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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삼의 아들(마태복음 21장 23~32절)

by 【고동엽】 202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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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삼의 아들(마태복음 21장 23~32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언젠가 한국 목사님들과 미국에서 온 목사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세미나를 가진 일이 있었습니다. 언어의 소통이 잘 안 되어서 통역을 세웠었습니다. 어느 미국 목사님의 질문에 대하여 한국 목사님이 대답하시는 말이 "글쎄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통역하시는 분이 이말을 영어로 옮기기가 어려워서 당황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물론 영어에도 이와 비슷한 "more or less" 같은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사실상 "글쎄요" 같은 그러한 묘한 말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됩니다. "글쎄요", "글쎄올시다" 이 말은 "Yes"도 "No"도 아닌 말이며 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고 승락도 부정도 아닌 참으로 애매한 말입니다. 거짓 같은 사실, 사실 같은 거짓이 있게 되는 참으로 애매하며 모호한 세상입니다.

세상은 묘하게 변하여 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처녀 총각이 분명하였는데 요사이는 이것이 또한 애매하여졌습니다. 처녀라 하면 긴 머리를 땋고 댕기를 드린 모습으로 구별되었고 결혼을 하면 머리는 올려야 하고 쪽을 지어 틀어 올려 확실한 표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처녀인지, 시집간 색시인지, 아이가 있는 애어머니인지가 전혀 알 수 없는 형편이요, 또한 총각도 긴 머리를 하고 다니다가 장가를 들면 상투를 틀어서 어른 된 표가 분명하였는데 이편 역시 애매하여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자에는 남녀의 구별도 모호합니다. 긴 머리의 남자, 짧은 머리의 여자, 뒤로 보아서는 구별할 길이 없고 여자들이 바지를 입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청바지까지 입고 나서니 이제는 의상으로서나 모양을 가지고는 구별하기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남자들이 치마를 언제부터 입느냐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문화 생활이란 곧 여름은 겨울같이 살며 겨울은 여름같이 살자는 것이라고 말한 분이 있는데 이 또한 일리가 있는 말같이 들려집니다. 역시 모호합니다. 이 모호성이 현대 문화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문 성경에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주는 좋은 표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두 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큰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선뜻 대답하기를 "네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며 둘째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하였더니 "싫습니다, 안가겠습니다" 하고 거절하더니 뒤에 뉘우치고 포도원의 일터로 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두 아들 중에서 누가 효자냐 할 때 물론 둘째 아들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상고해 보면 그렇게 쉽게 말하기 힘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어느 아들이 효자인지 어느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였는지 간단하게 말하기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쉽게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두 아들은 현대인의 인간상을 설명해주는 전형적인 모습과 특징을 가졌다고 봅니다.

맏형의 모습부터 생각하여 보십시다. 그는 한마디로 전형적인 "Yes man"입니다. 어떤 말에든지 대답은 우선 "yes" 입니다. 항상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 마음속의 진실한 긍정이 있던 없던 가겠다는 결심이 있던 없던 간에 우선 "네"라고 대답부터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자유당 시절에 "지당장관"이란 말이 유행어로 나돈 때가 있었습니다. 각하의 말씀에 무조건 "지당한 말씀입니다"라고 아첨하는 지조 없는 장관들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이 또한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상사의 말에 면전에서 "아니오"하는 것이 바른 처세이겠습니까? 우선 "네"라고 대답하고 나서 정히 안될 것이면 다음날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습니다."라고 진언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 아닐까요. 일언지하에 생각해 볼 시간도 가지지 아니하고 딱 잘라서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만 볼 수는 없으며 우선 아버지 앞에서 "예"라고 함으로서 당장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잘 처세한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국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시켜놓고 기다리는 손님들이 기다림에 지쳐서 재촉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청년들은 능란하게 대답합니다.

