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 1절~6절)

by 【고동엽】 2024. 6. 9.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 1절~6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의 기초가 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 주고받는 말은 말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믿지 못하는 행위는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들으며, 또 믿음으로 가르치고 믿음으로써 배울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근본이 되는 자세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의 은총, 그의 말씀, 그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뿌리요, 기본이요,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데 있어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시험이 있습니다.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입니다. 거짓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는 바에 거짓이 있다면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위선'이라는 함정은 참으로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둘째는 '외식'입니다. 겉으로는 훌륭한 믿음을 가진 듯하지만, 속으로는 믿음이 없습니다. 아름답게 장식된 믿음의 행위는 있으나 믿음의 내용은 없는 것입니다. 위선적이요 형식적인 믿음이라 할 것입니다. 가령 결혼생활에 비유해본다면, 믿고 사랑해서 결혼을 했으나 점차 생활만 남고 사랑도 믿음도 모두 사그라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생활이라 한다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남 보기에는 그럴듯합니다. 자식을 낳고 잘사는 것 같으며 사회적으로도 결혼생활이 지속되고 있습니다마는, 가장 귀중한 믿음과 사랑이 없습니다. 이같은 믿음은 외식주의적(外飾主義的) 믿음입니다. 또한 이러한 믿음은 의식주의(儀式主義)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신앙의 의식---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그에 따르는 많은 신앙적 의식 행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식만 남고 마음이 드려지지 않는다면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로서입니다. 그런데 제사는 있으되 믿음이 없을 때, 하나님은 이러한 의식주의를 크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식주의와 의식주의에 대해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으며, 때로는 이러한 외식주의에 침잠된 바리새인들의 의식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의 행위는 동기(動機)의 변화에 있습니다. 동기, 중심(中心)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행위, 생각, 모든 역사에 있어서 그 중심을 보십니다.

이 세상은 결과주의(結果主義)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방법도, 동기도 다 정당화하려 합니다. 정당화합니다. 실적주의(實績主義), 업적주의(業績主義)에 치중합니다. 실적에 따라 모든 것이 합리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동기주의(動機主義)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방법은 주님의 교훈에 있습니다. 다만 그 동기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시작, 그 중심부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동양적 사고로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일에나, 형제의 우애를 말할 때에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또한 남녀의 사랑에도 우리는 정성을 요구합니다. 한 그릇 물을 대접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합니다. 말 한마디에도 공손함과 정성이 깃들고, 선행을 하는 데에도 정성이 필수적입니다. 정성, 즉 마음이 깃들지 않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동양에서도 철학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세 가지의 교훈을 주십니다. 첫째,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과 5절과 16절에 걸쳐 세 번을 친히 강조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여러 번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은 신비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은밀해야 합니다. 그와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도 모르는 은밀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분의 아내는 밥을 지을 때에 쌀을 잘 일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밥을 먹다보면 종종 돌이 씹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십 년 동안 한번도 아내 앞에서 돌을 씹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지요. 어쩌다가 돌이 씹히면 슬그머니 나가서 혼자 처리해버리곤 한답니다. 밥에다 돌을 넣고 싶어서 일부러 넣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성껏 짓느라고 하는데도 실수로 그렇게 되는데 그것으로 아내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이같이 비밀스러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은근하게 쌓이고 쌓인 것들이 충만하고 가득하게 될 때에 진정 아름다운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별것 아닌 것을 나타내고 싶어합니다. 피아르(PR)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많은 것 같지만, 알맹이는 텅 비어 속 빈 강정과 같습니다. 이래서 허무해지고 무상(無常)을 느끼게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은근하고 은밀한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십시다. 그리할 때에 자녀들이 자라 하나씩 하나씩 부모의 사랑을 깨달아가면서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일이 설명하려들고 제발 알아달라고 하는 통에 자녀들은 사랑을 간섭으로 여기고 오히려 성가셔하는 것입니다. 은밀함에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 봉사하는 것, 선을 베푸는 것---이 모든 일이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충실한 것이 됩니다. 항상 그득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실은 은밀한 것입니다. 의(義) 또한 은밀합니다.

