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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지체의 영광(고린도전서 12장 18절~31절)

by 【고동엽】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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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의 영광(고린도전서 12장 18절~31절)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오래 전 일입니다. 미국 유학 시절에 제가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어느 교회의 주일 설교를 맡아본 적이 있습니다. 주간(週間)에는 학교에 나가 공부를 하고, 주일에는 그 교회에 나가 설교하기를 3년 간 계속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지급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별다른 사례금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교회에서는 매우 훌륭한 자동차를 한 대 사주었습니다. 교회를 오갈 때에 쓰라는 것이었지요. 분수에 넘치도록 좋은 차였습니다. 어찌나 좋은 것이던지 제가 다니는 학교의 교내에서 그보다 더 좋은 차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총장님의 차보다도 더욱 고급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차를 타고 패서디나(Pasadena)의 '프리웨이(Freeway)'라는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도로는 노폭(路幅)이 몹시 좁은 도로입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눈앞에 유리병 깨진 조각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워낙 좁은 길에 차가 많이 밀려 있기 때문에 그 조각들을 비켜서 달리기가 어려웠습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깔고 지나가려는데, '펑'하고 앞바퀴가 터져 버렸습니다. 큰일났습니다. 차는 뒤에서 줄줄이 밀려오는데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차를 한 쪽으로 치워놓으랴, 새 타이어를 갈아 끼우랴 혼자서 쩔쩔맵니다. 그러는데 두 사람이 차를 세워놓고 제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차들에 신호를 보내어 통행을 도와주는가 하면, 타이어 갈아 끼우는 일을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일이 다 끝나자, 경황 중에 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는 제게 "굿바이(Good-bye)!" 인사를 남기고 그들은 총총히 떠나버렸습니다. 그때의 고마웠던 심경이라니, 저는 두고두고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 해도 타이어에 펑크가 난다면 달릴 수 없습니다. 고물차라도 잘 달릴 수 있는 차라면 좋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 해도 잘 달리지 못한다면 고물차만 못합니다. 자동차 한 대는 약 2만여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의 부품이라도 고장이 난다면 나머지 19,999깨의 부품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 작은 부속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제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가 잘못됨으로써 전체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불행은 자기우상화(自己偶像化)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창조주와 섭리자와 경륜자이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피조물된 자기 위치를 떠나려 할 때 인간의 불행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자기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은혜 안에 살면서도 그러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생각해봅시다. 전적으로 부모의 사랑에 의지해서 생을 영위해나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때때로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서 슬퍼하고 고독해하고 눈물흘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은혜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하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병들었거나 건강하거나, 실패했거나 성공했거나, 살거나 죽거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격하며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은사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은사만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낳습니다. 시기 질투보다도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으셨든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한 처지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행복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았으면 낳은 대로,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행복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제쳐놓고 다른 일에만 가치가 있다고 덤벼드는 사람처럼 바보스러운 사람은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나이 들어서 젊었을 당시만을 생각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또한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나이든 사람은 나이든 대로 멋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 젊음과 현재의 나이를 바꾸자고 한다면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이대로가 좋기 때문입니다. 나이든 사람은 든 대로 젊은 사람은 젊은 대로, 여성이면 여성대로 남성이면 남성대로, 지능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어디에 처해 있든지 자신에게 주신 처지를 족하게 여기는 사람, 남의 세계를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러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많되 내가 부러워할 사람은 없다면 그야말로 행복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로, 할 수 있는 일을 소홀히 여기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겠다고 하는 까닭에 불행합니다. 이 또한 미련한 사람입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 안에, 그 전체 안에 '나'라는 작은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전체가 아닙니다.

