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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건물 없는 교회'

by 【고동엽】 2009. 1. 30.

 

 

'건물 없는 교회'

 


이 글은 개혁교회네트워크가 1월 18일 개최한 '이런 교회 다니고 싶다'라는 세미나에서 발표된 안해용 목사(너머서교회)의 발제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우리는 흔히 "저쪽 건물 뒤로 200미터 가면 교회가 있습니다"라든지 "교회가 낡아서 큰일이야"라는 말을 한다. 저변에는 교회를 하나의 장소나 건물로 여긴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교회를 장소나 건물로 묘사하지 않았다. 교회라는 단어의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원래 모인 무리나 민회(民會)등을 가리켰고, 기독교적인 용법에서는 '믿는 무리', '회중', '신앙 공동체'를 지칭했다.

이렇게 교회를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장소나 건물로 여길 때 나타나는 폐해는 두 가지다.

첫째, 우리가 모이는 장소나 건물을 신성시하는 경향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성도들의 모임 장소 혹은 모이는 건물을 '거룩하다'고 여기면서, 장소나 건물 중심의 신앙이 발전한다. 우리의 예배 처소를 구약의 성전과 동일시하는 모습이 바로 구체적인 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그 곳을 모든 신앙 활동의 중심으로 삼는다. 우리의 거룩성은 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측정된다.

예를 들어 주일예배를 드리러 가는 그리스도인을 상상해 보라. 예배당 건물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는 거룩해진다. 그 건물에 들어가 주일예배를 드리고 여러 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거룩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다가 오후에 예배당을 나서서 세상으로 진입하는 순간 그는 거룩성과 멀어진다. 점점 세상 적이 되고, 결국 세상 한가운데서 매우 세속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그가 유일하게 거룩해질 수 있는 길은 예배당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 안에서 활동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비성경적인 정신을 나타내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교회를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고 장소나 건물로 간주할 때 야기되는 또 다른 폐해는 기독신앙의 비인격화다. 우리는 '교회봉사'라는 말을 할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일정한 장소나 건물에 와서 주일학교든 성가대든 초신자 양육이든 자기가 맡은 책임을 다하는 정도로 여긴다. 그러기에 특정 장소 안에서 하지 않는 일은 '교회봉사'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가 사람들이고 봉사가 섬김이라면 '교회봉사'라는 것은 마땅히 어떤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말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교회봉사'라는 영역은 우리의 삶의 전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교회를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교회, ○○교회 하면 우리 머리에는 금방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떠올라야 한다. 허름한 상가 2층이든 무슨 공원의 구석이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임을 자각해야 한다.

에클레시아"란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공식문서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 번째 편지(살전1:1)에서이다. 본래 이 말은 성서적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내용을 내포한 교회로 사용되기 전에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사용되어졌던 용어를 바울이 전용하였던 것이다.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군주를 선택하고, 정치적인 결정을 추인하거나 사법적 차원의 탄원을 듣기 위해 모인 시민전체의 회합을 지칭할 때, "에클레시아"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런 유래를 거쳐 이 용어는 '집회'의 의미로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의미로 쓰이면서 신약교회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낱말로 자리 잡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은유적 표현으로 교회의 본질을 나타내었다. 그리스도 안에(살전1:1), 그리스도와 함께(롬6:1-11), 그리스도와 연합하는(갈3:27), 그리스도의 지체(고전6:15) 등등의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가 있다. 이러한 용어와 표현이 의미하는 교회의 본질은 주로 교회의 통일성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전12:27에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많은 지체들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음을 주장한다.(고전12:13) 따라서 지체는 하나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획일적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은사를 통한 조화로운 통일성을 말하고 있다.

다양한 은사가 전체의 몸과 조화를 이루어 상호봉사를 함으로 일체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지체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에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지, 몸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머리인 그리스도가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생명과 의지를 부여하며, 하나의 유기체로서 모든 지체를 연합시킨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개념을 더 확대하여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보이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아 현재 지상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존재론적으로 연결시키는 도식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구성된 지체를 그리스도의 신적인 몸과 동일시하는 관점으로 교회를 절대시하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것은 교회의 중심이 지체가 아닌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어야 하며, 지체는 머리에게서 생명력을 부여받아 다양한 은사를 통하여 봉사하는 구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성서의 기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사건을 구약시대에 야훼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성취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새 백성, 곧 독특한 임무와 주체성을 가진 새 공동체가 되었고, 예수도 추종자들은 새 이스라엘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의도적으로 열두 제자를 택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상징적으로 대표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이 제자들과 새 언약을 맺고, 모세의 언약과 율법을 토대로 새 계명을 주었다.