영국정부는 국가적으로 크게 수훈(殊勳)을 세운 고든(Gorden, C. G.) 장군을 치하하려 했습니다.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를 건립하려 했지만 장군은 이 일을 수락하지 않습니다. 작위(爵位)를 수여하고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데에도 거절합니다. 중국으로 아프리카로 전후(前後) 33회나 전진(戰塵)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워온 장군에 대하여 영국정부는 어떻게든 기념을 하고 싶어서, 조그마한 금메달에 그 공을 기록하여 증정했습니다.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유품(遺品)을 정리하는데, 당연히 간직했어야 할 메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금메달의 행방이 궁금해진 사람들이 애써 수소문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가슴 뭉클한 곡절이 숨어 있었습니다. 맨체스터에 대 흉년이 들었던 해에, 장군은 그 메달을 녹여 팔아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였던 것입니다. 장군의 일기장에는 그 사실에 관하여 단지 이렇게만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선물을 그리스도께 바쳤다"---바로 이 순간의 행복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행복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기뻐하십니다. 거기에 행복과 감사와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본능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 첫째가 소유욕입니다. 가지고 싶어하는 것, 먹고 싶어하는 것, 가능한 한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또 하나는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욕망이 이에 속합니다. 그 다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인정받으려 하는, 칭찬 받고자 하는 본능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책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저도 공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색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리고로 가는 후미진 골짜기에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버리지만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야기의 무대를 여리고로 가는 후미진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바꾸어 가정해보고 있습니다. 만일에 예루살렘의 큰 거리에 저가 쓰러져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제사장이 저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못했을) 것이다, 레위인이 못본 체하지 않았을(못했을)것이다---이것이 그 책의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에서는 선을 행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채근담」에는 사람의 이러한 본성을 꿰뚫어보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당자(當者) 앞에서 칭찬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며, 사람이 보는 데서 선행을 베푸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좀더 은밀한 중에서 좀더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선행은 칭찬과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칭찬과 존경은 결과적으로 따르는 것이요, 결코 동기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동기나 목적으로 행하는 선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의가 그러하고 진실이 그러합니다. 때로 우리가 선을 행하고도 낙심하는 것은 선의 은밀함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망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마음이 자기의 자유와 양심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학술적 용어로는 '주체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자기의 생각이 이루어지고 남의 생각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정체(正體) 없는 인간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은 어데 가고 허깨비만 남아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에게, 둘째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 비밀스러워야 합니다. 남이 모르는 것은 물론이요, 나 자신도 자신이 행한 선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자만(自慢)이 없습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혹시 물으신다고 하여도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대답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당연히 하나님께 돌리는 일인데 선행이라니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내가 조금 나누었을 뿐입니다. 어떻게 선행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마음가짐이 하나님께 대한 비밀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비밀을 지킬 때에 비로소 선행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선행으로 인하여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사람의 칭찬을 기대하여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얻었다면 이미 자기의 상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밀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와 나, 일 대 일의 관계에서, 순수한 동기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절대적 관계에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아버지께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본다'는 말의 헬라 원문은 '안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처럼 고마운 말은 또 없습니다. 세인(世人)이야 무어라 하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말하든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신다는 말에는 두 가지 반응이 뒤따릅니다. 첫째 사람은 그 말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세상 누구가 무어라고 하든지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내 중심을 아신다'며 기뻐합니다.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이 아신다고 할 때에 두려워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더라도 두려워할 것 없지만,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은 몹시도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위선을 아시는 것이 두렵습니다. 내 양심이 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깊은 곳을 아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외모를 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양(量)을 측정하시지 않습니다.