부분입니다. 나는 머리가 아닙니다. 지체입니다. 이 지체의식(肢體意識)이 분명해야 합니다. 각 지체의 기능은 몸 전체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하나의 부품은 전체의 완성품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부속품 자체에 존재의 의미는 없습니다. 이러한 지체의 기능은 나의 요구나 희망사항이나 욕망에 따라서 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내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점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놓일 자리에 놓인 것이 가장 큰 행복이요, 그 놓인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주어진 은사를 극대화하는 사람이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나는 전체가 아닙니다. 하나의 지체입니다. 어디까지나 부속품입니다.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화상(自畵像)을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모리스 와그너는 그의 저서에서 설명합니다. '사랑 받고 있다는 소속감,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느끼는 가치감,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 처리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이 세 가지가 없는 사람은 구제불능의 인간이다.' 이 세 가지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가졌어도 결국 아무 소용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각자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하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소속감---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온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내가 필요하다.' 이것이 나의 가치요, 내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의 은혜 안에 나는 분명히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분께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지 마십시다. 나이가 적든 많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간에, 하나님께는 내가 꼭 필요합니다. 거기에 나의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지금까지 그의 은혜로 살아왔으며, 이제 또한 그의 은혜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가 내게 은혜를 주실 때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자신감에서 사명감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없이는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주께서 필요로 하실 때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주께서 힘 주실 때에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신감입니다. 나 보기에는 자신이 초라한 듯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필요하듯이, 동시에 저 사람도 하나님께 필요합니다.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길 뿐더러 다른 지체도 소중히 여깁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체의식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21절)." 손이 발을 필요 없다 못할 것이요, 눈이 코더러 너는 뭐하느냐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지백체(四肢百體)가 다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지체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양하게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필요를 아는 것과 동시에, 나 자신은 어느 부분에 속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부분에 속한 지체인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즐기는 지체의 영광을 인지해야 합니다. 지체의 영광---거기에 내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형은 아버지의 태도가 못마땅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을 어째서 영접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이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불평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합니다. "얘야, 너는 형으로서 내게 필요하고, 이 아들은 둘째아들로서 내게 필요하다. 너 보기에는 나쁜 동생일지 몰라도 내게는 똑같이 소중한 아들이다. 이 아이는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다"---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아버지가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들만 필요하다고 말합니까? 공부도 못하고 속썩이는 아들은 필요 없다고 합니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병신 자식이 효도한다." 똑똑한 자식 저 잘났다고 모조리 흩어져 나가도, 마지막까지 집에 남아서 효도하는 자식은 남 보기에 변변치 못했던 그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똑똑한 사람, 하나님께 필요치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지체의식을 가진 자입니다. 정말로 자신의 위치를 알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런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십니다.

전체를 위해서 병든 지체는 차라리 잘라 내버려야 합니다. 깨끗한 지체, 충성된 지체,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지체는 어느 자리에 처해 있든지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연합입니다. 유기적(有機的)인 구조입니다. 기구적(機構的)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세 가지의 신비로운 연합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의 신성(神性) 안에 거룩한 삼위(三位)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신비로운 연합을 말씀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연합이요, 셋째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연합입니다. 모든 교파, 모든 교회, 모든 기구, 모든 기관, 모든 교인이 다 주님 앞에 지체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남녀 노유, 빈부 귀천이 다 한 지체로서 연합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어려움도 부조화도 없습니다. 다툼이 없고 분쟁이 없습니다. 아름답게 조화와 균형과 통일을 이루어가며 상부상조해나가는 것입니다. 이 생명력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22절)"---그렇습니다. 오히려 비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욱 많이 쓰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많이 쓰는 말로 '고급 인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고급 인력이 되고자 하지만, 실제로 고급 인력은 몇 사람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고급이 된다면 세상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급 인력이 폭넓게 사회를 지탱해주어야만 사회가 유지됩니다. 손가락을 놓고 이야기해봅시다. 엄지손가락만이 중요합니까? 다섯 손가락의 어느 하나도 필요치 않은 손가락이 없습니다. 엄지손가락이 할 수 없는 일을 새끼손가락이 하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 농촌에서 자라며 들은 이야기입니다. 여름날입니다. 한 농부가 등에 잔뜩 짐을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논두렁을 건너갑니다. 가면서 생각하기를 '손가락 열 개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발가락 열 개는 왜 생겼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을. 괜히 발가락 사이에 때나 끼고 무좀이나 생겨 골치만 아프지'하였답니다. 이 말을 들은 발가락들이 항의를 합니다. "무엇이라고? 발가락이 필요 없다고?" 발가락들은 그만 쭉 펴져서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한 걸음도 발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아하, 발가락들은 이래서 필요하구나.' 그제야 발가락이 마음대로 구부러져서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는 우스갯이야기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이 왜 존재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큰 인격 안에서 어느 부분에 속해 있습니까? 혹시라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다이아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름도 빛도 없이 한쪽 구석에서, 발처럼, 무릎처럼, 발가락처럼 그렇게 섬길 수는 없습니까? 진정한 지체의 영광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야 어떻게 되든지 머리가 영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내가 존재하며,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누누이 설명하는 가르침입니다.

