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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의 변명(잠언 6장 6절~11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제가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왕세자비가 될 자부(子婦)를 얻기 위하여 온 나라 곳곳에 방을 붙이고, 귀한 집안의 규수들을 모아서 일일이 심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제 마지막 후보로 열 처녀가 발탁되었습니다. 시아버지가 될 임금님은 이 열 처녀들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쌀을 담은 밥그릇을 제각기 하나씩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열흘 동안 먹고 지내다 오너라"했습니다. 어떤 처녀는 이것을 가지고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또 어떤 처녀는 열 등분으로 나누어서 조금씩, 조금씩 열흘 동안 아껴 먹었습니다. 열흘 후, 처녀들은 다시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 비실비실합니다. 아예 어떤 처녀는 쓰러져서 업혀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유독히 한 처녀는 아주 얼굴이 환하고 예뻐졌을 뿐만 아니라, 떡까지 한 시루이고 궁전에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의아해진 임금님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너는 그 한 그릇의 적은 쌀로 열흘 동안 먹고, 또 떡까지 해 가지고 왔느냐?" 그랬더니 이 처녀는 고합니다. "그 쌀을 그냥 가지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우선 그 쌀로 떡을 만들어 가지고 나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남은 이윤으로 쌀을 사고 또 떡을 만들어 팔고 해서 저도 먹고 집안사람들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임금님도 맛보시라고 이렇게 떡을 새로 빚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처녀가 왕세자비로 간택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많다 적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게으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좀더 생산적인 부지런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좀더 머리를 쓰는, 그런 의미에서 부지런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지런'이라고 하면 그저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으로만 아는데, 사실은 공부하는 것이 부지런한 것입니다.
연구를 하는 것이 부지런한 것입니다.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 부지런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인간으로 삽니다마는 엄격히 철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람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동물적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동물적 시간이라는 것은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또 피곤하니까 쉬는 시간입니다. '부지런'에도 동물적 부지런이 있습니다. 괜히 쏘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 인간적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부하는 시간이요, 사색하는 시간이요,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동물적인 시간이 아닌 인간적 시간이요, 인간적 부지런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 이것은 인간적 부지런에 속하는 것입니다. 한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멍청하게 쏘다니는 것은 제아무리 돌아 다녀봐야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또한 크리스찬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시간이 아니요, 은혜로 주어진 시간이요, 구속받은 시간이요, 은혜 안에 자유 하는 시간이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직행하는 그런 의미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크리스찬의, 그리스도인의 부지런입니다. 다른 시간들과는 차원적으로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요새 '한계에 도전한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 '한계'라는 말에 의미가 있습니다.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한계는 있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뜁니다. 아무리 뛰어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뛸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흔히들 '기록'이라는 말을 합니다마는 그것도 한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선 것은 아닙니다. 그런고로 한계를 넓히려고 한다든가, 넘어서려고 하는 망상, 이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계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어진 한계를 똑바로 알고,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생을 사는 것이 '부지런'입니다.
시간 관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첫째로, 시간 파괴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시간만 파괴하는 게 아니라 남의 시간까지 파괴합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들, 술에 취하는 사람들, 시기, 질투, 증오, 원한…… 이런 것들이 시간을 파괴합니다. 또한 그 파급 결과는 물론 후속결과까지 따르기에 결국은 많은 파괴를 초래합니다.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그 아까운 시간을, 그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남의 시간까지 말입니다.
