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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이기는 비결(로마서 12장 14절~21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토리라고 하는 네 살 된 예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또 모두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오빠에게 조그마한 새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오빠는 자전거 뒤에 토리를 태워주었습니다. 토리는 자전거 타는 것이 재미있었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뒤뜰에 놓아둔 자전거를 그만 도둑맞았습니다. 식구들이 이 일로 인해서 다 기분이 안좋았습니다마는 특별히 토리가 제일 마음이 상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토리는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아버지, 어머니, 오빠 주신 것을 감사하구요, 모든 것을 다 감사드려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주세요." 그리고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전거 도둑은 빼놓고요."이 세상에는 악이 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의 종교철학 교수 리차드 스윙버는 악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첫 번째로 물리적인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체로 느끼는 것입니다. 배고프고, 아프고, 쑤시고…… 두 번째로 정신적인 악이 있다고 합니다.
실의(失意)와 상심(傷心), 실패와 좌절로 인한 아픔 같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아픔입니다. 또하나, 상태의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심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야 될 이유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줄도 알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잘못된 것인 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고통을 느낍니다. 증오와 질투와 시기…… 이런 것들입니다. 네 번째로 도덕적 악이 있다고 합니다. 도덕적 규범에서 실패한 것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짓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보통 인간들의 처사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행동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우리는 어떤 수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 그러면 지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또 이긴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지지 않고 이긴다는 말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소극적이지만 악에게 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악마의 역사가 있습니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시험하고, 괴롭히고, 고통을 주어서 이제 여러 모로 자기 제자로 삼고,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고, 지옥으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이 악마의 작전계획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이 무엇이냐, 그 최상의 성공 전략이 무엇이냐 -- 그것은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악마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게 하는 것이요, 죄를 지었는데도 죄가 아니라고 변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에서 이것은 죄가 아니다, 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 악마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성공이요 성공작품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가만히 보세요. 분명히 잘못된 악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사회에 떠넘기면서 내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혹은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변명합니다. 그 순간에 악마는 축배를 들것입니다. 악이 성공한 것이니까요.
또 악한 사건이나 악한 사람 때문에 내가 악해져서는 안됩니다.
악마의 작전은 인간에게 악한 것을 보여주고 악을 체험하게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악에 빠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화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두워지고, 믿음이 흔들리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악마는 이런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이 악한 세상에서 살아도 우리는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미움을 당하고 살아도 내 마음도 함께 미워하는 마음이 되어도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두워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캄캄한 세상에 살아도 나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두운 세상에 살아도, 아무리 악한 세상에 살아도 내 마음은 항상 평안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다짐이 흔들릴 때에 흔히들 말세라고 말합니다. 소망이 없는 것은 벌써 악에게 넘어간 증좌입니다. 악에게 진 것입니다. 악마는 모든 악한 분위기를 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악해지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환경이야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선과 의와 빛을 간직해나가면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악마는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흔들리게 만듭니다. 본래 가졌던 귀한 마음이 그만 사라지게끔 만듭니다. 이럴 때에 또 악마가 이기는 것입니다. 나는 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실망은 금물입니다. 신앙적 세계관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평생 내가 고통을 느끼고 살아도 나는 내 할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처우를 받아도 내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내가 지녀야 할 사랑, 내가 가져야 할 믿음, 내가 가져야 할 소망은 그대로 지켜 가는 것입니다. 끄떡없이 지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 날 따라 갑자기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신혼여행길에 온통 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신부는 짜증을 냈습니다. "하필이면 결혼식 하는 날에 재수 없이 비가 온담." 신랑이 신부를 달랩니다. "무슨 소리요? 우리가 이런 날로 정한 게 잘못이지. 또 비가 온다고 해서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려서야 되겠소?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그러면 됐지 이까짓 비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손해를 봐서야 되겠소?" 아무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목적지에 도착한 후, 방안에 들어와서 불을 켜놓고 보니 그것 참 분위기 있더랍니다. 비가 오니 밖에도 나갈 수 없고 둘만이 방안에 있으니 절로 무드가 생깁니다. 신랑이 말합니다. "보시오. 행복하지 않소?" 여러분, 날씨 탓할 것 없고, 세상이 어떻고라고 말할 것 없습니다. 어떤 경우를 만나도 우리의 마음은 항상 고요해야 합니다. home, sweet home-우리의 가정, 우리의 마음은 항상 평온을 지켜가고, 내가 맡은 본분은 끝까지 다하고, 내가 지닐 사랑의 분량은 전적으로 다 쏟는 것,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노아 홍수 때의 일입니다. 너무도 많은 비 때문에 모든 것이 물에 잠기게 될 때, 노아는 모든 짐승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선(善)이 혼자서 덜렁덜렁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전부 한 쌍씩 들어오라고 했는데 너는 왜 혼자 들어오는 것이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할수없이 선은 자기와 짝이 될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제야 노아는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사람들이 '세상에 왜 악이 있을까? 