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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쓰신 가시면류관(마 27:20-31)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주님이 쓰신 가시면류관

마태복음 27:20-31

 

 

 

오늘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갈보리에 계시다가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여리고에서 다시 험한 산골짜기 길을 거슬러 올라가 베다니 마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벳바게라고 하는 마음에 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맞은편 마음에 가서 어린 나귀를 구하여 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벳바게라고 하는 마음에서 에루살렘성에 입성하시게 되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넘으시고 겟세마네 동산 기슭으로 내려가며 기디론시내쯤 가시게 되셨을때는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시온산 언덕을 올라가시면서 예루살렘성 가까이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따라서 함께 가고 있던 여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땅여 펴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어린아이들은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들고 소리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이렇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래서 이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해마다 종려주일이 되면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음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거기서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을 넘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행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가 있는 곳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곳에 세워진 기념교회가 있는데 거기까지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풍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복음서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승리적인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광경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들은 좀 꾸짖으세요" 이 말은 '이거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잠잠하면 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에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뜻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혼란과 죄악의 문제를 해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미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만 왕의 왕이 신에도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서 버린바되셨고, 간고를 많이 겪으셨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 되신것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금 면류관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멸시하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와 같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이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얼마나 낮아 지셨나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그는 하늘에서 사랑을 받으시고 지사에서는 왕이 되시는 분이신 데 이제 그 고통스러운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시게 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음과 몸에 상처를 입으시고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의 얼굴은 쉴새 없이 흐르는 피의 상처로 창백해지고 기력 없이 이지러져 버립니다.

 

이 시간 우리는 심령의 눈을 들어 나대신 주님이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시고 고난 당하시는 모습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난 당하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 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인간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가 마구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이 죄 때문에 질고를 당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 할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고 한 것처럼 아무런 흠도 죄도 없으신 어린양 같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시게 되신 것입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예수님의 머리를 상하게 하며 피를 흘리게 하고 고통을 주었으며 그 수치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총독의 사병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 들어가서 온 부대를 다 그의 앞에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긴 다음에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고 나서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하고 외치면서 희롱했습니다. 또 예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낮아 지셨습니까? 저들이 예수님을 조롱할 때 주님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시킬 실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와 같은 멸시와 천대, 희롱과 고난을 받으시면 서도 아버지의 궁전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영광스러운 권위를 그대로 간직한 채 어엿이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나사렛의 소박한 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주님이 원하시면 그의 불꽃같은 눈초리로 단숨에 로마 병정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고 침묵을 지키시던 그 입술에서 말씀 한마디가 나오는 날이면 빌라도의 궁전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도 있는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우유부단한 통치자 빌라도와 악당들을 산채로 땅속에 매장시키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정 어린 마음으로 가슴아프게 주님을 바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질고를 당하시는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쓰신 가시면류관을 바라보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면류관은 우리를 너무 슬프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날실 때부터 공생하셨고, 자라실 때 수고가 많으셨고, 전도하실 때 배척 당하시면 서도 우리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이 그처럼 냉대와 멸시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로마군인들에게 희롱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색옷을 입혔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위엄을 놀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가 왕이라니까 자색옷을 입으라는 식의 조롱하는 행위였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소란을 피웠다"는 고발을 하면서 멸시를 퍼부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연약한 자가 아니시지만 우리 때문에 연약한 자처럼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하여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는 자칭 왕이라 한다'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의미에서 왕이십니다. 만일에 주님이 왕이 아니셨다면 그는 일개의 사기꾼으로 조롱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셨기 때문에 그의 모든 말씀이 그의 왕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주장이 거부되고, 인격이 모독을 받게 될 때, 상처를 입고, 비난을 받으며, 멸시를 받는 그의 마음은 슬프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찬양을 받으셔야 마땅하신 주님이 이처럼 멸시를 당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주님이 쓰신 가시면류관은 조롱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만일에 저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려고만 했다면 짚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주님에게 고통을 주려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저들은 주님에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저들에게 맞으셨습니다. 게다가 머리를 찌르는 가시는 고통을 더해 주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우리의 마음과 몸이 아파지는 것 같습니다. 왜요? 주님은 온전히 우리 때문에 이런 멸시와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이 고통을 무엇으로 다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천재 미켈란젤로 나 라파엘도 주님이 당하신 고통의 정황을 그리라면 포기하고 물러갔을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 장이라도 우리의 죄 때문에 수욕당하시는 우리 주님의 슬픔을 다 노래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 어떠했나를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 말을 들으시기 보다 여러분이 앉으신 그 자리에서 사랑의 눈으로 가시 면류관 쓰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면류관은 우리에게 주시는 엄숙한 경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도 우리가 주님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워드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에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는 것이 옛날 로마군인들만이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의 뜻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런 죄를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도 자기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가시를 모아 면류관을 만드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합리적이 아닌 내용을 찾아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들이 생각한 과학적인 발견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떠듭니다. 저들은 주님에게 씌울 가시면류관을 만드느라고 손이 상합니다.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의 참 소망이신 그리스도에게 씌우기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 듣지 가시면류관을 만드는 일에서 손을 떼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노예를 해방하고, 압제받는 사람을 풀어 주십니다. 주님의 복음은 자유의 헌장이며 제사장의 무익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진실하신 친구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주님을 바로 알았다면 진주보다 더 값진 존경과 사랑의 금강석으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주님을 몰라서 가시고 면류관을 만들어 주님에게 씌우고 그것을 잘 한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남을 비난하고 트집잡는 일은 나쁜 일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일에서는 손을 떼고, 그런 일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지한 로마군인들은 주님의 머리에 관을 씌웠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주님의 손에 홀을 들려 드렸지만 그것은 진정한 왕권을 인정하는 상아로 만든 홀이 아니라 갈대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하늘 일이 아닐 때 그것은 주님을 조롱하는 행위가 되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위해 봉사를 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워드리고 그 손에 갈대 홀을 들려 드려 조롱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주님과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 경건한 거짓을 행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만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이 왕이시라면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에 주님이 왕으로 받아드려지지 않으면 차라리 정직하게 그에게 면류관을 씌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명목상의 선심과 거짓된 존경심과 충성의 구실로 또 다시 주님을 욕되게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나는 위선자는 아닌가?

