지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에스라는 그의 글 9장과 10장에서 보면 온 민족의 죄를 자기의 죄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원지기는 일년의 기회를 다시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일년은 한번 두고 보자는 일년이 결코 아닙니다. 그 과원지기 자신이 일년을 더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엄격히 말하면 무화과나무에게 주어지는 일년이 아니라 사실은 과원지기에게 주어지는 일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년은 과원지기에게 수고와 희생의 기회로 주어지는 일년입니다.

즉 내가 수고하고 내가 희생할 여지가 아직 남아있는 동안에는 이 나무를 찍어 버릴 수 없다는 신앙입니다.

모세는 심판 받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기를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려면 차라리 그전에 자기의 생명을 먼저 거두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심판 받을 자가 다시 살기 위하여서는 분명히 더 큰 희생이 지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열매를 맺고 있는가? 열매 없는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지금 현재에 주어진 종말적인 이 세대에는 분명히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열매 없는 세대를 향하여 목적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과원지기의 믿음으로 멸망 받을 우리 죄인을 위하여 대신 고난 당하시고 대신 희생된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책임을 대신 지셨으며 오늘도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만이 참 중보자이십니다. 이 진실된 중보자의 역사 하심을 인하여 그 어떤 열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중보적인 역할을 우리에게 하라 하십니다. 악인이 살며 죄인이 회개의 기회를 다시 얻기 위하여서는 과원지기의 믿음을 가지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와 역사의 의미를 망각하고 죄된 길에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 민족을 위해서 누가 이 같은 과원지기의 믿음을 가지고 나설 것입니까? 오늘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요구가 있습니까?

