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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경건과 참건강(에베소서 3장 14절~21절)

by 【고동엽】 202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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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경건과 참건강(에베소서 3장 14절~21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얼마전에 텔레비전을 보자니 정초때라 기자들이 길거리에 나가 행인들의 길을 막고 마이크를 대면서 새해에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새해에 가지는 소원이 뭡니까?" 이에 모두가 대답하는 말인즉 "소원성취해야죠, 뭐."입니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소원성취해야 된다는 대답입니다. "그 소원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하고 기자들은 집요하게 또 묻습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대답하는 것이 "건강해야죠"입니다. "돈벌어야죠"하는 대답은 없더군요. 특별히 요새는 세상이 변해서 그런지 "출세해야죠"하는 따위의 대답은 찾아볼 수 없어요.

출세하는 것 겁나거든요. 자녀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느냐 하는 질문에도 "그저 건강해야죠, 뭐." 이구동성입디다.

소원이 참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일껏 소원성취라 해놓고는 "건강해야죠" 하나로 끝나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윤리학자 하크네스는 현대의 현실을 두고 '상실의 시대'라 했습니다.

물질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위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가진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못 가진 것이 아닙니다. 가졌는데 가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상실감은 곧 소외감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고독한 것입니다. 상대적 빈곤이 절대적 빈곤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좋은 경치를 구경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경치를 볼 때에 좋다고 느끼는 것으로 좋은데 '이게 누구 산이지? 이건 내 것이 아닌데 뭘'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그럴 것 같습니까? 구경하는 데 돈 안 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굳이 저것이 누구 것이냐, 내 것이 아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경치라는 것이 먹는 것이 아니요, 주머니에 넣는 것도 아닙니다. 눈으로 보면 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애가라-그 큰 광경을 보면 참으로 굉장하지요. 정말 장관입니다. 큰물이 떨어져 내려오는 장관을 바라보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거는 미국 거다" "아니다, 캐나다 거다"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있으니까 양쪽 다 거다"하고들 떠들고 있습니다. 이 꼴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이 쐐기를 박습니다. "아니다, 저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내 것이다." 그렇지요. 내가 지금 보고 있으니 내 것입니다.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고 경치나 온전히 감상했으면 좋겠는데, 일껏 거기까지 가서는 내 것이다 남의 것이다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사람들입니까? 연전에 수양관을 하나 지으려고 산을 보러 다닐 때에 제가 조건을 하나 걸었습니다. 우리가 얻는 땅은 그 주변이 온통 그린벨트에 걸려 있을 것, 사방이 그린벨트에 걸리고 우리가 지을 땅만 그린벨트에 안 걸린 것이라야 한다고----왜요? 그린벨트 걸린 것, 그것 보는 것은 덤으로 얻는 것이니까요. 보면 우리 것이니까요. 여러분, 생각을 바꾸세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유의식이 확실치 못하고 잘못돼 있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서 불행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작가 까뮈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시가지 한복판에 세워진 공중전화 부스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도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넓은 세상은 등지고 부스 안에 스스로 갇혀 있는 것과도 같은 의식으로 살기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건강이란 중요한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건강하면 여유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해도 나 자신이 건강만 하다면 그것만으로 이 사회를 향하여 50퍼센트 구제는 하는 셈이라고 말입니다. 보세요. 가정에서 내가 건강하면 온 가족에게 여유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식구 가운데 누구 하나가 병들면 온 집안이 우울합니다. 병든 사람만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나 하나 건강한 것만으로도 사회봉사를 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이런 것을 먹어도 좋고 저런 것을 먹어도 좋습니다. 차가운 것을 먹어도 좋고 데운 것을 먹어도 좋습니다. 이런 데서 자도 좋고 저런 데서 하룻밤 자도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약한 사람은 가는 감기 오는 감기 다 걸립니다. 어쩌다 찬바람 한번 스치면 콜록거리고 콧물 흘리고 야단입니다.

