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사도행전 4장 13절~22절)

by 【고동엽】 2024. 6. 9.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사도행전 4장 13절~22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람들은 가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특히 요즈음에 와서 죽고 싶다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는 망상을 버리라고 조언을 합니다. 죽고 싶다고 원치 않아도 언젠가는 죽게 될 터인데 미리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까? 또한 죽음은 결정적인 책임을 지는 순간인데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죽음이 모든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만큼 큰 착각은 없습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은 무엇입니까? 지식은 있으나 용기가 없습니다. 기술은 있으나 지혜가 없습니다. 수평적인 지식은 있으나 높고 깊은 수직적인 지식이 없습니다. 적어도 지성인은 누구 때문이라고 타인을 원망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 좌절 등으로 자기 존재에 회의를 느낍니다. 자신이 싫어지고 밉고 부끄러워서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허탈감으로부터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대단히 용기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의롭거나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는 실수까지 저지른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온갖 협박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죽음까지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 엄청난 용기는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옛날 로마 시대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도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아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순교사에서 전해오는 한편의 이야기를 소개하지요. 어느 재판장이 많은 성도들을 붙잡아다 놓고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 잔뜩 위엄을 뽐내며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끌려온 성도들은 겁에 질리기는커녕 싱글싱글 웃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재판장은 몹시 부아가 나서 "저들을 매우 쳐라!" 하고 호령했습니다. 이 때 옆에서 일을 돕던 사람이 충고하기를, 성도들은 매맞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맞는 것이기에 오히려 좋아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죽이라고 재판장이 명령하자, 죽이면 천당간다고 더더욱 좋아하고, 정배를 보내면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어 기뻐하니 이런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러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성도들은 죄짓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니 돈을 많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죄를 짓도록 유도하자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음을, 믿음의 조상들에게서 얼마든지 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1절에서부터 아브라함을 위시하여 믿음의 조상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생애와 믿음의 위대함을 기록하면서 38절에 가서 결론 맺기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용기란 어떤 때에 생기는 것입니까? 첫째, 무지할 때에 용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 용기는 만용일 수가 있습니다만 아무튼 지식층보다는 무식한 사람들에게 용기가 있습니다. 둘째는, 본성에서 오는 용기가 있습니다. 성격적으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는, 지식에서 오는 용기입니다. 그러나 이 용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식이란 완전하지 않으므로, 구멍나지 않는 이론이 없고 반론 없는 이론이 없기에, 오늘 잠깐 이 이론에 동의했다가 내일이면 다시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식에 근거한 용기는 오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는, 믿음에 근거한 용기입니다. 이 용기는 절대적인 용기로, 변함이 없는 참 용기입니다. 물론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먼저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베드로와 요한의 그 놀라운 용기가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들의 용기의 근거는 오직 믿음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돈의 위력 때문에 돈을 의지하려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돈과 함께 망하리라"하고, 돈을 믿는 사람들이 돈과 함께 망하는 모습을 일찌기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명예와 권세는 믿을 만합니까? 바로 며칠 전에 권좌에 앉았다고 축하하는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수치를 당하면서 물러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출세하고 진급했다고 좋아할 것만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입니까? 이사야서 2:22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아서, 근본적으로 믿을 것이 못됩니다. 가끔 내일이면 결혼할 신부가 저에게 찾아와서 결혼에 대한 회의를 털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결혼할 상대자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지 않는 남자에게 일생을 건다는 것이 불안해서 결혼 전날 밤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신부에게 처음부터 남자를 믿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이 그를 내게 짝지어 주셨다는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조언해 줍니다. 사실은 부모도 자식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기에 그 믿음 위에서 결혼도 하고 사업도 하며 인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그들의 용기는 오직 절대적인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신앙으로는 그와 같은 용기가 어림도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지식이나 이론이나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그 계시와 자기와의 관계를 맺고 믿음을 세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은혜를 주관적으로 소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의롭다 하신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을 확증받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죽음도 두렵지 않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용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초월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사람들의 평판에 지나치게 예민한 편입니다. 가난하다는 것도 내가 못살아서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비해 못산다는 상대적 빈곤감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6․25를 겪어 본 사람들은 어떤 일에도 불평할 수 없다"라는 말씀을 듣고 크게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에 어떻게 먹고 어떤 형편에서 살았던가를 생각하면, 지금의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이나 눈치에 신경을 쓰다보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평판을 구걸하고 칭찬에 매달리면 초라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므로, 평가에 초연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신경을 썼습니다. 어느 면으로는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여성들은 병원에 입원해서도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픈 것보다는 얼굴이 상할까봐 더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시간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평가될까 하는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다니 놀랍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면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바울의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콘스탄틴 대왕은 로마에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한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보니, 그의 신하인 문무 백관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기독교인이었기에 부하들에게 관직과 기독교 중 하나만 선택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기독교를 따르려면 관직을 포기하고, 관직에 있으려면 기독교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때에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왕께는 죄송했지만 관직보다는 예수님을 택했습니다. 물러서는 그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고 편안했지만 왕은 대단히 괴로웠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더니 그 중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등지고 관직을 택했던 것입니다. 왕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남아 있는 변절자들을 다 내어 보내고 오히려 스스로 물러선 기독교인들을 다시 불러 선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는 버릴 것은 용감하게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언제가 잘 아는 성도가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한번 문병을 갔더니, 환자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저는 위로하기를, 허리는 누구나 다칠 수 있는 일인데 왜 그렇게 괴로워하시느냐, 편안한 마음으로 푹 쉬라고 했습니다. 그는 "물론 허리야 아무 때에나 부러질 수 있지요. 문제는 무엇을 하다가 부러졌느냐가 중요합니다"하고 대답하며, 주일날 예배보지 않고 골프치러 갔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사람들의 평가에 관계없이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셋째, 그들의 용기의 근거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동기와 방법과 과정에만 충실하며,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충성과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여러분, 공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공부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시험에 합격하고 못하고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나는 얼마나 성실하게 임했느냐 그것만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합격했으면 하나님의 뜻이요, 만일에 합격하지 못했으면 하나님이 그만두라는 뜻임을 알고 그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만약 부정으로 입학을 했다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결과에 따라서 방법을 정당화하려는 것 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잘못된 방법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선용되어 좋은 결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결과라고 잘못된 방법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이요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결과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고, 나로서는 참된 동기와 진실한 충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His part)과 우리들의 일(Our part)을 구분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리며 가꾸고 난 뒤, 추수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의와 진실을 다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문제는 불순한 동기, 잘못된 방법 때문에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양심이 나를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결코 결과가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백 번 실패를 해도 최선을 다한 일에는 유감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용기가 있습니다.