둘째로, 시간 소비형이 있습니다. 시간을 낭비합니다. 일한답시고 시간표를 만들고, 계획표를 만들고, 소위 마스터플랜(master plan)을 짭니다. 준비하는 게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약속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뭘 한다, 뭘 한다 해놓고는 정작 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저 생각만 하고 말만 하는 것입니다. 굉장한 말을 하고 있지만 실천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용같이 계획하고 뱀꼬리 같이 실천하는 용두사미(龍頭蛇尾)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시간 소비형입니다. 공연히 생각만 어벙벙해가지고 말만 많을 뿐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간 창조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의 뜻을 알고,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여건에 대하여 사명의식을 가지고 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축복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사명적으로 임하는 것이 바로 시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창조 역사에 내가 가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사역에 내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바로 시간 창조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게으른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말로 '아첼'이라고 하는 이 말은 구약성경의 잠언에서만 14번이 나옵니다. 게으른 자--의미가 아주 깊습니다. 우리는 이 말이 일반적인 의미의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게으름도 병입니다. 일단 한번 이 병에 걸려서 치유 받지 못하면 계속적으로 더 게을러지는 것입니다. 잠언 26장 14절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의 말씀이 있습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일어나지 못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9절)"--참 한심합니다. 도대체 잠이 많습니다. 안 그래도 미구에는 푹 잘 텐데 너무 많이 잡니다. 잠을 많이 자는 것, 문제입니다. 병들어서 잠을 많이 자기도 하지만, 잠을 너무 많이 자서 병들기도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게으른 자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부지런해야 됩니다. 실컷 자려면 24시간 다 자도 모자랍니다. 여러분도 알지 않습니까? 너무나 바삐 지내다가 어쩌다 휴가를 맞게 되면 '오늘은 좀 실컷 자야지'하며 낮부터 잡니다. 눈뜨면 또 졸리고, 또 자고…… 24시간 다 자도 모자랍니다. 밤에는 밤대로 낮에는 낮대로, 끝도 없습니다.
여러분, 혹 휴가입니까? 낮에 자지 마세요. 낮에 잤다가는 밤에 못 잡니다. 바이오리듬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밤에는 밤대로 피곤하고, 낮에는 낮대로 피곤하고, 정신이 몽롱해져서 공동묘지로 향하게 됩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쉬는 날에는 절대로 낮잠을 자지 마세요.
그것은 잘못하는 거예요. 생활 리듬은 꼭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이 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 25장 15절을 보세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참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요새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잘사는 모양이라고 보여주는가 본데 그런 것은 좀 안 보여주었으면 좋겠어요. 옛날 왕이나 귀족들이 침상에서 식사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갖다 받쳐놓은 음식을 먹습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 사람은 틀림없이 오래 못살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게으른 자는 그릇에 손을 넣고 음식을 입으로 올리는 것까지도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끝도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르기 시작하면 이것도 병입니다. 병은 점점 깊어지고 깊어져서 이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죽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또한 게으름이라는 것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 게으름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꼭 변명과 핑계가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생깁니다. 나는 안 하면서 남이 안 하는 것을 헐뜯는 것입니다. 나는 안 뛰면서 남이 안 뛰는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나는 게으르면서 남이 부지런한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런 못된 성격이 생깁니다. 대개 보면, 게으른 자는 남을 비난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가 못 따라 가겠으니까, 뒤에 앉아서 비꼬고, 비난 비방하게 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병리적 체질로 화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게으른 것이고 하나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내가 부지런함으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고, 남이 잘사는 것을 빼앗아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소위 '혁명'입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내가 못사는 것은 저 사람 때문이고, 무엇 때문이고…… 책임을 전부 남에게 돌리고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가난이 죄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는 다 용서받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그것 때문에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무서운 철학입니다. 가난하면 의인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적 진리는 그러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가난하다보니 어떻고, 어떻다보니 어떻고…… 게으른 자는 말이 많습니다. 그래, 근심도 번민도 많습니다. 성경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면, 잠언 22장 13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 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사자가 밖에 있다, 그래서 내가 못나간다, 이런다는 것입니다. 안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못나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험 아닌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이 꼭 변명을 합니다. "공부를 왜 안 하느냐?"하고 물어보면 "해봐야 별 볼일 없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까지 되어봤자 보아하니 취직도 못하고 고급 실업자가 되던데, 굳이 할 것이 뭐 있습니까?"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기왕 시작한 공부니까 마저 끝내거라. 공부 다 마친 후에는 지게를 져도 좋으니까 일단 끝내고 보자.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니 안 되느니는 말하지 말아라. 그것은 네 변명이야. 네가 공부를 못하니까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아 아니냐?"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예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꼭 안하면서 못한다고 합니다. 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밖에 나가면 밖에서 할 일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 얘기요, 내일 염려는 내일 일입니다. 오늘은 내가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게으른 자는 기회를 놓칩니다. 잠언 12장 27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은혜의 기회, 축복의 기회를 다 놓쳐버립니다.