왜 선과 악이 함께 있을까?'를 머리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이런 이야기까지 지어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유는 묻지 마십시다. 분명한 것은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에 대하여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것을 다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간단하게 몇 가지 특징만을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악을 '결핍으로서의 악'으로 보았습니다. 'evil as privation.' 악이라는 것은 선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어두움이라는 것은 빛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죄라는 것은 의가 모자라서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선이 없는 상태, 의가 부족한 상태가 악인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에 여기에는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둘째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높은 신앙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것은 심미적 개념으로서의 악입니다. 'esthetic concept of evil'--유명한 신학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궁극적인 하나님의 높은 관점에서 역사 전체를 한눈에 보는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완전한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보면 다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이란 왜 존재하느냐, 전체적인 아름다움에 기여하고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검은 반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더 빛나게 하는 것이요, 어디엔가 악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선으로 더 높은 선에 이르게 하기 위한 심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소화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천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악마는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의 능력과 놀라운 지혜, 그 초월적 역사 안에서 볼 때에 악은 선으로 더욱 높은 선을, 의로 더욱 의로운 의를, 더 큰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서 있다고 신앙 안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악은 선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적인 면에서 보지 말고, 신앙 안에서, 높은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받는 그런 기본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악과 악한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사랑해야 하고,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보면서 마침내 죄인까지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구별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세상 모든 악한 자의 대표격인 가룟 유다를 앞에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차라리 나지 않았음이 좋을 뻔했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를 보시면서, 악마에 붙들려 있는 그를 여전히 불쌍히 여기시고 계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악한 사람을 보더라도, 악과 죄는 미워해야겠지만 죄인에 대한 긍휼과 자비는 여전해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마세요. 사람을 정죄하지 마세요. 다만 악을 미워하는 확실한 구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자, 우리가 어떤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게 될 때에 내 원수가 생기는데,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19절)" -- 너는 손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섭리와 초월적 지혜에 의존하고, 온전히 그의 인도하심에 맡겨버립시다. 그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이 어느 날 많은 군중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어떤 짓궂은 청년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하나 물어봅시다. 스데반이 순교 당한 이야기를 아시지요? 그가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고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스데반을 치려던 돌을 다 치워놓으시든지, 아니면 스데반을 어디로 피신시켜놓으시든지 할 것이지 그래, 그 돌에 곱다시 맞아 죽게 만드신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이상한 질문이지만 실제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스펄젼 목사님은 이윽고 아주 확실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으로 하여금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지 않도록 피신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오히려 천사와 같은 얼굴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 힘과, 그 용기와 그 사랑, 그 승리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이것이 주님께서 만드신 작품입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디에 승리가 있고 어디에 패배가 있는 것입니까?
한 젊은 농부가 어떤 농부와 나란히 이웃하여 오랫동안 살았는데, 어느 날 이웃 농부로부터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했습니다. 아주 분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화가 난 농부는 복수할 양으로 존슨초라고 하는 잡초씨를 이웃 농부의 밭에 확 뿌렸습니다. 당연히 그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얼마 후에 그 농부의 딸과 이 젊은 농부가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장인이 된 이웃 농부가 그 밭을 이 사람에게 결혼선물로 주었습니다. 농부는 그 밭의 잡초를 없애느라고 무려 30년 동안을 고생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원수 갚는다고 덫을 놓고 원수 갚느라고 갖은 방법을 다 써봅니다. 그러나 해보세요.
마지막에 보면 그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결국은 내가 당하고 맙니다. 가만히 보니까 못된 사람 버릇 고친다고 하다가 자기가 더 나빠집니다. 무엇을 바로잡는다, 정의를 위한다고 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더 극단의 악에 빠지고 맙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갚으리라, 내게 맡기라, 너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네가 할 일만 다하라, 하십니다. 어떤 부인은 일생을 두고 자기 남편을 '원수'라고 부르고 있습디다. 원수도 좋고 악마도 좋아요. 그러나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내 마음에 그런 생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할 본분을 내가 다해야지요. 내가 할 사랑을 내가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악이 없어야 한다고 몸부림치지 마세요. 어째서 이런 일이 있느냐고 불평하지도 마세요. 그것 자체가 벌써 악에게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 이 사건 속에 엄연한 하나님의 교훈이 있고, 경고가 있고, 인도하심이 있고, 살아 계신 말씀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고요히 듣고, 나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찾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은 다시 말씀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랑으로 증오를 이기라, 어두운 데서 원수와 피나는 싸움을 벌이지 말고 빛을 밝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선으로 악을 이기라--선으로 이겨야 하고, 선을 생각해야 하고, 선을 극대화해야 하고, 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악을 보면서 선을 챙길 줄 알아야 합니다.
