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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

by 【고동엽】 2021. 12. 26.

 

1.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 


  (1)스코틀랜드는 영국 북쪽의 소국으로 아일란드에서 건너간 스콧트족과 원주민 픽트(Picts)족이 살고 있었으며, 처음으로 성니니안(St . Ninian)이 4세기 전도하고, 563년에는 성 콜롬바(St . Colunmba 521-597)가 아이오나(Iona)섬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전도를 하였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중심이 되어 영국의 세력에서 독립을 유지해 왔다.
    종교개혁이전에 성 안드류스 대학(St . Andrews, 1411), 글라스고 대학(Glasgow1450-1), 에버딘 대학(Aberdeen, 1494)이 설립되고 : 1472년에는 세인 안드류스가, 1492년에는 글라스고가 대 감독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개혁 전에는 교회가 힘을 잃었다.

 

  (2) 지리적으로 좋지않는 환경에 놓여있으며 북쪽은 고지대(High Land)이며, 남쪽에 수도인 에딘버러, 새인 앤드류스, 글라스고 등의 도시들이 있다. 민족적으로 스콧트인들(Scote)은 독립심이 강하고, 근면하며, 인색할만큼 근검절약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씨족 관념이(Clan)이 강하여 각 씨족벼로 특이한 색깔과 옷을 착용하였으며(옛날에) , 씨족간에 분쟁도 많았다고 한다.

 

  (3) 1707년 스코틀랜드가 영극과 연합(Union) 하기 이전 왕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a)  1513-1542 : 제임스 5세
     (b)  1542-1567 : 메리 스트아트(Mary Stuart 1542-1567) *소위 “Queen Scots"
     (c)  1567-1625 : 제임스 6세. (1603에는 영국왕을 겸하게 되어, 제임스 일세라는 옹칭을 가지게 됨. 이 이후로 1707년까지 영국왕은 자동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이 되었음)

 

 

2.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예비단계. 


  (1)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위크리프의 설교자들(Lallards)이 스코틀랜드에도 일어나 가능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레스비(Resby, 1406)와 크라와(Crawar, 1433)가 순교하였다. 

  (2) 독일에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자 루터의 저작이 밀수입되고, 패트릭 해밀턴(Patreck Hamilton)이 루터의 저작에 감명을 받고 독일에 건너가서 개혁자들을 만나 개혁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귀국하여, 진리를 전하다가 1528년에 스코틀랜드 장노교회의 첫  순교   자가 되었다.

  (3) 영국의 종교개혁운동이 영향을 미쳤으나, 반영감정(反英感情) 때문에 스콧트인들은 제네바의 개혁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존 낙스(John knox, 1513-1672)가 순교자 위시아트 (G. Wishart)를 이어 개혁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3. 존 녹스


  (1)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 해 딩턴(Haddington)출신이며, 그도 처음 신부가 되었으나, 고향에서 법률가로 일을 하는 등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위시아트의 영향으로 개혁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547년에 확신을 가지고 체인 안드류스에서 진리를 전파하다가, 불란서 함대가 성을 점령할 때 붙잡혀 19개월간 노예선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  1549년 방면된 후에 영국 에드워드6세 궁실의 목사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메리 여왕의 집권 후에 제네바로 피신하여 칼빈을 만결정적인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의 방향을 잡았다.  거기서 결혼도 하고...... .

  (2) 1555-1556, 귀국하여 설교와 저각에 힘을 다하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반불파(反佛派)
    귀족들과 “가장 복스러운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교회”를 설립하기로 계약(Covenant / 또는 (Covenanting)을 1557년에 맺게 되었다.  이 귀족들이 나중에 “회중(교회)의 존귀한 者” 로서 개혁운동의 정치적지지 자가된다.

  (3) 1560 영국의 도움으로 불란서 군대가 물러가고, 스코트란드 의회는 녹스의 신앙고백서(Scottish Confession, 1560)을 체택하였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개혁교회가 되었다.
    교황의 법적 권위를 무효화하고, 로마 카토릭 미사를 금지시켰다.
     같은 해에 제일 권징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 1560)를 저작하여 장노교회정치 원리를 확정하였다.  이 치리서는 의회의 인준을 받지 않고 교회의 총회(the General Assembly)에서 인준하여 교회의 독립을 확정시켰다.(그후 1564에 총회는 녹스가 지은 the Book of Common Order를 채택하였다.)

