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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지혜로운 자의 소원(잠30:5-9)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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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의 소원(잠30:5-9)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현대 사회에 모순이 있다면 그것은 결과만을 보고 단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나는 완전히 무시된 채 이루어진 업적,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을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슬프고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적 평가 방법인 것입니다. 무차별한 살생, 테러, 혁명, 방화 등 그 모든 권모술수로서 목적 달성만을 강구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과거를 완전히 무로 돌리고 현재의 소유와 능력의 정도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어른을 어른으로 모실 줄 알았고 애국자를 높이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연장자가 어른이 아니요 오직 가진 자만이 어른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루하루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눈 앞에 나타나는 현상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동기와 그 과정의 진실성 유무에서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동기와 소망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꿈과 목적이 더 중요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깊은 곳에 있는 소원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7에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의 능력이나 업적 또는 외모를 보시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에 갖고 있는 진실만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끔 우리는 전혀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이상한 일을 경험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오래 전부터 절실하게 소망했던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속에 진실한 소망을 갖고 있다면 말로 기도하지 않아도 꿰뚫어 들으실 것이다"라는 미련한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의 가치는 소원이 무엇이냐, 그 진실이 무엇이냐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꿈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한 꿈이며, 어느 정도 진실하고 절실한 것입니까? 높은 이상을 가진 꿈입니까? 아니면 저속하고 현세적인 꿈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윤리관, 종교관, 신앙관은 철저하게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3-12까지에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여덟 가지 복에 관한 말씀은 우리의 현세가 아무리 고달파도 우리의 이상은 "천국"이라는 높은 곳에 있음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 왕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라고 했을 때 솔로몬은 오직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만을 구하였습니다(왕상 3:9). 자기 자신을 위하여 소원을 말하지 않는 그의 진실된 마음에 흡족한 여호와는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귀와 영화까지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솔로몬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이루고 싶은 두 가지 소원을 아룁니다.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가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진실하려고 힘써 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진실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모릅니다. 바로 살아보려고, 깨끗하게 살아보려고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입니다. 우리들은 때로 사랑하는 자녀 또는 남편이나 아내 심지어는 자신의 양심까지도 속이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오래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오직 허망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삶을 한 번 살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만이 위대한 지혜의 근본입니다. 참 말을 할 때만이 그에게 영광이 있습니다. 진실 속에서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칭찬을 하고, 표창장을 주고, 누가 어떠한 영광을 돌려준다 하더라도 이것이 거짓으로 말미암은 소득이요, 불의와 협잡으로 말미암은 영광이라면 그만이 느끼는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칭찬하는 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 없고, 남들이 찬양해 주는 대로의 참된 영광을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만이 행복의 근원입니다. 설사 내가 억울한 말을 듣고 핍박을 받고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진실되고 참되고 의로운 행위라면 그 진실을 하나님만은 아시므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거짓 됨, 진실이 없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영화롭게 산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임종이 가까운 때에 "하나님이여, 내게서 허황된 거짓말을 제거해 주시옵소서"라는 소원을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과거에 관한 말을 할 때에는 우리 '기억력'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과거의 어떤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어떤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합시다. 그런데 과거의 인물과 지적된 사람이 같지 않을 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에도 기억력조차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현재에 관한 말을 할 때에는 '정확성'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정확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는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얼마전 어떤 외국인의 강연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옆에서 통역하는 목사님이 본의 아니게 많은 부분을 틀리게 통역하는 것을 들으며 정확하게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말을 정확하게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미래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실천'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경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장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베드로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말할 때에는 진실한 것이겠지만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거짓말을 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의 이상을 말할 때는 잘 생각하여 거짓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아! 불쌍한 사람이구나.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까?"하면서 괴로워합니다. 자신이 뜻한 대로 움직일 수 없고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죽기 전에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하소서." 다시 한 번 솔로몬의 소원을 생각해봅시다. 진실되게 살아보려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허위로 가득차 있는데, 나만 진실되어서 손해볼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은 버립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거짓을 추종한다 하여도 내 양심은 그럴 수 없다. 내 마지막 소원은 역시 진실 하나뿐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원이며, 가장 지혜로운 자의 소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말'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내 마음에 말을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 말을 하는 것은 결심이며 서원이며 곧 소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히브리 개념에 비추어 본다면 "내가 말한 대로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소원한 대로 결심한 대로 지키게 하여주십시오"라는 의미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대로 살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기도한 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서원과 내 생활과는 너무도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나는 40년 동안 이것 때문에 고생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구하오니 이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솔로몬의 아름다운 마지막 기도, 지혜로운 소원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두 번째 소원으로 필요한 양식을 구하였습니다.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기도문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양 만큼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양식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서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보통 아침에 커피 한 잔 정도 마시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같이 일을 해보니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는데 달걀 다섯 개와 굉장히 큰 햄 스테이크를 먹는 것을 보며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조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먹지 않고는 그들의 육체는 지탱을 못합니다. 책상에 앉아 일하는 정신 노동자에게는 커피 한 잔으로 족하겠지만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은 먹지 않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먹을 양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일 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서 하늘로부터 오는 영의 양식을 받아야 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결심, 나의 능력 그리고 나의 용기만을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힘 없이도 내가 설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교만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실패하고서도 아직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얼마나 어리석고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는 거짓말장이일까요. 하늘로부터 오는 힘, 그 양식, 그 영의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솔로몬은 "하나님이여,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배가 불러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할까 두렵고, 가난하여 도둑질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우니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고, 다만 필요한 양식을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기도입니까?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하다는 것도 하나의 시험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낮 예배에 나오는 교인 수와 저녁 예배에 나오는 교인 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문둥병자들만 모이는 교회에 설교하러 가 보았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그리고 새벽이나 나오는 교인 수는 똑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낮에는 나올 수 있는데 왜 밤에는 못 나오는 것입니까?