욥기 23장 10절에서 욥은 이러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의 고통을 기억하십니까? 그의 시련을 아십니까? 그 모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비난하고 책망하는 그 속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사실로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죽음을 지켜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와 운명을 다 아십니다. 마가복음 12장 41절과 누가복음 21장 1절 이하에는 헌금을 드리는 부자와 과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많은 돈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돌아보시지 않습니다. 부자의 헌금은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자 한 헌금이었으므로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과부는 두 푼 동전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하나님께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체를 드렸느니라(막 12:44)." 주님은 그 중심을 아십니다. 그리고 칭찬하십니다. "자기의 것 전체를 드렸느니라."

또 하나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보시고, 아시고, 그리고 채워주십니다. 누구든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베풀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냉수 한 그릇의 선행이라도 주님은 그것을 고귀하게 받으십니다. 이 가장 작은 선행에 대해서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친히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의 20절 말씀에도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꾸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그 심령에, 그 생활에, 그 장래에, 그 자손에, 그리고 그 나라에,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도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저는 혈혈단신으로 남하(南下)하여 병역과 학업을 마치는 중에 조금 고생을 했습니다. 간혹 남하하신 고향 어른들을 뵙게 되면 꼭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자네는 어디를 가도 밥은 굶지 않을 걸세. 자네 할아버지께서 어지간히도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셔서 많이 베푸셨으니, 그 음덕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야." 하기야 저의 기억으로도 그러한 할아버지의 삶을 쉽사리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오가는 손「客」을 집에 청해들여 대접하기를 좋아하시고, 남에게 줄 때에는 '좀더 주어라 좀더 주어라' 하시곤 했습니다. 심지어 세상 떠나실 때에도 '이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곳간문을 열어놓고 다 나누어주어라. 장례식은 잔치로 벌여라.

일주일 동안 마음껏 차려놓고 어려운 사람 청해다가 마음껏 먹도록 해주어라' 하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재물을 모아 자녀에게 물려주겠습니까? 부질없는 일입니다. 진정 자식이 부하게 되기를 원하거든, 오늘 은밀한 중에 선을 행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녀들에게 갚아주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은밀하게 일하십시다.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 하다가 낙심하고 원망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연연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 진정한 안도감, 진정한 자유, 진정한 영광, 진정한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 1절~6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의 기초가 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 주고받는 말은 말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믿지 못하는 행위는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들으며, 또 믿음으로 가르치고 믿음으로써 배울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근본이 되는 자세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의 은총, 그의 말씀, 그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뿌리요, 기본이요,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데 있어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시험이 있습니다.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입니다. 거짓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는 바에 거짓이 있다면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위선'이라는 함정은 참으로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둘째는 '외식'입니다. 겉으로는 훌륭한 믿음을 가진 듯하지만, 속으로는 믿음이 없습니다. 아름답게 장식된 믿음의 행위는 있으나 믿음의 내용은 없는 것입니다. 위선적이요 형식적인 믿음이라 할 것입니다. 가령 결혼생활에 비유해본다면, 믿고 사랑해서 결혼을 했으나 점차 생활만 남고 사랑도 믿음도 모두 사그라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생활이라 한다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남 보기에는 그럴듯합니다. 자식을 낳고 잘사는 것 같으며 사회적으로도 결혼생활이 지속되고 있습니다마는, 가장 귀중한 믿음과 사랑이 없습니다. 이같은 믿음은 외식주의적(外飾主義的) 믿음입니다. 또한 이러한 믿음은 의식주의(儀式主義)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신앙의 의식---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그에 따르는 많은 신앙적 의식 행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식만 남고 마음이 드려지지 않는다면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로서입니다. 그런데 제사는 있으되 믿음이 없을 때, 하나님은 이러한 의식주의를 크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식주의와 의식주의에 대해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으며, 때로는 이러한 외식주의에 침잠된 바리새인들의 의식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의 행위는 동기(動機)의 변화에 있습니다. 동기, 중심(中心)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행위, 생각, 모든 역사에 있어서 그 중심을 보십니다.