'천하게 여기는 것이 더 귀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 아름다움을 얻게 되고, 부족한 것이 존귀하다.' 사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설계를 하고 감독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대학 졸업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도 월 50만 원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현장의 인부들은 150만 원 가량을 받는답니다. 그래서 가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답니다. "자네, 대학 나오느라고 애 많이 썼네. 그래, 자네 월급이 얼마나 되나?" 대답할 말이 없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책상물림이나 하는 사람들이 육체노동자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옳습니까? 대학을 나오고 현장에서 일이라도 하려면, "저사람, 공부 안하더니 실패했구먼"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우리의 생각이 과연 타당합니까? 여러분, 그러나 시대는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커다란 전체 안에서의 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목수가 잠깐 쉬는 사이에 연장들끼리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누가 가장 필요한 것이냐 하는 싸움입니다. 서로서로 다른 것을 비난합니다. 자「尺」는 그저 재기만 하고 빈둥거린다는 둥, 자귀는 깍는 데밖에 쓸데가 없다는 둥, 망치는 두드리기만 하고 톱은 자르기만 한다는 둥, 모두가 서로가 쓸데없다는 비난뿐입니다.

목수가 돌아와서 일을 합니다. 자로 재고, 톱으로 켜고, 자귀로 깎고…… 어느 것 하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고루고루 사용하여 일을 합니다. 그래서 목수의 통에는 연장이 가득합니다. 어느 것을 더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까? 모든 지체는 하나님의 손에 고르게 조화롭게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초, 성 바오로(St. Paul's) 대성당을 지을 때의 일입니다. 이 건물의 설계․감리를 맡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공이 한번은 인부들의 작업 상황을 살펴보려고 현장에 나가보았습니다. 석공들이 열심히 돌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지금 뭘 하고 있나?" "보면 모르시겠소?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짜증투의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다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무얼 하고 있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입에 풀칠하자고 일을 하는 중이오."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자네는 무얼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이 부족한 사람이 그래도 석공 일을 배워서 이렇게 거룩한 성전을 짓는 일에 한몫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이 제각각입니다. 어째서 입니까?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지체의 영광은 머리에 있습니다. 지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우리의 수고를 주인이 기뻐하실 때, 그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탈무드」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는데 머리가 둘이요 손발이 각각 넷이다. 이 아이는 한 아이냐, 두 아이냐?'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쪽 머리를 때려서 저쪽 머리까지 울면 이 아이는 한 아이다. 한쪽이 울 때 다른 쪽이 울지 않으면 두 아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플 때에는 아내의 마음도 아픕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울 때에 기분 좋아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들은 둘입니다. 다른 사람이 슬플 때에 함께 슬퍼하고 다른 사람이 기쁠 때에 같이 기뻐야만 한 몸인 것입니다.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이 팔 한 짝이 잘려나갔습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사람의 팔을 이식하였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온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팔을 제공해준 사람은 살인강도 전과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팔을 전과자의 팔이라 하여 더럽다고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의 몸에 붙어 있으면 이미 그 몸의 지체인 것입니다. 과거에 그 손으로 무엇을 했건간에,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을 때 그 손은 소중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말 것입니다. 절망은 스스로를 크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입니다. 나의 존재 가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경륜과 그 사랑의 섭리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지체된 자신에 대하여 지체의식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온 세상이 무어라 하든 나는 존귀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함께 지체된 영광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나 자신의 가치가 있습니다.  