페르시아의 왕이 어느 날 세계적인 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인류에게 있는 가장 무서운 죄악이 무엇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이스의 현자는 대답했습니다. "늙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악입니다."
인도의 현자는 "사람이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암흑의 세상에 광명을 줄만한 선을 한 가지도 행치 못한 채 임종을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세상이 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조그마한 빛이라도 비추고, 조금이라도 선을 이루고, 이 세상을 밝힐만한 한 가지 선이라도 행하고 죽어야지요. 마찬가지로 악에 악을 더하고, 악을 개탄하고, 악에서 악화되고, 한 가지 빛도, 한 가지 선도 이루지 못하고 임종을 맞는다면 이보다 어려운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이보다 결정적 실패는 없는 것입니다. 악을 보면서 선을 생각하고, 다시금 우리가 선을 깊이 생각하면서 믿음과, 사랑과, 온유와, 겸손에서 새로운 의미의 자아의식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면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과 악인을 구별하셨습니다. 조금도 낙심하지 않으셨고, 조금도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셨고, 조금도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시며, 하나님께 위탁하시며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과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승리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승리는 약속된 것입니다. 최종 승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참된 승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은 말씀합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를 한번 비교해보십시다. 패자는 넘어졌다가 일어날 때에 뒤를 봅니다, 승자는 앞을 봅니다. 패자는 자기만 생각합니다, 승자는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패자는 원수와 악을 생각합니다, 승자는 선을 생각합니다. 패자는 손실만을 생각합니다, 승자는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득을 생각합니다. 패자는 끝내 원망으로 끝냅니다, 승자는 온유 겸손히 회개합니다. 패자는 절망합니다, 승자는 언제나 은혜와 사랑을 다시 확인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을 이기는 비결(로마서 12장 14절~21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토리라고 하는 네 살 된 예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또 모두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오빠에게 조그마한 새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오빠는 자전거 뒤에 토리를 태워주었습니다. 토리는 자전거 타는 것이 재미있었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뒤뜰에 놓아둔 자전거를 그만 도둑맞았습니다. 식구들이 이 일로 인해서 다 기분이 안좋았습니다마는 특별히 토리가 제일 마음이 상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토리는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아버지, 어머니, 오빠 주신 것을 감사하구요, 모든 것을 다 감사드려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주세요." 그리고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전거 도둑은 빼놓고요."이 세상에는 악이 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의 종교철학 교수 리차드 스윙버는 악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첫 번째로 물리적인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체로 느끼는 것입니다. 배고프고, 아프고, 쑤시고…… 두 번째로 정신적인 악이 있다고 합니다.
실의(失意)와 상심(傷心), 실패와 좌절로 인한 아픔 같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아픔입니다. 또하나, 상태의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심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야 될 이유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줄도 알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잘못된 것인 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고통을 느낍니다. 증오와 질투와 시기…… 이런 것들입니다. 네 번째로 도덕적 악이 있다고 합니다. 도덕적 규범에서 실패한 것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짓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보통 인간들의 처사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행동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우리는 어떤 수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 그러면 지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또 이긴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지지 않고 이긴다는 말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소극적이지만 악에게 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악마의 역사가 있습니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시험하고, 괴롭히고, 고통을 주어서 이제 여러 모로 자기 제자로 삼고,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고, 지옥으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이 악마의 작전계획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이 무엇이냐, 그 최상의 성공 전략이 무엇이냐 -- 그것은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악마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게 하는 것이요, 죄를 지었는데도 죄가 아니라고 변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에서 이것은 죄가 아니다, 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 악마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성공이요 성공작품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가만히 보세요. 분명히 잘못된 악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사회에 떠넘기면서 내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혹은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변명합니다. 그 순간에 악마는 축배를 들것입니다. 악이 성공한 것이니까요.
또 악한 사건이나 악한 사람 때문에 내가 악해져서는 안됩니다.