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저 아프고 남까지 괴롭힙니다. 허약해서 그렇습니다. 이건 먹고 저건 안 먹고--왜 이래져야 됩니까?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해서 튼튼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위장이라는 것이 건강한 사람은 손바닥만큼 두툼하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은 그저 이걸 먹어도 소화하고 저걸 먹어도 소화하는데, 신경질적인 사람은 종잇장처럼 얇아놓으니 무엇이 들어가면 발끈하고 화를 내고, 화가 지나치면 위천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뚫리는 것이지요. 반은 죽은 사람이지 산 사람이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비실비실 사니까 좌충우돌입니다. 문제가 많아요. 허약해 가지고 휘청휘청하니까 온통 문제 투성이지요.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여러 가지로 말합니다마는 결국 적당한 음식을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그리고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건강의 75퍼센트가 정신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한다고 뛰어보아야 그것은 25퍼센트 범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75퍼센트가 마음의 건강에 달려 있어요. 정신건강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는 첫째가 social isolation이라고 합니다. '사회적인 고독'입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회로부터 내가 이렇게 소외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첫째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major life change--큰 사건이 자기 생애에 있을 때에 여기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사랑하는 배우자가 죽었다던가 자식이 먼저 죽었다던가 하는 등의 큰 사건을 만나게 될 때에 이런 충격이 그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감의 결여'입니다. 내가 나에게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만족히 여기지 못해요. 내가 왜 하필이면 이런 직업을 택했나, 왜 이런 직장인가, 하고 자기일 에 만족치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12배나 호흡기질환이 온다고 합니다. 일에 만족치 못하는 사람은 건강을 지킬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정신적으로 허약한 데에 문제가 있고, 그 다음에는 염세적인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염세주의자는 한번 일이 잘못됐을 때, 한번 불운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이것이 앞으로도 자꾸 반복된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계속 불운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낙천주의자는 한번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도 다음 사건은 달리 될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염세주의자는 꼭 '내 운이 다한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나쁜 일만 생길 것이다, 이건 구제불능이다, 이젠 고칠 길이 없다, 나로서는 여기서부터 다시 소생할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정신적으로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육체적 건강인들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지식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느낌은 훨씬 더 절대적이고, 훨씬 더 원초적입니다. 러시아의 철학자 솔프비예프는 느낌이라는 것, 감정이라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수치, 연민, 경건이 그것입니다. 수치는 동물적 본능적 감정이요, 연민은 인격적 감정이며, 경건은 종교적 감정입니다.

이 같은 감정이 실로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감정처리에서 빗나가면 모든 것이 다 빗나갑니다.

그런고로 인간의 내적 건강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육체적으로는 건강치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건강해서 그 불편한 몸으로도 순교할 때까지 건강을 지켜 일할 수 있었으며, 오늘도 본문에서는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건강이란, 세계보건기구의 정의에 따르면 단지 무병이라거나 허약치 아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양호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Health is state of physical well-being'--'well- being'이라고 말합니다. 양호한 상태여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그럴 때에 그것이 건강입니다. 단순히 병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건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영적으로 건강하고야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에 육체도 따라 건강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속사람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이 속사람은 물질로써 건강 할 수가 없어요. 속사람은 사회적인 문제로써 건강케 할 수가 없어요. 속사람의 건강은 오직 경건에 있습니다. 오직 경건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이라고 하는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To be is blessing'--'산다는 것이 축복이다'라고. To live is holy--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산다는 것은 거룩합니다. health(건강)라는 말의 어원이 holy--온전함입니다. holy와 whole이 health로 나타난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 경건함, 그 속에 건강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경건이 없는 건강이라면 몸부림이요 발악입니다. 거룩함 속에 진정한 건강이 깃들어 있고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매일같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떠나서는 건강이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성경말씀은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16절)" -- '성령으로'입니다. 성령이 능력을 공급할 때에 비로소 강건하다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적 건강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약적인 경건이란 성령충만을 의미합니다.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약적인 건강은 오순절적인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3년, 그러나 그는 허약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다 보고 다 공부했습니다마는 그는 빈약했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에 그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 했고,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비겁하고 비열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충만하게 되었을 때에 사람이 달라져 새로운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자신의 과거도 극복합니다. 마침내 깨끗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삼천 명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심리적으로 생각하면 신령한 용기요, 영적 건강입니다. 담대하게 삽니다. 저는 그런 생각도 해보아요. 베드로가 삼천 명 앞에서 설교할 때에 베드로의 마음속에 그 앞에 앉은 사람이 '아, 저 사람, 며칠 전에 예수를 모른다고 도망갔던 사람 아닌가'하고 쳐다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없었을까 하고요. 바울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성령이 능력을 주시기에 그는 건강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삼천 명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본문은 또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절)" -- 그리스도적 신앙, 십자가 중심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가만히 보면 저희 마음대로 노는 것 같아도 그 마음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어요. 장난감하고 같이 놀고 친구들과 놀고 하지만 그래도 여기 가까이 우리 어머니가 있다 하는 것을 의식하고, 그 믿음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멀리 갔다든가 하고 생각하게 되면 그 시간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여 달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다' '거한다'하는 말은 헬라어에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파로이케오'로 이것은 천막을 친다는 뜻이며 임시적으로 나그네가 거한다는 뜻이고, 또하나 '카토이케오'라는 말은 영구거주를 말함입니다. 바울은 오늘 이 후자를 사용합니다. 주께서 우리 마음에 영원히 거주해 계셔야 된다, 그래서 그가 주인이 되시고, 그가 목적이 되시고, 그가 주도하시고 해야 내가 건강하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다스릴 때에 나는 건강할 수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넘치는 사랑, 그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지식에 넘치는 사랑, 분에 넘치는 사랑을 느낄 때에 거기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을 재미있게 정의한 바 있습니다. '내가 사랑 받고 있기에 나도 저를 사랑한다'--이것은 미숙한 사랑입니다.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 그런고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될 때에 이것도 미숙한 사랑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고로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 --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성숙한 사랑은 창조적인 것입니다. 대상이 그 누구냐를 묻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아름답고,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랑입니다. 순간순간 사랑을 확인합니다. 전에는 사랑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사랑이요, 전에는 버려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소중합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거나 길을 다닐 때에 얼마나 위험한 길을 갑니까? 그러나 우리는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가끔 비행기를 타면서 보면 조급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활주로에 내릴 때에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흔히 비행기가 아직 멈추기도 전에 남 먼저 내리겠다고 법석을 떨고 일어서고 합니다. 안내원들이 앉으세요, 앉으세요 하는데도 막무가냅니다. 왜 이렇게들 조급한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국내선을 타보니 활주로에 비행기가 내리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박수를 쳐요. 어떤 사람은 할렐루야 하고 어떤 사람은 조종사보고 고맙다고 인사를 해요. 조종사는 나와서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받아줍니다. 얼마나 보기 좋던지…… 생각하면 비행기가 한번씩 착륙할 때마다 박수칠만하지요. 고마운 일이지요. 이것을 생각 못해요.

