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모세의 고민(출애굽기 4장 1절~9절)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이가 된지라.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아침 방송으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었을 때, 이것을 믿고 우산을 준비하여 집을 나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이 이것을 조사하여 통계를 내어보았더니 우산을 가지고 나서는 사람이 전체의 40퍼센트밖에 되지 않더라고 합니다. 일기예보를 믿지 않는 사람이 60퍼센트나 되는 것이니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믿고 사십니까?
우리는 심각한 불신시대(不信時代)를 살고 있습니다. 믿고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믿음이 토대요 믿음이 안정(安定)이요 믿음이 힘이요 믿음이 용기인데 말입니다. 믿고야 지혜가 있고, 믿고야 인내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인내는 곧 죽음입니다. 믿음이 모든 축복의 근원이요 기초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원인이 내적인 것입니까 외적인 것입니까? 자신에게 있습니까 남에게 있습니까? 나 자신의 문제입니까 환경의 문제입니까? 도대체 불신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극히 작은 일 하나 하려고 해도 그 일을 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믿어야 하고, 남이 나를 믿어 주어야 하고, 내가 남을 믿어야 합니다.
제가 얼마전까지 11층 되는 높은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한번은 승강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는데 한 아주머니가 함께 탔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아래층까지 내려왔습니다. 자동차를 타러 가다가 문득 잊은 것이 생각나 다시 올라가려고 승강기를 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아주머니 역시 올라가는 승강기를 다시 타고 있습니다. 잊은 물건을 가지고 나와 내려오는 승강기를 타고 보니 이번에도 그 아주머니가 타고 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왜 자꾸 오르락내리락하시느냐고 물어봤지요. "무엇을 잊어버리셨습니까?" 그런데 이 아주머니 대답하시는 것좀 보십시오. "아래층까지 내려갔다가 생각해보니 내가 문을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어정쩡해져서 다시 올라가 열쇠구멍에 키를 꽂아 확인해보고 내려왔지요. 그런데 아래층까지 내려오고보면 또다시 미심쩍어져요. 그래서 또다시 올라가 확인해보고…… 지금 세 번째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람이 이 모양이랍니다"---여러분, 우리는 내가 나를 믿지 못합니다. 내 눈도 내 귀도 내 기억도 생각도 의지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슨 결심을 했다 해도 그 결심을 내가 믿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한번 결심이 며칠이나 갑니까? 인심조석변(人心朝夕變)이라고 합니다마는 그 정도도 못됩니다. 아침저녁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나의 의지, 나의 결심, 나의 결단, 나의 능력, 나의 지혜를 어느 정도까지 신임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선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믿어야 합니다. 생전처음 보는 남자를 믿고 그와 결혼합니다. 일생을 살자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이를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차를 타지만 저 운전기사가 술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면허증은 있는지 없는지, 도덕적으로 하자(瑕疵)는 없는 사람인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탑니다. 그리고 믿는 것입니다. 나는 조종사의 과거를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가 조종하는 비행기를 탑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만큼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이 있습니다. 선실(船室) 하나에 두 사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한 주교(主敎)가 낯선 승객과 같은 선실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동숙하게 된 그 손님, 생긴 것이 꼭 산적이나 깡패같이 우락부락해요. 주교께서 내심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지니고 있는 시계며 반지며 값나가는 것을 모조리 따로 챙겨가지고 선장을 찾았습니다. "이것들을 좀 맡아 주셔야겠습니다"하고 선장한테 귀중품들을 건냈습니다. "예, 잘 보관했다가 돌려드리지요."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주교는 그만 딴소리를 덧붙였습니다. "한 방을 쓰게 된 그 손님, 아무래도 좀 이상해 보여요. 그래서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 그래요?"하고 선장이 껄껄 웃더니 말합니다. "좀 전에 그 사람도 제게 귀중품을 맡기고 갔습니다"----여러분, 우리는 흔히 내가 남을 의심할 줄은 알아도 남이 나를 의심한다는 것은 까맣게 생각 못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牧者)로 40년을 지내왔습니다. 그가 목자로 살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종의 은둔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기를 바라기도 하고, 가나안땅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자유로운 천지에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는 전혀 무능력한 사람입니다. 아무런 기대도 걸 수 없는 그런 인간으로 전락해서 40년을 실의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호렙 산기슭에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이 목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실 뿐만 아니라 백성을 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로 엄청난 사명을 주십니다. 이 소명에 대하여 모세는 거절을 합니다. 여러 모로 사양하고 기피하고 꽁무니를 빼는 것입니다. 3장 11절에 보면 "내가 누구관대"라고 자기 비하(卑下)를 하고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내가 누군데 감히……' 스스로를 생각해 볼 때에 내가 내 백성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3장 13절에 보면 '내가 무엇이라 말할까요?' 하고 큰 염려를 합니다. '내가 할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해야 될 말이 무엇입니까?'----전혀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걱정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 1절에 보면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불신을 겁내고 있습니다. 이어 10절에 보면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하고 핑계를 댑니다. 또 13절에서는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건지시고 그 누군가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더라도 나는 예외입니다.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하고 기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고민이 있습니다. 이 고민은 물질이 아닙니다. 명예도 아니요 권세도 아닙니다. 자기 나름의 어떤 자유를 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고민은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고민이요, 믿어주지 않는 고민이요, 믿을 수 없는 고민입니다.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제입니까? 정치입니까? 인재(人材)입니까? 지혜입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근본은 믿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전혀 믿어서는 안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불신이 우리에게 그토록 불안을 안겨주고 고민을 하게 하고 나약하게 만들고 절망을 줍니다. 