지체의 영광(고린도전서 12장 18절~31절)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오래 전 일입니다. 미국 유학 시절에 제가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어느 교회의 주일 설교를 맡아본 적이 있습니다. 주간(週間)에는 학교에 나가 공부를 하고, 주일에는 그 교회에 나가 설교하기를 3년 간 계속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지급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별다른 사례금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교회에서는 매우 훌륭한 자동차를 한 대 사주었습니다. 교회를 오갈 때에 쓰라는 것이었지요. 분수에 넘치도록 좋은 차였습니다. 어찌나 좋은 것이던지 제가 다니는 학교의 교내에서 그보다 더 좋은 차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총장님의 차보다도 더욱 고급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차를 타고 패서디나(Pasadena)의 '프리웨이(Freeway)'라는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도로는 노폭(路幅)이 몹시 좁은 도로입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눈앞에 유리병 깨진 조각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워낙 좁은 길에 차가 많이 밀려 있기 때문에 그 조각들을 비켜서 달리기가 어려웠습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깔고 지나가려는데, '펑'하고 앞바퀴가 터져 버렸습니다. 큰일났습니다. 차는 뒤에서 줄줄이 밀려오는데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차를 한 쪽으로 치워놓으랴, 새 타이어를 갈아 끼우랴 혼자서 쩔쩔맵니다. 그러는데 두 사람이 차를 세워놓고 제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차들에 신호를 보내어 통행을 도와주는가 하면, 타이어 갈아 끼우는 일을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일이 다 끝나자, 경황 중에 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는 제게 "굿바이(Good-bye)!" 인사를 남기고 그들은 총총히 떠나버렸습니다. 그때의 고마웠던 심경이라니, 저는 두고두고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 해도 타이어에 펑크가 난다면 달릴 수 없습니다. 고물차라도 잘 달릴 수 있는 차라면 좋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 해도 잘 달리지 못한다면 고물차만 못합니다. 자동차 한 대는 약 2만여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의 부품이라도 고장이 난다면 나머지 19,999깨의 부품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 작은 부속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제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가 잘못됨으로써 전체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불행은 자기우상화(自己偶像化)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창조주와 섭리자와 경륜자이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피조물된 자기 위치를 떠나려 할 때 인간의 불행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자기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은혜 안에 살면서도 그러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생각해봅시다. 전적으로 부모의 사랑에 의지해서 생을 영위해나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때때로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서 슬퍼하고 고독해하고 눈물흘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은혜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하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병들었거나 건강하거나, 실패했거나 성공했거나, 살거나 죽거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격하며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은사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은사만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낳습니다. 시기 질투보다도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으셨든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한 처지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행복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았으면 낳은 대로,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행복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제쳐놓고 다른 일에만 가치가 있다고 덤벼드는 사람처럼 바보스러운 사람은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나이 들어서 젊었을 당시만을 생각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또한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나이든 사람은 나이든 대로 멋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 젊음과 현재의 나이를 바꾸자고 한다면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이대로가 좋기 때문입니다. 나이든 사람은 든 대로 젊은 사람은 젊은 대로, 여성이면 여성대로 남성이면 남성대로, 지능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어디에 처해 있든지 자신에게 주신 처지를 족하게 여기는 사람, 남의 세계를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러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많되 내가 부러워할 사람은 없다면 그야말로 행복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로, 할 수 있는 일을 소홀히 여기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겠다고 하는 까닭에 불행합니다. 이 또한 미련한 사람입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 안에, 그 전체 안에 '나'라는 작은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전체가 아닙니다.