자그마한 일이라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 하나하나가 오늘 와서는 이것도 고맙고 저것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 넘치는 사랑을 순간순간 깨닫고, 또 깨닫고, 그럴 때마다 더 건강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경건에 참건강이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 건강이 있습니다. 사랑을 느낄 때에, 사랑을 행할 때에,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이 있을 때에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건강할 때에 많은 사람에게 건강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건강할 때에 많은 사람을 참아줄 수도 있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금년들어 우리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이여!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참경건과 참건강(에베소서 3장 14절~21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얼마전에 텔레비전을 보자니 정초때라 기자들이 길거리에 나가 행인들의 길을 막고 마이크를 대면서 새해에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새해에 가지는 소원이 뭡니까?" 이에 모두가 대답하는 말인즉 "소원성취해야죠, 뭐."입니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소원성취해야 된다는 대답입니다. "그 소원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하고 기자들은 집요하게 또 묻습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대답하는 것이 "건강해야죠"입니다. "돈벌어야죠"하는 대답은 없더군요. 특별히 요새는 세상이 변해서 그런지 "출세해야죠"하는 따위의 대답은 찾아볼 수 없어요.

출세하는 것 겁나거든요. 자녀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느냐 하는 질문에도 "그저 건강해야죠, 뭐." 이구동성입디다.

소원이 참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일껏 소원성취라 해놓고는 "건강해야죠" 하나로 끝나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윤리학자 하크네스는 현대의 현실을 두고 '상실의 시대'라 했습니다.