악마의 작전은 인간에게 악한 것을 보여주고 악을 체험하게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악에 빠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화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두워지고, 믿음이 흔들리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악마는 이런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이 악한 세상에서 살아도 우리는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미움을 당하고 살아도 내 마음도 함께 미워하는 마음이 되어도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두워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캄캄한 세상에 살아도 나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두운 세상에 살아도, 아무리 악한 세상에 살아도 내 마음은 항상 평안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다짐이 흔들릴 때에 흔히들 말세라고 말합니다. 소망이 없는 것은 벌써 악에게 넘어간 증좌입니다. 악에게 진 것입니다. 악마는 모든 악한 분위기를 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악해지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환경이야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선과 의와 빛을 간직해나가면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악마는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흔들리게 만듭니다. 본래 가졌던 귀한 마음이 그만 사라지게끔 만듭니다. 이럴 때에 또 악마가 이기는 것입니다. 나는 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실망은 금물입니다. 신앙적 세계관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평생 내가 고통을 느끼고 살아도 나는 내 할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처우를 받아도 내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내가 지녀야 할 사랑, 내가 가져야 할 믿음, 내가 가져야 할 소망은 그대로 지켜 가는 것입니다. 끄떡없이 지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 날 따라 갑자기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신혼여행길에 온통 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신부는 짜증을 냈습니다. "하필이면 결혼식 하는 날에 재수 없이 비가 온담." 신랑이 신부를 달랩니다. "무슨 소리요? 우리가 이런 날로 정한 게 잘못이지. 또 비가 온다고 해서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려서야 되겠소?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그러면 됐지 이까짓 비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손해를 봐서야 되겠소?" 아무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목적지에 도착한 후, 방안에 들어와서 불을 켜놓고 보니 그것 참 분위기 있더랍니다. 비가 오니 밖에도 나갈 수 없고 둘만이 방안에 있으니 절로 무드가 생깁니다. 신랑이 말합니다. "보시오. 행복하지 않소?" 여러분, 날씨 탓할 것 없고, 세상이 어떻고라고 말할 것 없습니다. 어떤 경우를 만나도 우리의 마음은 항상 고요해야 합니다. home, sweet home-우리의 가정, 우리의 마음은 항상 평온을 지켜가고, 내가 맡은 본분은 끝까지 다하고, 내가 지닐 사랑의 분량은 전적으로 다 쏟는 것,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노아 홍수 때의 일입니다. 너무도 많은 비 때문에 모든 것이 물에 잠기게 될 때, 노아는 모든 짐승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선(善)이 혼자서 덜렁덜렁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전부 한 쌍씩 들어오라고 했는데 너는 왜 혼자 들어오는 것이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할수없이 선은 자기와 짝이 될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제야 노아는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사람들이 '세상에 왜 악이 있을까? 왜 선과 악이 함께 있을까?'를 머리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이런 이야기까지 지어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유는 묻지 마십시다. 분명한 것은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에 대하여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것을 다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간단하게 몇 가지 특징만을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악을 '결핍으로서의 악'으로 보았습니다. 'evil as privation.' 악이라는 것은 선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어두움이라는 것은 빛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죄라는 것은 의가 모자라서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선이 없는 상태, 의가 부족한 상태가 악인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에 여기에는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둘째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높은 신앙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것은 심미적 개념으로서의 악입니다. 'esthetic concept of evil'--유명한 신학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궁극적인 하나님의 높은 관점에서 역사 전체를 한눈에 보는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완전한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보면 다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이란 왜 존재하느냐, 전체적인 아름다움에 기여하고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검은 반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더 빛나게 하는 것이요, 어디엔가 악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선으로 더 높은 선에 이르게 하기 위한 심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소화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천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악마는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의 능력과 놀라운 지혜, 그 초월적 역사 안에서 볼 때에 악은 선으로 더욱 높은 선을, 의로 더욱 의로운 의를, 더 큰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서 있다고 신앙 안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악은 선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적인 면에서 보지 말고, 신앙 안에서, 높은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받는 그런 기본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악과 악한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사랑해야 하고,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보면서 마침내 죄인까지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구별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세상 모든 악한 자의 대표격인 가룟 유다를 앞에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차라리 나지 않았음이 좋을 뻔했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를 보시면서, 악마에 붙들려 있는 그를 여전히 불쌍히 여기시고 계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악한 사람을 보더라도, 악과 죄는 미워해야겠지만 죄인에 대한 긍휼과 자비는 여전해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마세요. 사람을 정죄하지 마세요. 다만 악을 미워하는 확실한 구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자, 우리가 어떤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게 될 때에 내 원수가 생기는데,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19절)" -- 너는 손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섭리와 초월적 지혜에 의존하고, 온전히 그의 인도하심에 맡겨버립시다. 그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이 어느 날 많은 군중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어떤 짓궂은 청년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하나 물어봅시다. 스데반이 순교 당한 이야기를 아시지요? 그가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고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스데반을 치려던 돌을 다 치워놓으시든지, 아니면 스데반을 어디로 피신시켜놓으시든지 할 것이지 그래, 그 돌에 곱다시 맞아 죽게 만드신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이상한 질문이지만 실제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스펄젼 목사님은 이윽고 아주 확실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으로 하여금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지 않도록 피신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오히려 천사와 같은 얼굴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 힘과, 그 용기와 그 사랑, 그 승리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이것이 주님께서 만드신 작품입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디에 승리가 있고 어디에 패배가 있는 것입니까?
