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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와 축복(창세기 9장 20절~29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 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 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
오늘은 주일이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입니다. 추석의 근본 정신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민족은 농사를 근본으로 하고 있기에 추석이 주는 의미는 자못 큽니다. 농사는 긴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하며, 여기에 경건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 오면서 농사가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땀 흘리고 수고했어도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을에 수확이 가능함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수확을 하고 나서는 자기들의 대가라고 자만하지 않고 겸손히 하늘에 감사하고자 했습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실의 기쁨을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과 함께 나누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 집안이 모여 추수 잔치를 열고 함께 축하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상들에게 감사하게 된 구체적인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생(生)에 대한 감사입니다. 생 자체에 대한 감사는 곧 생을 주신 분께 향한 감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생명이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 나머지 부모님께 감사를 한 것입니다. 둘째는,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의 스승이 바로 부모님입니다. 옛날에는 교육제도가 지금과 같지 아니한 때라, 아이들이 부모님으로부터 언어, 풍속, 문화, 가치관, 도덕, 윤리 등을 배우고, 농사에 따르는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효도하는 마음이 좀 줄어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부모님에게서보다 밖에서 배우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무엇이든지 부모님으로부터 배웠기에, 부모는 생명을 주신 분일 뿐만이 아니라 정신 세계까지도 다 물려주는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셋째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는 유산, 즉 토지에 대한 감사입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농토를 많이 가진 부모를 만나게 되면 평생을 안락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유산, 즉 토지에 대한 고마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어 놓고 나면 부모님께 대한 고마움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감사를 드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경우입니다. 이럴 때에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처럼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미신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본래의 의도는 감사와 보답을 위한 아름다운 마음입니다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뜻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불의한 세대와 타락된 인간들로 말미암아 감사해야 할 마음이 기복 사상으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가장 많이 도전 받는 문제가 바로 제사 문제입니다.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려야 하고 차례도 드려야 하므로 교회에 못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 성도들은 다음 두 가지를 그들에게 열심히 알려 줍니다. 하나는 살아 계신 부모께 효도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친척이나 이웃 어른들께 잘 하는 것이 부모님께 향한 구체적인 마음의 표현이 아니겠느냐고 설득해 봅니다. 사실 돌아가신 분께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모님의 교훈을 잘 받들어 그분들의 이름을 높이고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선하게 살고 덕을 베푸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자식이 잘 되면 아무개 아들이라고 부모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이 참된 효도임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살아 계시는 부모는 박대하면서 돌아가시고 나면 장례식은 거창하게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를 잘 치러 나가고 있습니다. 왜 이래야만 합니까? 저는 그 이유가 늘 궁금하던 차에, 바로 몇 년 전에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살아 계신 부모는 무능합니다. 다 늙고 병약하였으니 이익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서 귀신이 되면 유능한 자가 됩니다. 즉 산 부모는 무능하지만 죽은 부모는 귀신으로 복을 줄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에는 박대하다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보면 제사가 얼마나 고약한 일입니까? 효도한답시고 하는 제사지만 그 잠재 의식은 아주 불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어서 귀신된 부모님, 내게 복을 주세요" 하는 놀음이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효도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여기에는 범사에 형통함이 있고 장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해서 복받은 이야기는 성경이나 우리 민족의 야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바로 우리 생활 현상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하늘의 대표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위하는 마음, 즉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이 부모님께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계명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계명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계명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을 우리들로 하여금 복받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해된다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순종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효도하라는 계명도 가부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롭다 아니다가 아니라 부모님께 순종했다는 그 의미가 중요할 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수없이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부모가 소금섬을 물로 끓이라 해도 끓여야 하고, 소를 지붕 위로 올리라 해도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소금을 물로 끓이면 소금이 다 녹아 버리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따지지 말고 순종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또한 부모는 하나님의 대표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부모를 배반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불효하는 자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신 것을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부모에게 손찌검을 하는 자는 내다 죽이라 하셨고, 또한 부모를 저주하거나 미쳤다고 욕하는 사람은 증인 둘만 있으면 끌어내어 쳐죽여서 다시는 이런 악이 없도록 하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요즘 자식들 중에는 죽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요즘 가만히 보면, 자신은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자기 자식에게는 효도하라고 강요합니다. 효자 집안에서 효자가 나오지 불효자 집안에서 어떻게 효자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망상일 뿐입니다.