여기 이 과원지기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도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이를 위해 희생을 지불해야겠습니다.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 진리의 열매, 그리고 사랑의 열매와 생명의 열매가 풍성케 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무책임한 자에 대한 책임(누가복음 13장 6~9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비유하여 "아기 예수께서 누워 계시는 요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구유는 구유이며 요람은 요람이지만 그 속에 아기 예수께서 누워 계심으로서 매우 귀중한 구유가 되고 또 소중한 요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증거하여 주는 책은 성경 중에서도 역시 복음서들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역사적으로 증거 하여 주고 있으며 서신들은 이를 여러 가지 상황 안에서 변증하며 확증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 안에는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그의 사역, 그리고 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장 밝히 설명하여 주신 것은 역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비유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비유들 중에서도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하여 주는 비유가 더욱 소중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는 그런 뜻에서 가장 중요한 비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비유는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씀해 주시고 계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그 어떤 말씀보다도 가장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는 비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중에서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1장 18절 이하와 마가복음 11장 12절 이하에 나타난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열매가 없어서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심판 받은 이야기인데 비해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비유의 말씀이며 역시 열매가 없어서 책망을 들었으나 과원지기의 훌륭한 중보적인 역할로 인하여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Happy end로 끝난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는 주인이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는 관상나무가 못되는 나무입니다. 그 존재의 목적이 관상에 있지 않고 열매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목적대로의 열매가 없을 때 그 나무는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땅만 버리느냐 찍어 버리라"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심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목적으로 창조하신 것이며 그 목적이 또한 오늘의 생의 가치와 의미의 기초가 되고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실 때에도 뚜렷한 목적으로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내시고 보호하시며 오늘 이 땅에 있게 하심에도 확실한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 목적에서 빗나가거나 목적에서 떠날 때 그것은 존재의 가치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과 오늘 나를 여기에 있게 하신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도 그 열매가 없으므로 마침내 심판을 내리십니다. "찍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종말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와 면양, 산양 비유 등에서 가르쳐 주듯이 세상 끝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의인이 악인의 대접을 받기도 하고 죄인이 의인의 받을 영광을 대신 누리기도 합니다. 현세는 분명히 부조리와 모순이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도 그의 실천이성 비판에서 최대한으로 선한 사람의 복된 길을 설명하였으나 끝내는 내세를 긍정하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변명하려해도 이 세상만 가지고서는 상선벌악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역사의 종말에 "행한 대로" 공평히 갚으시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공평히 갚으시는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년 전에 타임지에 난 기사중에서 무서운 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한번 한 말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전파로써 이 우주 공간에 그대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한 말은 오늘 녹음기로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연구가 진행되면 2,000여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오늘 녹음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한갖 인간인 과학자의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살아온 모든 생을 장차 세상 끝날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게 된다는 이 사실을 어찌 이상한 일로만 생각하며 믿을 수 없는 일처럼 생각할 문제이겠습니까? 당연하고 또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심판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적인 심판도 있는 것입니다. 끝내 회개하지 아니할 때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케 하였다는 사실도 그것을 뜻하며 예수님께서 바리새교인과 서기관의 위선과 외식을 책망하사 "화 있을진저"라고 심판하신 것도 이러한 현재적 심판을 뜻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롯 유다에게 여러 번 회개의 기회를 주었으나 끝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 하심도 실상은 심판이었습니다. 유다가 그후로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는 여러 번 "내 버려 두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와 우상숭배와 더러움에 내버려둔 상태, 이것은 곧 현재적 심판을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불의에 길이 막히고 악한 계획은 실패되며 죄의 길로 줄달음치려 할 때는 오히려 병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증거일 것입니다. 불의가 통하며 죄된 일이 성공된다면 이는 곧 심판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심판은 오늘도 확실히 있으며 더딘 것 같으나 빠르고 무딘 것 같으나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3년간 기다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즉각적으로 찍어 버린 것이 이니라 3년을 참아서 심판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한다고 즉시 천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내하시되 무한히 인내하신 것이 아니고 3년동안 참으시고 그리고는 심판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음을 말하여 줍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길이 참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무한히 참으신 것은 아니고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할 때는 결국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참으셨고 어떤 때에는 참을 수 없어 심판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구약의 문맥 속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며 죄를 범하고 음란하며 멸망의 길에 섰을 때에도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선지자를 보내시어 깨우치고 돌아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상화할 때에는 진노하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겨도 참으셨으나 하나님을 우상화 해버린 때에는 참지 못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의 크기를 말해주는 상징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한계를 보여 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으나 동시에 십자가의 한계 이상으로 사랑하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계요, 인내의 한계입니다. 이를 넘어설 때에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되시면서 곧 심판도 되시고 구주이시자 심판주도 되시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구원이 있고 동시에 심판적인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요 5 : ).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음으로 이제 심판을 받았습니다. 3년이나 기다려 주시다가 내리신 심판인 까닭에 나무는 무슨 변명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이 심판을 받아 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고맙게도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주인의 심판을 가로 막으며 섰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한 순간입니까?

이 과원지기의 중보적인 간청은 결코 단순한 감상이나 동정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확실한 신앙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열매 없는 이 사건을 과원지기는 생리적 현상으로 본 것이 아니고 병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질적으로 이 나무가 나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병적으로 잘못 되었기에 열매가 맺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본래성은 선한 것이며 잠재적인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그를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이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기 때문"이란 그 신앙은 놀라운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계속하여 쓰러져 자는 베드로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마음에 없어서 잤다고 해야 바른 말일 것입니다. 정신상태가 건전치 못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위기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의 깊은 진실만은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또 신앙이기도 합니다.