한 젊은 농부가 어떤 농부와 나란히 이웃하여 오랫동안 살았는데, 어느 날 이웃 농부로부터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했습니다. 아주 분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화가 난 농부는 복수할 양으로 존슨초라고 하는 잡초씨를 이웃 농부의 밭에 확 뿌렸습니다. 당연히 그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얼마 후에 그 농부의 딸과 이 젊은 농부가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장인이 된 이웃 농부가 그 밭을 이 사람에게 결혼선물로 주었습니다. 농부는 그 밭의 잡초를 없애느라고 무려 30년 동안을 고생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원수 갚는다고 덫을 놓고 원수 갚느라고 갖은 방법을 다 써봅니다. 그러나 해보세요.
마지막에 보면 그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결국은 내가 당하고 맙니다. 가만히 보니까 못된 사람 버릇 고친다고 하다가 자기가 더 나빠집니다. 무엇을 바로잡는다, 정의를 위한다고 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더 극단의 악에 빠지고 맙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갚으리라, 내게 맡기라, 너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네가 할 일만 다하라, 하십니다. 어떤 부인은 일생을 두고 자기 남편을 '원수'라고 부르고 있습디다. 원수도 좋고 악마도 좋아요. 그러나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내 마음에 그런 생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할 본분을 내가 다해야지요. 내가 할 사랑을 내가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악이 없어야 한다고 몸부림치지 마세요. 어째서 이런 일이 있느냐고 불평하지도 마세요. 그것 자체가 벌써 악에게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 이 사건 속에 엄연한 하나님의 교훈이 있고, 경고가 있고, 인도하심이 있고, 살아 계신 말씀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고요히 듣고, 나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찾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은 다시 말씀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랑으로 증오를 이기라, 어두운 데서 원수와 피나는 싸움을 벌이지 말고 빛을 밝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선으로 악을 이기라--선으로 이겨야 하고, 선을 생각해야 하고, 선을 극대화해야 하고, 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악을 보면서 선을 챙길 줄 알아야 합니다.
페르시아의 왕이 어느 날 세계적인 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인류에게 있는 가장 무서운 죄악이 무엇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이스의 현자는 대답했습니다. "늙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악입니다."
인도의 현자는 "사람이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암흑의 세상에 광명을 줄만한 선을 한 가지도 행치 못한 채 임종을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세상이 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조그마한 빛이라도 비추고, 조금이라도 선을 이루고, 이 세상을 밝힐만한 한 가지 선이라도 행하고 죽어야지요. 마찬가지로 악에 악을 더하고, 악을 개탄하고, 악에서 악화되고, 한 가지 빛도, 한 가지 선도 이루지 못하고 임종을 맞는다면 이보다 어려운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이보다 결정적 실패는 없는 것입니다. 악을 보면서 선을 생각하고, 다시금 우리가 선을 깊이 생각하면서 믿음과, 사랑과, 온유와, 겸손에서 새로운 의미의 자아의식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면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과 악인을 구별하셨습니다. 조금도 낙심하지 않으셨고, 조금도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셨고, 조금도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시며, 하나님께 위탁하시며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과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승리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승리는 약속된 것입니다. 최종 승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참된 승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은 말씀합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를 한번 비교해보십시다. 패자는 넘어졌다가 일어날 때에 뒤를 봅니다, 승자는 앞을 봅니다. 패자는 자기만 생각합니다, 승자는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패자는 원수와 악을 생각합니다, 승자는 선을 생각합니다. 패자는 손실만을 생각합니다, 승자는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득을 생각합니다. 패자는 끝내 원망으로 끝냅니다, 승자는 온유 겸손히 회개합니다. 패자는 절망합니다, 승자는 언제나 은혜와 사랑을 다시 확인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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