바로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부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여유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어도 살 것 같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정말 다급한 심정이 되어 하나님께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라면 그렇게는 못할 것입니다. 마음이 부하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거만한 말은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한 사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부자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나오는 예는 무척 드문 일입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유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잘 믿을 수 있는 정도로만 채워주실 것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 그로 인하여 죄를 많이 범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가난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가난하게 해주십시오. 나의 신앙을 위하여, 나의 진실을 위하여, 진정으로 가난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는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한편 솔로몬은 너무 가난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까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모든 소원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임을 나타내 줍니다.

미제라블」이라는 프랑스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장발쟝이라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사흘 굶고서 도둑질 안하는 사람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가난하게 되면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너무나 가난하면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불의와 독재를 용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도 진실도 잃어버리고 다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비굴한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하여도 진실한 마음을 간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가난하지 말게 하옵소서. 진실을 찾고 지키며 살게 하시고, 의롭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용기와 양심의 자유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물질만을 허락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사실 물질적 가난보다 더욱더 가난한 것은 비굴해지는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가난하게 되면 비굴한 것이 체질화되기 쉬워짐으로 고치기 어렵게 됩니다. 돈 많은 사람이 나타나면 허리를 굽실거리는 장면을 우리는 가끔 봅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하여 비굴해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돈을 위하여 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질까 두려워 많은 돈을 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 그것만이 내 소원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왕 솔로몬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바랍니다"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그의 이 두 가지 소원은 사실은 하나의 소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나 자신이 되게끔 도와주시옵시며, 죽기 전에 이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자신의 생을 이렇게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보고 죽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보람있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비굴하고 처참한 긴 인생보다는 떳떳하고 진실된 짧은 삶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까?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렸던 솔로몬이 마지막 구했던 이 아름다운 소원이 오늘 우리의 지혜로운 소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죽기 전에 이 소원을 이루어 주옵소서

 

