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A. 성서관
1..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양태
1) 예수 그리스도 - 계시된 말씀
2) 성서 - 기록된 말씀
3) 설교 - 선포된 말씀
바르트가 히틀러와 싸우고 있을 때에는 세 가지 양태만, 후기 바르트에 가서는 세 가지만에서 '만'자가 사라진다.
가장 근원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이차적인 의미에서의 말씀. 그러므로 성서는 비평할 수 있다고 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맞지 안을 때는 성경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권위는 성경.
세 번째 권위인 설교는 성경에 일치해야.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 의해 비판을 받아야.
성경과 교회의 선포 사이에 신학의 자리가 있다: 교회의 설교는 신학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곧, 성경과 일치하는가의 비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
2.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인간적 증언인 성서
바르트는 성서가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봄. 성경은 첫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로는 계시에 대한 인간적인 증언이라고 봄. 옛 정통주의의 오류는 성경이 계시에 대한 인간적 증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이로 인해 기계적 영감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성경 안에는 수많은 인간적 요소, 인간적 제한성이 존재하고 있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를 파악하는데 실패한 사람이 자유주의 신학자. 그들은 성경이 인간적 증언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성경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 실패. 지금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 바르트의 영감론은 실재영감론(Realinspiration).
3. 계시하시고 은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계시인 동시에 은폐이다. 신앙이 없을 때에 성경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사람들이 계시를 계시로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계시인 동시에 은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하나님이 인간의 형태로 오셨기 때문. 이는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고자 낮아지고, 인간의 말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놀라운 일.
4.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성
계시인 동시에 은폐라면, 사람이 어떻게 그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가?: '사건' 하나님께서 은폐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은폐의 문을 여시고 말씀을 주실 때, 그 사건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게 된다: Ereignis, Akt. 이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5. 인간적 증언으로서의 성서의 가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시는가? 바르트는 성서적 증언들의 유일회적 가치를 주장.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특별한 자들이고 독보적인 자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한 이들. "이들의 현존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하나님이 이 증언을 떠나서 말씀하실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증언에 묶여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제를 배타적으로 이해하고, 다른 어떤 제삼의 법정이나 다른 어떤 권위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복음주의 교회 및 참된 교회의 존립이 결정되는 문제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증언에 묶여 있다. 이 증언을 통해서만 우리는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성경이라는 권위 외에 다른 어떤 권위를 요구하는 것은 참된 교회로부터의 이탈이라는 것.
그렇다면, 성경이나 설교를 볼 때, 설교에서의 오류나 실수들은 어떻게 되는가? 바르트는 그런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인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 그리고 그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은 일어난다고 생각. 이는 설교만 아니라 성경도 마찬가지. 성경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때 인간적 약점도 함께 드러난다.
6. 정경의 표준
이 문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못 듣느냐가 결정적인 표준이 된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표준이었던 '성경은 스스로 성경되게 한다'는 말을 새롭게 표현한 것. 즉, 성경의 권위는 성경 스스로가 입증하는데, 그 핵심은 그 문헌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정경이라는 것. 오늘날의 정경에 들지 않은 책 중에서도 그 책을 통해서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정경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
그것을 결정하는 자 - 전체교회가 해야 한다. 만일 성경 이외의 다른 문헌들 속에서 전체 교회가 명확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정경이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12사도의 교훈,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는 정경에 삽입할 가치가 있다고 봄. 약, 요이삼, 계은 정경에서 제거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봄.
바르트에 의하면, 정경은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때문에 종교개혁시대에 정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 역사적으로 볼 때 정경의 결정은 오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오늘날 누군가가 기록한 글을 정경으로 넣을 수는 없다. 정경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하고 기록한 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
B. 신론
1.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강조하게 되면, 칼빈의 예정론(이중예정)과 같은 결론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강조한 반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 칼빈의 이중예정에 표현된 하나님의 자유를 바르트는 그런 자유는 변덕의 자유다. 이런 하나님은 천상의 폭군이라고 비판.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상일 뿐. 바르트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전개하는 이유는 이러한 신을 청산하려는 의도가 내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지옥에 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언급되지 않는 신은 우상일 뿐이다. 과거 칼빈주의 정신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가 강조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상을 심어주고 말았다. 칼빈주의 예정론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은 없다.
: 바르트는 칼빈의 전통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칼빈 속에 드러나는 신학적 문제점들을 개혁하고자 노력.
"하나님의 자유는 사랑을 위한 자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와 같은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자비와 의
* 바르트는 신의 두 가지 모습을 하나로 만드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의 속에서도 나타난다.