또한 부모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축복권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복을 빌면 자녀가 복을 받습니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 효가 바로 복을 받는 기준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선포할 수 있고 자식은 그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녀에게 복을 빌었습니다. 이삭도 야곱과 에서에게 복을 빌었습니다. 야곱도 열두 아들을 놓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들의 신앙과 경건과 효성에 따라서 복을 빌었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빌었던 복을 가만히 연구해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복을 내린 기준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했느냐에 두어서 그에 따라 차례차례로 복을 분배했습니다. 요셉도 자녀들을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 이렇게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복을 비는 축복권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의 회갑 잔치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잔치의 마지막 순서에 가서 손자 손녀는 물론 아들 딸 모두가 한꺼번에 큰절을 하고, 고개를 숙인 그 상태에서 아버지가 일어나시어 민수기 6:24을 펴들고 복을 빌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 말씀을 읽은 후에 모든 자손들이 "아멘" 하고 일어나는 은혜스러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저도 환갑을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잔치였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습니까 욕을 들었습니까? 또한 자식에게 복을 빌고 있습니까 저주를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는 말들을 전부 종합해 본다면 과연 몇 마디가 축복이고 몇 마디가 저주이며 몇 마디가 비판에 속한 것인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저주하는 말을 많이 하면서 복받기를 원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부모에게 축복권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특히 인종 문제 등으로 해석이 분분한 내용입니다. 지금 노아는 육백 세가 넘었을 때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는 오존층이 두터워서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도 수명이 길었다고 과학자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 홍수 이후로 오존층이 얇아져 사람의 수명이 전부 단명해진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 노아는 육백 세가 넘었는데 포도 농사를 해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나이가 들면 낙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밤이 새도록 책을 읽기도 하고 연극을 보기도 하며 한껏 낭만을 즐기지만 나이 들면 무엇을 해도 다 그저 그렇습니다. 한가지 낙이 있다면 먹는 것뿐입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86세까지 장수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낚시를 할 정도로 건강하셨습니다. 그런데 늘 며느리인 제 어머님께 "아가야, 오늘이 며칠이냐? 요새는 무슨 생선이 나지?"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것들이 잡수시고 싶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그 날 저녁상에 낮에 물어 보신 그 생선이나 과일이 나오지 않으면 당신의 마음을 몰라준다 해서 대단히 섭섭해하셨습니다. 이렇게 노인들은 먹는 재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노아도 포도주를 만들어서 좀 과하게 마신것 같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여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벌거벗고 누워서 잠을 잔 것입니다. 이 때 아들 중에 함이 제일 먼저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람직하기로는 누가 아버지의 모습을 볼까 하여 재빨리 덮어드렸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는 다른 형제들에게 달려가 소문을 냈습니다. 그 내용이야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이제 노망을 해서 주책없이 포도주를 많이 잡수시어 지금 취해서 벌거벗고 누워 있다고 흉을 보았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깜짝 놀라서 무슨 소리냐고 하며 달려와 아버지를 덮어 드렸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부끄러움을 덮어 드렸을 뿐 아니라 자기들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뒷걸음질했다는 그 행위가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친 것은, 이미 아는 것은 덮어 주고,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 속에조차 두지 않으려는 귀한 행동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효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효도가 음식으로 되는 것입니까? 부모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는 데 효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잠언 10:12에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또 야고보서 5:20에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4:8에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라고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허물과 죄를 덮을 뿐만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점만 보일 때는 사랑할 때이고, 단점이 보일 때는 미워할 때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악한 과거를 결코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 잊어버립니다.