부분입니다. 나는 머리가 아닙니다. 지체입니다. 이 지체의식(肢體意識)이 분명해야 합니다. 각 지체의 기능은 몸 전체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하나의 부품은 전체의 완성품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부속품 자체에 존재의 의미는 없습니다. 이러한 지체의 기능은 나의 요구나 희망사항이나 욕망에 따라서 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내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점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놓일 자리에 놓인 것이 가장 큰 행복이요, 그 놓인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주어진 은사를 극대화하는 사람이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나는 전체가 아닙니다. 하나의 지체입니다. 어디까지나 부속품입니다.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화상(自畵像)을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모리스 와그너는 그의 저서에서 설명합니다. '사랑 받고 있다는 소속감,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느끼는 가치감,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 처리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이 세 가지가 없는 사람은 구제불능의 인간이다.' 이 세 가지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가졌어도 결국 아무 소용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각자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하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소속감---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온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내가 필요하다.' 이것이 나의 가치요, 내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의 은혜 안에 나는 분명히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분께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지 마십시다. 나이가 적든 많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간에, 하나님께는 내가 꼭 필요합니다. 거기에 나의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지금까지 그의 은혜로 살아왔으며, 이제 또한 그의 은혜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가 내게 은혜를 주실 때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자신감에서 사명감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없이는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주께서 필요로 하실 때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주께서 힘 주실 때에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신감입니다. 나 보기에는 자신이 초라한 듯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필요하듯이, 동시에 저 사람도 하나님께 필요합니다.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길 뿐더러 다른 지체도 소중히 여깁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체의식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21절)." 손이 발을 필요 없다 못할 것이요, 눈이 코더러 너는 뭐하느냐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지백체(四肢百體)가 다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지체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양하게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필요를 아는 것과 동시에, 나 자신은 어느 부분에 속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부분에 속한 지체인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즐기는 지체의 영광을 인지해야 합니다. 지체의 영광---거기에 내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형은 아버지의 태도가 못마땅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을 어째서 영접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이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불평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합니다. "얘야, 너는 형으로서 내게 필요하고, 이 아들은 둘째아들로서 내게 필요하다. 너 보기에는 나쁜 동생일지 몰라도 내게는 똑같이 소중한 아들이다. 이 아이는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다"---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아버지가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들만 필요하다고 말합니까? 공부도 못하고 속썩이는 아들은 필요 없다고 합니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병신 자식이 효도한다." 똑똑한 자식 저 잘났다고 모조리 흩어져 나가도, 마지막까지 집에 남아서 효도하는 자식은 남 보기에 변변치 못했던 그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똑똑한 사람, 하나님께 필요치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지체의식을 가진 자입니다. 정말로 자신의 위치를 알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런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십니다.

전체를 위해서 병든 지체는 차라리 잘라 내버려야 합니다. 깨끗한 지체, 충성된 지체,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지체는 어느 자리에 처해 있든지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연합입니다. 유기적(有機的)인 구조입니다. 기구적(機構的)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세 가지의 신비로운 연합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의 신성(神性) 안에 거룩한 삼위(三位)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신비로운 연합을 말씀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연합이요, 셋째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연합입니다. 모든 교파, 모든 교회, 모든 기구, 모든 기관, 모든 교인이 다 주님 앞에 지체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남녀 노유, 빈부 귀천이 다 한 지체로서 연합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어려움도 부조화도 없습니다. 다툼이 없고 분쟁이 없습니다. 아름답게 조화와 균형과 통일을 이루어가며 상부상조해나가는 것입니다. 이 생명력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22절)"---그렇습니다. 오히려 비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욱 많이 쓰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많이 쓰는 말로 '고급 인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고급 인력이 되고자 하지만, 실제로 고급 인력은 몇 사람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고급이 된다면 세상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급 인력이 폭넓게 사회를 지탱해주어야만 사회가 유지됩니다. 손가락을 놓고 이야기해봅시다. 엄지손가락만이 중요합니까? 다섯 손가락의 어느 하나도 필요치 않은 손가락이 없습니다. 엄지손가락이 할 수 없는 일을 새끼손가락이 하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 농촌에서 자라며 들은 이야기입니다. 여름날입니다. 한 농부가 등에 잔뜩 짐을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논두렁을 건너갑니다. 가면서 생각하기를 '손가락 열 개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발가락 열 개는 왜 생겼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을. 괜히 발가락 사이에 때나 끼고 무좀이나 생겨 골치만 아프지'하였답니다. 이 말을 들은 발가락들이 항의를 합니다. "무엇이라고? 발가락이 필요 없다고?" 발가락들은 그만 쭉 펴져서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한 걸음도 발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아하, 발가락들은 이래서 필요하구나.' 그제야 발가락이 마음대로 구부러져서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는 우스갯이야기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이 왜 존재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큰 인격 안에서 어느 부분에 속해 있습니까? 혹시라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다이아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름도 빛도 없이 한쪽 구석에서, 발처럼, 무릎처럼, 발가락처럼 그렇게 섬길 수는 없습니까? 진정한 지체의 영광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야 어떻게 되든지 머리가 영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내가 존재하며,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누누이 설명하는 가르침입니다.

