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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누가복음 24장 24절~35절)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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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누가복음 24장 24절~35절)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인간이 무엇이냐?----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소망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은 꿈과 소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무엇입니까?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했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은 다음 완전히 밀폐합니다. 빛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해놓으면 그 쥐가 3분 안에 죽습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희망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독에 쥐를 넣고 뚜껑을 닫을 때에 빛이 조금 들어가게 해주면, 이 경우의 쥐는 36시간이나 살아 있습니다. 똑같은 여건입니다. 쥐가 스스로 밖에 나올 수도 없고, 먹을 것을 넣어준 것도 아닙니다.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 빛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le Brunner)는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 삶의 의미에는 소망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을 마시고 소망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신문에 '삼십 년 걱정하다가 죽은 사람'이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기사가 났었습니다. 어느 테니스 선수의 어머니가 치과에서 이를 치료받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습니다.

테니스 선수는 극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후 30년이 넘도록, 이 선수는 이가 아무리 아파도 치과라면 문전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치과에 가면 꼭 죽을 것만 같은 강박관념에 매여버렸습니다.

테니스 선수쯤 되면 남달리 건강한 축에 속합니다. 이빨 치료 정도로 죽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심각한 절망감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30년이나 치과를 피하던 그가 어느 날은 치과에 가지 않고는 죽고 말 지경으로 치통이 심했습니다.

하는수없이 치과에 갔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받다가 결국은 그도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습니다. 매우 중요한 것을 일러주는 예화입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실망하여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 두 제자를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일곤 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난센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소망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상황은 최악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거기에다 경제적 빈곤, 사회적 무질서, 종교적 타락 모든 면에서 혼란하고 절망스러운 사회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험난한 역사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근거는 '메시야 대망 사상'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하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Messianic Expectation)이라는 철저한 신앙으로 저들은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메시야를 기다렸던지 심지어는 '처녀가 메시야를 잉태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베들레헴에서는 시집가지 않는 노처녀들이 많아졌을 정도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철저하고 간절하게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행하시는 일, 권위 있는 말씀, 그 능력과 이적을 볼 때에 그는 바로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온 생애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우리는 이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구속할 자이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러한 메시야가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들은 절망합니다. 당연히 높은 보좌에 앉아야 하고 왕이 되어야 하고 다윗의 보좌에서 호령하여야 할 분이 왜 그런 고난을 당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의롭고 거룩한 분이 비난받고 고통받고 십자가까지 져야 하다니---그들은 주께서 십자가를 지는 순간까지도 '혹시나'하는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으니까 십자가에 못박혔다가도 성큼 뛰어내리실 수 있을 것이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기막힌 능력을 가지신 분이 그렇게 죽으실 리가 없다'---그러나 예수님은 끝내 내려오시지 않고 죽으셨습니다. 장사되셨습니다. 그들의 소망이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삶의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죽음은 절망할 사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십자가 죽음은 오랫동안 예언되어온 구약의 성취입니다. 말씀이 여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하나의 드라마로 본다면 십자가 사건의 대목은 클라이맥스에 해당합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멸망이 아니라 승리입니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이처럼 영광된 사건 앞에서 왜 슬퍼해야 합니까? 왜 절망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였습니다.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지 않으신다고 한들 그 육신의 생명이 영원한 것입니까?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 부활생명이 더 높은 차원에서 역사를 이루어낸다는 것---이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읽다보면 불만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어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는데, '빈 무덤만 보고 왔다고 하더라'---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으면 좀 찾아보면 되지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무덤을 뒤져보든지 만났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왜 확인해보지 않습니까?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24절)"---도대체 틀렸습니다. 이런 소극적인 자세로 어떻게 신앙을 얻겠습니까? 더욱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동행을 하고 있는데도 이 엠마오 길의 두 제자는 그것을 몰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이 근심 중에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하고 질문하십니다. "이보시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시오? 예수님이 죽으셨소!"하고 제자들이 볼멘소리로 대꾸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26절)"하시고 예수님은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27절)" 설명하십니다. 이 얼마나 난센스입니까?