"예! 다 되었습니다. 곧 가져갑니다." 그리고 나서 30분이 지나기도 합니다. 실은 재촉한다고 해서 음식이 더 빨리 될 수도 없는 것이며 더 빨리 배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미 급한 손님에게 구구한 설명은 필요 없고 열 번이라도 "예! 곧 가져갑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잘못된 처세만은 아니며 불 신실하다고 나무랄 일도 아니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듯이 아무 실천도 없이 "예예"라고 대답만 하는 처세에 능한 인간상이 있습니다. 자기 진실이 먼저가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이 먼저 문제가 되는 인간, 참이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상대방이 나보고 무엇이라고 하며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데 신경을 더 쓰는 그러한 인간상 말입니다. 사실을 중시하며 책임을 무겁게 여기지 않고 기분과 처세만을 앞세우는 인간상 말입니다. 이러한 처세를 위한 처세 때문에 문제가 되며 소위 정치적인 처세자들 때문에 사회는 혼란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yes men" 아들인 형도 그런 대로 매력이 있는 아들이며 그런 대로 생각해 볼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둘째 아들입니다. 이 아들은 전형적인 "no man"입니다. 만사에 거절이 먼저 되는 인간입니다.

청개구리처럼 가라면 오고 서라면 앉는 사람, 꼭 반대로 살아야 좋고, 하지 말라는 일이면 기를 쓰고 해 봐야만 극성이 풀리는 역설적인 인간상이며 반항형의 인간상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라도 "예"라고 하면 자기가 무너지는 것 같고 비굴하게만 느껴지며 반드시 "아니오"라고 해야만 자기가 살고 자기를 찾게 되며 자기 위신이 세워진다고 생각하는 곤란한 인간형이 있습니다.

대체로 불행한 환경 속에서 짓눌려 살아온 과거를 가진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과 아무도 믿을 수 없으며 믿어서는 안되는 비참한 여건 속에 자라오면서 불신감에 젖고 배신당한 마음이 그 기초가 된 가장 불행한 심리적인 환자들이 여기에 속하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하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깊은 타성에 젖은 인간상을 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매사에 반항적이요, 사사건건 불평불만을 말합니다.

언제든지 단 한 면으로라도 좋은 방향에서 보지 못하며 긍정적인 방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꼭 반항하며 부정하며 거절부터 먼저 하는 비뚤어진 인간상이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의 아들은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라고 권하였더니 "안 가겠습니다"라고 거절하면서 끝내 교회에 출석치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언젠가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교회와 신앙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면서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뒤에 제가 만나서 "훌륭하더군"하면서 칭찬하였더니 그 청년 대답이 "내가 아버지 앞에서는 철저한 무신론 주의자인데 오늘 내가 이렇게 예수를 잘 믿는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속으로는 순종하고 긍정하면서도 겉으로는 반드시 거역하며 부정하고 반항하는 그러한 심리 말입니다. 반항을 위한 반항, 때로는 내심에서 긍정될 때와 내가 잘못되고 상대방이 옳다고 느껴질 때 더욱 더 크게 반항하는 부정적인 인간상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항만이 생명의 길이며 자기를 찾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만사에 부정적으로 대하려는 참으로 불행한 인간이 있습니다. 이 아들은 우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의미에서 시간차의 문제가 또한 중요합니다. 깊은 진실은 시간과 함께 사실이 나타나겠기 때문입니다. 형은 "가겠습니다" 하였으나 뒤에 가지 아니하였고 동생은 "안가겠습니다"라고 거절했으나 뒤에 뉘우치고 갔다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둘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은 아닙니다만 실제적으로 볼 때 뒤에라도 뉘우치고 간 동생이 아버지를 기쁘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즉 문제는 "뉘우침"에 있다는 것입니다. 뒤에 순종치 않는 자 즉 항상 "예예"하며 가장 경건한 것 같으나 실상은 불순종하는 형식과 의식만의 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형은 부인하는 자를 가리킨 말입니다. 동생은 비록 거절하나 뉘우침이 있으며 그 깊이에는 의와 진실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 말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세상을 따라 살며 교회에서는 세속주의자라는 평을 받을지 모르나 그 깊이에는 사랑과 진실과 의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깊이 상고해 볼 때 더욱 심각한 데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한 일로 인하여 제사장들과 충돌하시게 된 사건입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사고 팔며 돈을 바꾼다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당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며 물론 제사장들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이득을 위하며 짐짓 묵인해 오던 터인데 이제 갈릴리 촌에서 온 젊은 선지자가 이들을 다 내몰고 깨끗이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강도의 굴을 만드느냐고 호령하며 내몰 때 통쾌한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대제사장이 벌써 했어야 할 일을 지금 다른 사람을 통하여 하게 될 때 그 대제사장들은 면목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위신과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위신을 위하여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대답 대신에 되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 때에 그들은 의논하였습니다. 하늘로서라 하면 왜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로서라고 답한다면 이를 하늘로서인 줄 확실히 믿고 있는 군중들이 돌을 들어서 칠 것이라 생각하여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스스로 진실을 속였으며 사실에 준하지 않고 사람들의 여론에 신경을 쓴 처세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맏아들은 제사장과 장로들을 가르킨 것이며 둘째 아들은 당시에 천대받던 소외된 인간인 세리와 창녀들을 이른 말씀입니다. 이 대조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둘다 죄인이로되 형이 더 큰 죄인이며 문제의 열쇠는 "뉘우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알면서 스스로 부정했고 의식과 형식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나 실상은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며 저 세리와 창기는 비록 세상에서는 악하다, 천하다, 더럽다는 평을 들었어도 그 내심에서 회개와 의와 진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뉘우침"의 의를 인정하신 자비를 깊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 문맥 속에 숨겨진 깊은 또 다른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없으나 원칙적으로는 마땅히 있어야 할 제 삼의 아들을 생각합니다. 즉 가겠다고 하고 가지 아니한 아들이나 안 가겠다고 하다가 뒤에 뉘우치고 간 아들이 아닌 제 삼의 아들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가겠다고 대답하고 가는 그러한 아들 말입니다.