토머스 에디슨은 평생 많은 발명을 하여 '발명왕'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또한 2,000여 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에디슨에게 부탁했습니다. "자네가 일평생을 살고 느끼면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되는 것 한 가지를 내 아들에게 이야기해주게. 내 아들은 지금 사회를 향해서 첫 출발을 하려 하네." 그랬더니 에디슨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일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시계를 보지 말게"--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일하는 동안에는 그저 열심히 일을 하고, 시계를 보지 말아라, 또한 보수라든가, 일한 결과라든가, 칭찬이라든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라, 일하는 동안에는 오직 그 일만 열심히 하라, 라고 가르쳐준 것입니다. 또, 팔순이 넘은 그의 생일축하파티에 친구들이 다 모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생활이 어떠한가?" 에디슨은 대답합니다. "나는 매일 다섯 시간 쉬고, 나머지 시간은 연구실에서 일하네. 나는 나의 장례식 3일 전까지 이렇게 일할 걸세." 실제로 에디슨은 그가 미리 얘기한 그대로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자, 에디슨이 팔순이 넘도록 일할 때, 무슨 다른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보수를 생각한 것도 아니고, 칭찬을 생각한 것도 아니고, 성공이나 명예를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한 것 뿐이요, 일을 즐겼을 뿐이요, 일에 도취된 것뿐입니다. 이것이 부지런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세요. 성공한 사람들에 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보통사람에 비해 일찍 일어납니다. 그런데 한 30분 정도 일찍 일어나는 게 아니라, 3시간 정도 일찍 일어납니다. 남보다 3시간 일찍 일어났다, 이것이 그들의 공통점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게으른 자는 일만 만듭니다.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일을 만들어 다닌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한테까지 피해를 끼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게으른 자의 개념은 더 높은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달란트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거기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악하고 게으르다고 하셨습니다. 악하고 게으르다--게으르다는 말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악하다는 말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왜요? 본전은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까? 본전은 잘라먹지 않았습니다.
그냥 본전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왜 악하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게으름의 개념입니다. 게으름은 악함과 동일한 것입니다. 악한 마음에서 게으름이 오는 것입니다. 왜요? 내게 주어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내가 게으른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환경에 돌리고, 세상에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불신앙적입니다. 그런고로 그 사람은 악한 것입니다, 게으름은 악한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바로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기회, 내게 주어진 능력, 내게 주어진 현실 이대로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아직도 내가 밝은 눈으로 책을 읽을 수 있어요, 아직도 내가 멀쩡한 두 발로 걸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귀중합니까? 극단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파사디나에서 피아노 독주회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습니다. 그 때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피아니스트가 왼손 하나만으로 피아노 독주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 피아니스트였는데 전쟁에 나가서 오른손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는 낙심하였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오른쪽 의수로 피아노를 짚고, 왼손으로 독주회를 합니다. 오른손도 아닌 왼손 하나로 한 시간 반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면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내는 그를 보고 저는 '두 손을 다 가진 사람들은 대체 뭘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에 부지런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원성입니다. 이것은 즐기는 것입니다. 감사 감격함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6절)"--개미에게 배우라, 그는 예비하지 않느냐 함입니다. 창조적 신앙 관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더는 아무도 탓하지 마세요. 원망하지도 마세요. 내게 주어진 여건과 시간 안에서 내가 얼마나 충성되었느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 얼마나 질적으로 양적으로 가득한 생을 사느냐--거기에 성공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고, 농부가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내 본분은 오늘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런 생을 살아가세요. 