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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찾는 한 사람(예레미야 5장 1절~6절)

by 【고동엽】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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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찾는 한 사람(예레미야 5장 1절~6절)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성을 사(赦)하리라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로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磐石)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愚蠢)한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귀인(貴人)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結縛)을 끊은지라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그리고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

 

중국 춘추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魯)나라의 한 마을에 가난한 여자가 하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웃 제(齊)나라에서 노나라를 정복하려고 이 마을에도 쳐들어왔습니다. 그녀는 한 아기는 안고 한 아기는 손목을 잡은 채 이끌고 난리를 피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적은 점점 가까이 쫓아옵니다. 그러나 여자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느라 도저히 빨리 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잡혔구나 싶었을 때, 여자는 부득불 한 아기를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얼른 내려놓고, 손목을 잡고 있던 아기만 데리고 뛰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차라리 손목 잡고 있던 아기를 버리고, 안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가야 빨리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적의 장군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전에 아기를 버리는 그녀를 보았던 장군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품에 안고 있던 아기는 내려놓고 손목 잡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도망을 쳤느냐?" 여자는 조용히 설명했습니다. "내가 품에 안고 가던 아기는 내 아이요, 손목을 잡고 가던 아기는 내 형님의 아이입니다. 나는 내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적인 사랑이고, 형님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공적인 의입니다. 의를 버리고 사적인 사랑을 택하여 형님의 아이를 버리고 내 자식을 구원한다면 나는 좋겠지요. 허나 그렇게 한다면 우리 집안꼴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나라 꼴은 또 무엇이 되겠습니까?" 제 나라 장군은 크게 감동하여 "의를 아는 여자가 있는 도성은 쳐들어갈 수 없다. 의가 있는 나라는 공격하지 않는 법이다"하며 철수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잠언 14장 34절은 말씀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흥망성쇠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느 때에 망하고 어느 때에 흥합니까? 경제가 중요한 것 같으나 그실 가난해서 망한 나라는 없습니다.