물질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위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가진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못 가진 것이 아닙니다. 가졌는데 가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상실감은 곧 소외감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고독한 것입니다. 상대적 빈곤이 절대적 빈곤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좋은 경치를 구경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경치를 볼 때에 좋다고 느끼는 것으로 좋은데 '이게 누구 산이지? 이건 내 것이 아닌데 뭘'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그럴 것 같습니까? 구경하는 데 돈 안 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굳이 저것이 누구 것이냐, 내 것이 아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경치라는 것이 먹는 것이 아니요, 주머니에 넣는 것도 아닙니다. 눈으로 보면 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애가라-그 큰 광경을 보면 참으로 굉장하지요. 정말 장관입니다. 큰물이 떨어져 내려오는 장관을 바라보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거는 미국 거다" "아니다, 캐나다 거다"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있으니까 양쪽 다 거다"하고들 떠들고 있습니다. 이 꼴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이 쐐기를 박습니다. "아니다, 저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내 것이다." 그렇지요. 내가 지금 보고 있으니 내 것입니다.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고 경치나 온전히 감상했으면 좋겠는데, 일껏 거기까지 가서는 내 것이다 남의 것이다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사람들입니까? 연전에 수양관을 하나 지으려고 산을 보러 다닐 때에 제가 조건을 하나 걸었습니다. 우리가 얻는 땅은 그 주변이 온통 그린벨트에 걸려 있을 것, 사방이 그린벨트에 걸리고 우리가 지을 땅만 그린벨트에 안 걸린 것이라야 한다고----왜요? 그린벨트 걸린 것, 그것 보는 것은 덤으로 얻는 것이니까요. 보면 우리 것이니까요. 여러분, 생각을 바꾸세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유의식이 확실치 못하고 잘못돼 있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서 불행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작가 까뮈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시가지 한복판에 세워진 공중전화 부스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도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넓은 세상은 등지고 부스 안에 스스로 갇혀 있는 것과도 같은 의식으로 살기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건강이란 중요한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건강하면 여유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해도 나 자신이 건강만 하다면 그것만으로 이 사회를 향하여 50퍼센트 구제는 하는 셈이라고 말입니다. 보세요. 가정에서 내가 건강하면 온 가족에게 여유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식구 가운데 누구 하나가 병들면 온 집안이 우울합니다. 병든 사람만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나 하나 건강한 것만으로도 사회봉사를 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이런 것을 먹어도 좋고 저런 것을 먹어도 좋습니다. 차가운 것을 먹어도 좋고 데운 것을 먹어도 좋습니다. 이런 데서 자도 좋고 저런 데서 하룻밤 자도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약한 사람은 가는 감기 오는 감기 다 걸립니다. 어쩌다 찬바람 한번 스치면 콜록거리고 콧물 흘리고 야단입니다.

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저 아프고 남까지 괴롭힙니다. 허약해서 그렇습니다. 이건 먹고 저건 안 먹고--왜 이래져야 됩니까?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해서 튼튼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위장이라는 것이 건강한 사람은 손바닥만큼 두툼하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은 그저 이걸 먹어도 소화하고 저걸 먹어도 소화하는데, 신경질적인 사람은 종잇장처럼 얇아놓으니 무엇이 들어가면 발끈하고 화를 내고, 화가 지나치면 위천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뚫리는 것이지요. 반은 죽은 사람이지 산 사람이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비실비실 사니까 좌충우돌입니다. 문제가 많아요. 허약해 가지고 휘청휘청하니까 온통 문제 투성이지요.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여러 가지로 말합니다마는 결국 적당한 음식을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그리고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건강의 75퍼센트가 정신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한다고 뛰어보아야 그것은 25퍼센트 범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75퍼센트가 마음의 건강에 달려 있어요. 정신건강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는 첫째가 social isolation이라고 합니다. '사회적인 고독'입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회로부터 내가 이렇게 소외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첫째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major life change--큰 사건이 자기 생애에 있을 때에 여기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사랑하는 배우자가 죽었다던가 자식이 먼저 죽었다던가 하는 등의 큰 사건을 만나게 될 때에 이런 충격이 그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감의 결여'입니다. 내가 나에게 만족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만족히 여기지 못해요. 내가 왜 하필이면 이런 직업을 택했나, 왜 이런 직장인가, 하고 자기일 에 만족치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12배나 호흡기질환이 온다고 합니다. 일에 만족치 못하는 사람은 건강을 지킬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정신적으로 허약한 데에 문제가 있고, 그 다음에는 염세적인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염세주의자는 한번 일이 잘못됐을 때, 한번 불운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이것이 앞으로도 자꾸 반복된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계속 불운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낙천주의자는 한번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도 다음 사건은 달리 될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염세주의자는 꼭 '내 운이 다한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나쁜 일만 생길 것이다, 이건 구제불능이다, 이젠 고칠 길이 없다, 나로서는 여기서부터 다시 소생할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정신적으로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육체적 건강인들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지식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느낌은 훨씬 더 절대적이고, 훨씬 더 원초적입니다. 러시아의 철학자 솔프비예프는 느낌이라는 것, 감정이라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수치, 연민, 경건이 그것입니다. 수치는 동물적 본능적 감정이요, 연민은 인격적 감정이며, 경건은 종교적 감정입니다.

이 같은 감정이 실로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감정처리에서 빗나가면 모든 것이 다 빗나갑니다.