모세에게는 이 불신의 근본적인 원인이 우선 자기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면 말입니다. 모세는 꼭 해야 될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깊은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니까 하지 않는 것인지 어떤지, 그리고 하기야 어느 앞이라고 함부로 말하겠습니까마는 어쨌든 솔직히 터놓지 못하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애굽으로는 못 갑니다. 애굽에는 배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왕 앞에 갈 수가 없습니다. 나는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이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의 궁전에서 이스라엘인이면서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로 40년 동안 교육을 받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고생을 할 때에도 이 사람은 왕자로 높임을 받으며 영화를 누립니다. 애굽의 문물을 다 공부한 행운아였습니다. 마침 바로 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뒤를 이어서 왕이 될 수도 있는 여건에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40세가 되는 바로 그때에 애굽을 배반했습니다. 바로 왕을 배신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사람들의 눈앞에서 애굽사람을 쳐죽였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어떻게 애굽으로 돌아갑니까? 40년 동안을 미디안 광야에 쫓겨나 숨어살았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사람을 불러서 애굽으로 돌아가라, 바로 왕을 만나라, 이스라엘을 건지라, 하시니 정말 딱한 일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불가능한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선뜻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꿈도 없고 의욕도 없습니다. 실수와 혈기, 낙망과 실의가 이제는 체질화해버렸습니다. 모든것을 체념해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처가집 양이나 먹이면서 처가살이하다가 죽어갈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무려 40년, 이제 나이도 여든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모세로서는 망쳐버린 과거에서 이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지내온 80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갓난아기로 갈대상자에 담겨서 나일강변으로 떠내려간다, 바로의 공주가 와서 그를 건진다-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80년의 생애가 어찌 버려진 과거입니까? 어찌 실수한 과거라는 말입니까?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순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정말로 이해하는 순간부터는 지난날의 80년이 결코 버려진 과거가 아닌 것입니다. 한 사람 죽인 사건으로 망쳐버렸다-그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야 그 사건 하나로 모세의 생애는 망쳐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이야기가 그렇지 않습니다. 40년을 두고 광야에서 양이나 쳤다-결코 허송세월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인내를 배우고, 여기서 기도를 배우고, 여기서 경건을 배우고, 여기서 양을 치는 지도자의 소양(素養)을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기 위하여 그 40년 동안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트레이닝 코스(training course)입니다. 어찌 버려진 과거라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혹 실수한 일 있습니까? 그 실수 때문에 내 인생은 다 망쳐버렸다고 하겠습니까?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이렇게 말하십니까?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제 종식(終熄)해야 합니다. 나를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남을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과 그 뜻 안에서 새롭게 자기를 발견하는 순간 지난날의 80년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아주 버려진 과거, 그 집착으로부터 깨끗이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실까? 정말 나와 함께하실까?-하나님의 일을 하기에는 전혀 합당치 못한 스스로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의도 없고 진실도 없고 인내도 없고, 혈기에다 방종에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주제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고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려 하시는 큰 구원의 역사를 보고 자기를 본다면 내가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한 모퉁이에서 소중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 고용된 자이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나를 고용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막대기로 쓰시는가 하면 때로는 붙들어 종으로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찾으셨습니다. 부르셨습니다. 능력을 주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강권적으로 역사 하셨습니다. 모세는 부득이 자기의 나약함이나 어리석은 과거나 과거의 실수, 이런 데에 더 집착해서 거기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순종이요, 그것이 신앙이었습니다.
또한 백성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만날 때에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당연한 염려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을 소개하고 만날 때에 그의 과거부터 생각합니다. 과거로부터 추리하여 현재를 믿으려 하고 내일을 약속하려 합니다. 여러분, 혹 누구에게 직장을 소개해보았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남을 채용해보았습니까? 그런 때에 우리는 으레 이력서를 주고받습니다. 이력서는 그 사람의 과거입니다. 이력서에다 '앞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쓰게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디서 나서 어떻게 공부하고 그 동안에 어떻게 살아왔노라---이것을 가지고 나 자신을 증명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거가 그대로 미래로 있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사회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과거 이상의 일이 미래에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과거에 실수한 사람은 반드시 실수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나약했던 사람은 앞으로도 나약할 것이고, 과거에 게을렀던 사람은 앞으로도 게으를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목사님을 초청할 때에도 신학대학에 와서 그 목사님의 옛날 성적표를 떼어 가는 일이 있습니다. 성적이 시원치 않았으면 현재의 목회도 시원치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버립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데, 사람들이 그렇게 밖에 보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 자신도 자신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과거에 실수했으니까 앞으로도 실수할 것이다---과연 그렇습니까?