기도:하나님 아버지여, 허망한 이 세대에 살면서 거짓에 빠져 어디까지가 의이며, 어디까지가 불의이고, 어디까지가 소원이며,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처지에서 헤매며 살고 있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제 지혜로운 마음을 허락하시어 의와 불의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시고, 내가 얼마나 의와 떨어져 살고 있는지 깨닫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나 자신만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며, 내 소원대로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게하여 주옵시고, 이제 새 마음 새 뜻으로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진실을 찾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이나 부귀 영화 또는 장수와 건강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설 수 있기만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격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지혜로운 자의 소원(잠30:5-9)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현대 사회에 모순이 있다면 그것은 결과만을 보고 단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나는 완전히 무시된 채 이루어진 업적,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을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슬프고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적 평가 방법인 것입니다. 무차별한 살생, 테러, 혁명, 방화 등 그 모든 권모술수로서 목적 달성만을 강구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과거를 완전히 무로 돌리고 현재의 소유와 능력의 정도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어른을 어른으로 모실 줄 알았고 애국자를 높이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연장자가 어른이 아니요 오직 가진 자만이 어른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루하루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눈 앞에 나타나는 현상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동기와 그 과정의 진실성 유무에서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동기와 소망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꿈과 목적이 더 중요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깊은 곳에 있는 소원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7에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의 능력이나 업적 또는 외모를 보시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에 갖고 있는 진실만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끔 우리는 전혀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이상한 일을 경험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오래 전부터 절실하게 소망했던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속에 진실한 소망을 갖고 있다면 말로 기도하지 않아도 꿰뚫어 들으실 것이다"라는 미련한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의 가치는 소원이 무엇이냐, 그 진실이 무엇이냐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꿈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한 꿈이며, 어느 정도 진실하고 절실한 것입니까? 높은 이상을 가진 꿈입니까? 아니면 저속하고 현세적인 꿈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윤리관, 종교관, 신앙관은 철저하게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3-12까지에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여덟 가지 복에 관한 말씀은 우리의 현세가 아무리 고달파도 우리의 이상은 "천국"이라는 높은 곳에 있음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 왕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라고 했을 때 솔로몬은 오직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만을 구하였습니다(왕상 3:9). 자기 자신을 위하여 소원을 말하지 않는 그의 진실된 마음에 흡족한 여호와는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귀와 영화까지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솔로몬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이루고 싶은 두 가지 소원을 아룁니다.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가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진실하려고 힘써 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진실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모릅니다. 바로 살아보려고, 깨끗하게 살아보려고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입니다. 우리들은 때로 사랑하는 자녀 또는 남편이나 아내 심지어는 자신의 양심까지도 속이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오래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오직 허망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삶을 한 번 살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만이 위대한 지혜의 근본입니다. 참 말을 할 때만이 그에게 영광이 있습니다. 진실 속에서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칭찬을 하고, 표창장을 주고, 누가 어떠한 영광을 돌려준다 하더라도 이것이 거짓으로 말미암은 소득이요, 불의와 협잡으로 말미암은 영광이라면 그만이 느끼는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칭찬하는 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 없고, 남들이 찬양해 주는 대로의 참된 영광을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만이 행복의 근원입니다. 설사 내가 억울한 말을 듣고 핍박을 받고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진실되고 참되고 의로운 행위라면 그 진실을 하나님만은 아시므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거짓 됨, 진실이 없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영화롭게 산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임종이 가까운 때에 "하나님이여, 내게서 허황된 거짓말을 제거해 주시옵소서"라는 소원을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과거에 관한 말을 할 때에는 우리 '기억력'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과거의 어떤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어떤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합시다. 그런데 과거의 인물과 지적된 사람이 같지 않을 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에도 기억력조차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현재에 관한 말을 할 때에는 '정확성'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정확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는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얼마전 어떤 외국인의 강연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옆에서 통역하는 목사님이 본의 아니게 많은 부분을 틀리게 통역하는 것을 들으며 정확하게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말을 정확하게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미래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실천'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경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장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베드로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말할 때에는 진실한 것이겠지만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거짓말을 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의 이상을 말할 때는 잘 생각하여 거짓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아! 불쌍한 사람이구나.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까?"하면서 괴로워합니다. 자신이 뜻한 대로 움직일 수 없고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죽기 전에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하소서." 다시 한 번 솔로몬의 소원을 생각해봅시다. 진실되게 살아보려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허위로 가득차 있는데, 나만 진실되어서 손해볼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은 버립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거짓을 추종한다 하여도 내 양심은 그럴 수 없다. 내 마지막 소원은 역시 진실 하나뿐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원이며, 가장 지혜로운 자의 소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말'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내 마음에 말을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 말을 하는 것은 결심이며 서원이며 곧 소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히브리 개념에 비추어 본다면 "내가 말한 대로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소원한 대로 결심한 대로 지키게 하여주십시오"라는 의미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대로 살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기도한 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서원과 내 생활과는 너무도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나는 40년 동안 이것 때문에 고생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구하오니 이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솔로몬의 아름다운 마지막 기도, 지혜로운 소원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두 번째 소원으로 필요한 양식을 구하였습니다.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기도문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양 만큼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양식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서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보통 아침에 커피 한 잔 정도 마시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같이 일을 해보니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는데 달걀 다섯 개와 굉장히 큰 햄 스테이크를 먹는 것을 보며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조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먹지 않고는 그들의 육체는 지탱을 못합니다. 책상에 앉아 일하는 정신 노동자에게는 커피 한 잔으로 족하겠지만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은 먹지 않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먹을 양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일 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서 하늘로부터 오는 영의 양식을 받아야 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결심, 나의 능력 그리고 나의 용기만을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힘 없이도 내가 설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교만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실패하고서도 아직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얼마나 어리석고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는 거짓말장이일까요. 하늘로부터 오는 힘, 그 양식, 그 영의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솔로몬은 "하나님이여,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배가 불러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할까 두렵고, 가난하여 도둑질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우니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고, 다만 필요한 양식을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기도입니까?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하다는 것도 하나의 시험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낮 예배에 나오는 교인 수와 저녁 예배에 나오는 교인 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문둥병자들만 모이는 교회에 설교하러 가 보았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그리고 새벽이나 나오는 교인 수는 똑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낮에는 나올 수 있는데 왜 밤에는 못 나오는 것입니까?