'의'에는 심판의 개념이 많다.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두 개의 신관을 가지고 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 양자를 동시에 강조해왔다. 바르트는 이 두 개의 개념은 하나님을 십자가 밖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자비라고. 즉, 하나님의 자비와 의는 하나이다. 자비롭지 않은 하나님의 의는 없다: 율법 역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표출된 것.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바울에 의하면 십자가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 그 의의 핵심은 형벌받아야 될 우리의 형벌을 하나님께서 대신 짊어지시고 고통 당하시고, 대신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즉, 그것은 극단적인 하나님의 사랑(자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란 결국 하나님의 자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후기 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개념이 없어짐.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자애로우시다." 그렇다면 심판이란 뭔가? 그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어두운 어떤 것이다. (---> 바르트의 죄론과 연결) 바르트의 이같은 개념은 많은 신학적 논쟁을 초래. 여기에서 바르트는 율법주의와 결별: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도 이 하나님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흘러넘칠飁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 율법적으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주의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십자가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사람은 참으로 선한 사람으로, 하나님과 닮은 존재로 된다. ---> 철저하게 '은총의 신학'을 전개.
3. 하나님의 불변
* 문제: 하나님의 뜻이 변치 않는다면, 인간이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칼빈주의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하신 것이라면 변경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
반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불변은 석고상과 같은 무감각, 또는 움직일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죽어있지 않고 살아계신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만남이고 역사임을 뜻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 수동적인 행위는 있을 수 없다. 기도에 포기란 있을 수 없다. 기도의 포기란 비신앙의 위로받을 수 없는 행위이다." - 바르트는 적극적인 기도를 강조:"기도하지 않는 것은 허락될 수 없는 인간의 사치이다."
"하나님의 자유를 근거로 신자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결정하심이 존재한다."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 속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기도보다 앞서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의 기도에 뒤따르기도 한다."
--->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만남이요 역사라는 것을 반영. 따라서 인간은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한다.
* 그렇다면 하나님의 불변이란 뭔가? 하나님의 불변을 헬라 철학적으로 이해한 것이 잘못이었다. 하나님의 불변이란, 그분의 '인격성의 불변'을 의미. 인격성의 불변이란, 그분의 사랑, 은총, 약속과 같은 것들의 불변을 의미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자비하시고 의로우시고 오래 참으신다는 것, 곧 하나님의 삶과 인격은 영원히 불변한다."
4. 하나님의 전능
후기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 깊이 사고.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능이 그분의 무능함 속에 있음을 발견: 십자가 신학의 발전 결과. 십자가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승리하셨는가가 나타난다. "그는 자기에게 반역하는 자를 때리고 심판하고 힘으로 승리해서 그의 전능한 힘으로 정복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사랑과 거대한 은총의 힘으로 승리하신다. 그의 능력은 멸시받음과 순종 속에 나타나고 있다. 만군의 주님께서 승리하시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이고 십자가 속에서 나타난다."
인간에 대한 위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을 해치지 못하는 신이 바로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다.
'무능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전능' - 정치신학에 응용되고 있다: Politics of Jesus(요드) :빌 2:6의 그리스도 찬가에 기독교의 역사철학이 드러나 있다.
Moltmann, Ohne Macht M?htig : 기독교의 전능은 벌거벗은 전능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속에 나타나는 전능이다.
* 이 모든 것들은 자연신학적으로는 알 수 없다.
C. 예정론
* 예정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 많음.
* 전통적 예정론(칼빈주의 예정론)의 내용 - '이중예정'
영원전에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다.
"일군의 무리는 영원한 축복으로, 일군의 무리는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셨다."
칼빈: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사전에 정해졌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저주에 이르도록 사전에 정해졌다." "성경이 뚜렷이 밝혀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고 불변의 계획에 의해 오래 전에 구원을 주실 사람을 정해 놓으셨으며..." "그러므로 선택자 야곱은 여러 면에 있어서 에서와 하등 차별을 둘 것이 없으나, 하나님의 차별에 의해 유기된 에서와 현격히 구별된다." "유기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바울을 반대하는 것이다."(롬 9:13-16, 19-21) - 칼빈은 이중예정의 성서적 근거를 주장.
* 칼빈주의 5대 신학강령의 핵심; 예정론 -> 17c 칼빈주의에 영향
* 1618년 도르트 신조도 이를 근거로 확정.
1 인간의 전적 무능
2 제한된 속죄: 예수의 속죄의 죽음은 소수의 무리에게만
3 저항할 수 없는 은혜: 하나님의 절대주권 강조.