넷째,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내 편에 계시어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시므로, 내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용기가 넘쳐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하는 일은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비켜 가는 길은 비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주일마다 설교를 부탁해서 매주일 이른 아침이면 집사님 한 분이 저를 열심히 태워다 주곤 했습니다. 약 한 달이 지나자 이 일이 번거로웠던지 교회에서 자동차를 마련해 주시면서 좀 숙달되거든 손수 운전해서 교회에 오라고 어느 토요일 저녁에 새 자동차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바로 다음 날이 주일이라 아침에 처음 보는 새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교회에 갔었습니다.

교인들은 깜짝 놀라며 먼 거리를 주저하지 않고 온 그 용기에 대해 칭찬을 했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교회로 오는 길이니까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놀러 가는 길이었으면 못 갔을 것이나, 교회로 가는 길이니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소를 향해 갈 때의 일입니다.

이 재판은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재판이라 루터의 친구들이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말했습니다. "재판정 기왓장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재판정에 서리라." 그리고 재판정에 서서는 "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라는 외마디 기도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기에 나의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깨끗이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놀라운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같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들으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랴"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용기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난해도 떳떳하게 가난해야 합니다. 실패해도 비겁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비난을 받아도 신앙적으로 담담하게 견디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일이 있더라도 자랑스럽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스데반처럼 여유를 가지고 신령한 감격과 거룩한 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고 비판할 수 없는 용기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사도행전 4장 13절~22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람들은 가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특히 요즈음에 와서 죽고 싶다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는 망상을 버리라고 조언을 합니다. 죽고 싶다고 원치 않아도 언젠가는 죽게 될 터인데 미리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까? 또한 죽음은 결정적인 책임을 지는 순간인데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죽음이 모든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만큼 큰 착각은 없습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은 무엇입니까? 지식은 있으나 용기가 없습니다. 기술은 있으나 지혜가 없습니다. 수평적인 지식은 있으나 높고 깊은 수직적인 지식이 없습니다. 적어도 지성인은 누구 때문이라고 타인을 원망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 좌절 등으로 자기 존재에 회의를 느낍니다. 자신이 싫어지고 밉고 부끄러워서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허탈감으로부터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대단히 용기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의롭거나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는 실수까지 저지른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온갖 협박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죽음까지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 엄청난 용기는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옛날 로마 시대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도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아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순교사에서 전해오는 한편의 이야기를 소개하지요. 어느 재판장이 많은 성도들을 붙잡아다 놓고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 잔뜩 위엄을 뽐내며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끌려온 성도들은 겁에 질리기는커녕 싱글싱글 웃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재판장은 몹시 부아가 나서 "저들을 매우 쳐라!" 하고 호령했습니다. 이 때 옆에서 일을 돕던 사람이 충고하기를, 성도들은 매맞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맞는 것이기에 오히려 좋아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죽이라고 재판장이 명령하자, 죽이면 천당간다고 더더욱 좋아하고, 정배를 보내면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어 기뻐하니 이런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러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성도들은 죄짓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니 돈을 많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죄를 짓도록 유도하자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음을, 믿음의 조상들에게서 얼마든지 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1절에서부터 아브라함을 위시하여 믿음의 조상들을 죽 나열하고 그들의 생애와 믿음의 위대함을 기록하면서 38절에 가서 결론 맺기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용기란 어떤 때에 생기는 것입니까? 첫째, 무지할 때에 용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 용기는 만용일 수가 있습니다만 아무튼 지식층보다는 무식한 사람들에게 용기가 있습니다. 둘째는, 본성에서 오는 용기가 있습니다. 성격적으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는, 지식에서 오는 용기입니다. 그러나 이 용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식이란 완전하지 않으므로, 구멍나지 않는 이론이 없고 반론 없는 이론이 없기에, 오늘 잠깐 이 이론에 동의했다가 내일이면 다시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식에 근거한 용기는 오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는, 믿음에 근거한 용기입니다. 이 용기는 절대적인 용기로, 변함이 없는 참 용기입니다. 물론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먼저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베드로와 요한의 그 놀라운 용기가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들의 용기의 근거는 오직 믿음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돈의 위력 때문에 돈을 의지하려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돈과 함께 망하리라"하고, 돈을 믿는 사람들이 돈과 함께 망하는 모습을 일찌기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명예와 권세는 믿을 만합니까? 