여러분,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사건은 엄연히 생명적이요 소망적인 사건입니다. 문제는 저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눈이 닫혀 있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차려야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다같이 강단을 향하여 보고 있지만,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요 눈떠 있다고 다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은 3부 예배이지만 좀 있다가 4부 예배 때에 보면 점심 잡수시고 와서 그런지 눈뜨고 주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분명히 눈을 뜬것은 같은데 졸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또한 욕망이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돈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은 보이는 것이 돈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돈 좀 벌어야겠다'---이런 생각을 합니다. 욕망의 눈을 가진 사람,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합니다.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 시기와 질투와 더러운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의 눈은 볼 것을 볼 리가 없습니다. 왜 사랑을 하지 않느냐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열심히 비판합니다. 자신의 사랑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사랑만 평가하고 있습니다. 남의 선행에 대해서만 비판을 합니다. 그 속에 질투, 시기, 자기중심적 욕망이 있기 때문에 참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강단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이 사시(斜視)가 되어 이상한 데만 보고 있어요. 한 시간 내내 앉아 있어봐야 한 가지 말씀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촛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눈이 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찰스 알멘(Charles. L. Allen)이라는 사람은 「God's psychiatry」라는 저서에서 세 가지의 시력을 들고 있습니다. 첫째가 신체적 시력입니다. 우리가 눈을 떴기에 아름다운 경치도 감상하고, 여러 가지 생각도 가능한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이 모든 것들이 일시적으로 나하고 상관이 없어져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좋은 눈을 주셔서 저 뒤쪽에 앉아 하품하는 사람까지 보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똑똑히 보입니다. 눈이 밝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만일 눈이 나쁘면 뿌옇게 보고 마는 것입니다. 밝은 눈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정신적 시력입니다. 이성(理性)이 밝아야 합니다. 비판하고 추리하고 통합하는 사고능력입니다.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총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력이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제3의 시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영적(靈的)시력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우주비행사 에드윈 올드린(Edwin Aldrin) 대령이 헝가리의 한 대학을 방문하여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달나라에 첫발을 디디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가까이 느껴지더라고 했습니다. 강연을 듣고 있던 어느 대학생이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소련의 가가린은 우주에 가서도 하나님을 못 보았다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십니까?" "마음이 정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영의 시각으로라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하고 올드린 대령은 대답하였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답변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연다'는 말이 세 번 등장합니다. 희랍어로 '디아노이고'라 하는 이 단어를 세 가지로 다르게 번역하여 사용합니다. 31절에는 "눈이 밝아져"---눈을 열었다는 뜻이요, 32절에는 "성경을 풀어"---이것도 성경을 열었다는 뜻입니다. 또 45절에서는 '디아노이고'를 직역하여 "마음을 열어"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 가지 표현을 종합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여십니다. 주도권(initiative)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십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성경을 열어주시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실 때에 성경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의심, 세속적인 욕망, 편견, 더디 믿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밝은 마음을 주시고 성경을 열어주심으로 비로소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경험의 재통합, 만남의 관계---encounter, confrontation의 문제를 성경은 '뜨거워지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생각보다 먼저 가는 것입니다. 느낌보다 먼저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판단보다 먼저 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참으로 오묘합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저들이 깨닫고 알고, 그리고 뜨거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 아닙니다. 뜨거움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깨달은 것입니다.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중생의 체험 그렇습니다. 거듭나는 삶도 분명히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본인이 모른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모든 생명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어머니의 젖을 먹었다고 하는데, 과연 어머니의 젖을 빨던 장면이 기억납니까? 만약 기억난다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너댓 살까지 젖을 먹은 사람일 것입니다. 느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의식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에서도 그러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랑의 느낌이 마음속에 생겼습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좋다, 저것은 어떻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의식보다 훨씬 먼저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뜨겁다'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일기장에 씌어 있는 내용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아침, 그는 루터의 「로마서주석」을 읽고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주제로 성경을 죽 풀이해나간 책입니다. 아무튼 이 책을 읽고 있던 중에 아홉 시 십 오 분 경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였고, 내 죄를 다 사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경험한 뜨거움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 마음속의 모든 정욕과 죄악이 물러가면서 주님만을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웨슬리는 이 기쁨을 참을 수 없어서 밖으로 뛰어나가 증거 하였고, 그가 나가서 간증할 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령 운동이 크게 번져 지금의 감리교를 이루게 되었고, 부패와 타락으로 멸망 직전에 있던 영국을 건져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뜨거움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까? 본문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성경이 우리의 마음을 엽니다. 고난의 메시야를 만날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성령이 감동할 때에 그 마음이 뜨거워지며 주님을 만나는 큰 기쁨에 충만하게 됩니다. 어느 어린아이가 공부를 하고 있고 그 옆에서 어머니가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를 보고 "왜 우시는 거예요?"하고 어린아이가 묻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우는 것이란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야. 너무나 감사하여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구나." 이런 충만한 기쁨과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읽습니까? 심심풀이 옛날이야기 삼아 읽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에 '내가 너희 죄를 사하였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귀에 들려와야 합니다. 이러한 말씀이 들려올 때까지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 뜨거워지는 체험을 경험하십시오. 이 뜨거움의 체험이 있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옛날에 정몽주(鄭夢周)의 어머니는 아들 옷을 입힐 때에 안은 빨간 천으로, 겉은 파란 천으로 해 입혔다고 합니다. 사람이 밖으로는 평화와 온유와 겸손이 나타나야 하고 안에는 불붙는 정열을 소유해야 한다는 뜻이 담긴 일화입니다.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네 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무감각, 무책임, 무관심, 무목적. 돈에 미치고 발광하는 열정은 있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뜨거움이 없는, 감격이 없는 세대입니다. 내 욕심 채우는 데는 발벗고 나서지만 이웃에 대해서는 한없이 냉담한 현실입니다.

여러분, 성경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리스도를 만나십시다. 그 귀한 뜨거움을 체험하는 순간, 모든 정욕이 물러가고 감정이 순화되어 모든 지혜가 바로 서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바로 보게 되고, 나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내가 가야 하는 사명의 길도 깨닫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뜨거움'을 체험하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복음을 증거 합니다.

절망의 원인은 정치나 경제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나 자신이 하나님과 만나는 그 뜨거운 체험이 없기 때문에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만이 이 세상을 다시 밝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세계,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세계를 그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올바른 역사의식으로 증인의 생을 살아갈 때,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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