뮌헨 올림픽촌에서 북한선수 하나가 사격부문에서 금메달을 탔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소감을 묻는 말에 대답하기를 "김일성 수령님께서 교시하시기를 원수의 심장을 쏘는 마음으로 쏘라"고 하셨는데 그대로 하여서 이겼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서독 선수들을 비롯하여 모든 선수들이 저런 사람들과는 경기를 계속하지 않겠다고 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던 일을 기억합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 청년이 나쁜 것입니까? 본래 그렇게 나쁜 것이었겠습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배웠고 그것 밖에는 들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도 본래부터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선한 본래성과 깊은 진실을 알아주며 숨겨져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람이 한번 죄를 범하면 그 죄를 회개한 뒤에도 그 허물은 남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중에서 죄와 허물을 구별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 장로님과 함께 양조장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술 냄새가 몹시 나는 길이었는데 장로님이 "그 냄새 참 좋다"고 하기에 이상한 마음과 더불어 놀랐습니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30년 전에 술을 끊고 다시 마신 일이 없지만 아직도 술 냄새가 그처럼 유혹적으로 느껴질 때가 간혹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회개하였으되 허물은 언제나 약점으로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 곳으로 다시 빠지기가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런즉 죄의 종된 자와 종 되었던 자가 어찌 온전히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이 과원지기는 무화과 나무의 열매 없는 책임을 자기가 같이 지려고 합니다. 주인은 분명하게 판단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동안 주인이 보아온 바에 의하여 과원지기는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많은 수고와 정성을 기울였음을 인정하고, 잘못은 오직 나무에게만 있다고 판단하여 과원지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나무가 나쁘니 "찍어 버리라"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원지기는 그 책임을 같이 지려고 합니다. 자기에게도 분명히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인이 찾아와 상담을 하는데 남편이 나쁜 사람이 되어서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으며 이제는 이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허물과 잘못을 이야기하며 이혼해야만 한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가 한마디만 묻겠는데 이 말에 대답하고 나서 이혼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결혼 전에도 그 남자가 그와 같이 불량한 사람이었을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의 대답이 "본래 그런 남자이었으면 어찌 내가 결혼을 하였겠느냐"고 하면서 그 전에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분명하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래 좋던 사람이 부인과 함께 사는 7년 동안에 그와 같이 나쁜 사람이 되었으니 그 책임이 당신에게는 전혀 없는 것입니까?"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게도 책임이 좀 있겠지요." 저는 다시금 말하였습니다. "좀이 아닙니다. 둘이서 산 일이니 부인에게도 50%의 책임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나머지 50%는 기도하시며 믿음과 사랑으로 채우십시오."라고. 그후 그 여인은 돌아가서 아직도 이혼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에게는 전혀 잘못이 없고 내 책임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게 될 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라도 내게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자에게는 결코 원망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책임 없는 자에게 불평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책임한 자의 책임을 대신 지는 것이 곧 사랑이며 믿음입니다. 과원지기는 열매 없는 책임이 자기 책임인 것처럼 생각하여 마침내는 같이 책임을 지려 하며 좀더 나아가서는 대신 지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비판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말없이 책임을 함께 지며 나아가서는 대신 지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에스라는 그의 글 9장과 10장에서 보면 온 민족의 죄를 자기의 죄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원지기는 일년의 기회를 다시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일년은 한번 두고 보자는 일년이 결코 아닙니다. 그 과원지기 자신이 일년을 더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엄격히 말하면 무화과나무에게 주어지는 일년이 아니라 사실은 과원지기에게 주어지는 일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년은 과원지기에게 수고와 희생의 기회로 주어지는 일년입니다.

즉 내가 수고하고 내가 희생할 여지가 아직 남아있는 동안에는 이 나무를 찍어 버릴 수 없다는 신앙입니다.

모세는 심판 받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기를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려면 차라리 그전에 자기의 생명을 먼저 거두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심판 받을 자가 다시 살기 위하여서는 분명히 더 큰 희생이 지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열매를 맺고 있는가? 열매 없는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지금 현재에 주어진 종말적인 이 세대에는 분명히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열매 없는 세대를 향하여 목적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과원지기의 믿음으로 멸망 받을 우리 죄인을 위하여 대신 고난 당하시고 대신 희생된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책임을 대신 지셨으며 오늘도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만이 참 중보자이십니다. 이 진실된 중보자의 역사 하심을 인하여 그 어떤 열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중보적인 역할을 우리에게 하라 하십니다. 악인이 살며 죄인이 회개의 기회를 다시 얻기 위하여서는 과원지기의 믿음을 가지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와 역사의 의미를 망각하고 죄된 길에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 민족을 위해서 누가 이 같은 과원지기의 믿음을 가지고 나설 것입니까? 오늘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요구가 있습니까?

여기 이 과원지기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도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이를 위해 희생을 지불해야겠습니다.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 진리의 열매, 그리고 사랑의 열매와 생명의 열매가 풍성케 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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