4 성도의 견인: 택정함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끄신다.
* 유기된 자의 입장에서는?
* 예정론에 대한 반론
1. 예정론은 운명론이다: 이 역사는 결정된 대로 기계적으로 발생할 뿐이다. 운명론 → 기계론.
2.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모순된다: 예정론은 성경에도 기록된 인간의 자유의지를 희생시킨다.
3. 예정론은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된다: 인간의 죄 역시 하나님의 예정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 이에 대해 예정론자들의 주장: 하나님은 죄 지을 것을 알고 계셨다. 죄 짓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므로 망하는 것은 너희의 자유 의지로 망하는 것이다.
4. 예정론은 노력하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낙심시킨다:
5. 예정론은 개인을 불공평하게 대한다 -> 이에 대해 예정론자들;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불공평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 : "지옥에 가는 자들의 이빨 가는 소리도 하나님의 의를 찬양한다."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의이지,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의인 것은 아니다.
6. 예정론은 선한 도덕에 비호의적이다
7. 예정론은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는다: 이미 구원과 멸망이 확정되어 있다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
8. 예정론은 보편구원을 가르치는 성경구절과 모순된다.
--- cf. L. Boetnner, [칼빈주의 예정론], 홍의표(역)
* K. Barth의 예정론 비판
바르트는 신개념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봄. 영원전에 일군의 무리를 지옥에 보내는 신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런 신은 단연코 없다! 하나님은 지옥에 가는 마지막 사람의 생명도 건져내기를 원하시며,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비와 긍휼의 신. 그 십자가 앞에서 지옥에 가는 자들의 명단을 영원 전부터 작정하고 계신 신을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신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미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다. 이는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파악하지 않음으로 인해 빚어진 일. 이러한 천상의 폭군을 몰아내야 한다: 바르트가 계시신학을 전개하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 하나님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바르트의 기독론적 신개념은 1942년 CD Ⅱ/2에서 완벽하게 드러남. 바르트는 1936년에 예정론에 관한 논문 "Gottes gnadenwahl" 발표. 양자 간에는 상당한 차이.
1. 1936년 예정론의 특징
완벽하게 기독론적으로 집중되지는 않음.
1) 하나님은 선택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신다(눅 17:34): 전통적 예정론과 유사
2)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이 없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고 버리는 사랑이다. "육은 심판을 언급하지 않는 사랑을 말하지만, 영은 말씀을 우리에게 말해 주신다. 보편적 은총 속에서 저주가 폐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3)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Der einzige Verwortne)이 아니고, 우리의 버림의 계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에 의한 우리의 버림받음 인식. "우리는 하나님의 버림을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에서 인식할 수 있다."
4) 그리스도는 선택과 버림의 중재자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과 선택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와 버림이 주어진다. 이를 중재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5) 선택은 하나님의 현존하는 자유의 행위와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믿음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지금 일어나고 있다 - 전통적 예정론 비판: 전통적 예정론은 현존하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간과한다고 비판. 전통적 예정론의 신 개념은 이신론의 신과 비슷하다고.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선택하시고 지금 우리에게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주신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 일어나고 있다.
6)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선택된 자이다. = 예정론은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믿는 자의 고백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7) 선택과 유기는 영원전에 완성된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다. 지금은 그 선택이 일어나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가서야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가 구별될 것이다.
☞ 아직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 명확히 정리된 것은 아니다.
초점: 예정을 믿음의 사건으로 이해하려고. 믿음 속에서 경험되는 고백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이해.
2. 1942년 이후(CD Ⅱ/2)의 예정론: 하나님의 심판의 개념 사라짐.
1.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규정(Selbstbestimmung Gottes)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로 영원 전에 결정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밖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일면 사변적. but, 이는 십자가의 계시의 사건을 영원 전으로 투영하는 바르트 신학 사상의 과정 속에서 형성.
2.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밖에 있는 신은 이미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보편적 원리나 상상에 의해서 찾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는 선택을 위한 결의였다. 영원 전에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셨다. 예정론은 기쁘고 즐겁고 위로해 주는 복음이지 공포와 기쁨이 섞인 어떤 것은 결코 아니다. 예정론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정을 말한 것이다. 인간을 버리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사건은 이러한 하나님의 결의가 나타난 사건.
4. 하나님의 이중예정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뜻한다. 인간을 선택하시고 대신 자기를 버리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요약한 것이 이중예정이다: 하나님의 이중예정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다른 인간을 버린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Der einzige Verworfene)이다. CD II/2 p. 358? so "이중예정은 복음의 총화다."