착하고 충성된 자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변명(잠언 6장 6절~11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제가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왕세자비가 될 자부(子婦)를 얻기 위하여 온 나라 곳곳에 방을 붙이고, 귀한 집안의 규수들을 모아서 일일이 심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제 마지막 후보로 열 처녀가 발탁되었습니다. 시아버지가 될 임금님은 이 열 처녀들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쌀을 담은 밥그릇을 제각기 하나씩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열흘 동안 먹고 지내다 오너라"했습니다. 어떤 처녀는 이것을 가지고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또 어떤 처녀는 열 등분으로 나누어서 조금씩, 조금씩 열흘 동안 아껴 먹었습니다. 열흘 후, 처녀들은 다시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 비실비실합니다. 아예 어떤 처녀는 쓰러져서 업혀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유독히 한 처녀는 아주 얼굴이 환하고 예뻐졌을 뿐만 아니라, 떡까지 한 시루이고 궁전에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의아해진 임금님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너는 그 한 그릇의 적은 쌀로 열흘 동안 먹고, 또 떡까지 해 가지고 왔느냐?" 그랬더니 이 처녀는 고합니다. "그 쌀을 그냥 가지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우선 그 쌀로 떡을 만들어 가지고 나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남은 이윤으로 쌀을 사고 또 떡을 만들어 팔고 해서 저도 먹고 집안사람들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임금님도 맛보시라고 이렇게 떡을 새로 빚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처녀가 왕세자비로 간택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많다 적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게으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좀더 생산적인 부지런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좀더 머리를 쓰는, 그런 의미에서 부지런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지런'이라고 하면 그저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으로만 아는데, 사실은 공부하는 것이 부지런한 것입니다.
연구를 하는 것이 부지런한 것입니다.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 부지런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인간으로 삽니다마는 엄격히 철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람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동물적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동물적 시간이라는 것은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또 피곤하니까 쉬는 시간입니다. '부지런'에도 동물적 부지런이 있습니다. 괜히 쏘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 인간적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부하는 시간이요, 사색하는 시간이요,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동물적인 시간이 아닌 인간적 시간이요, 인간적 부지런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 이것은 인간적 부지런에 속하는 것입니다. 한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멍청하게 쏘다니는 것은 제아무리 돌아 다녀봐야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또한 크리스찬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시간이 아니요, 은혜로 주어진 시간이요, 구속받은 시간이요, 은혜 안에 자유 하는 시간이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직행하는 그런 의미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크리스찬의, 그리스도인의 부지런입니다. 다른 시간들과는 차원적으로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요새 '한계에 도전한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 '한계'라는 말에 의미가 있습니다.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한계는 있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뜁니다. 아무리 뛰어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뛸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흔히들 '기록'이라는 말을 합니다마는 그것도 한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선 것은 아닙니다. 그런고로 한계를 넓히려고 한다든가, 넘어서려고 하는 망상, 이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계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어진 한계를 똑바로 알고,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생을 사는 것이 '부지런'입니다.
시간 관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첫째로, 시간 파괴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시간만 파괴하는 게 아니라 남의 시간까지 파괴합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들, 술에 취하는 사람들, 시기, 질투, 증오, 원한…… 이런 것들이 시간을 파괴합니다. 또한 그 파급 결과는 물론 후속결과까지 따르기에 결국은 많은 파괴를 초래합니다.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그 아까운 시간을, 그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남의 시간까지 말입니다.
