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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능력의 나라(고린도전서 4:14 - 21)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이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현대를 사람들은 "3M"(three-M)시대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Money(돈), Machine(기계), Mass communication(대중 전달)의 머릿글자 M을 따서 현대 사회의 특징을 나타낸 것입니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생활 속에서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위력 앞에 위축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놀랄 지경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그것들의 위력 앞에 무릎을 끓고 심지어는 가족이나 친척보다도 돈을 더 사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기계에 둘러싸여 생활하게 됩니다. 아침에 시계가 따르릉 울리면 일어나서 라디오를 틀고 전기 밥솥과 가스레인지에다 식사 준비를 하고 아침을 먹은 후 차를 타고 출근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에어콘 장치가 된 사무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 전화가 옵니다. 자동 판매기에 동전을 넣어 커피 한 잔을 사 마시고는 그 날의 결재 서류를 타이핑합니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면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습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젼을 보면서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 마십니다. 이상은 어느 사무원의 하루를 예로 들었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도 기계와 떨어져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는 기계(machine)의 시대라고 가히 칭할 만합니다.
다음으로 매스컴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매스컴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살아갑니다. 매스컴에서 옳다고 하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입시키면 그것은 어느새 나의 의견이 되고 맙니다. 이 매스컴을 통해 우리는 여러 가지 광고와 선전을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어느 공장에 설교하러 갔다가 광고비를 어느 정도 지불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생산비의 15% 내지 30%를 거의 광고비에 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의 값이 1,000원이라면 그 중에서 150원 내지 300원은 광고비라는 것입니다.
광고비만큼 싸게 팔면 더 잘 팔리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매달 매상고를 통계 내는데 TV광고를 하지 않는 달에는 매상이 당장 줄어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라디오를 듣거나 TV 또는 신문을 볼 때에 선전이나 광고가 나오면 아주 싫어하지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선전과 광고를 보고 물건을 구매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는 매스컴의 시대 혹은 PR 시대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선전과 광고가 판을 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약국에서 약을 하나 구입하여 설명서를 보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설명해 놓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상에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과대 선전이나 허위 광고에 조심해야만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 자체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진실만을 듣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 가지 면으로 살펴볼 수 있지만 신앙적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의 고백문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는 신조나 혹은 의식을 말합니다. 거창한 종교의식이나 아주 장엄한 예식 혹은 신학적인 논리와 많은 이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형식과 규례들도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5에서 말세의 교인상을 지적하면서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경건한 의식으로 쓰인 말만 존재한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언젠가 기독교 회관에서 들어서다가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중에 그 친구 가슴에 달린 금십자가가 눈에 띄웠습니다. "거참 십자가가 무척 크구만. 어떻게 주님을 가슴에 달고 다니나?"하고 웃으면서 "전에 연대 모 교수가 쓴 수필에서 '가슴에 단 십자가가 크면 클수록 사기성이 높다'라는 글을 보았네"하고 농담을 했더니 그 친구는 얼른 금배지를 떼어서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 듣고 떼어서 주머니에 넣는 사람은 더 수상한데"라고 한번 더 놀려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다니면서 전혀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즈음 열성있는 신자들 사이에 "할렐루야"란 전용 용어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려한 것이 바로 이런 식의 경건의 모양이며 말과 의식은 있으나 경견의 능력을 부인하고 그 내용의 결핍된 것이었음을 우리는 이 시간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복음 3:5에 기록된 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창조의 힘, 변화시키는 힘(transforming power), 출생의 힘에 있습니다. 땅속에 있는 조그마한 씨가 땅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하나의 생명을 출생하고 창조하는 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한 이것은 겨자씨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성장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다시 요한복음 3장에서 성령이란 바람 같아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의식 이전, 생각 이전, 말 이전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역사, 생명의 역사에는 아무도 말이 없습니다.
로마서 14:17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이 성경의 문맥으로 본다면 하나의 종교의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거창하고 장엄한 종교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 중에 움직이는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기독교는 사회성과 공동체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이웃과의 교제를 말로써 이루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귀여운 여자아이를 보고 인형 같다고 하고, 잘 만들어진 인형보고는 진짜 살아있는 아이 같다고 할 정도로 우리의 언어는 완전하지 못하고 부족하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과 교제하려 할 때 여기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전서 6:20에서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로 사람을 설득하거나 교제하려고 하지 말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해방 직후 평양에 갔다가 극장에서 어떤 목사님과 공산주의자가 '하나님의 존재유무'에 대하여 토론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산주의자가 먼저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자, 목사님이 "이유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보이지 않으니까 없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점잖게 "그 말은 아주 옳은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안 보이는 것이라고 다 없는 것입니까? 그러면 당신의 몇 대조 할아버지를 당신은 본 적이 없으니 그 조상은 없었던 사람입니까? 당신은 공기나 전자 등을 본 적이 있습니까?"고 질문하자 공산주의자는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싸움에 졌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을까요? 우리는 절대로 말로써 전도하려고 하지 맙시다. 변론하지도 맙시다. 믿음에서 변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가리키며 '이 사람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까지도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조용히 끊고자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자가 결혼 전에 딴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면 돌로 쳐죽이던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요셉을 가리켜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말이 없습니다. 말로써 사람을 사귀려 하지 맙시다.
신․구약 성경 외에 외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중에 "선물을 주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선물을 아니줌만 못하다"란 말이 있습니다. 선물이란 말없이 주어야 선물이지 말이 많으면 뇌물이 됩니다. 조건 없이 말없이 주는 선물, 말없이 수고하는 봉사가 아쉽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더욱 극단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 정도로 말없이 수고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소망과 믿음 그리고 겸손과 인내는 항상 말이 없습니다. 조용한 희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실천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없는 행동만이 효과가 있으며 말이 많은 행동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너무나 기막힌 일을 당한 욥을 보고 친구들은 위로의 말을 잊고 옆에 앉아 같이 일주일 동안 울기만 했습니다. 이 때에 욥은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그들이 입을 열어 욥에게 이것저것 말을 많이 하게 되자 욥은 그들에게 잠잠해 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들이 아무 말 없이 욥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슬픔과 분노만을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위로도 역시 말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말없이 그 슬픔에 동참해 주는 행동에 참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63에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사도 바울은 참으로 울분할 수밖에 없는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소실을 취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음행에 속하는 사건으로 사도 바울은 편지를 내어 자신이 직접 가서 책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고린도 교회 사람들 중에 바울이 큰 소리만 쳤지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교만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바울은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음이 아파진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 교만한 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알아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구구한 변명이나 합리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습니다. 변화시키는 능력, 사랑의 힘, 말없이 행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말없이 하나님은 이 세계를 다스리시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논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행동하십니다. 소리도 형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판하고 계십니다.
터툴리안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큰 연자맷돌과 같다. 이 연자맷돌은 돌지만 소리가 없고 아주 천천히 돌지만 매우 보드랍게 간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공의로운 심판이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기는 힘, 자신을 극복하고 능욕과 죄를 이기는 힘, 의심과 나약함을 이기는 힘,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힘,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을 명심합시다.
기도:아버지 하나님, 말과 형식과 외식으로 가득찬 이 세대에 하나님의 귀한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일깨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이 때에 우리 가운데 진정으로 살아 있는 힘이 있는가를 살펴보게 하소서. 죄를 이기고 불의를 극복하고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고 이 세대를 변혁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말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신앙이 입술에 머물지 않게 해주시고 오직 말없이 행동하는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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