결과만 가지고 선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좋았다고 그의 행동 전체를 정상화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동기가 좋았다고 그 행위를 옳은 일이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동기도 좋고 방법도 선하고 결과도 아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가겠다고 대답은 하고 마음이 변하여 가지 아니한 아들처럼 마음이 쉽게 처세적으로 변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열매 없는 신앙 생활이나 가지 아니하겠다고 거절하였어도 뒤에 뉘우쳐서 끌려가듯이 따라가는 아들처럼 믿기는 믿되 힘이 없고, 순종은 하나 뉘우침과 가책과 의무감에 매이고 심지어는 저주의식에 몰려서 억지로 사는 은혜 없는 신앙 생활이 모두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겠다고 고백하고 그 고백대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하고서 원하고 고백한 내용대로 사회 생활에서 실제로 생활을 통하여 몸으로써 신앙을 고백해 나아가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예"라고 했으면 직장에서, 시장에서, 다시 하나님께 "예"라고 항상 계속적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은 곧 세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포도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라고 했으면 포도원에서도 "예"라고 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 처음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변함없이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순종하되 기쁨으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계속적으로 가책과 공포에 매어서 억지로 끌려가는 비굴한 생활을 떠나서 깨끗한 마음으로 처음부터 "예"라고 대답하고 곧 실현하되 기쁨으로 실천하는 그러한 명랑하고 행복한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각과 말이 일치되고 말과 행동이 같아지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을 때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회개의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으나 고기를 잡으리라고는 믿지 않은 채 의심하는 중에 그물을 내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믿지 아니 하였으니 억지로 부득이 하여 복종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한 것은 처음부터 "예"라고 못한 것입니다. 순종하되 믿음으로 하지 못하고, 믿되 전적으로 믿지 못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 : 19).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항상 "예"라고 하셨고 끝내는 십자가 앞에서까지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예" 하고 즐겨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예" 뿐, "아니라" 함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순종이 되어지는 협력적이고, 그리고 언제나 긍정적인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느 아들에 속합니까?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다. 형입니까? 동생입니까? 동생이 형보다 났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아들이 되십시다. 제 삼의 아들로 나타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진리 앞에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녀가 되어서 진실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며 따라서 그 안에서, 그 포도원 안에서, 참된 행복도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삼의 아들(마태복음 21장 23~32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언젠가 한국 목사님들과 미국에서 온 목사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세미나를 가진 일이 있었습니다. 언어의 소통이 잘 안 되어서 통역을 세웠었습니다. 어느 미국 목사님의 질문에 대하여 한국 목사님이 대답하시는 말이 "글쎄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통역하시는 분이 이말을 영어로 옮기기가 어려워서 당황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물론 영어에도 이와 비슷한 "more or less" 같은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사실상 "글쎄요" 같은 그러한 묘한 말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됩니다. "글쎄요", "글쎄올시다" 이 말은 "Yes"도 "No"도 아닌 말이며 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고 승락도 부정도 아닌 참으로 애매한 말입니다. 거짓 같은 사실, 사실 같은 거짓이 있게 되는 참으로 애매하며 모호한 세상입니다.