둘째로, 시간 소비형이 있습니다. 시간을 낭비합니다. 일한답시고 시간표를 만들고, 계획표를 만들고, 소위 마스터플랜(master plan)을 짭니다. 준비하는 게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약속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뭘 한다, 뭘 한다 해놓고는 정작 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저 생각만 하고 말만 하는 것입니다. 굉장한 말을 하고 있지만 실천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용같이 계획하고 뱀꼬리 같이 실천하는 용두사미(龍頭蛇尾)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시간 소비형입니다. 공연히 생각만 어벙벙해가지고 말만 많을 뿐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간 창조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의 뜻을 알고,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여건에 대하여 사명의식을 가지고 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축복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사명적으로 임하는 것이 바로 시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창조 역사에 내가 가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사역에 내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바로 시간 창조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게으른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말로 '아첼'이라고 하는 이 말은 구약성경의 잠언에서만 14번이 나옵니다. 게으른 자--의미가 아주 깊습니다. 우리는 이 말이 일반적인 의미의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게으름도 병입니다. 일단 한번 이 병에 걸려서 치유 받지 못하면 계속적으로 더 게을러지는 것입니다. 잠언 26장 14절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의 말씀이 있습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일어나지 못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9절)"--참 한심합니다. 도대체 잠이 많습니다. 안 그래도 미구에는 푹 잘 텐데 너무 많이 잡니다. 잠을 많이 자는 것, 문제입니다. 병들어서 잠을 많이 자기도 하지만, 잠을 너무 많이 자서 병들기도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게으른 자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부지런해야 됩니다. 실컷 자려면 24시간 다 자도 모자랍니다. 여러분도 알지 않습니까? 너무나 바삐 지내다가 어쩌다 휴가를 맞게 되면 '오늘은 좀 실컷 자야지'하며 낮부터 잡니다. 눈뜨면 또 졸리고, 또 자고…… 24시간 다 자도 모자랍니다. 밤에는 밤대로 낮에는 낮대로, 끝도 없습니다.
여러분, 혹 휴가입니까? 낮에 자지 마세요. 낮에 잤다가는 밤에 못 잡니다. 바이오리듬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밤에는 밤대로 피곤하고, 낮에는 낮대로 피곤하고, 정신이 몽롱해져서 공동묘지로 향하게 됩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쉬는 날에는 절대로 낮잠을 자지 마세요.
그것은 잘못하는 거예요. 생활 리듬은 꼭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이 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 25장 15절을 보세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참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요새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잘사는 모양이라고 보여주는가 본데 그런 것은 좀 안 보여주었으면 좋겠어요. 옛날 왕이나 귀족들이 침상에서 식사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갖다 받쳐놓은 음식을 먹습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 사람은 틀림없이 오래 못살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게으른 자는 그릇에 손을 넣고 음식을 입으로 올리는 것까지도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끝도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르기 시작하면 이것도 병입니다. 병은 점점 깊어지고 깊어져서 이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죽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또한 게으름이라는 것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 게으름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꼭 변명과 핑계가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생깁니다. 나는 안 하면서 남이 안 하는 것을 헐뜯는 것입니다. 나는 안 뛰면서 남이 안 뛰는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나는 게으르면서 남이 부지런한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런 못된 성격이 생깁니다. 대개 보면, 게으른 자는 남을 비난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가 못 따라 가겠으니까, 뒤에 앉아서 비꼬고, 비난 비방하게 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병리적 체질로 화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게으른 것이고 하나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내가 부지런함으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고, 남이 잘사는 것을 빼앗아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소위 '혁명'입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내가 못사는 것은 저 사람 때문이고, 무엇 때문이고…… 책임을 전부 남에게 돌리고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가난이 죄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는 다 용서받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그것 때문에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무서운 철학입니다. 가난하면 의인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적 진리는 그러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가난하다보니 어떻고, 어떻다보니 어떻고…… 게으른 자는 말이 많습니다. 그래, 근심도 번민도 많습니다. 성경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면, 잠언 22장 13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 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사자가 밖에 있다, 그래서 내가 못나간다, 이런다는 것입니다. 안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못나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험 아닌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이 꼭 변명을 합니다. "공부를 왜 안 하느냐?"하고 물어보면 "해봐야 별 볼일 없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까지 되어봤자 보아하니 취직도 못하고 고급 실업자가 되던데, 굳이 할 것이 뭐 있습니까?"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기왕 시작한 공부니까 마저 끝내거라. 공부 다 마친 후에는 지게를 져도 좋으니까 일단 끝내고 보자.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니 안 되느니는 말하지 말아라. 그것은 네 변명이야. 네가 공부를 못하니까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아 아니냐?"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예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꼭 안하면서 못한다고 합니다. 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밖에 나가면 밖에서 할 일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 얘기요, 내일 염려는 내일 일입니다. 오늘은 내가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게으른 자는 기회를 놓칩니다. 잠언 12장 27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은혜의 기회, 축복의 기회를 다 놓쳐버립니다.