이 세상은 결과주의(結果主義)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방법도, 동기도 다 정당화하려 합니다. 정당화합니다. 실적주의(實績主義), 업적주의(業績主義)에 치중합니다. 실적에 따라 모든 것이 합리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동기주의(動機主義)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방법은 주님의 교훈에 있습니다. 다만 그 동기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시작, 그 중심부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동양적 사고로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일에나, 형제의 우애를 말할 때에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또한 남녀의 사랑에도 우리는 정성을 요구합니다. 한 그릇 물을 대접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합니다. 말 한마디에도 공손함과 정성이 깃들고, 선행을 하는 데에도 정성이 필수적입니다. 정성, 즉 마음이 깃들지 않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동양에서도 철학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세 가지의 교훈을 주십니다. 첫째,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과 5절과 16절에 걸쳐 세 번을 친히 강조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여러 번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은 신비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은밀해야 합니다. 그와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도 모르는 은밀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분의 아내는 밥을 지을 때에 쌀을 잘 일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밥을 먹다보면 종종 돌이 씹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십 년 동안 한번도 아내 앞에서 돌을 씹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지요. 어쩌다가 돌이 씹히면 슬그머니 나가서 혼자 처리해버리곤 한답니다. 밥에다 돌을 넣고 싶어서 일부러 넣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성껏 짓느라고 하는데도 실수로 그렇게 되는데 그것으로 아내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이같이 비밀스러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은근하게 쌓이고 쌓인 것들이 충만하고 가득하게 될 때에 진정 아름다운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별것 아닌 것을 나타내고 싶어합니다. 피아르(PR)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많은 것 같지만, 알맹이는 텅 비어 속 빈 강정과 같습니다. 이래서 허무해지고 무상(無常)을 느끼게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은근하고 은밀한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십시다. 그리할 때에 자녀들이 자라 하나씩 하나씩 부모의 사랑을 깨달아가면서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일이 설명하려들고 제발 알아달라고 하는 통에 자녀들은 사랑을 간섭으로 여기고 오히려 성가셔하는 것입니다. 은밀함에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 봉사하는 것, 선을 베푸는 것---이 모든 일이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충실한 것이 됩니다. 항상 그득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실은 은밀한 것입니다. 의(義) 또한 은밀합니다.

영국정부는 국가적으로 크게 수훈(殊勳)을 세운 고든(Gorden, C. G.) 장군을 치하하려 했습니다.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를 건립하려 했지만 장군은 이 일을 수락하지 않습니다. 작위(爵位)를 수여하고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데에도 거절합니다. 중국으로 아프리카로 전후(前後) 33회나 전진(戰塵)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워온 장군에 대하여 영국정부는 어떻게든 기념을 하고 싶어서, 조그마한 금메달에 그 공을 기록하여 증정했습니다.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유품(遺品)을 정리하는데, 당연히 간직했어야 할 메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금메달의 행방이 궁금해진 사람들이 애써 수소문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가슴 뭉클한 곡절이 숨어 있었습니다. 맨체스터에 대 흉년이 들었던 해에, 장군은 그 메달을 녹여 팔아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였던 것입니다. 장군의 일기장에는 그 사실에 관하여 단지 이렇게만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선물을 그리스도께 바쳤다"---바로 이 순간의 행복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행복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기뻐하십니다. 거기에 행복과 감사와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본능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 첫째가 소유욕입니다. 가지고 싶어하는 것, 먹고 싶어하는 것, 가능한 한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또 하나는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욕망이 이에 속합니다. 그 다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인정받으려 하는, 칭찬 받고자 하는 본능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책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저도 공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색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리고로 가는 후미진 골짜기에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버리지만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야기의 무대를 여리고로 가는 후미진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바꾸어 가정해보고 있습니다. 만일에 예루살렘의 큰 거리에 저가 쓰러져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제사장이 저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못했을) 것이다, 레위인이 못본 체하지 않았을(못했을)것이다---이것이 그 책의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에서는 선을 행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채근담」에는 사람의 이러한 본성을 꿰뚫어보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당자(當者) 앞에서 칭찬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며, 사람이 보는 데서 선행을 베푸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좀더 은밀한 중에서 좀더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선행은 칭찬과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칭찬과 존경은 결과적으로 따르는 것이요, 결코 동기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동기나 목적으로 행하는 선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의가 그러하고 진실이 그러합니다. 때로 우리가 선을 행하고도 낙심하는 것은 선의 은밀함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망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마음이 자기의 자유와 양심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학술적 용어로는 '주체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자기의 생각이 이루어지고 남의 생각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정체(正體) 없는 인간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은 어데 가고 허깨비만 남아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에게, 둘째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 비밀스러워야 합니다. 남이 모르는 것은 물론이요, 나 자신도 자신이 행한 선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자만(自慢)이 없습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혹시 물으신다고 하여도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대답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당연히 하나님께 돌리는 일인데 선행이라니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내가 조금 나누었을 뿐입니다. 어떻게 선행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마음가짐이 하나님께 대한 비밀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비밀을 지킬 때에 비로소 선행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선행으로 인하여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사람의 칭찬을 기대하여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얻었다면 이미 자기의 상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밀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와 나, 일 대 일의 관계에서, 순수한 동기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절대적 관계에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아버지께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본다'는 말의 헬라 원문은 '안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처럼 고마운 말은 또 없습니다. 세인(世人)이야 무어라 하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말하든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신다는 말에는 두 가지 반응이 뒤따릅니다. 첫째 사람은 그 말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세상 누구가 무어라고 하든지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내 중심을 아신다'며 기뻐합니다.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이 아신다고 할 때에 두려워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더라도 두려워할 것 없지만,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은 몹시도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위선을 아시는 것이 두렵습니다. 내 양심이 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깊은 곳을 아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외모를 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양(量)을 측정하시지 않습니다.