사실 노아는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사람으로, 노아 때문에 그 아들들이 다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아버지께 존경과 높은 자부심으로 그만한 허물을 덮어 줄 수 없었단 말입니까? 그러고 보면 함은 나쁜 아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아버지께 가졌던 긍지와 존경으로 이 한 가지 실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함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지금 술취해 있는 아버지의 형편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아들들이 이해해야 했습니다. 노인이 되면 고독합니다. 그래서 탐식하게도 되며 약해지기도 합니다. 600세가 넘은 노아는 아마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함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드렸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니, 기억하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존경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 여행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바울의 병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제 나름대로 연구해 본 결과는 간질병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에 가서 설교하다 말고 발작이 나서 쓰러진 일이 있다고 짐작을 합니다. 이런 광경을 보았다면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자기 병 하나 고치지 못해서 설교하다 쓰러지면서 누구에게 예수 믿고 복받으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4:14에서 말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사도 바울은 자기 입장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전혀 개의치 않음이 너무도 고마워서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눈이라도 빼어 주리라."------얼마나 뜨겁고 감격한 마음입니까? 여러분들도 이런 사랑을 느껴 보았습니까? 나의 허물을 덮어주는 그 고마움에 너무나 감격하여 "저 분은 나를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 줄 것이야"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거기에는 존경과 높이고 싶은 마음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잠에서 깨어나 이 사실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는데, 함에게는 형제의 종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생각하지 못한 자는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도한 셈을 향해서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하나님을 셈의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벳에게도 창대케 하는 축복을 내렸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들들이 가진 효성만큼 복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복은 받아야 합니다. 나의 요령만으로 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만약 복을 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물어야 하겠습니다. 바리새적인 의에 취하지 말며 어리석은 자만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부모의 명예를 높여서 잘 공경할 때, 내가 가진 효성만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후손에게까지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 크신 은혜가 우리 모든 가정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효도와 축복(창세기 9장 20절~29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 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 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
오늘은 주일이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입니다. 추석의 근본 정신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민족은 농사를 근본으로 하고 있기에 추석이 주는 의미는 자못 큽니다. 농사는 긴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하며, 여기에 경건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 오면서 농사가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땀 흘리고 수고했어도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을에 수확이 가능함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수확을 하고 나서는 자기들의 대가라고 자만하지 않고 겸손히 하늘에 감사하고자 했습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실의 기쁨을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과 함께 나누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 집안이 모여 추수 잔치를 열고 함께 축하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상들에게 감사하게 된 구체적인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생(生)에 대한 감사입니다. 생 자체에 대한 감사는 곧 생을 주신 분께 향한 감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생명이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 나머지 부모님께 감사를 한 것입니다. 둘째는,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의 스승이 바로 부모님입니다. 옛날에는 교육제도가 지금과 같지 아니한 때라, 아이들이 부모님으로부터 언어, 풍속, 문화, 가치관, 도덕, 윤리 등을 배우고, 농사에 따르는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효도하는 마음이 좀 줄어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부모님에게서보다 밖에서 배우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무엇이든지 부모님으로부터 배웠기에, 부모는 생명을 주신 분일 뿐만이 아니라 정신 세계까지도 다 물려주는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셋째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는 유산, 즉 토지에 대한 감사입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농토를 많이 가진 부모를 만나게 되면 평생을 안락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유산, 즉 토지에 대한 고마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어 놓고 나면 부모님께 대한 고마움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감사를 드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경우입니다. 이럴 때에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처럼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미신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본래의 의도는 감사와 보답을 위한 아름다운 마음입니다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뜻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불의한 세대와 타락된 인간들로 말미암아 감사해야 할 마음이 기복 사상으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가장 많이 도전 받는 문제가 바로 제사 문제입니다.