토머스 에디슨은 평생 많은 발명을 하여 '발명왕'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또한 2,000여 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에디슨에게 부탁했습니다. "자네가 일평생을 살고 느끼면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되는 것 한 가지를 내 아들에게 이야기해주게. 내 아들은 지금 사회를 향해서 첫 출발을 하려 하네." 그랬더니 에디슨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일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시계를 보지 말게"--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일하는 동안에는 그저 열심히 일을 하고, 시계를 보지 말아라, 또한 보수라든가, 일한 결과라든가, 칭찬이라든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라, 일하는 동안에는 오직 그 일만 열심히 하라, 라고 가르쳐준 것입니다. 또, 팔순이 넘은 그의 생일축하파티에 친구들이 다 모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생활이 어떠한가?" 에디슨은 대답합니다. "나는 매일 다섯 시간 쉬고, 나머지 시간은 연구실에서 일하네. 나는 나의 장례식 3일 전까지 이렇게 일할 걸세." 실제로 에디슨은 그가 미리 얘기한 그대로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자, 에디슨이 팔순이 넘도록 일할 때, 무슨 다른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보수를 생각한 것도 아니고, 칭찬을 생각한 것도 아니고, 성공이나 명예를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한 것 뿐이요, 일을 즐겼을 뿐이요, 일에 도취된 것뿐입니다. 이것이 부지런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세요. 성공한 사람들에 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보통사람에 비해 일찍 일어납니다. 그런데 한 30분 정도 일찍 일어나는 게 아니라, 3시간 정도 일찍 일어납니다. 남보다 3시간 일찍 일어났다, 이것이 그들의 공통점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게으른 자는 일만 만듭니다.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일을 만들어 다닌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한테까지 피해를 끼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게으른 자의 개념은 더 높은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달란트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거기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악하고 게으르다고 하셨습니다. 악하고 게으르다--게으르다는 말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악하다는 말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왜요? 본전은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까? 본전은 잘라먹지 않았습니다.
그냥 본전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왜 악하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게으름의 개념입니다. 게으름은 악함과 동일한 것입니다. 악한 마음에서 게으름이 오는 것입니다. 왜요? 내게 주어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내가 게으른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환경에 돌리고, 세상에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불신앙적입니다. 그런고로 그 사람은 악한 것입니다, 게으름은 악한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바로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기회, 내게 주어진 능력, 내게 주어진 현실 이대로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아직도 내가 밝은 눈으로 책을 읽을 수 있어요, 아직도 내가 멀쩡한 두 발로 걸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귀중합니까? 극단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파사디나에서 피아노 독주회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습니다. 그 때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피아니스트가 왼손 하나만으로 피아노 독주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 피아니스트였는데 전쟁에 나가서 오른손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는 낙심하였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오른쪽 의수로 피아노를 짚고, 왼손으로 독주회를 합니다. 오른손도 아닌 왼손 하나로 한 시간 반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면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내는 그를 보고 저는 '두 손을 다 가진 사람들은 대체 뭘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에 부지런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원성입니다. 이것은 즐기는 것입니다. 감사 감격함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6절)"--개미에게 배우라, 그는 예비하지 않느냐 함입니다. 창조적 신앙 관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더는 아무도 탓하지 마세요. 원망하지도 마세요. 내게 주어진 여건과 시간 안에서 내가 얼마나 충성되었느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 얼마나 질적으로 양적으로 가득한 생을 사느냐--거기에 성공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고, 농부가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내 본분은 오늘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런 생을 살아가세요. 착하고 충성된 자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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