욥기 23장 10절에서 욥은 이러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의 고통을 기억하십니까? 그의 시련을 아십니까? 그 모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비난하고 책망하는 그 속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사실로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죽음을 지켜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와 운명을 다 아십니다. 마가복음 12장 41절과 누가복음 21장 1절 이하에는 헌금을 드리는 부자와 과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많은 돈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돌아보시지 않습니다. 부자의 헌금은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자 한 헌금이었으므로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과부는 두 푼 동전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하나님께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체를 드렸느니라(막 12:44)." 주님은 그 중심을 아십니다. 그리고 칭찬하십니다. "자기의 것 전체를 드렸느니라."

또 하나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보시고, 아시고, 그리고 채워주십니다. 누구든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베풀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냉수 한 그릇의 선행이라도 주님은 그것을 고귀하게 받으십니다. 이 가장 작은 선행에 대해서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친히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의 20절 말씀에도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꾸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그 심령에, 그 생활에, 그 장래에, 그 자손에, 그리고 그 나라에,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도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저는 혈혈단신으로 남하(南下)하여 병역과 학업을 마치는 중에 조금 고생을 했습니다. 간혹 남하하신 고향 어른들을 뵙게 되면 꼭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자네는 어디를 가도 밥은 굶지 않을 걸세. 자네 할아버지께서 어지간히도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셔서 많이 베푸셨으니, 그 음덕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야." 하기야 저의 기억으로도 그러한 할아버지의 삶을 쉽사리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오가는 손「客」을 집에 청해들여 대접하기를 좋아하시고, 남에게 줄 때에는 '좀더 주어라 좀더 주어라' 하시곤 했습니다. 심지어 세상 떠나실 때에도 '이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곳간문을 열어놓고 다 나누어주어라. 장례식은 잔치로 벌여라.

일주일 동안 마음껏 차려놓고 어려운 사람 청해다가 마음껏 먹도록 해주어라' 하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재물을 모아 자녀에게 물려주겠습니까? 부질없는 일입니다. 진정 자식이 부하게 되기를 원하거든, 오늘 은밀한 중에 선을 행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녀들에게 갚아주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은밀하게 일하십시다.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 하다가 낙심하고 원망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연연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 진정한 안도감, 진정한 자유, 진정한 영광, 진정한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