바로 며칠 전에 권좌에 앉았다고 축하하는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수치를 당하면서 물러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출세하고 진급했다고 좋아할 것만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입니까? 이사야서 2:22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아서, 근본적으로 믿을 것이 못됩니다. 가끔 내일이면 결혼할 신부가 저에게 찾아와서 결혼에 대한 회의를 털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결혼할 상대자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지 않는 남자에게 일생을 건다는 것이 불안해서 결혼 전날 밤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신부에게 처음부터 남자를 믿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이 그를 내게 짝지어 주셨다는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조언해 줍니다. 사실은 부모도 자식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기에 그 믿음 위에서 결혼도 하고 사업도 하며 인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그들의 용기는 오직 절대적인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신앙으로는 그와 같은 용기가 어림도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지식이나 이론이나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그 계시와 자기와의 관계를 맺고 믿음을 세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은혜를 주관적으로 소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의롭다 하신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을 확증받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죽음도 두렵지 않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용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초월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사람들의 평판에 지나치게 예민한 편입니다. 가난하다는 것도 내가 못살아서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비해 못산다는 상대적 빈곤감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6․25를 겪어 본 사람들은 어떤 일에도 불평할 수 없다"라는 말씀을 듣고 크게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에 어떻게 먹고 어떤 형편에서 살았던가를 생각하면, 지금의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이나 눈치에 신경을 쓰다보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평판을 구걸하고 칭찬에 매달리면 초라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므로, 평가에 초연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신경을 썼습니다. 어느 면으로는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여성들은 병원에 입원해서도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픈 것보다는 얼굴이 상할까봐 더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시간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평가될까 하는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다니 놀랍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면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바울의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콘스탄틴 대왕은 로마에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한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보니, 그의 신하인 문무 백관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기독교인이었기에 부하들에게 관직과 기독교 중 하나만 선택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기독교를 따르려면 관직을 포기하고, 관직에 있으려면 기독교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때에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왕께는 죄송했지만 관직보다는 예수님을 택했습니다. 물러서는 그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고 편안했지만 왕은 대단히 괴로웠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더니 그 중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등지고 관직을 택했던 것입니다. 왕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남아 있는 변절자들을 다 내어 보내고 오히려 스스로 물러선 기독교인들을 다시 불러 선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는 버릴 것은 용감하게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언제가 잘 아는 성도가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한번 문병을 갔더니, 환자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저는 위로하기를, 허리는 누구나 다칠 수 있는 일인데 왜 그렇게 괴로워하시느냐, 편안한 마음으로 푹 쉬라고 했습니다. 그는 "물론 허리야 아무 때에나 부러질 수 있지요. 문제는 무엇을 하다가 부러졌느냐가 중요합니다"하고 대답하며, 주일날 예배보지 않고 골프치러 갔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사람들의 평가에 관계없이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셋째, 그들의 용기의 근거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동기와 방법과 과정에만 충실하며,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충성과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여러분, 공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공부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시험에 합격하고 못하고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나는 얼마나 성실하게 임했느냐 그것만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합격했으면 하나님의 뜻이요, 만일에 합격하지 못했으면 하나님이 그만두라는 뜻임을 알고 그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만약 부정으로 입학을 했다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결과에 따라서 방법을 정당화하려는 것 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잘못된 방법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선용되어 좋은 결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결과라고 잘못된 방법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이요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결과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고, 나로서는 참된 동기와 진실한 충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His part)과 우리들의 일(Our part)을 구분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리며 가꾸고 난 뒤, 추수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의와 진실을 다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문제는 불순한 동기, 잘못된 방법 때문에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양심이 나를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결코 결과가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백 번 실패를 해도 최선을 다한 일에는 유감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용기가 있습니다.