세상은 묘하게 변하여 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처녀 총각이 분명하였는데 요사이는 이것이 또한 애매하여졌습니다. 처녀라 하면 긴 머리를 땋고 댕기를 드린 모습으로 구별되었고 결혼을 하면 머리는 올려야 하고 쪽을 지어 틀어 올려 확실한 표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처녀인지, 시집간 색시인지, 아이가 있는 애어머니인지가 전혀 알 수 없는 형편이요, 또한 총각도 긴 머리를 하고 다니다가 장가를 들면 상투를 틀어서 어른 된 표가 분명하였는데 이편 역시 애매하여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자에는 남녀의 구별도 모호합니다. 긴 머리의 남자, 짧은 머리의 여자, 뒤로 보아서는 구별할 길이 없고 여자들이 바지를 입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청바지까지 입고 나서니 이제는 의상으로서나 모양을 가지고는 구별하기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남자들이 치마를 언제부터 입느냐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문화 생활이란 곧 여름은 겨울같이 살며 겨울은 여름같이 살자는 것이라고 말한 분이 있는데 이 또한 일리가 있는 말같이 들려집니다. 역시 모호합니다. 이 모호성이 현대 문화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문 성경에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주는 좋은 표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두 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큰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선뜻 대답하기를 "네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며 둘째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하였더니 "싫습니다, 안가겠습니다" 하고 거절하더니 뒤에 뉘우치고 포도원의 일터로 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두 아들 중에서 누가 효자냐 할 때 물론 둘째 아들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상고해 보면 그렇게 쉽게 말하기 힘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어느 아들이 효자인지 어느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였는지 간단하게 말하기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쉽게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두 아들은 현대인의 인간상을 설명해주는 전형적인 모습과 특징을 가졌다고 봅니다.

맏형의 모습부터 생각하여 보십시다. 그는 한마디로 전형적인 "Yes man"입니다. 어떤 말에든지 대답은 우선 "yes" 입니다. 항상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 마음속의 진실한 긍정이 있던 없던 가겠다는 결심이 있던 없던 간에 우선 "네"라고 대답부터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자유당 시절에 "지당장관"이란 말이 유행어로 나돈 때가 있었습니다. 각하의 말씀에 무조건 "지당한 말씀입니다"라고 아첨하는 지조 없는 장관들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이 또한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상사의 말에 면전에서 "아니오"하는 것이 바른 처세이겠습니까? 우선 "네"라고 대답하고 나서 정히 안될 것이면 다음날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습니다."라고 진언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 아닐까요. 일언지하에 생각해 볼 시간도 가지지 아니하고 딱 잘라서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만 볼 수는 없으며 우선 아버지 앞에서 "예"라고 함으로서 당장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잘 처세한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국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시켜놓고 기다리는 손님들이 기다림에 지쳐서 재촉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청년들은 능란하게 대답합니다.