정치도 중요하고, 기술도 필요하고, 자본도 필요하고, 요샛말로 많은 노하우(Knowhow)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저 는 진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번영, 반갑지 않습니다. 잘사는 것, 바라지 않습니다. 아직 별로 잘살지도 못하면서 벌써부터 이 꼴인데 더 잘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것 같습니까? 이보다 더 잘살게 되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또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뻔합니다. 불보듯이 뻔한 멸망이 눈앞에 있습니다. GNP 올라가는 것, 탐탁치 않습니다. 이 이상 뭘 더 잘살겠다는 것입니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문제는 도덕성입니다. 도덕적으로 망하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얼마 가지지도 못했는데 벌써 사치하고 이기주의다 뭐다 정신없어요. 이래가지고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느 나라든 망할 때에 보면 도덕적 타락으로 망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 지식도 있고 유능합니다. 인물도 훤하게 잘났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썩었어요. 요사 이 이런 부정 저런 부정 저질렀다 하고 신문에 난 얼굴들 좀 보세요. 하나같이 잘생겼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속이 썩었어요. 저 망하고 나라 망치고, 도대체 이 꼴이 뭡니까? 이런 사람들이 앞에 서 가지고 무얼 한다는 것입니까? 한심합니다. 참 문제올시다. 한 사람의 인격을 생각해보세요. 똑똑한 것, 그것이 능수가 아닙니다. 일류대학을 따지지 않습니다. 지식이고 뭐고 반갑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돈이 없습니까 기술이 없습니까? 왜 좋은 상품을 못 만듭니까? 그까짓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쩔쩔맵니다. 정직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사 하나를 박아도 똑바로 박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모양입니다. 정직하지 못해요. 개인도 나라도 민족도 사회도 모름지기 의가 있어야 합니다. 의가 있고야 설 수 있습니다. 공의가 있어야 그 기초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찾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경제, 번영, 자유…… 이런 것 대수롭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그런 것, 별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과 의로움, 바로 그것을 찾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머니에게 효성이 아주 지극한 왕이 있었습니다. 나라도 잘 다스렸는데, 백성들이 법을 반드시 지키도록 형벌을 엄하게 했습니다. 법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잡아다가 40대씩 매를 쳤습니다. 이른바 태형입니다. 그러자 나라의 질서가 제대로 잡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교롭게도 왕의 어머니가 범죄를 저질러서 왕 앞에 붙들려왔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저마다 근심스러운 얼굴로 '저 효성이 지극한 왕이 이제 자기 어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에 어머니라고 봐준다면 모처럼 세운 이 나라의 공의와 질서는 와르르 무너져버릴 건데…… 어찌될 것인고?'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재판장 자리에 앉은 왕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만에야 무겁게 입을 열어 명령했습니다. "저 여자를 기둥에 묶으라! 그리고 법대로 40대를 매우 치라!"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니 안칠 수가 없었습니다. 막 치려는 순간, 갑자기 왕이 달려들어 자기 옷을 다 벗고 어머니를 꽉 껴안았습니다. 그렇게 왕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40대의 매를 고스란히 다 맞았습니다. 왕의 등에서 피가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이 나라의 공의를 드높이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 성을 두루 다니면서 공의를 구하는 한 사람을 만나라. 그 한 사람만 찾으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온 성을 사하리라' 하십니다. 사랑의 시각이요 사랑의 외침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적으로 잘 아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는 죄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 죄목이 여러 가지입니다 마는 특별히 남색(南色)을 했습니다. 요샛말로 호모섹스(homosex)를 했다는 말입니다. 아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성적으로도 많이 타락했습니다. 특별히 sodomite라고 하는 말은 아예 남색 행위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동성간에, 혹은 사람과 동물간에 갖는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밖에도 온갖 더러운 행위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더 참지 못하시고 이 도성을 진멸하십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경제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요, 정치 때문에 망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도덕적 타락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망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알고보면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속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5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만일에 의인이 오십 명이면, 사십오 명, 사십 명이면, 삼십 명이면, 이십 명이면, 마지막으로 열 명이면 어찌하시렵니까 하고 하소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 명을 찾으면 내가 그 열 명으로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 이 더러운 도성 전체를 용서하리라 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아무리 죄가 많아도 의인 열 명만 있으면 그 의인 열 명으로 인하여 이 성 전부를 사하리라 하시다니요. 그러나 그 열 명이 없었습니다. 롯이라는 영 시원치 않은 사람이 있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롯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저를 위하여 기도했기 때문에 그 식구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결정적인 이유는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인 열 명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의인이 있으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를 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이 의인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고, 양화가 악화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선교적 의미가 있고, 여기에 교육적 의미가 있고, 여기에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의인 열 명이 있다면 그 열 명으로 인하여 그래도 언젠가는 한 사람 한 사람 좋은 영향을 받아서 구원을 받게 될 날이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 때에는 어떠했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사람이 육체가 되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동물적인 고깃덩이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더는 보실 수 없었어요. 산 사람 없이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쓸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로 천하를 진멸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계산법이 있습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의 인구가 오만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의인 열 명을 보시고 그 오만 명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과 엄청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10:50000입니다.

성경에서 보는바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명만 있으면 이 도성 전부를 사하리라 하십니다. 얼마나 애끊는, 답답해하시는 말씀입니까? 그 한 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보고 전체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랍고 엄청나고 무변광대한 사랑과 외침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한사람의 인격, 한사람의 사람됨을 놓고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의 인격을 저울질해서 몇 가지가 장점이고, 몇 가지가 단점이고, 몇 가지가 옳다 그르다,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인격이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허물이 많고 다 부족해도, 하나님 마음에 드는 훌륭하고 귀한 것이 그 사람에게 한 가지라도 있으면 거기에 마음을 두십니다. 그 나머지 것은 다 덮어두시고 다 의롭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과의 관계요 사랑의 시각입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좋아서 사랑합니까? 우스운 이야기지만 제 친한 친구가 결혼을 했기에 그 집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갓 결혼한 신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못생겨 보입니다. 마침 신부가 잠깐 부엌으로 나간 사이에 "자네, 저 얼굴을 평생보고 살 건데 괜찮은가?"하고 친구를 떠보았지요. 그랬더니 이 친구, "가만히 있어봐. 조금 있다가 보면 알아"하고 대답합니다. 이윽고 신부가 들어와 차를 따라주고 다시 방을 나가는데 친구가 저를 툭툭 치며 신부를 가리킵니다. "지금 봐, 어서. 지금 보라구." 눈을 들어보니 그것 참, 뒷모습이 예뻐요. 그래서 결혼했다고 하는 사연입니다. 사실 어디 한 군데가 아주 아름답고 마음에 딱 들면 결혼하는 것이지 이것저것 다 따지려들면 결혼을 할 수 있어요?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다. 좋은 점을 극대화하기 시작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다 좋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 아니겠습니까?