그런고로 인간의 내적 건강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육체적으로는 건강치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건강해서 그 불편한 몸으로도 순교할 때까지 건강을 지켜 일할 수 있었으며, 오늘도 본문에서는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건강이란, 세계보건기구의 정의에 따르면 단지 무병이라거나 허약치 아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양호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Health is state of physical well-being'--'well- being'이라고 말합니다. 양호한 상태여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그럴 때에 그것이 건강입니다. 단순히 병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건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영적으로 건강하고야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에 육체도 따라 건강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속사람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이 속사람은 물질로써 건강 할 수가 없어요. 속사람은 사회적인 문제로써 건강케 할 수가 없어요. 속사람의 건강은 오직 경건에 있습니다. 오직 경건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이라고 하는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To be is blessing'--'산다는 것이 축복이다'라고. To live is holy--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산다는 것은 거룩합니다. health(건강)라는 말의 어원이 holy--온전함입니다. holy와 whole이 health로 나타난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 경건함, 그 속에 건강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경건이 없는 건강이라면 몸부림이요 발악입니다. 거룩함 속에 진정한 건강이 깃들어 있고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매일같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떠나서는 건강이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성경말씀은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16절)" -- '성령으로'입니다. 성령이 능력을 공급할 때에 비로소 강건하다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적 건강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약적인 경건이란 성령충만을 의미합니다.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약적인 건강은 오순절적인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3년, 그러나 그는 허약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다 보고 다 공부했습니다마는 그는 빈약했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에 그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 했고,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비겁하고 비열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충만하게 되었을 때에 사람이 달라져 새로운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자신의 과거도 극복합니다. 마침내 깨끗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삼천 명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심리적으로 생각하면 신령한 용기요, 영적 건강입니다. 담대하게 삽니다. 저는 그런 생각도 해보아요. 베드로가 삼천 명 앞에서 설교할 때에 베드로의 마음속에 그 앞에 앉은 사람이 '아, 저 사람, 며칠 전에 예수를 모른다고 도망갔던 사람 아닌가'하고 쳐다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없었을까 하고요. 바울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성령이 능력을 주시기에 그는 건강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삼천 명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본문은 또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절)" -- 그리스도적 신앙, 십자가 중심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가만히 보면 저희 마음대로 노는 것 같아도 그 마음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어요. 장난감하고 같이 놀고 친구들과 놀고 하지만 그래도 여기 가까이 우리 어머니가 있다 하는 것을 의식하고, 그 믿음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멀리 갔다든가 하고 생각하게 되면 그 시간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여 달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다' '거한다'하는 말은 헬라어에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파로이케오'로 이것은 천막을 친다는 뜻이며 임시적으로 나그네가 거한다는 뜻이고, 또하나 '카토이케오'라는 말은 영구거주를 말함입니다. 바울은 오늘 이 후자를 사용합니다. 주께서 우리 마음에 영원히 거주해 계셔야 된다, 그래서 그가 주인이 되시고, 그가 목적이 되시고, 그가 주도하시고 해야 내가 건강하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다스릴 때에 나는 건강할 수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넘치는 사랑, 그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지식에 넘치는 사랑, 분에 넘치는 사랑을 느낄 때에 거기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을 재미있게 정의한 바 있습니다. '내가 사랑 받고 있기에 나도 저를 사랑한다'--이것은 미숙한 사랑입니다.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 그런고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될 때에 이것도 미숙한 사랑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고로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 --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성숙한 사랑은 창조적인 것입니다. 대상이 그 누구냐를 묻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아름답고,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랑입니다. 순간순간 사랑을 확인합니다. 전에는 사랑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사랑이요, 전에는 버려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소중합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거나 길을 다닐 때에 얼마나 위험한 길을 갑니까? 그러나 우리는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가끔 비행기를 타면서 보면 조급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활주로에 내릴 때에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흔히 비행기가 아직 멈추기도 전에 남 먼저 내리겠다고 법석을 떨고 일어서고 합니다. 안내원들이 앉으세요, 앉으세요 하는데도 막무가냅니다. 왜 이렇게들 조급한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국내선을 타보니 활주로에 비행기가 내리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박수를 쳐요. 어떤 사람은 할렐루야 하고 어떤 사람은 조종사보고 고맙다고 인사를 해요. 조종사는 나와서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받아줍니다. 얼마나 보기 좋던지…… 생각하면 비행기가 한번씩 착륙할 때마다 박수칠만하지요. 고마운 일이지요. 이것을 생각 못해요.

자그마한 일이라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 하나하나가 오늘 와서는 이것도 고맙고 저것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 넘치는 사랑을 순간순간 깨닫고, 또 깨닫고, 그럴 때마다 더 건강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경건에 참건강이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 건강이 있습니다. 사랑을 느낄 때에, 사랑을 행할 때에,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이 있을 때에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건강할 때에 많은 사람에게 건강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건강할 때에 많은 사람을 참아줄 수도 있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금년들어 우리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이여!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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