"예! 다 되었습니다. 곧 가져갑니다." 그리고 나서 30분이 지나기도 합니다. 실은 재촉한다고 해서 음식이 더 빨리 될 수도 없는 것이며 더 빨리 배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미 급한 손님에게 구구한 설명은 필요 없고 열 번이라도 "예! 곧 가져갑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잘못된 처세만은 아니며 불 신실하다고 나무랄 일도 아니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듯이 아무 실천도 없이 "예예"라고 대답만 하는 처세에 능한 인간상이 있습니다. 자기 진실이 먼저가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이 먼저 문제가 되는 인간, 참이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상대방이 나보고 무엇이라고 하며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데 신경을 더 쓰는 그러한 인간상 말입니다. 사실을 중시하며 책임을 무겁게 여기지 않고 기분과 처세만을 앞세우는 인간상 말입니다. 이러한 처세를 위한 처세 때문에 문제가 되며 소위 정치적인 처세자들 때문에 사회는 혼란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yes men" 아들인 형도 그런 대로 매력이 있는 아들이며 그런 대로 생각해 볼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둘째 아들입니다. 이 아들은 전형적인 "no man"입니다. 만사에 거절이 먼저 되는 인간입니다.

청개구리처럼 가라면 오고 서라면 앉는 사람, 꼭 반대로 살아야 좋고, 하지 말라는 일이면 기를 쓰고 해 봐야만 극성이 풀리는 역설적인 인간상이며 반항형의 인간상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라도 "예"라고 하면 자기가 무너지는 것 같고 비굴하게만 느껴지며 반드시 "아니오"라고 해야만 자기가 살고 자기를 찾게 되며 자기 위신이 세워진다고 생각하는 곤란한 인간형이 있습니다.

대체로 불행한 환경 속에서 짓눌려 살아온 과거를 가진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과 아무도 믿을 수 없으며 믿어서는 안되는 비참한 여건 속에 자라오면서 불신감에 젖고 배신당한 마음이 그 기초가 된 가장 불행한 심리적인 환자들이 여기에 속하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하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깊은 타성에 젖은 인간상을 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매사에 반항적이요, 사사건건 불평불만을 말합니다.

언제든지 단 한 면으로라도 좋은 방향에서 보지 못하며 긍정적인 방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꼭 반항하며 부정하며 거절부터 먼저 하는 비뚤어진 인간상이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의 아들은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라고 권하였더니 "안 가겠습니다"라고 거절하면서 끝내 교회에 출석치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언젠가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교회와 신앙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면서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뒤에 제가 만나서 "훌륭하더군"하면서 칭찬하였더니 그 청년 대답이 "내가 아버지 앞에서는 철저한 무신론 주의자인데 오늘 내가 이렇게 예수를 잘 믿는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속으로는 순종하고 긍정하면서도 겉으로는 반드시 거역하며 부정하고 반항하는 그러한 심리 말입니다. 반항을 위한 반항, 때로는 내심에서 긍정될 때와 내가 잘못되고 상대방이 옳다고 느껴질 때 더욱 더 크게 반항하는 부정적인 인간상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항만이 생명의 길이며 자기를 찾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만사에 부정적으로 대하려는 참으로 불행한 인간이 있습니다. 이 아들은 우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의미에서 시간차의 문제가 또한 중요합니다. 깊은 진실은 시간과 함께 사실이 나타나겠기 때문입니다. 형은 "가겠습니다" 하였으나 뒤에 가지 아니하였고 동생은 "안가겠습니다"라고 거절했으나 뒤에 뉘우치고 갔다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둘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은 아닙니다만 실제적으로 볼 때 뒤에라도 뉘우치고 간 동생이 아버지를 기쁘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즉 문제는 "뉘우침"에 있다는 것입니다. 뒤에 순종치 않는 자 즉 항상 "예예"하며 가장 경건한 것 같으나 실상은 불순종하는 형식과 의식만의 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형은 부인하는 자를 가리킨 말입니다. 동생은 비록 거절하나 뉘우침이 있으며 그 깊이에는 의와 진실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 말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세상을 따라 살며 교회에서는 세속주의자라는 평을 받을지 모르나 그 깊이에는 사랑과 진실과 의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깊이 상고해 볼 때 더욱 심각한 데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한 일로 인하여 제사장들과 충돌하시게 된 사건입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사고 팔며 돈을 바꾼다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당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며 물론 제사장들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이득을 위하며 짐짓 묵인해 오던 터인데 이제 갈릴리 촌에서 온 젊은 선지자가 이들을 다 내몰고 깨끗이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강도의 굴을 만드느냐고 호령하며 내몰 때 통쾌한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대제사장이 벌써 했어야 할 일을 지금 다른 사람을 통하여 하게 될 때 그 대제사장들은 면목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위신과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위신을 위하여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대답 대신에 되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 때에 그들은 의논하였습니다. 하늘로서라 하면 왜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로서라고 답한다면 이를 하늘로서인 줄 확실히 믿고 있는 군중들이 돌을 들어서 칠 것이라 생각하여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스스로 진실을 속였으며 사실에 준하지 않고 사람들의 여론에 신경을 쓴 처세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맏아들은 제사장과 장로들을 가르킨 것이며 둘째 아들은 당시에 천대받던 소외된 인간인 세리와 창녀들을 이른 말씀입니다. 이 대조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둘다 죄인이로되 형이 더 큰 죄인이며 문제의 열쇠는 "뉘우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알면서 스스로 부정했고 의식과 형식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나 실상은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며 저 세리와 창기는 비록 세상에서는 악하다, 천하다, 더럽다는 평을 들었어도 그 내심에서 회개와 의와 진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뉘우침"의 의를 인정하신 자비를 깊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 문맥 속에 숨겨진 깊은 또 다른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없으나 원칙적으로는 마땅히 있어야 할 제 삼의 아들을 생각합니다. 즉 가겠다고 하고 가지 아니한 아들이나 안 가겠다고 하다가 뒤에 뉘우치고 간 아들이 아닌 제 삼의 아들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가겠다고 대답하고 가는 그러한 아들 말입니다.