모세는 과거에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오늘은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천하 인간 중에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요. 갖은 비난을 다 받으면서도 모세는 온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과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역설적으로 보아줄 수는 없는 것입니까? 왜들 그토록 가혹한 것입니까? 이를테면 전과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실수한 사람은 또 실수할 것이고, 혈기부린 사람은 또 혈기부릴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 이상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모세를 대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틀림없이 거부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노예생활을 할 때에 너는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호의호식한 놈이다, 너따위가 무슨 애국심을 가졌느냐? 사람을 하나 죽였거든 무엇인가를 이룩해놓든지 해야지, 도망가기는 왜 도망가? 오히려 40년 동안이나 숨어 있다가 이제 와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라?'-누가 나를 믿어줄 것입니까? 사실입니다. 아무도 믿어줄 수 없는 것은 그의 과거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중히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나의 능력도 나의 경력도 나의 과거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이 사실만을 믿어라, 백성들로 이 사실을 믿게 하라,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모세에게 말했다. 이것을 너희는 믿어라-이것입니다. 모세가 가져야 할 자기 의식이 무엇입니까? 자기 정체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역사 하신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만 믿어라-그래서 그들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를 통한 이적(異蹟)입니다.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백성들로 믿게 하려 하셨고 모세도 그것을 믿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기적을 믿으십니까? 어느 날, 주일학교 여선생님 한 분이 종교서적을 읽다가 자유주의자들이 써놓은 좋지 않은 책을 잘못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학교 어린아이들을 앞에 놓고 가르칠 때에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쳐서 물이 갈라지고, 그래서 건너갔다고 했는데, 성경의 그 이야기는 좀 잘못된 것 같아. 그런 기적은 없었을 거야. 홍해라는 말은 '갈대 바다'라는 뜻이거든. 깊이 6인치밖에 안 되는 얕은 바다를 건너갔던 거지"-이런 식으로 아는 체를 했던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듣고 있던 어린이 하나가 벌떡 일어서더니 "아, 하나님, 이적을 나타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이 어리둥절해서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그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6인치밖에 안 되는 물에 그 많은 애굽 군사들이 다 빠져죽었으니 이적이 아닙니까?"
여러분, 성경을 믿으려면 똑똑히 믿어야 합니다. 전부를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적을 빼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의 생애에서 이적을 뺀다면 모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요렇게, 저것을 조렇게 굴려 생각하고 꿰뚫어본다 해도 소용없는 짓입니다. 성경은 이적으로 꽉 찼습니다. 역사는 이적으로 충만합니다. 우리는 이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가 모세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적의 권세를 그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사람'됨을 믿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생애는 이적으로 충만하고, 이적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역사 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하시는 모든 역사에 우리는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전적인 순종입니다. 그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물을 내어 먹일 때, 반석을 치면서 실수를 합니다. 백성들이 하도 그를 원망하니까 '이 패역한 놈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하고 혈기를 부리면서 반석을 두 번 칩니다.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너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다'하고 심판해버리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계속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높여야 하고 그는 하나의 '사환'으로서 겸손하고 온유하게 끝까지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감정으로 잘못 행사함으로 말미암아 불 신앙의 사람으로 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민 20장).
우리는 나도 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남도 나를 믿어주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믿으신 것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다 의심을 해도 좋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이것 하나만은 믿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었기에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내가 내 남편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남편을 믿고, 하나님을 믿기에 아내를 믿고, 하나님을 믿기에 집을 나간 아들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오늘도 함께 하시고, 큰 경륜을 이루어나가고 계십니다. 하므로 그 안에서 나를 믿고, 내 이웃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름에 대하여 우유부단하다면 기회에 대한 큰 도적이 됩니다. 이것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이것을 염려하는 것은 심리학적인 살인입니다.
여기에 기피와 소심한 생각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배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 그 안에서 나를 믿고 남을 믿고 교회를 믿고 성도의 교제를 믿고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 믿음에 따르는 정확한 순종입니다. 깨끗한 순종이 있을 때에 나타나게 될 능력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도와 축복(창세기 9장 20절~29절) (0) | 2024.06.09 |
---|---|
가장 복된 사람(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0) | 2024.06.09 |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누가복음 24장 24절~35절) (0) | 2024.06.09 |
스스로 버리노라(요한복음 10장 11절~18절) (0) | 2024.06.09 |
네 입을 넓게 열라(시편 81편 8절~16절) (0) | 2024.06.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