이러한 의도는 예수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 사건을 기점으로 낡은 율법시대는 지나고, 복음의 시대가 왔음을 알려 준다. 이들은 새 시대에 적합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새 공동체가 곧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믿었다. 이 새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 이방인 할 것 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면 누구든지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이스라엘, 곧 새 이스라엘이다. 새 이스라엘은 외면적 유대인이 아닌 내면적 유대인으로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따라서 할례는 육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다.

교회가 참된 이스라엘, 곧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교회가 새로운 계약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콘첼만은 초대교회와 관련하여 교회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존재'로 인식하는 동시에 '세상 안의 존재'로 이해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는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부탁하신 말씀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거룩한 자들, 선택된 자들,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 즉 신앙에 의하여 결정되며,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될 때에 진정으로 새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바른 교회관을 확립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적으로 교회는 건물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 높은 건물을 짓고 더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로 건강한 교회로 나아가는 첫 단추가 건물 없는 교회를 지향함에 있다. 건물을 소유하지 않는 것은 성서적인 본래의 의미를 찾아가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교회의 정의를 사람으로 본다면 건물이 주인 되는 교회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론적인 본래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 조금은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건물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이루어 질 수 있다.

인간은 작은 건물을 소유하게 되면 더 큰 건물과 안락함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분명히 선언함으로 분명한 본질적인 교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건물 없는 교회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인 이원론적인 신앙에서 놓여 날 수 있다. 교회가 사람들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으려면 건물이 없기에 이런 의식을 가지는데 도움이 된다.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고 건물과 장소 안에 가두어 버린 신앙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는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머무는 곳이 교회이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의 일이라는 의식을 갖게 한다. 그러기에 건물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본질을 찾아가는 교회로 나아갈 수 있다.

건물이 없음을 통하여 사회로 나아감에 집중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들의 빛이 교회 안에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건물이 없기에 사회에 나아가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이 사용하지 않는 건물을 활용할 수 있다. 효율적인 입장에서도 훨씬 알차게 진행될 수 있다. 본 교회는 고등학교 음악실을 이용하고 있다. 음악실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공간을 사용하고 있고, 저희 교회는 학교에 일정한 사용료를 내고 있고, 공간을 청소하고 관리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학교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학생들의 장학금을 전달하므로 교회와 사회가 소통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고 있다.

건물 없는 교회를 통하여 건강한 교회 재정을 운영할 수 있다. 대부분 많은 교회들이 나눔과 섬김의 많은 예산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건물을 유지하기 위한 많은 예산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물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교회의 많은 예산을 사회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저희 교회는 적은 인원으로 개척했지만, 건물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선교와 구제를 위해 전체 예산의 30%에 이르는 비용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건물에 자유로우면 봉사사역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질 수 있다.

건물 없는 교회를 통하여 다양한 교회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교회하면 십자가 종탑이 있고, 예배당 중앙에 십자가가 놓여 있고, 높은 천장에 들어가면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곳을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모이는 그 곳이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다양한 교회의 모습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찻집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고, 가정집에서도 가정교회가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학원에서도 예배를 드림으로 그곳이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다양한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고 건강한 교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새로운 시도들이 많아 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건물을 짓고 그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성도들을 모으는 일에 집중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가지고 있다. 건물에 자유로우면 교회의 본질을 추구할 수 있고 건강한 교회로 나아가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유럽의 화려한 성당들이 텅텅 비어가고 술집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국교회도 몇 십 년이 지나 유럽 교회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기에 본질을 찾아가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건물이 없는 교회로 나아갈 때 이루어 질 것이다. 사회와 소통하고, 건물에 사용되는 예산을 가지고 선교와 구제를 위하여 사용된다면 잃어버린 교회의 영향력이 회복될 것이다.

(뉴조)안해용 / 너머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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