탕자가 돌아옵니다. 천하에 못된 사람이지요. 아버지 유산을 미리 타내 가지고는 허랑 방탕 내버리고 온 탕자,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쓸데는 하나도 없어요. 몸도 병들었을 터, 성격적으로도 타락했을 터,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술 마시는 것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 무엇에 쓰겠어요? 그러나 돌아왔다는 그 하나만으로 아버지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라고 합니다. 돌아온 것이 너무나 반가워서 전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다윗 왕을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 모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종 다윗은 정직한 사람이라'---정직한 믿음, 그것 하나 보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또한 모세도 결정적인 허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랑하십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심지어 모세가 이방 여자를 첩으로 맞이한 바로 그 시점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다.

온 천하에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이 없다'---그 온유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랑하셨습니다. 다 수용하셨어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성경공부 하는 교인들로부터 받는 질문 중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자, 우리가 깨끗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천하에 못된 놈 하나가 있는데 바로 야곱입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못됐습니다. 형님 발꿈치를 잡고 나온 놈인데 어련하겠습니까? 아무튼 태어나서 한다는 짓이 간사하고, 거짓되고, 하는 일마다 참 못마땅해요. 잘한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런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거든요. 그래서 교인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못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야곱이 이렇게 저렇게 다 못됐는데 딱 한 가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야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못됐어요. 그가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 충성하는 마음,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되겠다는, 복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누구도 못 말립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그만 꺼뻑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중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작은 예배당에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몰라요. 낚시질할 때에 쓰는 의자까지 들고 와서 좍 깔았습니다. 요 앞은 물론 저 뒤 보이지도 않는 마당에까지 꽉 차게 앉았는데 예배시간 15분전에 갔는데도 발 들여놓을 데가 없어요. 더욱이 제가 보고 놀란 것은,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는데 거기마다 성경책도 놓고 핸드백도 놓았습니다. 자리잡아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 올 거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거기에 앉으려 하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리잡아놓고 있는 것 보니 좀 못됐기는 하지만, 자기친구를 여기 앉혀서 예배드리게 하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은 봐줄만하지요.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잘한들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잘못하는 것 많아요. 그러나 그 중심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를 보시고 전체를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휘청휘청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 믿음을 보시고 모든 행위를 다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은혜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성경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한 사람만 찾으라, 그러면 온 성을 사하리라.'

링컨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이 존경을 받는 그 삶의 비결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껄껄 웃으면서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실패 속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존경받았던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가 87세 때, 알렉산더 메즈어라고 하는 분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 말고는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는, 하나님 말고는 원하는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전도자를 내게 백 명만 주십시오. 그 사람이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관계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지옥의 문을 부술 수 있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백 명만 있으면 이 나라를 구원하겠다 함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말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사람 칠백 명만 주십시오." 칠백 명만 있으면 그 넓은 미국은 산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 그 몇 사람에 의해서 나라도 민족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이렇게 수만 명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특별히 새벽기도에 나온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 부족하지만 여기 앉은 이 분들을 보시고 죄 많은 강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의 잘못도 덮어 주시옵소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편승하고 싶습니까? 부족하지마는 나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정결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로 인하여, 우리로 인하여 이 민족이 복을 받는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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