5.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버림의 계시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극단적 대리적 교환에 의한 인간에 대한 선택의 계시이다: 인간이 심판받을 자리에 하나님이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교환을 받으신 교환의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을 보면 인간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계시되어있다 ---> then, 믿음의 기능은? '만인구원론'인가? 이에 대한 대답:
6. 하나님의 선택은 고정된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역사이고 만남이고 사건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시간 속에서 영원히 일어난다. 그러므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이다.
7. 현 역사 속에는 버림받은 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존재는 하나님이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은총이고 선택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행위는 두 개의 결과를 초래한다. 버림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끊임없이 거부당하는 곳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의 그늘과 같은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을 필요로 한다. 이 믿음의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는 곳, 즉 하나님의 자비로운 불신(?)이 거부당하는 곳에는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폐기된 버림의 그늘이 존재한다.
8. 믿는 자는 선택된 자이다. 믿는 자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십자가가 바로 이 영원한 선택의 표준이다.(이 점은 1936년과 동일) - 예정은 '고백'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지금 믿는 순간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동시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것(바르트는 후에 이 개념을 폐기).
* 정리: 바르트는 1942년의 예정론에서부터 기독론적 신관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행위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신이지, 심판하고 버리는 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유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폐기한 '불가능한 가 능성', 하나님의 은총의 '그늘'이지 본질이 아니다.
* 1942년 예정론의 특징:
i) '신관' - 버리는 신은 없다는 것. 지금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사랑이고 은총이라는 것.
ii)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를 십자가에서 사색.
* 예정론의 분석과 종합
ⅰ)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이중예정의 교리는 잘못이다.
전통적 이중예정의 근거: 롬 9 - 바르트는 롬 9장의 주석이 잘못되었다고 봄: 롬 9장이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를 분별해야. 바울은 이중예정을 가르치려 롬 9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방인조차도)들이 약속의 자녀. 이렇게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사람이 힐문할 수는 없다는 것.
ⅱ) Moltmann; 예정론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리이다. [희망의 신학](1964) 발표 이전 몰트만은 칼빈주의 연구에 몰두: [예정과 성도의 견인] 예정론 연구에 있어서 문제점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과의 관계에 대한 것. 칼빈주의의 기계론적 예정론 강조로 인해 예정론에 대한 혐오감 초래하기도. 몰트만은 예정론에 대한 이같은 오해에 유감. 예정론이야말로 복음을 표현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 교리라고 생각. "엡 1" - 선행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 이 듣고 믿는 인간의 행위는 운명적으로, 기계론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ⅲ) 예정론은 신앙의 우연성(Zuf?ligkeit)과 무상성(Hinf?ligkeit)을 반대하는 교리이다.
ⅳ) 예정론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을 말하는 교리이다.
ⅴ)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이다.
ⅵ) 예정론은 하나님의 攝理를 전하는 교리이다.
* 오늘날 예정론은 바르트와 몰트만을 거쳐 복음적인 예정론으로 정리됨. 바르트는 예정론과 관련하여 신론에 대해, 몰트만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공헌.
D. 삼위일체론.
* 삼위일체론에 대한 반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K. Braaten, No other Gospel: 니터의 No other name?을 반박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를 반박하는 가장 중심적인 교리는 삼위일체론이라고. 성서신학자: 성서에는 삼위일체론이 발견되지 않는다.
* 삼위일체론의 이단들
① 삼신론: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② 일신론:
종속론 - 예수는 성부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 아리우스주의, 여호와의 증인(예수는 성부와 동일한 신이 아니라, a god에 불과하다) but, 빌 2:6ff(그리스도의 비하): 종속론의 오류를 증명.
양태론 - 일명 '정통주의 이단.' : 하나님이 세 역할을 가진다고 설명.
양자론 - 일명 '자유주의 이단.' : 예수를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 예수의 선재성 부정. 예수와 인간의 질적 차이 부정. 이들은 성령을 하나님의 에너지 혹 능력으로 이해.
☞ 일신론은 십자가를 진지하게 보지 않기 때문에 잘못.