결과만 가지고 선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좋았다고 그의 행동 전체를 정상화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동기가 좋았다고 그 행위를 옳은 일이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동기도 좋고 방법도 선하고 결과도 아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가겠다고 대답은 하고 마음이 변하여 가지 아니한 아들처럼 마음이 쉽게 처세적으로 변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열매 없는 신앙 생활이나 가지 아니하겠다고 거절하였어도 뒤에 뉘우쳐서 끌려가듯이 따라가는 아들처럼 믿기는 믿되 힘이 없고, 순종은 하나 뉘우침과 가책과 의무감에 매이고 심지어는 저주의식에 몰려서 억지로 사는 은혜 없는 신앙 생활이 모두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겠다고 고백하고 그 고백대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하고서 원하고 고백한 내용대로 사회 생활에서 실제로 생활을 통하여 몸으로써 신앙을 고백해 나아가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예"라고 했으면 직장에서, 시장에서, 다시 하나님께 "예"라고 항상 계속적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은 곧 세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포도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라고 했으면 포도원에서도 "예"라고 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 처음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변함없이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순종하되 기쁨으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계속적으로 가책과 공포에 매어서 억지로 끌려가는 비굴한 생활을 떠나서 깨끗한 마음으로 처음부터 "예"라고 대답하고 곧 실현하되 기쁨으로 실천하는 그러한 명랑하고 행복한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각과 말이 일치되고 말과 행동이 같아지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을 때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회개의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으나 고기를 잡으리라고는 믿지 않은 채 의심하는 중에 그물을 내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믿지 아니 하였으니 억지로 부득이 하여 복종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한 것은 처음부터 "예"라고 못한 것입니다. 순종하되 믿음으로 하지 못하고, 믿되 전적으로 믿지 못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 : 19).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항상 "예"라고 하셨고 끝내는 십자가 앞에서까지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예" 하고 즐겨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예" 뿐, "아니라" 함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순종이 되어지는 협력적이고, 그리고 언제나 긍정적인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느 아들에 속합니까?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다. 형입니까? 동생입니까? 동생이 형보다 났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아들이 되십시다. 제 삼의 아들로 나타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진리 앞에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녀가 되어서 진실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며 따라서 그 안에서, 그 포도원 안에서, 참된 행복도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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