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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를 찾으신 예수님(요 21:1-14)(1183-11)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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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를 찾으신 예수님(요 21:1-14)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으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하나님은 모두에게 독특한 은사와 사명을 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고등학교에서 있던 일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머리가 길면 기계로 깍던 일이 지금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애인이 있으면 그것을 신고해라 그러면 포상을 한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무슨 19세기의 교육행정이 아닌가를 생각했습니다. 무슨 집단적인 마네킹으로 아이들을 만들려고 작정을 했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대로라면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하는 바보들을 만들고 말겁니다. 언젠가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엄마하고 군대를 같이 가라고, 얼마나 마마보이인가 알아야지요? 신혼여행을 가서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지요? 무엇이 이런 일들을 만들고 있습니까?
제가 탁구를 하면서 한번 왼손으로 해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정말로 안 됩니다. 요즘은 가끔은 왼손이 부럽기도 합니다. 언젠가 제가 학교를 다니는데 저희 반에 늘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는 기가 죽어서 다니는 그런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야! 미국에는 다 왼손잡이라더라. 거기서는 오른손잡이가 조금은 바보로 취급을 받는다고. 정말 우리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에 간다면 거기서는 너는 어려운 일이 없겠다고 말입니다. 미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그런 말이 있었는데 갔는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에 대해 여러모로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고 보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난 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1-3) 여기서 이상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극히 개인적인 말로써,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할지 잘 모르지만 자기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는 말입니다. 정말, 처량한 순간입니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그는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자기를 내세우던 베드로가, 지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고기잡이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형편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지금부터 예수님의 제자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제 철이 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은 자기가 제일 우월하고, 제일 잘 믿는다고 남보다 앞서기를 좋아했던 것이, 이제 자신을 바로 알고 맨 꼴찌로 떨어지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할 때에 기가 죽어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수제자로 늘 앞장을 섰던 그가, 지난 3년 동안의 제자 생활을 청산하고 물고기 잡으러 돌아가는 처량한 모습을 봅니다. 수제자 그 이름도 말짱 도루묵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어부 인가 그게 아닙니다. 그저 베드로가 나 고기 잡으러 간다. 그러니 다른 이들도 다 따라갑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러는 것은 아닙니까? 그저 편승해서 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닙니까? 분위기에 예배를 드리고, 남이 가니까 남이 하니까 그래서 그런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조금 뻔뻔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베드로의 디베랴로 간 이유나 목적이 사랑이 식거나 뭐 그래서 떠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살다가 보면 정말로 면목이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베드로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그를 괴롭히고 있어서, 이제 다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체면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슬금슬금 도망갔는데, 자기는 어쩌자고 예수님 뒤를 따라갔다가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큰일을 저질렀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염려하여 미리 경고하셨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졸기만 하다가 세 번씩이나 부인을 했으니, 그야말로 참패를 한 셈입니다. 이제 정말 무슨 체면으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 저는 다시 어부로 돌아갑니다. 찾지 마세요. 이제 다시 저를 제자로 삼았다가는 또 어떤 망신을 당하실지 모릅니다. 사표를 내겠습니다" 하고 패잔병의 모습으로 자기 고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동감이 가기도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 자기의 허물을 다 소화하고 흡수하고 초월할 만큼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흔히 교회에서도 종종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어느 분에게 "집사로서 일하세요, 또 성가대원으로 일하세요" 하고 권면 하면 많은 사람들이 "저는 부족합니다" 하고 사양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사실 자기 생각, 자기 부족, 자기 나약함, 지난날의 실수, 과거의 허물 등을 다 생각하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것을 사랑하고 부르셨다"고 은혜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과거의 자기에게 얽매여서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조금 남보다 의로우니 자신있다는 사람이나, 나는 부족해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둘 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는 자기 나약함이나 허물 됨을 극복할 만큼 그 정도의 은혜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본문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갈릴리로 먹고 살기 위하여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재미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들도 가겠다고 하며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이란 본문에 있는 대로 도마, 나다나엘, 세배대의 아들 둘, 또 다른 제자 둘로써, 모두 합치면 베드로까지 7명입니다. 베드로가 간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도 따라나서는데, 자세히 보면 그들이 다 어부가 아닙니다.