 

지금 이 자리에 주님께서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슬픈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나 사실은 미움과 조롱의 가시면류관을 씌워 드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 순종한다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불순종의 가시 면류관을 씌워 드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가슴아파하시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엄숙한 경고입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면류관은 승리의 고통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정복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이상 겪을 수 없는 수치에서도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고통을 당하실 때 회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의 값은 고통과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당할 고통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신 모습을 기억하시지요? "내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은 인간으로서 이러한 고통을 앞에 놓고 싸울 때 전력을 다하여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피곤해 졌습니다. 그의 몸은 피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고통과 분노의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이 쓴잔 죽음의 잔을 마심으로 그의 백성에게 내릴 영원한 죽임을 면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주님은 사람으로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하였지만 겁내지 아니 하시고 정해진 목적을 이탈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야곱 베헤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개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물려고 덤벼들고 뼈다귀하나를 가지고 서로 먹겠다고 으르렁대며 싸웁니다. 사람들은 때로 여우와도 같습니다. 간사하기 이를 데 없고 엉큼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표범과 같아서 잡을 수도 없이 미끄럽고 빠릅니다. 사람들은 때로 뱀과 같아서 번갯불처럼 날쌔고 교활합니다" 바로 꼬집은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나쁜 점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약탈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뜻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집사와 권사 그리고 목사가 천국을 향해 올라가는데 집사에게는 금줄이 드리워지고 권사에게는 새끼줄이 그리고 복사에게는 고무줄이 드리워졌다고 합니다. 집사는 금줄을 타고 천국에 잘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권사는 새끼줄을 타고 언제 끊어질런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간신히 올라가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목사는 고무줄을 붙잡고 올라가는데 늘었다 줄었다 하며 다 올라간 것 같았다가는 죽 늘어져 저 밑까지 떨어지는데 죽을힘을 다해서 어떻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천국이라는 데를 가니까 예수님이 집사님이 오셨다고 그렇게 기뻐하면서 잔치를 베풀며 대환영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권사는 집사한테 저렇게 환대하니 나한테는 더 잘하시겠지 하는 기대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시더니 "오, 너 왔니?" 하시고는 별로 반가워하시는 기색도 없으시더랍니다. 그런데 목사를 보시더니 예수님은 인사하실 사이도 없이 예수님의 보좌에 가서 얼른 앉으시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는 하도 이상해서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그래도 제가 세상에서 목사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에게는 목사님이라고 대접도 받고 살았는데 그래 이렇게 천국에 왔으면 너 그 동안 수고했다고 말씀 한마디라도 하셔아죠. 어떻게 주님 보좌에 털썩 앉기만 하십니까?"

 

이때 예수님 말씀이 "야, 네가 먼저 내 자리에 앉을 것 같아 내가 먼저 않았다"

 

이것은 물론 만든 이야기입니다. 틀림없이 어는 평신도가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더구나 목사가 주님의 영광을 약탈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다는 사실을 꼬집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우리들 때문에 주님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렇게 모욕과 수치 그리고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그는 정말 곤욕을 당하며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깍는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릇소가 보르테르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과 같이 죽었으나 예수는 하나님처럼 죽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으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를 못박는 사람들을 향하여 침을 뱉고 악담을 퍼붓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못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본 어느 목격자는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증거 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예수님의 기도대로 했더니 강퍅하던 사울이 바울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사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면류관은 우리를 치료합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은 바라보는 사람은 통회의 눈물 없이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때문에 수치와 모욕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주님도 욕을 당했으니 나도 욕을 당하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모욕은 우리와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예일대학교의 헨리 나운스 박사는 목회자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Looucleel healers'라는 말을 썼습니다. 여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심령이 다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목회자는 그 상한 심령을 치료해주는 치료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목회자 자신이 깊은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은 이를 치료해주어야 하는 치료자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상처받은 치료자입니다.

 

외국에 이민을 가서 지내시는 분들을 보면(물론 예외도 있지만) 대개는 고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요사이 어디가나 경제 사정이 어려워서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운영이 어렵고 회사에 나가시는 분들은 구조조정으로 인해 해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심리가 가득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언어가 자유롭지 않아 답답한데 억울한 일 당하면 해소 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한국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나와 이것이 터지는데 목회자는 이것을 다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부부간에 싸움이 붙어 심각해지면 밤12시 새벽2시 가릴 것이 없이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자다가 달려가서 달래야만 합니다. 목회자에게는 상처가 없습니까? 엉뚱한 일로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다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상처를 치료받을 길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입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우리의 불평도, 원망도, 근심도, 걱정도, 불만도, 낙심도, 미움도 다 치료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가시면류관을 잘 쓰면 마지막에는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립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우리 몫의 가시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가시관 잘 써서 마지막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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