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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1

by 【고동엽】 2009. 4. 17.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1
어린 시절 중학교 교과서에 기독교는 사랑, 불교는 깨달음, 유교는 인(仁) 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2 천 년이나 되는데 그리스도인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불리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기독교에 예수사랑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복음서가 증언하는 풍부하고,
지금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이 실종된 까닭인데요. 그것은 종교개혁 신학이 하나님나라보다는 그리스도의 죄의 용서를 신학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 입니다. 그에 따라서 삼위일체 신론도 함께 실종되고 성부 하나님만 강조되어 신이 통치하고 지배하는 신으로만 인식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설명되지 못한 것이 사랑이 우리 삶에서 작동하지 않은 원인이라고 생각되고요, 또한 우선 말씀드리는 것은 황당하게도 우리가 예수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입니다.
10 여년 전에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하면서 동양학자 김용옥의 요한복음 해설서를 참고했습니다. 김용옥은 말하기를 예수사랑이 무엇인지 규명한 학자도 없고 자기도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사랑의 복음서인 요한복음 해설서를 쓴 사람이나, 그 사랑을 모르면서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하는 필자는 뻔뻔하고 웃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학자는 아니지만 예수사랑이 무엇인지 밝혀야 겠다는 생각에 방대한 고대의 라틴-그리스 신학과 철학 그리고 중세와 현대신학 책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필자의 첫 책인 '기독교 본류를 찾아서- 예수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입니다.
그때부터 책 읽는 것이 필자의 직업이 됐습니다. 기독교를 알아 가는 것이 무척 재미있고 여러분과 소통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펴볼 사랑이야기는 끌레르보의 베르나르 식의 영혼의 양식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윤리로서의 사랑 이야기 입니다. 이번에는 글이 어렵지는 않겠으나 우리가 기독교의 근본을 알아야 함으로 다소 글이 깁니다. 몇 회가 될지 모르겠으나 그 여정을 시작합니다.
1. 인간의 본성인 사랑
사랑은 우리의 품성도 아니고, 더욱이 기본적으로는 윤리규범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은 대부분이 동사로 사용 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이고, 그리스도인의 생명 입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봅니다.
신학생 시절에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노량진에 있는 천사원을 방문했습니다. 학생들이 4 - 5 세 정도의 아이들과 놀이를 한 후 돌아올 시간쯤에 영유아 20 여 명이 누워있는 침대로 가서 모두가 한 아기 씩 안아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치고 필자가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는 순간 모든 아기가 일제히 울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에 다시 들어가니 모두가 울음을 동시에 그쳤습니다. 다시 나오면 울고 들어가면 그칩니다. 실험하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을 열어 놓고 한 발은 밖에 두고, 한 발은 안에 있으면 안 울고, 안에 있는 발을 밖으로 빼면 울고 다시 들여 놓으면 그칩니다. 소리를 죽여서 살포시 동작을 해도 같습니다. 먼 침대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침대 아이도 소리는 못 듣는데 일제히 울고 일제히 그칩니다. 아기들이 기를 느낍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같이 있기를 좋아 합니다. 사랑이 그리운 아기들을 두고 오는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1950 년대 미국은 여성해방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육아 기계가 개발되어 판매되고 아기를 집단 양육하는 운동이 일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심리학회는 이것을 지지했습니다.
심리학회 회장이 된 해리 할로는 원숭이 실험을 통해 집단 양육이 병에 취약하고 아기를 안아주는 게 건강과 양육에 좋다는 이론을 주장합니다. 그는 아기 안아 줄 것을 주장하는 전국강연을 다녔는데 어느날 조교에게 '나는 엄마들이 모두 아는 사실을 강연한다' 고 투덜댔습니다.
해리 할로는 사랑이 지능발달과 건강에 유익함을 밝혔습니다. 아울러 사랑의 결핍이 지능퇴행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밝혔습니다.
그는 사랑은 생명의 양식이라고 합니다.(데버러 블룸, 사랑의 발견, 사이언스북스 2005)
바울은 성령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을 부어 주신다고 합니다.(로마5:5)
이 사랑은 우리의 품성을 규정하는 미덕이 아닙니다. 내 안에 거주하는 성령 그 자체이며 , 신적 사랑 그 자체 입니다.(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3 신준호 새물결플러스 2019, 319p)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인류의 정신문명이 확립된 BC 8 세기부터 AD 2 세기까지를 축의 시대라고 합니다.(칼 야스퍼스) 이때 현자들은 선(善)과 지혜를 정신문명의 기둥으로 삼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카렌 암스트롱)
사랑이 함께하는 특성인데 반하여 선과 도덕은 부정과 불의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차별을 일으킵니다. 지식도 소수의 특권층에 집중되어 지식이 없는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합니다. 선과 지혜는 소외를 일으키는 매카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는 앞으로 지혜를 배설물처럼 여기겠다고 합니다.
지식인 그룹인 기득권 세력이 중앙 콘트롤 타워가 있는 것처럼 합심하여 조국일가를 핍박하는 것도 이제까지 차별하며 누려온 권력을 허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 입니다.
현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1 세기에 예수는 사랑할 것을 주창합니다.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은 서로 동등하게 함께 하며, 누구로부터도 지배, 억압, 차별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일 때 평화의 삶을 이룰 수 있다는 뜻 입니다.
사랑은 만인을 평등하게 하는 윤리개념 입니다.
토스또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미시킨 공작은 천한 여인인 미모의 나스따시야와 귀족의 딸을 동시에 사랑 합니다. 토스또예프스키의 모든 소설에서 처럼 미시킨 공작은 파멸해 가는 나스따시야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스따시야는 귀족의 딸에게 양보하려고 그녀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 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천한 내가 귀족인 당신과 동등하다는 건 아닙니다.' 라는 편지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서로 같아진다는 의미로 쓰여진 사례 입니다. 지금은 아이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하면 모두 좋아할 말이지만, 20 세기 초까지도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 편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묵자의 사랑 편에서 보다 자세히 살피겠지만, 중국은 한 무제가 국가 질서를 위해서 묵자의 사랑등 제자백가를 제치고 서열을 중시하여 차별하는 공자의 유가를 국가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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