몇 사람만 어부이고 나머지는 물고기도 잡을 줄 모르는 사람인데도, 베드로가 간다 하니, 그냥 따라나선 것입니다. 정말, 한심하다는 이야기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생각이 있어서 가겠다는 것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생각도 없이 그저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누가 간다고 하면, 생각도 없이 따라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편승하는 신앙생활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음, 합세해서 모두 바닷가로 갔는데, 밤새도록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잡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3년 동안 쉬었으니 기술 부족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3년 간을 주님을 따라 다니다가 이제 그만 두고 왔으니, 마음이 착잡하지 않겠습니까? 허무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그 마음들은 갈등으로 가득 차, 무슨 고기를 잡겠습니까? 마음에 갈등이 있어 하나님의 일을 저버린 사람에게 인간적인 성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안정되고 차분한 상태라야 눈이 밝고 총명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이 맑습니다. 그러므로, 물방울이 튀기면서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보고 그물을 던지는데, 지금 베드로의 눈에는 물고기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날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냥 밤을 새웠습니다. 얼마나 피곤한 새벽이겠습니까? 사실, 아무리 밤새워 일을 했다 해도 물고기만 많이 잡혔다면 피곤은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허탕만 했으니 빈 그물을 끌어올리는 그들은 더욱 피곤했을 것입니다. 원래 갈릴리에서는 밤에 물고기가 잘 잡혀서 예나 지금이나 주로 밤에 고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날이 새어가도록 잡지 못했으니 그들은 이제 틀렸다고 포기하는 그 순간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 21 : 4-6)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피곤한 시간이니까 이 충고를 받아들여 깊은 곳으로 가서 한 번 더 던집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지금 배의 위치가 육지에서 약 50간쯤이라고 말하는데, 이 거리는 약 100m 정도라고 합니다. 바다에서 100m란 아주 가까운 거리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피곤함이 극에 달해 물고기 노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육지에서 보시고 그쪽으로 던지라고 말씀한 것 같습니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충고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순간,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예수의 사랑하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요 21 : 7) 여기서 다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이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 제자는 역시 요한입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고기를 멀리서 들려온 충고 한마디로 가득 잡자, 요한은 곧 3년 전을 생각해 냅니다. 그래서,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사도 요한은 두 가지 근거에서 주님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3년 전에 예수께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시어 그 때도 밤새껏 잡지 못하던 고기를 많이 잡은 경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요한이 젊었기에 베드로보다 눈이 밝아서 먼저 알아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상 두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자만이 알아봅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그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미워하고 오해하는 마음으로 비뚤어져 있으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눈으로 보다 마음의 눈으로 보므로 상대방을 똑바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어떤 일을 만났습니까? 나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지난날에 내게 주신 은혜를 곧 연상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하마터면 교통 사고로 죽을 뻔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한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오늘 감기만 걸리더라도 그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 일곱 제자가 있었는데, 요한만이 생각해냈습니다. 베드로는 약간 멍한 상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이 먼저 주님이신 것을 알고 베드로에게 알려 줍니다. 사도 요한이 계속 자신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제자가 아니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자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주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사랑을 많이 받는 자라고 자기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사랑하는 제자"가 자기 이름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표현입니까?
그 다음에 우리가 기억을 해야 할 것은 베드로의 계산하지 않는 저돌성입니다.
주님이시라는 요한의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극성스럽게 당장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을 때도 무덤에 먼저 도착한 것은 요한이었지만,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간 것은 베드로가 먼저입니다. 요한은 근거만 있으면 베드로를 높이려고 애쓰는 흔적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을 알아본 것은 요한 자신이지만 물 속에 뛰어 들어간 사람은 베드로로 그가 더 훌륭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두른 후에 그대로 뛰어내리더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던 사람이, 주라고 하는 순간에 뛰어내립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지금까지의 심정이 얼마나 주님을 갈급했으며 껄껄한 마음이었는가를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는 했지만 밤새껏 잡지 못했으니 답답하고 외롭고 뭔가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는 중 "주님이다"라는 소리에 앞뒤 가릴 것 없이 풍덩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이 적극적인 자세는 예수님을 떠난 잠깐 동안의 시간이 얼마나 그에게 힘든 시간이었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잠깐 곁길로 갔다가 주님이 나타나자 고기는 안중에도 없이 그물도 끌어당기지 않고 그냥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이제 주님 앞에 무릎 꿇은 베드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베드로의 모습에서 그 순간만은 예수님을 부인했던 생각은 다 사라졌고, 제자의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고 하는 자기 허물에 대해서는 돌보지 않았습니다. 왜 물고기를 잡으러 갔느냐고 주님의 책망이 있을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향해서 달려간 것입니다. 단순한 그 마음이 가장 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많은 것을 깨우치고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실천력의 사람을 지금도 찾으신다는 겁니다. 자 새벽기도를 합시다. 그러면 그냥 나오면 됩니다. 몸에 병이 나지 않을까? 교통사고가 나는 게 아니야? 이런 잡다한 생각이 우리를 먼저 뛰어드는 신앙의 모습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체입니다. 손은 머리가 움직여 그러면 움직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가 엉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너무나 마음대로입니다.