'천하게 여기는 것이 더 귀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 아름다움을 얻게 되고, 부족한 것이 존귀하다.' 사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설계를 하고 감독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대학 졸업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도 월 50만 원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현장의 인부들은 150만 원 가량을 받는답니다. 그래서 가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답니다. "자네, 대학 나오느라고 애 많이 썼네. 그래, 자네 월급이 얼마나 되나?" 대답할 말이 없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책상물림이나 하는 사람들이 육체노동자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옳습니까? 대학을 나오고 현장에서 일이라도 하려면, "저사람, 공부 안하더니 실패했구먼"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우리의 생각이 과연 타당합니까? 여러분, 그러나 시대는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커다란 전체 안에서의 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목수가 잠깐 쉬는 사이에 연장들끼리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누가 가장 필요한 것이냐 하는 싸움입니다. 서로서로 다른 것을 비난합니다. 자「尺」는 그저 재기만 하고 빈둥거린다는 둥, 자귀는 깍는 데밖에 쓸데가 없다는 둥, 망치는 두드리기만 하고 톱은 자르기만 한다는 둥, 모두가 서로가 쓸데없다는 비난뿐입니다.

목수가 돌아와서 일을 합니다. 자로 재고, 톱으로 켜고, 자귀로 깎고…… 어느 것 하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고루고루 사용하여 일을 합니다. 그래서 목수의 통에는 연장이 가득합니다. 어느 것을 더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까? 모든 지체는 하나님의 손에 고르게 조화롭게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초, 성 바오로(St. Paul's) 대성당을 지을 때의 일입니다. 이 건물의 설계․감리를 맡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공이 한번은 인부들의 작업 상황을 살펴보려고 현장에 나가보았습니다. 석공들이 열심히 돌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지금 뭘 하고 있나?" "보면 모르시겠소?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짜증투의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다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무얼 하고 있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입에 풀칠하자고 일을 하는 중이오."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자네는 무얼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이 부족한 사람이 그래도 석공 일을 배워서 이렇게 거룩한 성전을 짓는 일에 한몫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이 제각각입니다. 어째서 입니까?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지체의 영광은 머리에 있습니다. 지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우리의 수고를 주인이 기뻐하실 때, 그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탈무드」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는데 머리가 둘이요 손발이 각각 넷이다. 이 아이는 한 아이냐, 두 아이냐?'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쪽 머리를 때려서 저쪽 머리까지 울면 이 아이는 한 아이다. 한쪽이 울 때 다른 쪽이 울지 않으면 두 아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플 때에는 아내의 마음도 아픕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울 때에 기분 좋아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들은 둘입니다. 다른 사람이 슬플 때에 함께 슬퍼하고 다른 사람이 기쁠 때에 같이 기뻐야만 한 몸인 것입니다.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이 팔 한 짝이 잘려나갔습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사람의 팔을 이식하였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온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팔을 제공해준 사람은 살인강도 전과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팔을 전과자의 팔이라 하여 더럽다고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의 몸에 붙어 있으면 이미 그 몸의 지체인 것입니다. 과거에 그 손으로 무엇을 했건간에,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을 때 그 손은 소중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말 것입니다. 절망은 스스로를 크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입니다. 나의 존재 가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경륜과 그 사랑의 섭리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지체된 자신에 대하여 지체의식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온 세상이 무어라 하든 나는 존귀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함께 지체된 영광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나 자신의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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