  (4) 1560년에 섭정이었던 기즈家의 마리아가 죽은 뒤에, “스콧트인들의 여왕”이라 불리워지는 메리 여왕이 1561년 불란서에서 귀국한 이후로 1567년 그의 아들 제임스6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낙수는 에딘버러 성 질스(St . Giles)강단에서, 메리 여왕은 왕좌에서 서로 불호령으로 공박하였다고 한다. 낙스는 생전에 개혁교회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1572년 11월 24일에 죽었으나, 개신교도로 양육 받은 제임스 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안심하였다 한다.

 

  (5) 그의 성품은 편협한 점도 있고, 과격하고 거침없이 말을 함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으나, 대담하고 직선적이어서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왕실에 틀고 앉은 “마녀들에 대한 선전나팔”(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이란 소책자의 표제가 나타내 보이는것 같이 선동적이고 열열한 개혁운동가였다.
    그의 신념은 “예정론 연구” (Treatise on Predestination, 1560, 제네바에서 출간)에서 보이는 엄격한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1587, 1644완간)로 사후에 출판되었다.

 

 

4. 녹스의 후계자 멜빌


  (1) 안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2-1622)은 녹스의 후계자로서 스코틀랜드 교회를 장노교회로 조직하였다.  1577년 촐회에서 제 이 권징서(Second Book of Discioline, 1577)을 체택하고 목사, 감독, 성직자(minister)는 같은 말로 썼으며 시찰장(Super-intendents)의 임무를 노회(Presby tery)로 이관하고, 감독직은 교회재판(ecclesiastical courts)에서 담당하였다.

  (2) 그는 베자의 친구이었으며, 학자요 스코틀랜드대학교육 개혁가이기도 하였다.
    글라스고대학장으로서 어학, 과학, 철학, 신학등의 새로운 교과과정을 도입하였다.
    제임스 왕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수 차례 교수직을 잃었으며, 국교회 예배의식을 풍자하는 시를 써 런던탑에 수금되기도 하였다.

 

 

5.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특징. 

 

  (1)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교리는 개혁신앙(Reformed faith),정치는 장노주의(Presby-terian system)를 취한다.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확정된 것은 1690년이나, 그때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 제임스6세기 영국왕이 된이후로 영국왕들들이 스코틀랜드에 감독제를 강요하였다. 단일   군주, 단일교회정책을 취한 것이다.  스콧트인들은 정치적, 종교적자립을 원하여 1538년   국민계약(National Covenant)을 맺어 장노제를 유지하기로 맹약하고, 영국왕 찰스일세에   반란을 일으켰고, 1643년에는 청교도들이 우세한 영국의회와 “신성동맹 및 계약”(The     Solemn Leagus and Covenant)을 맺고 국왕과 싸우게 되었다.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 예배서를 교회의 규범서로 받아들였으   며, 명예 혁명 후에 정식으로 스코틀랜드 영역에는 장노교회가 국교로 선포되었다.

 

  (3)예배는 질서와 위엄(order and dignity)이 있으며 단순하다 .고교회파(High Presbyterisns)는 예배의식에 예식서를 사용하나, 대부분 정한 예배 의식서를 사용하지 않고, 예배의 중심을 설교에 둔다. 사도적 신앙과 보편 교회적 예배에 충실하려 한다.
    성찬은 번번하지 않고 장노들이 수종한다.  권징을 실시한다.

 

 

6. 계약파(Covenanters) 

 

  (1) 16세기, 17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로서 종교적, 정치적 맹세로 결속하여 그들의 종교적이상을 성취하려하였다
    1556에서 1562사이에 수많은 계약이 이루어지고, 1638년 찰스일세에 대항하여 맺은 국민계약(the National Covenant), 1643년 신성동맹 및 계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을 정점으로 계약을 종교 및 정치투쟁의 방법으로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계약파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1661-1688년사이에 또 다시 장노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새로운 계약이 생겨 났고, 명예혁명으로 장노주의의 승리로 계약목적이 이루어졌다.

 

  (2) 그 이후에 일부의 과격파는 1690년의 장로교회설립에 불만을 가지고 “개혁 증노교회 교인” (Reformed Preabyterians)이 되었으며, 계속 “계약파” 전통을 이어왔다.  그후에 스코틀랜드 장노교회에서 분리한 “자유교회” (Free Church, 1876)에 합세하였다. 

 

  (3) 리차드 카메룬(Rechard Cameron, ?-d. 1680)은 과격파의 대표이며, 1661-1688년 왕성복구시대에 찰스이세에 대한 무력항쟁을 펴고, 국교회에 동조하는 동족에 대해서도 공격을 엄추지 않았다.  그는 열혈설교가이며 스코틀랜드교회와 국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1680년에 국와의 군대와 교전중 전사하였다.  그를 따르는 과격한 계약파를 “카메루니안”(Cameronians)라 부른다. 지금도 미국에 개혁 장로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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