C.f. 예수가 과연 聖子인가? 이 질문은 삼위일체론 논쟁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판넨베르크. W. Pannenberg, Grundz?e der Christologie - 중요: 삼위일체론의 중요성 강조. 삼위일체론이 정초되는 장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J. Moltmann E. J?gel
☞ 이들은 삼위일체론이야말로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정초하고 있으며, 성경 도처에서 체계화된 것이라고 봄. 삼위일체론 이야말로 기독교회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
*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을 강조한 것은 자유주의가 횡행하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비교해 볼 때 혁명적 특징을 지닌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의 역사다라고 주장.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를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한 반면,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자신의 역사라고 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성령과의 관계: 영원 속에서 영원의 반복. 하나님은 "1 Person(한 분)이고 3 Seinsweise(존재양태)를 지닌다". 한 분 하나님은 세 번 반복하실 수 있다.
---> Q. 이는 양태론이 아닌가?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었다면 하나님이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없나?
이에 대해 바르트는 하나님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고 함.
*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 터툴리안 - "una substantia, tres persone" 터툴리안의 persona는 오늘날의 인격과는 다르다. 그것은 (배우가 쓰는)'mask', 즉 '역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persona에 '인격'이라는 의미가 첨가되기 시작. ---> 오늘날 persona는 무조건 인격의 의미.
바르트는 이 persona의 연구를 통해 터툴리안 당시 여기에는 인격의 개념이 없고, 역할의 개념만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바르트의 정의는 터툴리안의 정의를 오늘날 독일어로 정확히 번역한 것. 문제는 터툴리안의 정의에 양태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로 인해 서방교회의 전통 속에서 정통주의자들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적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 동방교회:(하나의 실체),(세 개의 인격) - 하나님은 세 분이신데,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것을 인식. 그런데 이를 터툴리안이 라틴어로 옮기면서 문제가 발생. 동방교회가 세 분이 하나의 인격을 가진다고 본 반면,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인데 세 개의 역할을 한다고 이해. 이 때 우리는 초대교회에 교리의 정통성은 동방교회에 있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초대교회의 중요한 신조는 모두가 동방에서 결정되고 있었음.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을 한 분으로 말하는 자들을 모두 이단으로 정죄. 다만 이 세 분 하나님의 하나의 우시야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 그것은 무슨 뜻인가?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서방교회 측에서 본다면, 정통의 표현이고, 20세기에 삼위일체론을 부활시켰다는 공헌을 한 것 같다. 하지만, 동방교회 전통에 입각해서 본다면,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전체적으로 양태론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동방교회 전통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의 가장 커다란 진전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에서 이루어진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서방교회 신학자가 동방교회와의 대화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 서구신학에서 삼위일체론 논쟁을 다시 야기. 삼위일체론은 철저히 계시와 성경에 입각한 것이고, 단지 논리적 모순을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이를 증언하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한다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드러나게 된다: 일신론은 자연신학이며, 철학적 신개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의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이신 신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다(마 28:19; 고후 14:13). 이 세 분 하나님은 각각 다른 하나님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내어주셨을 뿐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고 봄. 그렇다면 삼신론인가? 몰트만은 일신론과 삼신론 중 오히려 삼신론이 성서에 더 잘 부합한다고 이해. 그러나 삼신론은 이단이다. 삼신론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이어야.
그렇다면, 어떻게 삼위일체론이 가능한 것인가? 몰트만은 계시에 입각해서 이를 언급해야 한다고 봄. 성서를 떠나서 사변해서는 안된다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여기에서 '하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너희가 나를 알았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보았고 또 알았느니라."(요 14:7ff)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10)
---> 예수는 한 번도 자신이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삼위일체론은 본래 3 = 1 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와 하나님, 성령이 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으며 상호 '침투'(perichoresis)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하나인 것은 상호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자들은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와 성령의 영광을 함께 볼 수 있게 된다. 삼위일체론은 이 세 분 하나님이 신비하게 결합하고 있다는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잘 드러나 있다. (하나의 실체) (세 개의 인격)
===> 몰트만은 바로 이 사실을 밝혀 냄. 십자가에 달린 이는 성자만 아니라, 성부와 성령이 함께 달렸다고 봄. 십자가에는 삼위일체적인 고난의 형식이 있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달게 하는 고난을, 아들은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을 당한다. 둘은 함께 십자가에 달리지만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고난을 당한다. 삼위일체론은 바로 이 사실을 밝히려고 한 것이었다.
===> 이후 서구신학에서 삼위일체론 논쟁 초래.
ⅰ) 몰트만의 관점을 수용,지지; 동방교회, 서방교회 신학자 중 상당수. 이들은 터툴리안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
ⅱ) 몰트만에 대한 비판; 바르트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 이들은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생각을 고수. 때문에 바르트의 전통 아래 있는 이들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을 한 분으로 만들지 못한다며 비판. 이들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삼신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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