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려야 하고 차례도 드려야 하므로 교회에 못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 성도들은 다음 두 가지를 그들에게 열심히 알려 줍니다. 하나는 살아 계신 부모께 효도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친척이나 이웃 어른들께 잘 하는 것이 부모님께 향한 구체적인 마음의 표현이 아니겠느냐고 설득해 봅니다. 사실 돌아가신 분께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모님의 교훈을 잘 받들어 그분들의 이름을 높이고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선하게 살고 덕을 베푸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자식이 잘 되면 아무개 아들이라고 부모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이 참된 효도임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살아 계시는 부모는 박대하면서 돌아가시고 나면 장례식은 거창하게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를 잘 치러 나가고 있습니다. 왜 이래야만 합니까? 저는 그 이유가 늘 궁금하던 차에, 바로 몇 년 전에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살아 계신 부모는 무능합니다. 다 늙고 병약하였으니 이익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서 귀신이 되면 유능한 자가 됩니다. 즉 산 부모는 무능하지만 죽은 부모는 귀신으로 복을 줄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에는 박대하다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보면 제사가 얼마나 고약한 일입니까? 효도한답시고 하는 제사지만 그 잠재 의식은 아주 불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어서 귀신된 부모님, 내게 복을 주세요" 하는 놀음이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효도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여기에는 범사에 형통함이 있고 장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해서 복받은 이야기는 성경이나 우리 민족의 야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바로 우리 생활 현상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하늘의 대표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위하는 마음, 즉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이 부모님께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계명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계명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계명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을 우리들로 하여금 복받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해된다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순종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효도하라는 계명도 가부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롭다 아니다가 아니라 부모님께 순종했다는 그 의미가 중요할 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수없이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부모가 소금섬을 물로 끓이라 해도 끓여야 하고, 소를 지붕 위로 올리라 해도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소금을 물로 끓이면 소금이 다 녹아 버리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따지지 말고 순종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또한 부모는 하나님의 대표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부모를 배반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불효하는 자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신 것을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부모에게 손찌검을 하는 자는 내다 죽이라 하셨고, 또한 부모를 저주하거나 미쳤다고 욕하는 사람은 증인 둘만 있으면 끌어내어 쳐죽여서 다시는 이런 악이 없도록 하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요즘 자식들 중에는 죽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요즘 가만히 보면, 자신은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자기 자식에게는 효도하라고 강요합니다. 효자 집안에서 효자가 나오지 불효자 집안에서 어떻게 효자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망상일 뿐입니다.
또한 부모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축복권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복을 빌면 자녀가 복을 받습니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 효가 바로 복을 받는 기준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선포할 수 있고 자식은 그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녀에게 복을 빌었습니다. 이삭도 야곱과 에서에게 복을 빌었습니다. 야곱도 열두 아들을 놓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들의 신앙과 경건과 효성에 따라서 복을 빌었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빌었던 복을 가만히 연구해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복을 내린 기준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했느냐에 두어서 그에 따라 차례차례로 복을 분배했습니다. 요셉도 자녀들을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 이렇게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복을 비는 축복권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의 회갑 잔치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잔치의 마지막 순서에 가서 손자 손녀는 물론 아들 딸 모두가 한꺼번에 큰절을 하고, 고개를 숙인 그 상태에서 아버지가 일어나시어 민수기 6:24을 펴들고 복을 빌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 말씀을 읽은 후에 모든 자손들이 "아멘" 하고 일어나는 은혜스러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저도 환갑을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잔치였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습니까 욕을 들었습니까? 또한 자식에게 복을 빌고 있습니까 저주를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는 말들을 전부 종합해 본다면 과연 몇 마디가 축복이고 몇 마디가 저주이며 몇 마디가 비판에 속한 것인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저주하는 말을 많이 하면서 복받기를 원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부모에게 축복권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특히 인종 문제 등으로 해석이 분분한 내용입니다. 