넷째,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내 편에 계시어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시므로, 내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용기가 넘쳐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하는 일은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비켜 가는 길은 비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주일마다 설교를 부탁해서 매주일 이른 아침이면 집사님 한 분이 저를 열심히 태워다 주곤 했습니다. 약 한 달이 지나자 이 일이 번거로웠던지 교회에서 자동차를 마련해 주시면서 좀 숙달되거든 손수 운전해서 교회에 오라고 어느 토요일 저녁에 새 자동차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바로 다음 날이 주일이라 아침에 처음 보는 새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교회에 갔었습니다.

교인들은 깜짝 놀라며 먼 거리를 주저하지 않고 온 그 용기에 대해 칭찬을 했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교회로 오는 길이니까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놀러 가는 길이었으면 못 갔을 것이나, 교회로 가는 길이니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소를 향해 갈 때의 일입니다.

이 재판은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재판이라 루터의 친구들이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말했습니다. "재판정 기왓장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재판정에 서리라." 그리고 재판정에 서서는 "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라는 외마디 기도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기에 나의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깨끗이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놀라운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같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들으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랴"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용기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난해도 떳떳하게 가난해야 합니다. 실패해도 비겁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비난을 받아도 신앙적으로 담담하게 견디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일이 있더라도 자랑스럽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스데반처럼 여유를 가지고 신령한 감격과 거룩한 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고 비판할 수 없는 용기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