뇌성마비란 무엇입니까? 뇌의 이상으로 인하여 뇌의 명령과 몸의 행동이 제각각인 병입니다. 교회도 뇌성마비가 온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가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몸인 지체들이 안 따라 줍니다. 베드로의 장점이 그겁니다. 주님이다. 계산이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겁니다. 무덤에까지 요한이 먼저 갑니다. 들어가기는 베드로가 먼저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자 우리가 더 깊이 생각을 할 것은 그 분의 말씀이 우리를 풍성하게 하신 다는 겁니다.
그들이 밤을 새우며 수고를 하지만 그들의 자리에는 아무런 일들도 나타나지 아니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이 들리고 순종이 일어나고 그런 일들이 얼마나 일어납니까?
제가 요즘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마가복음9장29절에 말씀을 기억을 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올 수 없느니라. 교회가 살아나는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다른 길이 있습니까? 그런 길이 어떻게 나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길은 그것이 최고의 길입니다. 지금 답답합니까? 기도 외에는 ...
내가 지금 어떤 방법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사업에 어떤 방법으로, 공부를 어떤 방법으로?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내가 지금 주님의 방법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열심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고 능력이 없고 낙심으로 치달아 가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길을 가고 있다면 이제 거기서 돌아 와야 합니다. 거기서 몇 날을 기다려도 고기는 잡히지 아니하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런 일에도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합니다.
자 부활의 주님이 오셔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물을 들지를 못하게 너무나 많이 잡았다는 겁니다. 성공이냐 실패냐는 커다란 차이가 아닙니다. 배 이편이냐 아니면 배 저편이냐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주시는 귀중한 음성은 말씀이 하라고 하는 그곳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1960년에 모나미라는 필기구제조 업체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경쟁이 너무 심해서 도산의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송삼석이란 회장이 그 당시에 설립을 하신 분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의 특징이 시험을 당하면 기도를 하러 가잖아요? 그 분도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 너무나 범죄 한 게 많아요. 그래서 그가 이것을 놓고서 철저히 회개기도를 드립니다.
1.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너무나 주일성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서 철저히 회개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주일성수 하겠습니다.
2. 돈을 벌어도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것을 떼먹었습니다. 이제는 십일조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3. 새벽기도 하지 않은 것을 회개 했습니다. 내가 새벽마다 주님 앞에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벽기도를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있는데 그때 읽은 본문이 오늘 말씀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베드로는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모나미153이라는 볼펜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님, 이 볼펜이 모든 사람의 손에 아니 전 세계의 사람의 손에 들리기를 원합니다.”
그가 기도를 드리면서 목표를 50억 자루가 팔리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망해가는 회사가 볼펜을 50억 자루를 팔겠다고 하니 그게 말도 안 되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드리고 내려와서는 그는 모나미153을 만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게 잘 팔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심지어 조달청에서 납품을 해달라고 해서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의 모든 부서는 공식 볼펜이 모나미 153입니다. 아니 그게 예쁘기를 합니까? 모양이 좋습니까? 그런데 다른 볼펜은 안 팔리고 그것만 팔리는 겁니다. 얼마 전에 모나미에서 이런 발표를 했습니다. 50억 자루를 팔았다고. 그것을 왜 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쓰게 하시니까 그런 겁니다.
성령이 역사를 하시니까 그런 겁니다. 기도로 만들어서 그런 겁니다. 자 이제 감이 잡힙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예배의 부름 /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참회의 기도 /
주의 긍휼을 힘입어 저희들이 다시 보좌 앞에 나왔습니다. 이렇게 병마가 많고 위험이 있고 전쟁과 기근과 재난, 우환, 질고가 그칠 날이 없는 무서운 세상을 살아가지마는 한 주일동안 평안하게 지나게 하셨고 다시 주님 앞에 나와 찬송을 부르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하오나 우리는 나 자신을 생각한 나머지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았으며, 말씀을 거역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으며, 불의한 길로 가는 자와 동행을 하였습니다. 덕이 되지 못하는 말을 하여서 많은 사람들을 가슴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내가 이롭기 위하여 남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하며 다른 이의 손해를 그들의 아픔을 생각을 하지를 못했음을 생각하오며 주님 앞에 자복합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나 하나의 안일을 생각하며 모두의 평안과 기쁨을 생각하지 못했고, 세속적인 생각에 매여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영원을 외면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모르는 자들의 모습으로 살아왔던 일들을 기억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당연히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고 당연히 만나야 할 사람을 반가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찾아야 할 사람을 찾아가지 못한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자복하오니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는 우리에게 많은 것으로 주셨고 지금도 주시건만 받은바 없는 것처럼 원망을 했습니다. 불평으로 살았습니다. 그 많은 은사를 주셨지만 은사를 땅에 묻어두고서 게으르고 나태함에 살아온 모습을 주님 기억을 합니다.
선한 일에는 핑계가 많았고 세속적인 일에는 서두르며 살았습니다. 주님 이 악과 허물에서 건져주시옵소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이 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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