지금 노아는 육백 세가 넘었을 때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는 오존층이 두터워서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도 수명이 길었다고 과학자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 홍수 이후로 오존층이 얇아져 사람의 수명이 전부 단명해진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 노아는 육백 세가 넘었는데 포도 농사를 해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나이가 들면 낙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밤이 새도록 책을 읽기도 하고 연극을 보기도 하며 한껏 낭만을 즐기지만 나이 들면 무엇을 해도 다 그저 그렇습니다. 한가지 낙이 있다면 먹는 것뿐입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86세까지 장수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낚시를 할 정도로 건강하셨습니다. 그런데 늘 며느리인 제 어머님께 "아가야, 오늘이 며칠이냐? 요새는 무슨 생선이 나지?"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것들이 잡수시고 싶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그 날 저녁상에 낮에 물어 보신 그 생선이나 과일이 나오지 않으면 당신의 마음을 몰라준다 해서 대단히 섭섭해하셨습니다. 이렇게 노인들은 먹는 재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노아도 포도주를 만들어서 좀 과하게 마신것 같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여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벌거벗고 누워서 잠을 잔 것입니다. 이 때 아들 중에 함이 제일 먼저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람직하기로는 누가 아버지의 모습을 볼까 하여 재빨리 덮어드렸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는 다른 형제들에게 달려가 소문을 냈습니다. 그 내용이야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이제 노망을 해서 주책없이 포도주를 많이 잡수시어 지금 취해서 벌거벗고 누워 있다고 흉을 보았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깜짝 놀라서 무슨 소리냐고 하며 달려와 아버지를 덮어 드렸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부끄러움을 덮어 드렸을 뿐 아니라 자기들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뒷걸음질했다는 그 행위가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친 것은, 이미 아는 것은 덮어 주고,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 속에조차 두지 않으려는 귀한 행동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효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효도가 음식으로 되는 것입니까? 부모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는 데 효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잠언 10:12에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또 야고보서 5:20에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4:8에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라고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허물과 죄를 덮을 뿐만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점만 보일 때는 사랑할 때이고, 단점이 보일 때는 미워할 때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악한 과거를 결코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 잊어버립니다.
사실 노아는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사람으로, 노아 때문에 그 아들들이 다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아버지께 존경과 높은 자부심으로 그만한 허물을 덮어 줄 수 없었단 말입니까? 그러고 보면 함은 나쁜 아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아버지께 가졌던 긍지와 존경으로 이 한 가지 실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함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지금 술취해 있는 아버지의 형편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아들들이 이해해야 했습니다. 노인이 되면 고독합니다. 그래서 탐식하게도 되며 약해지기도 합니다. 600세가 넘은 노아는 아마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함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드렸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니, 기억하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존경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 여행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바울의 병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제 나름대로 연구해 본 결과는 간질병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에 가서 설교하다 말고 발작이 나서 쓰러진 일이 있다고 짐작을 합니다. 이런 광경을 보았다면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자기 병 하나 고치지 못해서 설교하다 쓰러지면서 누구에게 예수 믿고 복받으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4:14에서 말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사도 바울은 자기 입장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전혀 개의치 않음이 너무도 고마워서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눈이라도 빼어 주리라."------얼마나 뜨겁고 감격한 마음입니까? 여러분들도 이런 사랑을 느껴 보았습니까? 나의 허물을 덮어주는 그 고마움에 너무나 감격하여 "저 분은 나를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 줄 것이야"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거기에는 존경과 높이고 싶은 마음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잠에서 깨어나 이 사실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는데, 함에게는 형제의 종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생각하지 못한 자는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도한 셈을 향해서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하나님을 셈의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벳에게도 창대케 하는 축복을 내렸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들들이 가진 효성만큼 복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복은 받아야 합니다. 나의 요령만으로 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만약 복을 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물어야 하겠습니다. 바리새적인 의에 취하지 말며 어리석은 자만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부모의 명예를 높여서 잘 공경할 때, 내가 가진 효성만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후손에게까지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 크신 은혜가 우리 모든 가정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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