바로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부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여유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어도 살 것 같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정말 다급한 심정이 되어 하나님께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라면 그렇게는 못할 것입니다. 마음이 부하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거만한 말은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한 사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부자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나오는 예는 무척 드문 일입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유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잘 믿을 수 있는 정도로만 채워주실 것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 그로 인하여 죄를 많이 범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가난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가난하게 해주십시오. 나의 신앙을 위하여, 나의 진실을 위하여, 진정으로 가난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는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한편 솔로몬은 너무 가난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까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모든 소원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임을 나타내 줍니다.

미제라블」이라는 프랑스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장발쟝이라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사흘 굶고서 도둑질 안하는 사람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가난하게 되면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너무나 가난하면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불의와 독재를 용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도 진실도 잃어버리고 다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비굴한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하여도 진실한 마음을 간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가난하지 말게 하옵소서. 진실을 찾고 지키며 살게 하시고, 의롭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용기와 양심의 자유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물질만을 허락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사실 물질적 가난보다 더욱더 가난한 것은 비굴해지는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가난하게 되면 비굴한 것이 체질화되기 쉬워짐으로 고치기 어렵게 됩니다. 돈 많은 사람이 나타나면 허리를 굽실거리는 장면을 우리는 가끔 봅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하여 비굴해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돈을 위하여 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질까 두려워 많은 돈을 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 그것만이 내 소원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왕 솔로몬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바랍니다"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그의 이 두 가지 소원은 사실은 하나의 소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나 자신이 되게끔 도와주시옵시며, 죽기 전에 이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자신의 생을 이렇게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보고 죽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보람있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비굴하고 처참한 긴 인생보다는 떳떳하고 진실된 짧은 삶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까?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렸던 솔로몬이 마지막 구했던 이 아름다운 소원이 오늘 우리의 지혜로운 소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죽기 전에 이 소원을 이루어 주옵소서

 

기도:하나님 아버지여, 허망한 이 세대에 살면서 거짓에 빠져 어디까지가 의이며, 어디까지가 불의이고, 어디까지가 소원이며,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처지에서 헤매며 살고 있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제 지혜로운 마음을 허락하시어 의와 불의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시고, 내가 얼마나 의와 떨어져 살고 있는지 깨닫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나 자신만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며, 내 소원대로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게하여 주옵시고, 이제 새 마음 새 뜻으로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진실을 찾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이나 부귀 영화 또는 장수와 건강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설 수 있기만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격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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